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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Christianity)
세기에 태어난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원어(原語)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 교회·그리스 정교회(正敎會)·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그리스 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리스도교를 아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시대와 신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영원하고 참된 진리를 내포한 종교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종교라는 두 가지 기본원리 아래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순전히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밝히려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자존(自存)하는 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랑(agape)’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존재와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다. 하느님은 그 사랑으로써 세상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이룩하는데, 그 사업은 바로 인류의 역사 속에 구현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역사 속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었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의 근거와 핵심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을 ‘사랑의 계약’이라고 한다. 본질이 선(善)이요 사랑인 하느님은 인간과의 계약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겨 계약을 파기했을 때에도 하느님은 사랑의 계약을 지켰다. 하느님은 그 계약의 실현인 인간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사람이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4절에서는 이것을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셨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때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이 세상에 구현되는 원리로서, 이의 육화(肉化)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교를 알려면 가장 특징적인 신관(神觀)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느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신으로서, 그 자신이 3위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곧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3위로서, 이 셋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3위로써 하나의 하느님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3위는 하나의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樣式)의 차이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로서 구약성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었다. 아들로서의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살았고, 또 죽었다가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그리스도이며,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고 활동하는 영적 존재이다. 이같은 삼위일체의 신앙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가 곧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그의 본질은 역시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구현하였으며, 그의 사랑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핵심이며, 본질을 이루는 원리이다. 이와 같은 교의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啓示)한 것으로 믿는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자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나, 자연계시에 의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으로서, 다만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올바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종교(啓示宗敎)라는 특수성을 가지지만, 그 계시는 인류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또한 역사적인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인류 역사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정신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단체로 형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정확히는 오순절(五旬節)의 성령 체험 이후 신앙심이 굳어진 사도들이 각지에서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력(西曆)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기원 1년에 탄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 사학자들은 유다 나라 헤롯대왕(BC 37∼BC 4?) 통치 말기에 실시한 ‘호구조사령(戶口調査令)’을 근거로 BC 4년경 출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에 의하여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종말신앙(終末信仰)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BC 6세기부터 바빌로니아·페르시아·그리스 등 외국의 지배를 받아 왔었다. 특히 BC 3세기 초부터는 그리스의 지배하에서 유대교가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까지 약탈당하였으며,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살되었다. BC 2세기 중반에는 반(反)그리스 전쟁으로 한때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을 하였지만, BC 63년에는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그들의 유일한 신으로 믿고 있는 야훼신(하느님)이 그들 민족을 구하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의 세상은 얼마안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과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새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서 ‘메시아(Messiah)’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메시아’의 원어는 헤브라이어의 마샤(mashiah)로서,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상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종말사상이 팽배해 있고, 그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망이 높아 있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나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福音)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 가르침의 중심사상은 바로 ‘사랑’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예수의 이 말 속에 그의 모든 가르침이 요약되어 있다. 예수는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여, 병든 사람과 불구자들을 고쳐 주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를 가까이 하며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으며, 예수의 제자들도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따랐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신에 기초한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에 묶여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고, 마침내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을 자칭한다는 정치적인 반(反)로마 운동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사도들의 전도〉 하느님으로서 인성(人性)을 취한 예수는 신적(神的)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가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종교로, 세계종교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로가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司祭)로서의 감독(監督)·장로(長老), 부제(副祭)로서의 집사(執事)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新約聖書)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로마 가톨릭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그리스 정교회)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직위가 로마 교황인 정통 가톨릭교회를 이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로마가톨릭이라고 한다. ‘가톨릭(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그 신앙선언 속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특정한 개인·인종·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이 명칭은 그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조직】 현재 가톨릭교회는 약 6억의 신도를 가진 세계 최대의 종교단체로, 유럽·남북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의 여러 나라에 퍼져 있으며, 그 거대한 집단은 일정한 조직을 가지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 조직을 만드는 원리를 ‘히에라르키아[敎階制度]’라 부르며 상·하 관계에 따른 계급을 뜻한다. 이러한 교회조직을 피라미드에 비유하면 그 하부구조로서 가장 폭넓은 신자층이 있고, 그 위에 성직자층이 있다. 교회는 통할의 편의상 많은 교구로 나뉘고 통상 주교가 관리한다. 교구는 다시 소교구로 분할되어 사제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최고 권위자는 교황이라 불리는 로마의 주교이다. 그 근거는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권위를 계승한 데 있다. 따라서 교황은 교회의 모든 사건을 재정(裁定)하는 권력을 가진다. 이 교황의 권위는 제1바티칸 공의회(1869∼70)에서 선언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과 관련한 교의(敎義)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교황은 라테란협정(1929)에 따라 인정된 바티칸시국(市國)의 주권자이기도 하다. 또한 교황은 교회의 통치를 위한 기관으로서 교황청을 두고 있다. 영어에서 ‘Holy See(聖座)’라는 말은 교황과 교황청을 합친 명칭이다. 교황청의 기구는 교회의 발전에 따라 차츰 커져, 현재는 국무성성(國務聖省)을 중심으로 성성(聖省:성의회)·사무국·법원·사무처·위원회(20여 개가 있다) 등이 있으며, 파견기관으로는 바티칸 대사·공사·교황사절 등이 이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들 업무의 책임자로 추기경(樞機卿)이 있다. 추기경은 교황이 임명하는 최고 고문으로 12세기 이래 교황을 선출하는 권리도 행사한다. 교황이 공석이 되면 추기경들은 회의를 열고 투표를 통하여 2/3 이상의 득표자를 교황으로 선출한다. 이렇게 하여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이 그것을 정식으로 수락하면 추기경 조제장(助祭長)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에서 새로운 교황의 결정을 선언하고, 다음 일요일이나 축제일에 대관식(戴冠式)이 행해진다. 이같은 교황선출 방식은 오랜 시대와 더불어 정착된 것이며, 교회사를 보면 초대 성 베드로 교황부터 현재의 요한 바오로 2세까지 264대에 걸친 교황의 이름이 나타난다. 교황 밑에서 각각 지역 교회를 관리하는 것은 주교와 사제(司祭:신부)이다. 주교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바에 따라 사도(그리스도의 제자)의 후계자가 되며, 일정한 자격이 있는 신부가 성성식을 받고 주교가 된다. 주교는 사제로서의 완전한 권능을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으며, 자신의 사제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도 있게 된다. 한편 사제 서품(敍品)에 의해 사제가 된 자는 제한된 사제의 권능만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주교도 사제도 모두 일체가 되어 교회를 관리하고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하고, 성화(聖化)를 돕는 일을 그 본래의 책무로 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층(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일반신자이다. 신자는 직위적인 사제직은 가지지 않으나 이들을 공통사제직이라 일컬어 역시 그리스도 유일의 사제직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성세성사(聖洗聖事)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할 것을 그 사명으로 삼는다.
【역사】 가톨릭교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의해 창립되어, 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다. 예수는 제자 중에서 12명을 선정하여 그 장(長)에 베드로를 임명하고 그에게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부여하였다(마태 16:18∼19).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 제자들은 성령(聖靈)에 의해 신앙이 강화되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사도의 장인 베드로도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안티오키아에, 그리고 로마에 사도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자와 순수한 그리스도교도가 있어 이들 사이에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할 것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열고 그리스도교도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로마제국의 모진 박해 속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을 강화해갔으나 전부터 로마제국에 있었던 이교(異敎)의 영향으로 교회에는 그노시스·몬타누스·마르키온 및 마니교(摩尼敎) 등의 이단(異端)이 생겼다. 이 이단에 대항하여 교부(敎父)라 불리는 뛰어난 교회사상가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클레멘스, 오리게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특히 유명하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교에 자유를 부여하고 보호하였으며, 4세기 말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 국교령’을 발포하여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배척하였다. 한편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중요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의 교의를 명확하게 확정지었다. 중세에 이르러 처음 로마제국의 영향 밑에 있던 교회는 동(東)로마제국의 지배를 피해, 마침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였다. 로마가톨릭은 신성(神聖) 로마제국의 속권(俗權)과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마침내 ‘보름스 협약’에서 서임권을 획득하고 교권을 확립시켰다. 이리하여 교회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밖으로는 7회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며, 안으로는 학문과 문화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경제력은 증대하고 생활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교회는 차차 세속주의에 빠져들었고, 교회 지도자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의 계속으로 분열을 일으켜 대립교황(對立敎皇)이 출현하였다.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의 무지와 도덕성의 퇴폐도 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고 M.루터의 등장으로 결정적 단계를 맞게 되어 가톨릭교가 분리되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도 예수회 등의 신수도회에 의한 쇄신운동을 진행시켜 교회는 점차 새로운 힘을 회복시켜 해외 선교활동 등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통일이 붕괴되면서 근대국가가 탄생하여 주권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자 가톨릭교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었다. 1929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가톨릭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어 세계 최소의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는 전쟁과 박해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인종·국적·종교의 차별없이 원조하였고, 전후에는 평화 확립에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와 같은 세계정세를 감안하여 제2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 등 뛰어난 교의를 선언하였다.
【교의】 가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적인 교회임을 주장하는 점에서, 그 창립자의 사랑의 가르침이 곧 가톨릭의 교의(敎義)이다. 가톨릭의 교의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바탕을 둔다. 성서는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으며, 성전은 사도시대부터 구전해 내려오는 글로 쓰여지지 않은 하느님의 말을 뜻한다. 가톨릭교의 교도권(敎導權)은 성서와 성전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을 인류에게 널리 전파하고 권위로써 이것을 해석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가톨릭 신앙은 이 교도권에 복종하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와는 다르다. 가톨릭의 신관(神觀)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라 하며, 이 신관은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에서 확립되었다. 하느님의 본성은 하나이지만 위격은 셋(성부·성자·성령)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의 조상인 아담의 죄로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상태를 원죄(原罪)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속죄하여 또다시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사(聖事)에 의해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푼다. 성사는 은혜를 베푸는 의식으로서 일곱 가지가 있다. 즉 ‘성세'‘견진(堅振)'‘성체(聖體)’‘고백(告白)’‘혼인(婚姻)’‘병자(病者)’‘신품(神品)’성사이다.
東方正敎會(Eastern Orthodoxy)
사도시대부터 예루살렘·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이집트·인도·그리스·동유럽·러시아 방면으로 발전하여 분포되고 오리엔트의 헬라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그리스도교회의 총칭.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전통·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최고의 권위】 정교회에서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일곱 공의회】 정교회에서는 일곱 공의회, 즉 325년의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81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의 제3차 에페수스 공의회, 451년의 제4차 칼케돈(할키돈) 공의회, 553년의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0년의 제6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787년의 제7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 일곱 공의회에서 결정된 주요내용은 먼저 교회의 신조(Creed: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가 확정되어 교회의 신앙으로 지금까지 고백되고 있다. 다음으로 전체 그리스도교회의 가시적 조직이 선언되었는데, 대표적인 행정구역으로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인데 이를 펜타르키(Pentarchy:5집정 관할구역)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화(成肉化:Incarnation)의 교리와 연관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호칭은 테오토코스(θεοτοκοζ:하느님의 어머니)로 결정되었으며,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 끝으로 성화상(聖畵像:이콘) 공경은 성화상이 상징하는 내용을 공경하는 것임을 확실히 하였다.
【교회의 이교】 그리스도교계의 대표적인 문화권은 셈문화권·그리스문화권·라틴문화권 등 3문화권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신학자들과 저술가 그리고 교회학교로 번성했던 셈문화권의 교회(Oriental Church) 곧 네스토리우스교회와 아르메니아교회, 시리아교회(Jacobite Church라고도 함), 이집트교회(Coptic Church), 에티오피아교회, 인디아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소위 단성론파(單性論派:Monophicism)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나갔다. 두번째로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라틴문화권교회(Western, Latin, Roman Catholic Church)와 그리스문화권교회(Eastern, Greek Orthodox Church) 간에는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요소들과 교황권 및 필리오퀘(Filioque)라는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후 1274년에는 리옹에서, 1438년에는 피렌체에서 터키의 위협에 직면한 그리스교회가 라틴교회와 화해의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 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터키에 함락되어 그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역사적인 성 소피아대성당은 터키의 박물관으로 바뀐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터키 치하에서 동방정교회는 제2등급 종교로 전락되는 한편, 교회조직은 터키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려면 터키 정부의 재가를 얻어야 했고, 상당한 대가(세금과 같은)를 지불해야 했다. 총대주교의 자리는 주로 반라틴적인 인물에게 주어졌다. 터키 정권은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등의 총대주교좌를 형식적으로는 정교회의 독립관구로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에 예속시켰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도 콘스탄티노플에 종속되게 하였다.
【지역 정교회들의 독립】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터키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국가의 정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간섭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스는 1833년, 루마니아는 64년, 불가리아는 71년, 세르비아는 79년에 각각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치적 교회로 행보함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관할구역은 아주 작아지고 말았으며, 아직도 터키정부의 압력하에 있다.
【러시아 정교회】 기원 후, 1세기경 사도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 대륙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옮겨서 흑해(黑海) 주변 시노페와 코르순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한다(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 사도 안드레아가 방문 선교했던 지역은 후일 키예프와 노보고라드라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988년 키예프공국의 블라디미르대공(980~1015)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1019년 야로슬라브 공(1015~1054)이 키예프 러시아의 권력자가 되어 러시아를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1037년에는 테오 펨프스 대주교가 키예프 러시아의 수좌주교로 착좌하였다. 1237년 11월 바투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입하여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대공의 막내아들 다니엘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전쟁으로 찌든 러시아 백성들은 모스크바로 몰려들었고 이반 1세(다니엘의 둘째아들) 때에는 모스크바가 전체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1380년 9월 8일, 약세의 러시아 군대는 40만 몽골대군을 격전 끝에 격파함으로써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로 남게 되었다. 1472년 이반 3세(1462~1505)는 마지막 비잔틴 황제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고스와 결혼하고 쌍두(雙頭) 독수리 문장(紋章)을 취하고 자칭 짜르, 곧 황제가 되어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라 불렀다. 1589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축성되어 욥(1589~1605)이 초대 총대주교로 취임하였다. 1917년 이래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파괴했다. 18년 2월 1일 총대주교 티콘은 무신론 정권을 파문하고 무신론 정권에 동조하는 성직자들의 집단, 곧 ‘살아 있는 교회’를 단죄하였다. 20년 11월 20일 티콘 총대주교는 자기가 투옥될 것을 예견하고 주교들의 자치적인 조직을 증언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21년 세르비아 총대주교의 입회하에 칼루프치에서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를 조직하였다. 22년 서유럽의 엑사르크 에블로기 수좌대주교와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주교들은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를 재조직하였다. 1921년 이후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는 유고슬라비아의 칼루프치에서 독일 뮌헨으로 그 본부를 옮겼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41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던 스탈린은 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러시아 안의 정교회에 다소 자유를 주었다. 당시 소련 헌법에는 반종교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조항을 두어서 교회의 사회활동 금지, 사제교육 금지, 종교교육 금지, 액션단체 조직 활동 금지, 교회내 도서실 폐쇄, 성경 및 교회서적 출판금지, 교회의 토지·건물·현금은 언제든지 몰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90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자 교회의 개방은 급격히 증가되어 90년 모스크바 관구에는 40개의 성당이 문을 열었다. 93년에는 300여개가 넘는 성당들이 문을 열고 열심히 선교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아리우스파(Arianism)
4세기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의 주장을 교의로 삼는 일파.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는, “성부(聖父)·성자(聖子)·성신(聖神)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養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 후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 아래서는 전 로마 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이른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중세 철학(medieval philosophy)
4∼5세기 로마 제국 몰락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철학적 사변.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서(西)로마 제국의 멸망을 고대의 종말로 보고 그 이후를 중세로 보는 역사학상의 시대구분을 따라 5세기 말에서 15∼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서양철학을 말한다. 이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스콜라 철학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중세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도 할 만큼 그리스도교 신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교부시대(敎父時代)를 더 거슬러 올라가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까지 중세철학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중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세철학은 그리스·로마 초기의 고대 철학과는 당연히 이질적인 관심과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발단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복음의 선포, 사도들의 선교활동, 초대교회의 형성이라는 종교적 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중세철학의 근본 주체는 그리스도교와 그 모태가 된 유대교의 종교적 세계관 속에 그 싹을 볼 수 있다. 이 세계관은 이미 구약성서의 《창세기》 가운데 신화적인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신(神)은 유일(唯一)의 절대자요,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은 ‘무(無)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고 인간에게 ‘신의 모습(imago Dei)’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세계관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적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명확히 자각되면서 처음에는 ‘이 세상의 지혜’인 그리스적 자연관이나 합리주의와의 대립으로서 나타났다. 이 자각은 그의 논리적 심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리스 철학을 방법으로서 채용하게 되고, 신앙적 세계의 이해는 점차 신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는 중세철학의 걸음은 이러한 신앙적 세계관의 논리화,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중세철학의 방법】 중세철학은 우선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적인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웃음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변증(辨證)의 도구로서 출발하였다.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철학의 자립성이 더욱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입장은 중세철학의 어떤 시기에도 해당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중세철학에 중요한 구실을 한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도 공통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중세철학은 그리스적 논리나 이성만을 논증의 유일한 방법으로 삼지 않고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방법을 병용하였다. ① 인간이성에 보편적으로 승인되어야 하는 논리학적인 제원리, ② 세계나 인간에 대한 경험이나 관찰에 근거한 지식, ③ 종교상의 권위에 의하여 진리로 인정된 계시나 교의이다. 이 중에서 첫째 원리는 그리스 철학에 의존했는데, 교부시대에는 주로 플라톤 철학을 규범으로 삼았으며,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論理學)이 이에 덧붙여졌다. 그 후에는 신(新)플라톤적인 절충주의가, 13세기 후에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루었다.
【중세철학의 전개】 그리스철학을 최초로 교부학(敎父學)과 결부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론이다. 플라톤 철학은 그를 중개로 하여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공통사상이 되어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계승되었다. 보이티우스는 그리스도교적은 아니었으나 플라톤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제저작을 번역·해설하여 그것을 서유럽에 소개함으로써 다가올 스콜라철학의 준비를 갖추었다. 최고 존재자인 신으로부터 질료적 피조물(質料的被造物)에 이르는 세계의 제존재의 질서를 신플라톤적 색채가 짙은 신비주의적 세계상(世界像)으로 종합 정리한 위(僞)디오니시우스는 그 후의 중세적·세계적 세계관의 윤곽을 제공하였다. 스콜라 철학 시대가 되자 논리적 요구가 더욱 고조되고 신앙에 가능한 한 합리적 기초를 부여하기 위한 신학의 학적 정비(學的整備)가 적극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화해(和解)를 구하는 신앙(fides quaderens intellectum)’이라는 안셀무스의 입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나타낸다. 중세 최고의 예리한 변론가인 아벨라르는 이와 같은 논리적 요구를 한층 더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촉진제가 되었다. 13세기에는 풍부한 그리스 철학의 문헌을 가진 아라비아 문화권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스콜라 철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형이상학에 더하여 자연철학(自然哲學)에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T.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적 방법을 채용함으로써 이 방면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그때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성과를 종합하는 일대 체계를 완성하여 중세철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중세철학이 사용한 제2의 논거인 관찰·경험에 의거한 지식은,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가 키케로를 통하여 배웠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내면성이 이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계시(啓示)나 종교상의 권위를 논증의 근거로 하는 경우에는 대개 교회가 승인한 사항이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스콜라 철학 시대에는 교부, 그 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철학의 의의】 중세철학은 이와 같은 몇가지 근거로 나타나는 진리를 상호 모순되는 일 없이 조화시키려 함으로써 고대와 근대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 논증법을 개발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제약도 있었고, 또 철학이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서의 역할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중세철학은 그 독자성과 심원성(深遠性)을 지닌다. 신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통일적인 질서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의 확실한 근거를 추구해 온 점은 중세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르네상스 이후 경시되었던 중세철학은 19세기 후반부터 급속하게 재인식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C.보임커, M.울프, M.그라프만, E.H.질송 등의 연구로 점점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교부 철학(patris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의 철학·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교부의 저술이 정통교리의 권위로서 후대에서도 인용되었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통틀어 교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교부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교부학(敎父學)이라고 한다. 교부는 대개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예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도인 사람도 있고 커서 개종한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대문명의 유산, 특히 시인과 철학가의 학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인데, 이들 교부들이 고대문명 속에서 불멸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이를 섭취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구조(構造)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 교부란 그리스어(語)로 저술활동을 한 동방의 교부를 말하고, 라틴 교부란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한 서유럽의 교부를 말한다. 19세기에 J.P.미뉴가 편찬한 《그리스 교부집성》 162권과 《라틴 교부집성》 221권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총괄적인 것이다. 그리스 교부는 사변적(思辨的)이어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궁극의 철학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이 혼재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조화된 그리스도 사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를 거친 다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접촉한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아테나고라스는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철학”이라고 부르짖은 2세기의 교부이며 호교가였다.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의학교(敎義學校)를 지도한 클레멘스·오리게네스가 있고,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활약한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라틴 교부로는 그 유명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푸리아누스·암브로시우스·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한 로마의 변론가인 그는 이교도적 교양으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고백록》을 썼다. 이것은 이교문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고뇌와 환희를 한 사람의 내면의 역사로 부각시킨 것으로서, 정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가 여기에서 그려낸, 인간의 내면의 지주(支柱)가 되고 빛을 밝혀주는 ‘내면의 신(神)’의 사상은 그 후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11.13∼430.8.28)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사상가.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성인(聖人).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철학. 중세 초기에 샤를 대제(大帝)는 유럽 각지에 신학원(神學院)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을 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이다. 스콜라학은 이 때문에 중세의 신학(神學)·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 매우 다방면에 걸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도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여 중세철학의 본연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주석·해석이 그 첫째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서는 신(神)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서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 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스콜라철학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예속되는 곳에서는 상실되며, 긴장관계에 있는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이 성립된다. 스콜라학의 다양성은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작은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하나의 문제점에 따라 참조되는 여러 전거(典據)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설(說)이 수집·정리되었다. 12세기 초, 페트루스 롬발드스의 《명제론집(命題論集)》은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이들 여러 견해를 하나하나의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자로 분류하는 방법(그렇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슴마(완전한 단일로서 간결한 총괄)는 이들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의 조화와 종합의 시도로서 여러 영역에 관하여 이루어진 여러 설의 집대성이며, 참으로 학술의 종합이라고 할 만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은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다.
【초기】 샤를 대제 시대부터 12세기까지이며 신(新)플라톤파 철학을 도입하여 가짜 디오니시오스(Dionysios)의 번역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스코투스 에류게나, 신앙과 이성(理性)의 관계를 명확히 한정시키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神)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전성기】 13세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서(自然學書)를 아라비아 철학에서 이입함으로써 종래의 신학으로부터는 독립된 지적 연구(知的硏究)가 일어난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적으로 채용하고 게다가 이것을 전통적인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혼연히 융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 전체는 신학의 체계로서 종합되었다. 이에 비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말기】 14세기로, 신앙과 이성과의 조화가 점차 상실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 M.J.에크하르트가 대표적이다.
神學의 侍女(ancilla theologiae)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 P.다미아니가 신학에 대한 철학의 위상(位相)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명칭. 즉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당시 성서의 권위에 대하여 이성(理性)의 권위를 강조한 변증학(辯證學:dialectica)이라는 철학적 학문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변증학이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경우의 기준을 만들고, 변증학은 여주인에게 봉사하는 시녀와 같이 신학에 예속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철학이 신앙의 진리나 신학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표현한 말이다.
普遍論爭(controversy of universal)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중세 유럽에서 ‘보편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존재론적·논리학적인 철학논쟁. ‘보편에 대한 문제’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대결이라는 형태로 이미 논의한 문제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세에 들어오자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어 중세의 논리학·존재론의 정치(精緻)한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① 보편은 ‘명칭’ 또는 ‘음성의 흐름(flatos vocis)’에 지나지 않고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는 설(說)로 이것은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이라고 불리며 대표자는 로스켈리누스이다. 14세기에 오캄은 이 설을 다시 들고 나와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근세 철학에의 이행(移行)을 준비하였다. ② 보편이 실재 안에 실체(實體)로서 존재한다는 설로 이것은 실재론(實在論:realism)이라고 하며, 대표자는 기욤(샹보의)이다. 이 설에 의하면,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공통된 실체에 우유성(偶有性)이 가해져서 개개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③ 이 양극론(兩極論) 중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P.아벨라르의 설이 유명하다. 이에 의하면 보편은 ‘언어(sermo)’이다. 즉 그것은 음성이나 실체라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여기에선 개물)에 대하여 ‘말하여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 설은 사고(思考)에 의해 파악되는 ‘뜻’의 영역을 ‘존재’의 영역과는 다른 영역으로서 확립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중세의 의미론·존재론의 정밀한 전개는 그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唯名論(nominalism)
보편자(普遍者)는 명사(名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그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철학상의 입장. 명목론(名目論)이라고도 한다. 실재론(實在論)과 대립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個體)뿐으로, 예를 들면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개념은 많은 빨간 것을 갖는 빨강이라는 공통 성질에 대하여 주어진 말, 혹은 기호로서,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이 명사를 주어진 근거로 하여 사물간의 유사성(類似性)이라는 것마저 부정한다. 실재론·개념론과 함께 유럽 중세(中世)의 보편 논쟁으로 일파(一派)를 이루었다. 11세기 후반기에 로스켈리누스가 이 입장을 대표했으며, 14세기에는 W.오컴이 체계적 이론을 전개하였다. 17세기 때 영국의 경험론 속에서 부활하였는데 T.홉스가 그 대표자이다. 중세에서는 플라톤적 실재론과 결부하였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위험사상시되었고, 명백히 유물론적 색채를 띠었다.
實在論(realism)
인식론(認識論)의 사고 방식으로 의식·주관과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올바른 인식의 목적 또는 기준으로 삼는 입장. 관념론(觀念論)과 대립되는 입장이지만 보편개념의 실재를 인정하는 의미에서는 대립되지 않는다. 즉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스콜라신학의 정통파, F.브렌타노, B.볼차노, E.후설 등의 현상학(現象學)이나 A.마이농 등의 대상론(對象論)의 입장과 같이 개물(個物:하나하나의 책상이나 삼각형의 도형 등)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도 실재론이라 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경험적 실재로서의 개물과는 다른 초월적(超越的) 관념론적(觀念論的) 대상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다. 그 때문에 이 경향은 개물 이외에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명론(唯名論)과 대립되고 용어로서의 ‘실념론(實念論)’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 실재론에서는 보편적인 문제는 별도로 하고 다음 입장과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① 지각(知覺)·경험(經驗)을 그대로 실재라고 생각하는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다. 이것은 소박한 형이상학적 유물론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으나 직접 여건의 주관성(主觀性)·상대성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예시(例示)되는 ‘착각(錯覺)’ 등에서도 명백하다. ② 따라서 빛깔·냄새와 같은 주관적인 제2성질(性質) 배후에 실재하는 객관적 성질로서의 물리적인 연장(延長)·고체성(固體性)·운동과 같은 제1성질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데카르트, 가생디, 특히 로크), 이는 인식의 근대과학에 의한 설명과 물질의 기계적 고찰의 진전에 따라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험적 실재로서는 심리적 착각 등의 예에서 제1성질이 제2성질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 분명하며 연장이나 운동 그 자체는 경험에서의 추상(抽象)의 소산이다. 게다가 과학적 탐구는 실재적 성질의 정의를 부단히 변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입장도 결함이 있다. ③ 이 때문에 I.칸트는 제1성질을 포함한 경험적 인식의 모든 대상을 ‘현상(現象)’이라 하고 그 배후에 인식의 가능성을 초월한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를 상징하였다. 칸트 이후의 다양한 실재론의 입장은 물자체라는 문제의 개념을 둘러싸고 생겨났다고 할 수도 있다. ④ 또 19~20세기에 걸쳐 G.W.F.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동·비판으로서 전유럽에 다채로운 실재론과 실증주의의 입장이 생겼다. 칸트를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신칸트학파의 일원(A.릴, N.하르트만 등), 유물론·모사설(模寫說)을 주장하면서도 소박실재론과 객관의 정적(靜的)인 인식을 버리고 동적(動的)인 과학적 실재론(科學的實在論)의 입장을 취하는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등이 그 예이다. ⑤ 이상의 유럽 대륙,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흐름 외에, 영미(英美)에 유력한 현대실재론(現代實在論)이 있다. 즉 20세기 초에 영국 헤겔학파의 관념론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대두한 B.러셀, G.무어, L.비트겐슈타인등 케임브리지학파는 미국의 R.B.페리 등 현대실재론과 함께 신실재론(新實在論)이라고 한다. 프래그머티즘도 일종의 경험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케임브리지학파의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또 이 학파의 무어, 그리고 후기의 L.비트겐슈타인과 흐름을 같이 하는 영국 일상언어학파(英國日常言語學派)의 경향은 경험적 실재론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논점을 내포한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재론과 관념론 및 양자의 대립 그 자체가 언어 용법의 혼란에서 생기는 형이상학적 의사문제(形而上學的擬似問題)라고 생각하고 일상언어학파도 공통의 논점을 계승하지만 다시 철학용어에 의한 비일상적인 추상적 개괄화(抽象的槪括化)를 버리면 경험적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는 상식적(常識的) 입장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이 경향은 역사 및 문체 양면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을 내포한다. 첫째, 그것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파에서 볼 수 있는 실재론 이론에 더욱 세련되고 면밀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둘째, 앞에 서술한 전통적인 여러 실재론은 어쨌든 경험적 여건의 배후에 제1성질이나 물자체를 가정하고 거기에 객관성과 올바른 인식의 근거를 찾는 모사설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비경험적인 실재의 성질에서 그것과 경험적 여건의 연관을 말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난점이 있으나 이들 현대실재론은 이와 같은 사고법을 배제한다. 셋째, 그 때문에 그것은 객관적으로 가정되는 실재의 과학적인 여러 성질이나 법칙도 구체적 경험에서 추상(抽象) 또는 구성된 기호체계(記號體系)로 생각한다. 더구나 그것들을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과 같이 실체화하지 않고, 특히 프래그머티즘과 같이 경험해명(經驗解明)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이해하고 경험적 실재론의 입장을 취한다.
中世社會
고대사회 이후 지속되고 근세사회에 선행하는 역사적 사회 개념. 원래 중세라는 말은 고대와 근대의 중간 시대란 뜻으로 사용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시대구분법은 고대·근대의 이분법에서 고대·중세·근대의 삼분법으로 바뀌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로마시대가 고대, 게르만 민족이동 이후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중세, 그 이후를 근대로 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중세라면 무가치한 시대요, 암흑 시대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중세를 처음 비판하고 나선 르네상스기의 인문주의자들과 그 이후의 근대주의자들이 신랄하게 중세의 문화와 사회를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근대 문화와 근대사회가 가지는 자체 모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면서 중세가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또, 중세라는 시대구분은 본래 유럽사를 서술하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동양사에서는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중국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일본사에서 중세란 어느 때부터 시작되며 어느 때 끝나는가 하는 것은 매우 큰 문제거리이며, 나아가서는 동양의 역사에 중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까지 의문시되고 있다.
【유럽】 중세의 시작은 보통 5세기의 게르만 민족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보고 있고, 그 끝은 15세기 르네상스로 보는데, 이 1000년간을 다시 전·후기로 나누어 10세기까지를 중세 전기, 그 이후를 중세 후기로 나눈다. 일설에 따르면 중세는 르네상스로 끝나지 않고, 18세기의 프랑스 혁명까지 계속된다고 보고 있으며, 또 18세기의 계몽사상, 17세기의 과학혁명, 16세기의 종교개혁 등을 중세의 끝,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등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대체로 중세의 끝을 17, 18세기로 늦추는 것이 최근의 특징이다. 먼저 중세 전기의 사회를 고찰해 보면, 원시적인 게르만 사회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봉건사회로 이행하여 가는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경제는 극히 제한된 원거리 무역과 사치품 교역을 제외하면 자급자족적인 실물경제 단계에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일부 수도원에 고대 라틴문화가 계승되었을 뿐 일반 농촌사회는 암흑시대와 같았다. 정치적으로도 아직 봉건제도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여 불안한 중앙집권국가(프랑크 왕국)가 성립되었다가 다시 분열되었다. 11세기 이후 유럽의 중세사회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상업이 부흥하여 도처에 정기시(定期市)가 설치되어 그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중세도시의 발생은 지중해 무역이 다시 일어나고 상업이 부흥하게 된 이유 이외에도 농업 생산의 증대, 인구의 증가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도시는 자치권을 획득하여, 농민이 도망간 뒤 1년만 정착하게 되면 농노신분에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해방시킨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서로 동업조합을 조직하여 농촌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중세도시는 점차 확대 발전, 대학을 비롯한 문화시설이 들어서게 되어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기초를 닦아갔다. 도시로부터의 경제적 압력으로 농촌 경제의 구조가 변화하게 되었는데, 장원제도의 발전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봉건제도가 발전하였다는 사실이다. 때마침 십자군운동이 일어나 봉건기사 계급이 성장하는 가운데 유럽의 중세사회는 고도 봉건사회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13세기를 고비로 유럽 중세사회는 큰 위기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증상은 흑사병의 유행(1347∼51), 백년전쟁(1337∼1453), 농민 반란(1388) 등 일련의 사건으로 나타났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상업도시가 발달하면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유럽 전역에 이데올로기 위기를 조성하였다. 한편,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관이 바뀌어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을 부정하는 새 사조를 낳았다. 봉건체제의 위기가 심화되자 봉건지배층은 이에 대응되는 절대왕정 체제를 형성하였다. 절대왕정은 봉건제도의 증대되는 사회불안을 진압하기 위한 보다 조직적인 관료행정 체제라 할 수 있으나, 결국 영국·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근대 시민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근대개혁이 단행되었다. 동유럽 대다수의 나라들과 아시아·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도 혁명 대신 개혁이 단행되었다. 역사상 근대혁명이나 개혁이 중세사회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같으나, 혁명이냐 개혁이냐 하는 문제는 그 나라 의회민주정치의 발전여부와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다.
封建制度(feudalism)
중세 유럽에서 봉토수수(封土授受)에 의해서 성립되었던 지배계급 내의 주종(主從)관계, 또는 씨족적·혈연적 관계를 기반으로 했던 주(周)나라의 통치조직. 원래 봉건제도란 용어는 중국의 고대사에서 군현제도에 대응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주로 서양의 feudalism의 역어(譯語)로서 사용되고 있다.
【봉건제도의 개념】 학문상 통일된 개념이 없어 학자에 따라 제각기 상이한 봉건제도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나, 다음과 같이 3가지 개념으로 대별할 수 있다.
〈법제사적 개념〉 봉주(封主)와 봉신(封臣) 간의 주종서약(主從誓約)이라는 신분관계와 거기 대응하는 봉토(封土)의 수수라는 물권(物權)관계와 불가분의 결합체제를 말한다. 서유럽에서는 대략 8, 9세기에서 13세기까지 해당한다.
〈사회경제사적 개념〉 노예제의 붕괴 후에 성립되어 자본주의에 앞서서 존재하였던 영주(領主)와 농노(農奴) 사이의 지배·예속관계가 기조를 이룬 생산체제를 말한다. 이 생산체제에서 영주와 농노는 토지를 매개로 봉건지대를 수취·수납하였다. 봉건지대는 부역지대에서 생산물지대 또는 화폐지대로 바뀌어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어 갔으나, 여전히 영주의 경제외적인 지배와 공동체의 규제가 농민을 극심하게 속박하였는데, 서유럽에서는 6, 7세기에서 18세기 시민혁명 때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사회유형으로서의 개념〉 국왕 또는 황제를 정점으로 계서제(階序制)를 이루고, 신분제의 견지, 외적 권위의 강조 또는 전통의 고수라는 형태로 개인역량의 발휘와 내면적 권위의 존중 등이 억압된 사회를 말한다. 봉건사회가 세계사적으로 어떤 뜻을 지니느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씨족제의 붕괴과정에 있는 사회가 보편적인 국가이념과 종교를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형성을 도모해 나갈 때에 생긴 역사적 조건의 우연한 산물로 보고 있으며, 필연적인 한 단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관료·군대가 없고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 있어서는 주종관계라고 하는 인적 결합의 강화에 의한 통일이야말로 국가 통치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봉건제 개념의 형성사】 봉건제 개념은 일반적으로는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구제도) 하의 상황에서 생긴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봉건제(feodalite)’라는 용어 자체는 봉(封)을 뜻하는 라틴어 fevum, feodum의 형용사형인 feodalis에서 유래한다. 이 말이 프랑스어 속에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초기에 이르러서인데, 처음에는 어원에 충실하게 봉의 법적 자격이나 봉에 부수되는 고유의 부담(負擔)을 뜻하는 법률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봉건제라는 말이 ‘하나의 문명 상태’를 나타낸 역사용어로서 최초로 사용된 것은 불랭빌리에 백작의 《프랑스 구정체의 역사》(1727)에서이다. 그는 샤를 루아소 등의 절대주의 이론가에 대항하여 귀족의 봉건적 제권리를 옹호하려는 의도에서, 주권(主權)의 세분화야말로 게르만인의 침입 후 출현한 봉건정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었다고 논하였다. 불랭빌리에의 저서의 영향을 받은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48)에서 프랑크왕권의 성립과 그 해체의 과정 속에서 확립된 봉건법은 역사적 산물로서, ‘세계에서 한 번 이상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주장하고, 또 봉건정체에서는 주권이 대소 무수의 봉(封), 즉 영주지배권으로 분할되어 있어서 아나르시(anarchie:무정부상태)에의 경향을 가진 ‘봉(封)의 법(法)’이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볼테르는 정복 위에 구축된 봉건제는 특수한 유럽적인 역사현상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도, 《여러 국민의 습속·정신론》(56)에서 그 역시, 카롤링거 왕조 붕괴에 이은 10, 11세기에 프랑스나 독일 및 이탈리아에서는 정치권력이 성채를 거점으로 한 ‘무수한 소폭군(小暴君)’에 의해 분할 소유되어, 원수(元首)도 경찰도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아나르시가 지배하는 ‘완전한 봉건정체’가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립적 영주지배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중세의 묵은 지배구조가 이미 소멸되어 단순한 역사적 추억으로 되어 있던 절대왕정시대에, 절대주의의 이상인 통일적·주권적 국가의 반전상(反轉像)으로서 주권의 세분화를 표지(標識)로 하는 봉건제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봉건제라는 말을 일반화하고, 혁명 전후의 상황으로 해서 새로운 봉건제의 개념이 정형화되어 갔다. 89년 8월 11일의 포고는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기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된 ‘봉건제’의 내용은 ‘봉건적 제권리’의 잔존물, 정확하게 말하면 토지영주제(土地領主制)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토지영주제야말로 봉건사회를 지탱하던 진정한 토대였다는 시각에서 귀족에 의한 농민의 정치적·사회적 지배기구로서의 봉건제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은 경과에 의해서 오늘날 관용되고 있는 3가지 봉건제의 개념의 원형이 성립되었었다. 그리고 그 후 19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사회학·문화사, 영국의 국민경제학, 독일의 중세국가논쟁을 통하여 봉건제의 개념은 다채로운 전개와 교류를 계속해 나갔다.
【봉건사회의 구조】 봉건사회에서 정치사회구조의 기축을 이루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봉(封), 즉 가신제(家臣制)였다. 한 개 또는 몇 개의 성채를 소유하는 성주(城主)는 성주지배권의 영주인 동시에 스스로 봉주로서 몇 사람의 기사(騎士)들로 구성된 봉신단(封臣團)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성주층도 각각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이 봉신(封臣)이 되어서, 대제후의 봉신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 대제후 위에는 또한 국왕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기사를 최하층에 두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인 계층서열이 형성되어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러나 봉건제는 그것 자체가 항상 아나르시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사회가 하나의 정치질서로서 존속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봉건제 외에 그 기초나 토대가 되는 비봉건적인 요소, 구체적으로는 각 층의 봉주가 자기의 봉신단에 대해 봉건법상의 의무의 충실한 이행을 강제하기에 족한 만큼의 봉주로서의 권위와 그 권위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직접적·가산적(家産的) 지배영역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현실의 봉건사회는 더욱이 부분적으로만의 봉건사회로서, 그 내부구조는 봉건제와 가산제(家産制)라는 이원적 원리에 의해서 편성되어 있었다. 먼저 대제후 지배권에 대해 살펴보면, ① 대제후의 직접적 지배하에서, 대관(代官)이라는 직명을 가진 관리가 관리하던 직할성주 지배권, ② 대제후의 봉신인 성주층의 지배하에 있는 수봉(授封)성주 지배권의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왕국 전체에 대해 살펴보면, 국왕의 지배권의 대상은 ① 국왕의 직할성주 지배권, ② 국왕의 직속신하인 성주층의 수봉성주 지배권, ③ 대제후 지배권의 셋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 ①과 ②가 결합되어 국왕직속의 대제후 지배권을 형성하였다. 그 위에 다시 봉건제와 가산제라는 이원적 조직원리는 성주 지배권의 내부구조에도 관철되어서, 직할·수봉 성주 지배권은 ① 대관과 성주의 직접적 지배영지, ② 그들의 봉신인 기사층(騎士層)의 영지 등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①은 한 개 내지 몇 개의 촌락규모를 가지는 많은 관할구로 나누어져, 각 구마다 대관과 성주의 권한을 대행하는 관리가 배치되었다. ②는 봉토 외에 일반적으로 기사 자신의 조상전래의 자유지(自由地)가 포함되었는데, 그 전체 규모는 대략 촌락 하나의 규모에 상당하였다. 기사층은 토지에 밀착된 생활을 하였던 촌락의 향사(鄕士)인데, 법적으로 귀족신분의 말단을 차지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촌락 관리의 처지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기사와 촌락의 관리 사이에는 관리의 기사화나 기사의 관리화와 같은 신분·권력관계의 상호 교류가 자주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일한 교류관계가 성주와 대관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던 점으로 보아 봉건제와 가산제를 엄격하게 고정적·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며,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
【봉건제도의 발전 과정】 〈유럽〉 서유럽을 중심으로 봉건제도의 발전과정을 보면, 그 법제사적 의미에서나 부역중심의 고전장원(古典莊園)의 성립 및 가톨릭적 통일문화권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유럽에서의 봉건제도는 대략 8,9세기의 카롤링거왕조의 프랑크 왕국에서 성립했다. 10세기~13세기가 그 전성기였으며, 13세기 이후 도시의 발달에 의한 화폐경제의 보급·지대형태의 변화 등에 의해서 점차 지배형태가 변화하였고, 국가제도의 변질을 초래하여 영역지배를 중심으로 한 왕권 또는 영방(領邦) 군주권이 강화됨으로써 인적 결합(人的結合) 관계의 요소가 더욱더 희박해져 붕괴하고 말았다. 봉건제도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공동의 모체에서 출발했는데도 프랑크 왕국의 해체 후 각국이 독자의 발전을 시작하자 지역에 따른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특색 있는 봉건체제를 나타냈다. 사회경제의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국가체제의 면에서는 달랐다.
① 독일:독일에서는 종족공국(種族公國)의 자생적 통합현상이 나타나서 그 통합 위에 형성된 신성로마제국은 처음부터 연방적 봉건국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오토 1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의 교회정책, 즉 여러 공국(公國) 제후들의 분립적 세력에 대한 중화적(中和的) 세력으로서 교회의 세속적 세력을 배양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던 이유였다. 말하자면 독일에서 법(法)의 근원은 황제 또는 그의 관리에 의한 위로부터의 관직적(官職的) 명령 외에 촌락단체·가우(Gau)·훈데르트샤프트(Hundertschaft)·종족공국의 순서로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자생적 지배권이 있었으며, 대소(大小) 귀족의 영지에도 위로부터 받은 봉토 외에 조상전래의 자유세습지가 많았으므로, 법의 이원주의가 일관하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법제사적 의미의 봉건제는 독일에서는 예상 외로 관철되지 못하였다.
② 프랑스:독일의 경우와는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로마제국 말기로부터의 전통도 있어 영주와 민중과의 사이에는 부족적인 연결이 없었으며, 귀족의 대부분은 프랑크 왕실과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했었다. 따라서 독일에서와 같은 자생적인 힘의 작용은 대단치 않았고, 노르만족의 침입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자에 의한 통일의 필요성이 크게 요구되었기 때문에 군웅할거의 봉건적 분열의 현실 속에서 실력에 의한 왕권 신장이 달성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0, 11세기의 프랑스는 분권적 봉건제의 대표적 형태를 취하여 ‘나의 봉신의 봉신은 나의 봉신이 아니다’라는 주종관계의 전형적 원칙이 수립되었고, ‘봉토 아닌 것이 없다’는 상황을 나타내었다. 프랑스 왕실은 12세기 말 이후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도시의 경제력과 결탁하여 정기금(定期金)을 가신(家臣)에게 수봉(授封)함으로써 봉건왕정의 실력을 강화하여나갔다.
③ 이탈리아:이탈리아에서는 남부의 고전고대·사라센·노르만적 제요소, 북부의 로마·랑고바르드·프랑크적 제요소 및 교회국가의 전통 등으로 인해 모자이크와도 같은 복잡성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비잔틴 제국의 영향하에 있던 제도시가 먼저 발달했기 때문에 봉건체제도 남부와 북부로 크게 분류된다. 남부에서는 노르만의 집권적 지배하에 봉건제후의 통치가 도시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였으며, 북부에서는 봉건제후나 가신군(家臣群)의 시민화와 도시에 의한 주변농촌의 정복으로 도시국가의 할거를 초래하고, 아울러 농민이 조기에 소작관계로 전화하여 전반적으로 일찍이 봉건체제를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④ 영국:앵글로 색슨 시대에 이미 봉건제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는 제제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봉건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1066년의 노르만인의 정복에 의해서이다. 즉 영국봉건제는 정복민족에 의해서 대륙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점이 처음부터 결정적인 특색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봉건법상의 예는 86년 솔즈베리의 서약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보유하고 다소의 세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윌리엄 1세에게 충성을 선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직속신하이거나 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국왕과 일반민과의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 우선해서 일반적 신종(臣從)의 관계가 유지되었는데,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영국이 집권적 봉건제의 대표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처: 네이버 오픈 사전,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