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사실 수업시간에는 조용한 친구였어요. 별 질문도, 별 말 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게 자기 공부만 하다 나가는 친구였죠. 그래도 눈에 확 띄게 멋있는 친구라서 눈길이 안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죠. 특별히 뭐 호감이 있었다기 보다도, 그냥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더군요. 이야기는 어떻게 하는지, 웃을때는 어떻게 웃는지, 뭐 그냥 그런 것들이요.
그러다가 그 아이를 학원 밖에서 만난 건 한 커피전문점에서였어요. 저는 학원에 가기 전에 학원 옆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러서 그린티 라떼를 사고 있었죠. 그런데 저 앞쪽에서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용기가 보이더군요. 원래의 제 성격이었다면 말을 안 걸었겠지만, 왠지 궁금한 마음에 저도 주문을 하고 그쪽으로 가서 말을 걸었죠. 마치 우연을 가장한 만남인척 하고 말이에요.
"어? 안녕하세요?"
제가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용기가 저를 처다보더군요. 그는 이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제 인사를 받았죠.
"아, 안녕하세요."
"수업 시작은 조금 뒤인데, 일찍 오셨네요?"
"아, 네.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시간이 좀 애매하게 남아서요. 커피나 마시려고 왔죠."
음... 용기가 가진 분위기는 미묘했어요. 웃는 모습에서 아직은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쌍커풀 없는 눈이라던지 전체적인 인상은 굉장히 남자다웠죠. 아니, 남자답다기 보단 오히려 섹시하다는 쪽이 더 가까울 것 같군요. 처음 들어본 그의 목소리는 두근거릴만큼 멋있었어요. 적당한 울림이 있는, 왠지 기분 좋아지는 그런 목소리.
이윽고 용기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어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더군요. 갑자기 그 모습을 보니 기범이가 떠오르더라고요. 기범이라면 달디 단 카라멜 프라푸치노를 주문했을 텐데 말이죠. 기범이는 단 거라면 사족을 못 써요. 저는 단 걸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기범이 때문에 온갖 단 군것질들을 먹느라고 끌려다닌 적도 많았어요. 얼마전엔 베스킨 라빈스의 파핑 파핑 바나나인가 뭔가를 먹겠다고 난리를 쳐서 갔었는데... 엄청 좋아하더군요. 뭔가 초콜렛과 딸기와 바나나 아이스크림이 섞인, 이야기만 들어도 엄청 달 것 같은 거였는데, 정말 기범이는 행복해 하며 먹더군요. 제가 끝까지 먹지 않겠다고 버티자 기범이가 갑자기 짖궂게 웃으며 저에게 키스를 해왔죠. 그 때 기범이의 입술에서 느껴지던 그 달콤한 맛에 정신이 아찔했었는데...
"음? 선생님 귀 뚫으셨었네요?"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방심하는 사이에 갑자기 용기가 제 귓볼을 살짝 건드렸어요. 그리고는 귀를 뚫었었던 자국이 있던 자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데.. 저는 당황했지만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길에 왠지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마치 뭔가에 데인 것처럼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쿵쾅쿵쾅.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슨 유행가 가사 같군요. 그런데 그 때 제 느낌이 정말 그랬어요. 잠시 신기한 듯 제 귓볼을 만지던 용기가 이내 자신이 주문한 커피를 들고는 저에게 인사했죠.
"그럼, 선생님. 이따 수업때 뵈요. 저 먼저 가볼게요."
그렇게 그는 가게를 나갔어요. 그렇지만, 그가 자리를 뜨고 난 한참 후에도 저는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 서 있어야만 했죠.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가르친다라는 건, 지치는 일이에요. 토익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할때만해도 사실 저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게 처음으로 해보는 강의이기도 했지만, 저 원래 이런거 도전하는 걸 굉장히 즐기는 편이거든요. (뭐, 페이가 굉장히 셌다는 사실도 한몫 했겠지만). 그런데, 두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열심히 떠는다는 건... 그리고 그걸 심지어 하루에 몇번씩 반복해야 한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죠. 강의가 많은 때는 하루가 끝나면 완전 녹초가 되어 버리곤 했어요. 주로 직장인들을 상대로 퇴근 후 하는 수업이 많아서 그 날도 늦게 끝나서 집에 터벅 터벅 걸어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머리속은 아까 있었던 일로 복잡했죠. 그 후에 용기를 수업때 봤었는데, 왠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렵더군요.
"뭐야,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 형?"
제가 사는 아파트 앞에 다 와가는데 놀이터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누군지 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기범이의 목소리였어요. 그 쪽을 돌아보니 기범이가 그네에 걸터앉아 있더군요. 아무리 피곤해도 그 아이를 보면 기분이 좋았어요. 꼭 나만 오면 반겨주는 애완견 같은 느낌이라서. 저는 방긋 웃으며 기범이에게 다가갔고, 그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어요.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기범이가 잠시 눈을 감고 제 손에 얼굴을 파묻더니, 저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겨서 안았어요.
"뭐야, 여기서 계속 기다렸던거야?"
"네. 그냥 형 얼굴도 보고 싶고. 그래서... 근데 형 힘없는 거 보니까 마음이 안 좋네요."
"그래도 집에 왔는데 애완견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좋네."
"우와, 너무한다. 제가 형 강아지에요?"
저의 장난에 기범이가 투정을 부리더군요. 사실 둘이 같이 있으면 제가 얘를 너무 좋아해서 귀찮게 할 정도로 괴롭히거든요. 막 괜히 찔러보고, 만지고. 오늘처럼 이렇게 기범이가 먼저 안겨서 애교부리는 때도 사실 많지 않아요. 잠시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갑자기 기범이가 무슨 생각이 난 듯 일어나더니 제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하더군요. 그곳은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이었어요.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죠. 그렇게 계속 걷다가 하늘이 탁 트인 곳에 벤치로 가서 앉더군요. 그러더니 기범이 자신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병맥주 두개를 꺼냈어요. 제가 가장 즐겨마시는 맥주인 스텔라 아르투아 였죠.
"마셔요. 덥지 않아요?"
"지금 나랑 맥주 마시자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애들 놀이터에서 마실 수는 없잖아요."
그가 맥주 병을 따서 저에게 건넸어요. 방금 산 건지 아직까지 시원한 맥주. 힘든 하루였는데 그가 건네 준 맥주를 마시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더군요. 목이 칼칼한 느낌이 굉장히 좋았어요. 맥주를 마시다가 하늘을 슬쩍 봤는데, 신기하게도 별이 많이 보이더군요. 날씨가 맑아서 그런가..
"있잖아요, 나 요즘에 형이랑 있으면 자꾸 상상하게 되요."
조용히 맥주를 마시다가 기범이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하더군요.
"야한 거?"
"하하. 아뇨. 아니, 뭐 사실 그것도 안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제가 상상하는 건... 으음.. 형이랑 같이하는 미래 같은 거에요."
"미래? 무슨 미래?"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단순히 여기서 사귀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멀리까지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요."
저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잠시 가만히 있었어요. 기범이가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데 기범이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더군요.
"솔직히 지금이야 우리가 어리니까 아무 상관 없는 데 조금만 나이들어봐요. 결혼해라, 왜 여자친구 안 사귀냐. 집에서 엄청 난리일텐데."
"그래서 니가 그리는 미래는 뭔데?"
"그냥 평범한 거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고, 집에 오면 맛있는 거 먹으면서 그날 있었던 이야기 나누고.."
"정말 평범하네.."
"또 제가 이래뵈도 건축 전공이지 않습니까? 저기 저 남해에 바다 보이는 곳에 멋진 집을 지어놓고 같이 사는 거죠. 얼마전에 건축잡지에서 본 건물이 있는데 완전 근사하더라고요. 그것보다 더 멋진거 지어줄테니까, 나랑 같이 살래요?"
"그거 지금 프로포즈라고 하는 거냐?"
제 말이 기범이는 그냥 웃어보이더군요. 어쩐지 서글퍼지더라고요. 이루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는, 기범이와 함께 하는 미래. 저는 그냥 기범이 무릎을 베고 누웠어요. 기범이가 제 머리를 쓰다듬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 그냥 가만히 있었죠.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거리는데.. 맥주 때문인가. 어딘지 어지러웠어요. 그렇지만, 그냥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게 되더군요.
첫댓글 영원을 기대하는 순간엔 별도 더 많아지는가 보아요.
눈을 감아도 꺼풀 속에 반짝이는 걸 보니요. 찬찬히 다시 읽겠습니다.
감사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