영화 [박쥐] 관람 평
(줄거리)
좀 더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갈 수는 없을까를 평소에 많은 생각을 한 어떤 젊은 신부는, 외국 어느 수상한 곳에 난치성 환자를 위한 백신을 계발하는 중이라는 생화학 연구소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실험대상으로 내맡기는 자들에게만 입소가 가능한 곳이다.
오직 자신을 막장 인생이라고 여긴 자들만이 장렬하게 최후로 생체 실험용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곳이다. 평소에 요양 정신 병동에서 사목하면서 무력하게 생을 마감하는 자들을 보며, 신부로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던 이 신부는, 과학 발전을 위해 과감하게 희생할 생각을 하고 자원 입소한다.
하지만 여태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없었다. 침대에 누운 이 젊은 신부에게도 주저 없이 실험 세균이 투입되고 곧 신부는 전신이 수포로 부풀어 오른다. 마치 욥처럼.
신부는 모든 것을 각오했다는 심정으로 죽어가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반복한다. “하나님, 사람들이 보지 못할 것을 본, 그런 자처럼 되게 하옵소서.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만이 구원할 수 있는 자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정작 신부에게 일어난 사태는 신부가 점찍은 예상 문제를 모두 비켜간다. 그에게 수혈된 피는 창세기 3장에서 여자를 유혹했던 악마의 그 피였던 것이다.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그는 400명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신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사람의 피를 양식으로 해야 건강하게 삶을 살 수 있는 ‘뱀파이어’, 곧 ‘흡혈귀’가 된 것이다.
매일 같이 사람의 피를 공급받지 못하면 이 신부는 온 몸에 수포로 뒤덮인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한 떼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신의 자비만을 고대할 수밖에 없는, 온갖 말기적 환자들이다. 이들의 귀에는 기적적으로 생환한 신부의 존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신부가 품게 된 능력이 안수 기도를 통해서, 교회 의식을 통해서 자신들에게도 혜택이 주어지기를 고대했다.
젊은 신부(흡혈귀)는 어릴 적 알고 지냈던 한 가정으로 초대를 받는다. 한복집을 하는 집인데 분위기가 허접스럽기 짝이 없다. 그 집의 아들이 정신 병력이 있다. 엄마 되는 자가 이 신부를 모시고 기도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이 아들에게는 양녀인 동시에 며느리가 되는 젊은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고아 때부터 이 아들의 엄마로부터 양육 받았지만 실은 불쌍하게도 줄곧 심한 학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집안에 수요일만 되면 마작을 하기 위해 모여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활기찬 순간이다. 여기에 젊은 신부(흡혈귀)도 끼어들면서 젊은 며느리와 신부는 단번에 눈이 맞았다. 열정적인 깊은 관계에 탐닉해 들어간다. 서로가 서로를 주체 못한다. 내부에 억제된 욕정이 거침없이 발산된다.
그런데 흡혈귀의 결정적인 취약점이 있다. 그것은 햇빛을 받으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밤에는 병원에서 환자의 혈관에서 빨대로 피를 마시다가 낮에는 멀쩡하고 윤기 나는 얼굴피부로 회복되면서 요양 병동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교우들에게 주님을 대신한 사제의 충실한 집무에 소홀함이 없다. 신부로서 죄를 사해주고 천국에로의 소망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젊은 신부로부터 비로소 사랑의 맛을 경험한 이 불쌍한 젊은 며느리는 다른 방식의 구원을 느낀다. 그것은 비록 신부가 흡혈귀인 줄을 알지만 이 신부와의 사랑 관계를 을 통해 이 지옥 같은 집안에서의 구원을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병자 남편이 장애요소다. 젊은 며느리는 가끔 얻어맞기도 한다.
신부도 이 젊은 며느리에게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학대받은 며느리의 피멍을 보고 분노한 신부(흡혈귀)는, 아들을 밤중에 낚시하자고 꼬셔내어 고요한 호수 한복판에서 젊은 며느리와 더불어 물에 빠트려 죽여 버린다.
그리고 이미 신부직책을 그만둔 전직 신부인 이 흡혈귀는 이 한복집 이층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하지만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던 이들에게 죽었던 남편이 환영이 되어 나타나 밤마다 이 두 사람을 심하게 괴롭힌다. 여기서 이 두 커플 사이에 사람 죽인 책임전가를 놓고 마찰이 생긴다. 사이가 벌어진다. 이제 와서 여인은 환영에 시달림이 없는 생활을 원한다. 예전 생활이 더 나았다고 후회도 해본다.
아들의 장례식에서 엄마마저 충격 받아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이 젊은 여인이 의지할 대상은 아무도 없다. 환영에서 벗어나 영원한 삶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은 전직 신부처럼 자신도 흡혈귀가 되어 자기만의 욕망에 충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여인이 흡혈귀가 되자마자 오히려 전직 신부보다 더 신선한 피를 얻고자 하는데 있어 앞 뒤 안 가리고 걸식 걸린 듯이 생사람의 피를 찾아다닌다. 아주 악한 여자 흡혈귀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직 신부인 흡혈귀가 이 사태를 종결짓기 위해 조치를 위한다. 같이 자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느 날 밤, 차를 몰고 멀리 바닷가 절벽 위까지 몰라가서 거기에 멈춘다. 해가 떠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여자 흡혈귀는 전직 신부의 계획을 알아채고 결사적으로 차 뒤 트렁크에 몸을 숨이고자 하지만 전직 신부는 그 뒤 트렁크마저 뜯어내어 바다를 향해 힘껏 내던져 버린다. 어느새 아침 해는 서서히 떠올라 온다. 온 천하가 햇빛에 눈부시다. 두 흡혈귀의 몸은 그 햇볕에 새까맣게 타 들어가면서 사라진다. 남은 것은 그동안 싣던 케쥬얼 신발 두 켤레뿐이다. 땅에 털썩 떨어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독의 의도)
흡혈귀나 신이나 모두 인간 세계 외부에서나 존재하는 실체다. 그런데 인간들은 신은 인간 세계로의 도입을 허용하면서 악마의 도입은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감독이 봐서는 이렇게 해서는 인간의 실상을 아는데 있어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정신세계 안에 살아있는 무의식적인 어두운 세력을 일상의 생활에 섞여서 같이 굴러간다. (보통 사람과 마작 놀이를 같이 하는 흡혈귀) 평소에 사람들의 행복과 소망과 기대의 한계가 어디에 부딪혀서 자주 막히게 될까? 이 점을 흡혈귀를 등장해서 대신 보여주는 것이다. 흡혈귀는 인간을 닮았다. 아니, 인간이 흡혈귀를 닮았다.
힘차게 서민 주택가를 휙휙 날아다니는 흡혈귀, 그러면서도 그 전능한 힘을 오로지 자신의 때마다 끼니 채우는 용도로 활용하면서 힘없는 인간을 죽이고 거기서 피를 공급하는 흡혈귀, 이 흡혈귀의 활동은 내부적으로 늘 결핍을 저주하면서 전능한 힘을 숭배하고 헤픈 은총을 얻으려하는 인간들의 이중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신은 뭘 하는가? 신을 모신다는 단체인 교회조차 실은 이 흡혈귀의 활동을 저지하지 못한다. 도리어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늙고 장님 된 신부가 흡혈귀 된 젊은 신부 보고 다음과 같이 간청한다. “나도 네처럼 흡혈귀 되게 해줘. 그 능력으로 잠시 눈을 떠서 햇빛만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젊은 신부는 이렇게 핀잔을 주고 뒤돌아선다. “지옥 같은 세상에 뭐 볼 것 있다고 눈 뜨시려고 합니까?”
이처럼 신을 모신다는 교회마저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기적에 목말라 한다. 이는 곧 교회마저 인간들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능하게도 손 놓고 있다는 말이다. 종교도 나서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 인간은 왜 종교를 가지나 안 가지나 왜 알 수 없는 결핍과 공포에 의해 시달리면서 살아가는가?
이것은 인간이 꼭 죄를 지을 때만 징벌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할 때, 신도 외면하고 오직 흡혈귀만 활개 치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외치고 있는 현 시대를 향한 하소연이다.
감독은, 누구도 탈출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해서 절망해 한다. 큰 빛이 비추어야 흡혈귀는 소멸되는데 왜 그 큰 빛이 흡혈귀에만 적용되고 인간에게는 평소에 적용되지를 못하는지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즉 빛이 인간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끝까지 그저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유행가 가사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속물, 경찰 간부 및 각 분야에 걸쳐 속물만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작 흡혈귀만 주도권고 쥐고 설치는 세상이 되었음을 고발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분노케 하고자 하는 것이다. 흡혈귀의 유쾌하고 명랑한 대사로도 이 분노를 삭일 수는 없고 덮어 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고상함도 잔인한 흡혈귀의 피 빨아먹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결도 인간들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흡혈귀 자체에서 해소되었다. 즉 착한 흡혈귀(?)가 나쁜 흡혈귀를 껴안고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결한다. 이것은 인간보다도 흡혈귀가 차라리 선하다는 메시지이다.
착한 신부 흡혈귀가 같은 여자 흡혈귀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이렇게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 그러자 나쁜 여자 흡혈귀가 말한다. “나는 종교가 없으니 지옥도 없어”
인간 세계에서는 이미 착한 흡혈귀 같은 희생정신도 남의 일이 된 상태다. 따라서 아무 것도 기대할 것 없다. 감독은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서 스스로에게 분노하기를 원한다. 과연 이 착한 흡혈귀라도 되어 있는지를….
(복음적 평가)
도대체 인간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구원을 거론할 자격이라도 있단 말인가? 자신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신을 거론하고 악마를 거론해도 다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됨됨을 따지는 자리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우리 인간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들은 수시로 자기 구원만 챙기는데 여념이 없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구조를 깔아놓으신다. 그 구조란 곧 요한복음 17:2에 나오는 구조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즉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작은 소리나, 작은 움직임도,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 짓는 예수님의 권세가 발휘되는 흔적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그 배치와 배열 선상에 놓여 질 뿐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영생이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을 고백하여 예수님을 찬양한다. 자신의 형편과 가치를 논하지 않고….
이로서 이 세상은 악마가 활개 치는 참 멋진 빛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