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은 이메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얼마정도 요구와 받을 수 있나요.(현재 구직중 상태)
두번째, 소송은 언제 부터 하나요.
현재 내용증명서를 보냈습니다.
# 꼭 좋은 날이 오길 바라며 약소자가 이기는 세상을 위해서.....
------------ 이 곳 부터 내용증명서 내용입니다.----------------
※작성목적
**체육관에서 2년 4개월 동안 근무하며 본인이 부당한 대우 및 과중한 업무로 발생한 질병(망막박리, 슬개건염, 전립선염, 화병, 이병, 돌발성 난청. 내과질환)으로 인하여 오랜 기간 동안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장기간 그 질병치료에 임하였는데 백호체육관장(전중수)은 아직까지(2003년 10월)도의적 책임과 위로비 등이 없었다. 또한 과중한 업무로 인해 질병이 발생했는데 그 잘못에 대한 전중수 관장은 비신사적 책임회피를 하였다. 그래서 본인은 아래 사례로 통하여 병원비, 치료비 및 요양비, 퇴직금 등에 대한 정당한 본인의 모든 권리를 찾고자한다.
안녕하십니까?
본인은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고심을 했으며 본인 의사를 글로써 표현하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백호체육관(경기도 고양시 주엽동 위치)에서의 입사(2000년 3월 31일)와 퇴사(2002년 8월 28일)때까지 어떠한 근무조건과 대우를 받았는지를 상세히 적어보겠습니다. 만약 본인 의사가 잘못 거짓된 부분이 있다면 반박 및 답변해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백호체육관에서 근무할 때 처음 시작은 좋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당한 근무조건과 시간, 대우, 월급 등에 본인은 실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인에게 발생한 질병(무릎치료 및 망막박리, 이명, 돌발성 난청, 전립선염, 육체․정신적 고통)에 대한 관장님께서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을 지셨다면 본인은 이런 글까지는 작성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 양해 드립니다. 본인이 백호체육관에서 근무하면서 부당한 근무조건으로 인해 발생한 수술(육체적 피해) 및 치료 요양(정신적 피해) 사례에 대한 정당한 본인의 권리를 찾고자 합니다. 아래와 같이 사건내용 및 경위를 서술하겠습니다. (이하 존칭 생략, 서술하여 작성함.)
본인은 1999년 대전 대학 동문체육관에 1년간 근무(1999년 3월 2(화)일~2000년 3월 24(금)일)를 하고 개인사정으로 부득이 퇴사를 하였다. 대전에 있을 때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정훈체육관 한 곳을 소개받은 적이 있다. 사범생활 근무조건 및 정훈체육관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부천 중동에 위치한 금메달 체육관 임성빈 관장을 찾아뵙게 되었다. 그 곳에서 사범생활과 임금 등 여러 관련 사항과 대우를 설명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임성빈관장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친구(백호체육관 전중수 관장)가 고양시태권도협회(임원)에서 일을 한다며 통화를 하였고, 그 후 본인에게 말을 하였다
그 친구(백호체육관장 전중수)도 홍성(본인의 고향)이고 무덕관(1950년부터 내려온 태권도 계보: 청도관, 연무관, 송무관, 지도관 무덕관 등)출신이라 했다. 홍성이면 본인의 고향이기도 하고, 무덕관이면 홍성의 제일체육관(본인이 청소년기에 태권도를 수련한 곳)뿐인데 역시나 제일체육관 선배이자, 고교선배였다. 그런 계기로 임성빈관장은 고향선배이니 잘해 줄 것이다. 그 정훈체육관보다 백호체육관(본인이 입, 퇴사 한 곳)에 사범 생활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 설명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믿음과 편안한 마음으로 그 곳 백호체육관에서 사범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000년 3월 25(토)일(2000년 3월 11일에 전화 약속을 함)에 본인과 친형이 함께 일산에 있는 백호체육관을 오전에 방문했다. 전중수관장(이하 백호관장)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이동하여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근무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백호체육관장은 근무조건을 ‘월급은 3개월에 한번씩(현실에 맞지 않은 말이 이었음) 올려주며, 빨간 날(국, 공유일)은 모두 쉬고, 또한 토요일도 쉰다고 하였다’. 또 ‘국, 공유일 쉬어서 직업을 태권도 관장을 선택했다.’란 말도 하였다. 그리고 보너스는 추석, 설날 지급(금액은 얘기 안 함)하고, 출근시간은 월요일은 10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11시까지 출근이고 퇴근은 수업마치고 퇴근한다와 식사문제는 점심, 저녁은 제공하지 않고, 점심 식대만 10만원 지불(근무일에 비해 부족한 식대 값)하며 월급은 대전 체육관에서 받은 것(100만원~110만원)을 맞추어준다는 근무조건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본인은 5세 때 교통사고가 나서 오른쪽 시력이 잘 안나온다고 설명함과 동시에 오른쪽 눈을 1999년 11월 18일 충남대병원에서 망막박리 수술(백호관장, 원장 모두 입사 때부터 본인이 망막박리 수술 사실을 알고 있었음)해서 눈,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수술한 오른쪽 눈이 시력이 안 좋아 1종 보통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없어 2종 보통면허를 취득했다고 백호관장에게 설명하였다. 그래서 백호관장은 본인은 수업만하고 차량운행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렇게 본인은 백호관장이 고교 ․ 체육관 선배이고, 고향 윗마을 분이라서 양쪽 가족들도 어느 정도 아는 사이였기에 더 없이 믿고 따르기로 하여 다른 궁금증에 대해 자세한 문의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도권 지역에 태권도 관련 협회에서 일하는 선배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지하며 따랐다.
본인의 목표는 어느 정도 태권도 사범경력을 쌓은 뒤 본인의 체육관을 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을 백호관장에게 말을 했더니, 백호관장은 본인의 체육관 자리와 신설 및 인수(기존의 체육관을 구입하는 것)에 대해 알아봐 준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 후 2000년 1년 동안 ‘두 차례 체육관을 소개(영등포 용인대 동문회장 체육관, 서울 상계동 백호관장의 친구 체육관)해 인수 할 수 있냐’ 란 질문에 본인은 ‘인수 할 수 있다’고 해 인수에 들어가는 경비 및 기반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백호관장은 두 차례 모두 아무 통보 없이 넘어가 버렸으며, 본인이 힘들어 할 때나 퇴사를 하려 할 때 체육관 자리 알아 봐 준다는 것으로 계속 근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요즘 체육관은 브랜드 체인점처럼(예: 무슨 대학교 태권도학과 동문체육관)운영해야 신설 체육관에 약간이나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본인은 체육관 운영에 필요한 자격증(태권도 5단, 3급 태권도 사범, 3급 생활체육지도자, 2급 경기지도자)을 모두 갖고 있었지만, 체대(체육전공) 및 태권도학과 전공을 안 했기 때문에 그런 동문체육관(경희대 태권도학과, 용인대 태권도학과)에 불리한 조건으로 체육관 신설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호관장이 열심히 하면 용인대 태권도학과 간판(상호)을 달아 줄 수 있다면서 본인이 어려울 때 때 그 매개로 계속 근무하게 하였다.(백호관장은 백호체육관에서 근무한 사범들에게 용인대 백호란 상호가 들어 간 체육관을 총 10개를 개관하고 싶었음)
1. 2000년 4월 3일(월) 수업시간은 5부재로 운영
※ 수업시간 (오후 2시, 3시30분, 5시, 6시30분, 8시) 30분 간격 휴식
※ 국, 공유일 근무일
-4월 8(토)일 오전 11시~9(일)일 오전 7시까지 백호체육관에서 합숙훈련
-4월 16(일)일 고양시장기 및 협회장기 태권도대회, 오전 8시~오후6시까지, 고양종합학교 체육관
-5월 14(일)일 북한산 등반대회,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5월 21(일)일 태권도 승품, 단 심사대회, 오전 9시~오후 5시까지, 장소 고양종합고교 체육관
-6월 6(화)일 현충일 검은 띠 캠프, 오전 7시~오후 6시까지, 임진강, 태풍전망대
※ 근무시간
-월: 오전 10시 ~ 오후 10시까지(12시간 근무)
-화~금: 오전 11시 ~ 오후 10시까지(11시간 근무)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승품, 단 심사 및 대회연습)
2000년 3월 31일(금) 79회 승급심사 일에 첫 출근을 했으나 정식 출근은 2000년 4월 3일(월)부터 이었다. 그래서 2000년 4월 3일(월)에 출근(그 당시 경기도 부천시에서 대중교통이용 출근)하여 청소 및 기자재 정리를 하고 업무파악하기 위해 이상관 사범(본인이 입사하기 전부터 근무하던 사범, 이하 이사범)과 대화(본인이 근무하기 전 까지 사범이 5명 정도가 바뀌었고, 1999년 8월에 태권도경연대회 때 박종환사범이 학부모에게 욕설한 실수 인해 백호체육관 이미지가 나빠졌다. 이로 인해 관원생이 180명에서 계속 감소해 130명 정도 유지하고 있더란 얘기 등 여러 문제점 말해주었다.)를 나누었다. 그 다음 수련시간, 출석부(학년별 관원생 명단)를 체크하였다. 또한 관원생 파악에서 2000년 3월 관원생은 총 인원은 140명이 조금 넘었으나 출석인원은 120명이 되지 않았다. 본인은 수업을 1주일 정도 수업보조(뒤에서 수련생들을 자세 교정)를 하고 그 다음에 오후 2시부와 오후 8시부를 지도했다. 입사한지 한달이 되어 2000년 4월 28일 첫 월급날이 되었다. 그러나 월급이 본인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대전 동문체육관에서 근무하며 받은 월급(100만원~110만원)을 백호관장은 맞추어 준다고 했는데 월급은 70만원과 식대 10만원이 다였다. 이때 당혹감은 뭐라 말 할 수 없었지만 이렇다 할 건의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직 업무파악을 못해서 생각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기로 했으며 3개월 되는 날(2000년 6월)에 월급인상을 한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2000년 5월이 지나서 본인이 노력한 만큼 월급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체육관 사범들에게 근무조건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어 비교 해봤다. 그런데 본인보다 다른 체육관에 사범들은 근무조건, 대우, 복지혜택 등이 훨씬 좋았다. 구체적으로 월급인상 조건, 출 ․ 퇴근시간이 좋았고 중, 석식 제공, 승품단 심사비(1품 98,000원, 2품 108,000원, 3품 118,000원)보너스 연장근무 수당 등으로 보아 본인의 월급은 터무니없었고 혜택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괜찮았다. 함께 근무하는 이사범(수업보조 및 청소 등 혼자서 하게 됨) 때문에 근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백호관장과 백호관장 사모(이미옥 이하 백호원장)도 즐겁게 근무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하지 못하였다.
직장이란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지만 서로 함께 도와가며 편안한 직장분위기 조성 등으로 근무하는 것이 우선인데 한쪽은 편하게 다른 한쪽은 힘들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범과 함께 근무할수록 청소 및 수업보조(뒤에서 도와주는 것)를 도와주는 것이 줄어들었고, 만약 수업을 보조하게 되면 뒤에서 앉아있었다. 또한 백호관장이 자리를 비우면 그런 행동은 심해졌으며, 때론 사무실에 전화를 하면서 수업에 관심을 갖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이사범이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아는 바이지만 함께 근무하면서 근무와 다른 행동으로 인해 본인을 힘 빠지게 하는 일 많았다. 본인은 이런 내용을 백호관장에게 건의를 하지 않았으며 그런 것(혼자서 청소 및 수업하는 것)이 직장생활의 위계질서며 순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 알게 된 것은 2001년 6월에 입사한 정복인사범(용인대 태권도학과 졸업, 용인대 시범단 출신 여자사범, 이하 정사범)이 들어오면서 알게 되었다. 본인도 요령을 피우고 수업을 하고 싶었지만 본인은 성격상 그렇게 하는 것이 용납이 안 되었다. 그래서 불공평하게 대우 및 월급을 받는 것보다 사직하기로 생각하여 다른 직장 생활하는 선배들과 업무에 대한 상의를 해보았다. 그 선배들은 고교 ․ 고향 선배 체육관이니 적어도 6개월에서 1년 정도 근무해줘야 하지 않겠냐 란 권유가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고 이해하여 출근을 하게 되었다.
태권도행사 및 대회가 많았던 2000년 4, 5월이 지나면서 본인에게 주어지는 사무적 업무(수업계획서, 가정통신문, 문서작성)와 수련지도 시간이 많아졌다. 토요일, 국, 공유일(구두 계약 시 휴식이라 했는데 약속과 달리 함) 출근수당과 연장근무에 대한 수당 없었고, 계약과 다른 사항이 벌어졌다. 또한 3개월 되는 2000년 6월 30(금)일에 월급인상 하기로 하였던 것이 3개월이 지나 2000년 7월 28(금)일에 10만원 인상되어 90만원(식대 10만원 포함)을 받게 되었다. 백호관장과 위 월급 내용을 대화를 해봤지만 본인이 잘못 생각 한 거라면서 답변을 주었다. 그래서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신뢰성이란 단어가 한동안 근무하면서 떠올랐다.
2000년 7월이 되어 여름방학 준비차원에 특성 있는 수련계획서(품새반, 기공체조반, 태권로빅반, 시범단반, 기초체력반 등)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밤늦게 퇴근하고 부천으로 귀가(경기도 부천시 송내동 거주)하면서 밤 11시 30분 넘어 도착해 그 과제를 새벽까지 작성해 가면 함께 근무했던 이사범은 지시사항을 작성하지 않고 출근하였다. 본인이 작성한 것을 백호관장에게 제출할 때 이사범은 자신이 작성한 것처럼 보고했다.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인이 뭐라 할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인과 이사범은 운동선배 ․ 직장선배이고, 나이차이가 5살 정도 이었음, 백호관장은 고교 11년 선배이기 때문에 대화하기 어려웠음) 그렇게 보고 된 내용이 승낙을 받아 혼자 수련계획표 워드작업(백호관장이나 이사범은 워드작업에 능숙하지 않았음)을 하고 이것을 시행하였다.
2. 2000년 7월 18일(화) 여름방학이 시작하여 수련시간이 6부재로 변경
※ 수업시간(오전 7시, 8시30분, 10시, 오후 2시, 3시30분, 5시) 휴식간격 있음
※ 국, 공유일 근무일
-7월 17(월)일 제헌절, 수영캠프, 오전 8시~오후 6시까지, 한강망원지구
※ 근무시간
-오전 : 오전 7시 ~ 오후 7시까지(총 12시간 근무)
-토요일: 오후 11시 ~ 오후5시까지(승품심사 및 대회연습)
2000년 방학기간은 출근하기 위해 새벽 4시경 일어나 첫 전철(부천시 송내역)을 타고 영등포에 도착 후 다시 좌석버스 87번을 타고 일산 주엽동에 위치한 백호체육관에 아침 7시까지 출근하였다. 매번 반복된 힘든 출근과 점심은 집에서 쌓은 도시락으로 대처하였다. 늦은 퇴근으로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가 넘었고 짧은 수면을 취하는 생활을 1달 동안(2000년 7월 18일~8월 25일까지) 반복하였다. 여름방학(2000년 7, 8월)동안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칭찬보다 질책과 자존심 상한 말(인격체인 사범들에게 ‘야 임마’ ‘니들 먹는 것은 개들도 안 먹는다.’)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입사 후 첫 여름캠프 일에 백호원장이 그렇게 우리 사범들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예전부터 백호원장은 체육관 행사에 꼭 참석하여 사범들을 힘들게 했고 여러 지시를 했다고 퇴사한 사범들이 말함) 본인과 이사범은 백호관장 지시를 따르고 행동했지만 백호원장은 백호관장과 다른 지시 때문에 우리들(본인과 이사범)을 당황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백호관장은 많은 사람과 관원생 앞에서 사범들에게 높은 언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2000년 7월 하순 새로운 이승용 사범(당시 29세 용인대 태권도학과 졸업)이 왔다. 회의시간에 백호관장이 업무 얘기 등과 함께 사범이 3명 근무하면 더욱 세심하게 관원생들에게 신경 써 줄 수 있으며, 교육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또 사범 3명 근무하면 근무태만인 사범을 막 바꾼다.(바로 퇴사시킬 수 있다.)란 말을 하였다. 그리고 백호관장은 본인과 이사범에게 말할 때 너무 직선적, 강조적인 표현보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가 있었더라면 본인과 다른 사범들에게 더욱 힘이 되고 그 힘이 관원생들을 가르치는데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작은 소망은 본인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2000년 7월 하순에는 이승용사범(당시 29세 용인대 태권도학과 졸업 새로운 사범)과 본인이 한 달 동안 수업이 잘 맞추어 함께 근무하는 것이 편했으며 힘이 솟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서로 힘들 땐 도와주며 격려해주고 함께 고민하고 상담하는 등 일하는데 힘이 되었다. 본인과 이승용사범은 서로 수업과 마음을 잘 맞추어 나가고 2000년 9월 담임 선생제도(학년별 나누어 담당관리)까지 만들어 함께 일하기로 했는데 2000년 9월 초순 백호관장의 큰형이 운영하는 체육관(서울 영등포 소재)에서 사범이 필요해 아쉽게도 이승용사범(힘이 되어준 사범)이 그쪽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또 다시 힘든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3. 2000년 8월 28일(월) 개학하면서 입관생들의 많아져서 관원이 상승(기준 120명→150명)되었다. 수업시간은 종전 5부재에서 1부 늘어난 6부재로 변경
※수업시간(오후 2시, 3시30분, 5시, 6시, 7시, 8시) 5시부터 휴식시간 없음
※ 국, 공유일 근무일
-9월 16(토)일 오전 11시~17(일)일 오전 8시까지 백호체육관에서 합숙훈련
-9월 24(일)일 용인대 동문회장기 태권도경연대회 오전 7시~오후 7시까지
-10월 24(일)일 고양시 교육감기 태권도 겨루기 및 경연대회, 오전 8시~오후 6시까지, 고양종고
-10월 28(토)일 오전 11시~29(일)오전 8시까지 백호체육관에서 합숙훈련
-11월 19(일)일 오전 11시~오후 6시까지 승품단 심사일, 고양종합고등학교
※ 근무시간
-월: 오전 10시~오후10시(12시간) - 화~금: 오전 11시~10시(11시간) 근무
-토: 오전 11시~오후 5시까지(승품심사 및 대회연습)
2000년 8월 28일 개학하면서 관원생과 수업시간이 늘어남으로 저녁식사 문제를 백호관장에게 해결해주기 부탁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종전 그대로 점심은 도시락으로 대처했고 저녁은 먹을 시간이 없어서 퇴근 후 빵(백호체육관 아래 1층에 있는 파리바케트에서 구입)으로 대처했다. 이렇게 불규칙한 식사문제와 휴식 없는 수업시간이 시작되어 육체적 피로가 가중되었다. 여러 행사 및 대회를 치러 보았지만 특히 2개월마다 돌아오는 승품심사(국기원에서 발생한 단증, 품증 시험)와 용인대 동문 태권도 경연대회가 되면 심한 스트레스인한 불면증과 소화불량은 더욱 심해졌다.
태권도 경연대회기간이 되면 대회 참가하는 관원생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다보면 대회 참석하지 못한 관원생들은 대회기간동안 참가자의 시범과 연습관람 및 상가옥상에서의 수업 등으로 보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퇴관(그만 나오는 일)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대회 참가 관원생 에게도 힘든 고통사항을 초래하였다.(한 관원생은 2, 3개 중복해 참가하기도 할 정도이었음) 아무리 정신교육(대회에 참가하면 좋다는 장점)을 시키고 대회연습을 시켰지만 과연 경연대회란 관원생들에게 보람이 있었는가? 아니면 백호관장의 명예, 권위의식을 위해서 참가했던 것은 아닌가?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매번 그렇지만 대회를 끝나고 나면 장점보다 단점만 지적하시는 백호관장의 태도는 관원생들 및 사범들에겐 맥이 풀리는 결과만을 초래했고 격려의 말 보단 질책만 하는 백호관장의 태도에 실망을 금 할 수가 없었다. 또한 2000년 10월 24일에 치러진 고양시 교육감기 경연대회도 용인대 동문대회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본인과 이사범은 어렵게 근무를 하고 수업은 이때부터 휴식시간 없이 지도하게 되었다. 만약에 백호관장이 차량운행을 도와주지 않는 날이면 휴식 시간 없이 이사범은 차량운행을 본인은 수업만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런 식으로 수업을 무리하게 지도하다보니 목소리가 변하게 되고(소리를 크게 내며 수업하는 일 때문에) 성대가 문제가 생겼다. 또한 피로가 쌓여 몸이 지쳐갔으며 체육관 조명이 밝지 않아서 눈의 피로증진과 안구건조를 가증(치료는 백호체육관 옆 당시 류소아과에서 현재는 손가정의학과에서 치료 받음)되었다. 이시기는 마음속으로 당장 퇴사를 하고 싶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퇴사를 못하고 있었다. 또한 백호관장은 본인의 체육관을 차라는데 돕겠다는 말로 본인의 힘든 생활을 잊어버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육관 출근 후 오전에 잠시 쉬면서 수업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백호체육관 주변 초등학교 앞(일산 주엽동에 위치한 문촌, 오마초등학교)에서 체육관 홍보(마케팅 수단)를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체육관에 들어오면 수업시간이 되었거나, 백호원장과 자녀들이 있어서 편안하게 업무준비를 할 수 없었다.(사범들의 편안한 수업준비 조건을 만들어 주지 못하면서 수업준비 하지 않는 다는 질책을 함) 그렇게 본인은 몸이 피곤한 상태 때문에 간간이 주말 휴식이 있으면 사회활동보다 수면만 청했으며 또한 성격은 점점 급하게 행동하는 하는 것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연말 88회 공개심사준비(1년에 한번 가족을 초청하여 그 앞에서 관원생들이 시험 보는 것)로 11월부터 공개심사 위주로 수업은 진행되었다. 그때 백호관장은 관원생 앞에 사범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동과 말이 잦았다. 어린 학생 앞에서는 그런 말(예: 존칭사용 안함, 수업 중에 이사범, 장사범, ‘그게 뭐야 답답하다.’)은 괜찮았지만 중, 고생 앞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창피해서 지도하는데 정신적으로 어려웠다.
4. 2000년 12월 26일(화)겨울방학이 시작되어 수련시간이 6부재로 변경
※ 수업시간(오전 8시30분, 10시, 11시30분, 오후 2시, 3시30분, 5시) 1달 동안 휴식간격 있음
※ 국, 공유일 근무일
-2000년 12월~2001년 1월까지 없음
※ 근무시간
-오전: 8시(4시간) ~오후7시까지(7시간) - 총 11시간 근무
-토: 오전 11시~오후 5시까지 (승품심사 및 대회연습)
지난 2000년 여름방학은 오전 7시에 수업이 시작이었지만 이번 2000년 겨울방학은 수업 시작이 오전 8시로 출근하기가 조금은 수월하였다. 또한 근로조건이 어느 정도 해결(저녁 식사문제, 사범채용, 수업 후 휴식시간)이 되어야 일하는데도 의욕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백호관장은 그러한 문제가 해결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사범을 채용을 백호관장에게 말했지만 ‘구하고 있다.’란 말만 반복하고 사범 채용에는 관심이 없는 느낌이었다. 이에 함께 일하는 이사범도 점차 지쳐하는 듯 보였고, 무리한 차량운행으로 무릎 통증을 호소하였다. 그런 이사범의 무릎통증에 대한 백호관장은 대처 및 치료비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힘들고 지쳤지만 본인이 88회 공개심사에 맞은 분야(1년에 한번 연말에 학부모 초청 공개심사 때 본인이 준비하는 품새, 호신술, 격파시범, 겨루기) 및 책임과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근무는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백호체육관 마루바닥에서 혼자 잠을 자면서 공개심사를 준비하였다. 그렇게 하여 88회 공개승급심사를 2000년 12월 29일(금) 오후 3시에 오마중학교 태권도실에서 치르게 되었다. 공개 심사 진행할 때 조금 실수(관원생들이 가족들 앞에서 긴장하여 실수한 것)가 있었지만 어린 관원생들이 진지하게 승급심사에 임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스럽고 마음이 편해졌으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공개 심사 준비하는 동안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결과에 대한 것에 만족했다. 이렇게 하여 고단한 2000년 한해를 넘기게 되었다.
2001년 새해가 밝아 왔다. 2001년 2월 여러 행사 치르고 설날연휴 보너스 10만원 받았다. 본인은 그때 보너스보다 진정으로 직원들을 배려하는 마음과 따뜻한 격려와 위로가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욕심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본인은 시골에서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속상했다. 본인이 그렇게 부당하게 일하며 적은 월급을 받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님께서는 백호관장이 본인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믿고 있었다. 연휴 끝나고 다시 백호체육관 작은 운동 공간(30평정도)과 한겨울에 기름난로(호흡기에 악 영향, 천식유발, 답답하고 탁한 실내공기 조성) 켜 놓은 채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름이 떨어지면 사범들이 번갈아 가며 기름을 사왔고 또한 한 겨울이나 평상시에 학원차량을 찬물로 백호체육관 앞 주차장에서 본인과 다른 사범이 물걸레 세차를 하였다.(백호관장이 시켜서 하게 됨)
5. 2001년 2월 1일(월) 개학하면서 수업시간은 6부재로 변경
※ 수업시간 (2시, 3시30분. 5시. 6시, 7시, 8시) 5시 이후 휴식시간 없음
※ 국, 공유일 근무일:
-3월 17(토)일 오전 11시~18(일)일 오전 8시까지 백호체육관에서 1박 2일 합숙훈련
-4월 14(토)일 오후 2시~15(일)일 오전 8시까지 백호체육관에서 1박 2일 합숙훈련
-5월 13(일)일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북한산 등산대회
-5월 27(일)일 고양시 태권도경연대회, 오전 7시~오후 6시까지 고양종합고등학교
-6월 2(토)일 오전 11시~6월(일)일 오전 8시까지 백호체육관에서 1박 2일 합숙훈련
-6월 6(수)일 현충일, 용인대 동문회장기 경연대회, 오전 8시~오후 7시까지
※ 근무시간
- 월: 오전 10시~밤 10시까지(12시간), 화~금: 오전 11시~밤 10시까지(11시간)
- 토: 오전 11시~오후 5시까지(대회 및 승품 심사 연습 때문에 출근)
2001년 2월도 근무 조건과 대우 변함이 없었고 만약 백호관장이 체육관에 나오지 않으면 본인은 오후 3시 30분 ~ 오후 9시까지 쉬지 않고 수업(오른쪽 시력 관계로 1종 보통면허 취득 못했음 그래서 백호체육관 15인승 승합차량 운행은 하지 못함, 이런 사항을 입사 전에 말함)지도만 하였고 이사범은 차량 운행만 하게 되었다. 만약 수업 중 상담전화(학생 또는 학부모)가 올 경우엔 상담에 대한 답변으로 수업이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 전화, 방문상담은 관원생들의 입관으로 연결되어 쉽게 전화를 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백호관장이 이런 사소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 해 주었던지 아니면 따로 차량운행 하는 분이 계셨다면 관원생들에게 덜 피해가 갔을 것이며 수업이 진행이 수월했을 것이다. (백호원장이 간간히 오후 3시~7시까지 전화를 받아 주고 그 후는 집으로 돌아감)
그리고 2001년 2월 초순에 백호관장은 관원생 입관을 더욱 증진(관원생은 170명 넘게 있는 상태)하기 위해서 2001년 2월 회의시간에 여러 제한(입관보너스, 200명 특별보너스 지급과 연장근무수당, 국, 공휴일에 대한 수당 지급, 퇴직금 언급 함)을 실행 할 것을 설명하였다.
첫 번째, 2001년 3월부터 입관 보너스와 관원이 200명 달성 시 특별 보너스 지급한다. 그리고 170명 기준으로 입관하면 교육비 7만원에서 각각 본인과 이사범에게 2만원 지급한다.(예 10명 입관이면, 보너스 20만원지급)란 시행 얘기를 하였다.
둘 번째, 근무조건 및 수당, 퇴직금 얘기, 승품심사 수당은 없으나, 국, 공유일 출근수당 및 근무시간외 연장근무수당과 퇴직금 지불한 다란 이 두 가지 말을 하였다.(그 후 입관 보너스는 지켜졌으나. 200명 특별보너스와 수당, 연장근무, 퇴직금에 대한 것은 지켜지지 않았음)
그래서 본인과 이사범은 동의를 했지만 설마(업무적 약속을 잘 이뤄지지 않음)란 생각을 들었다. 그런데 결과는 백호관장은 약속과 달리 행동을 하였다. 2002년 3월 월급날이 되었다. 입관 인원이 15명이 향상되어 기본월급+입관보너스 30만원(170→185명)을 2001년 3월 30일(금)에 지급 받았다. 이런 조건에서 잠시 이었지만 힘든 일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또한 2001년 4월 30일(월)에 기본월급과 10명(185명→195명)입관보너스 2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보너스 지급내용은 백호관장 생각과 우리들(본인과 이상범) 생각과 달랐다.
본인과 이사범의 입관보너스 생각은 관원 170명 기준(170명→185명에서 15명 입관되면 185명이 기준이 아니고 다시 170명이 기준이 된다. 그래서 4월 달 입관 보너스는 170명→195명 25명 입관한 만큼 보너스 계산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170명→185명, 170명→195명, 170→205명 주장)해서 입관보너스를 계산한 다란 생각 이였다. 그러나 백호관장의 보너스 지급 생각은 처음 시작할 때 170명이 기준인데 다음달 보너스 지급할 때는 전 달 입관인원이 또 다른 기준이 데서 계산한다(이런 식으로170명→185명, 185→195명, 195→205명 주장)고 말을 달리하셨다. 처음 시작 할 때 확실히 말을 했다면 본인과 이사범에게 입관보너스에 대한 혼란과 답답함을 해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서로가 사소한 의견 차이로 일어난 것 같아서 좋은 쪽으로 생각해 넘어가기로 했다.
그 후 백호관장은 200명 넘으면 특별보너스(금액은 정하지 않음)를 준다며 위로의 말을 했다. 2001년 5월이 시작되어서 북한산 등반 및 경연대회 준비로 더욱 바빠졌으며 그 달은 일요일도 출근하여 행사를 치러 휴식할 시간이 더 부족했다. 그렇게 한 사범은 차량운행 다른 사범은 수업지도로 지친 몸과 정신으로 일했으며 드디어 관원생이 200명이 넘게 되었다. 2001년 5월 30일(수)에 기본월급과 10명(205명)입관보너스 2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백호관장이 200명 넘으면 특별보너스를 지급한다고 했으나 아무런 설명과 조치가 없어 넘어 가버렸다.(연장근무 수당도 포함) 아무리 구두로 한 약속이라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본인과 이사범은 실망하였지만 좋게 생각하고 서로 위로하며 넘어가기로 했다.
2001년 6월 6일(수)에 용인대 태권도 경연 동문대회가 있었는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백호체육관에서 참가 할 종목은 단체 품새 및 태권로빅(태권도 에어로빅약자)이었는데 대회 이틀 남기고 백호관장이 보조운동(보조기구를 이용한 운동 및 운동에 필요한 보조행동)을 참가하란 지시를 내렸다. 본인보다 함께 근무하는 이사범이 그때 많이 힘들었을 거다.(대회 삼일 남겨두고 다른 종목을 작성하고 연습한다는 것이 무리한 요구였음) 그리고 사범들과 관원생들은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하는데, 대회전 날 백호원장이 수업과 경연대회 연습에 대한 많은 참견으로 스트레스를 이사범에게 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사범은 대회를 감정 폭발과 참가 못하겠다며 백호원장과 마찰이 있었다. 백호관장은 용인(용인대 태권도학과 동문회 임원이기 때문에 대회 준비로 인해 체육관에 없었음)에 있어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대회 날도 이사범과 백호원장은 마찰이 계속 되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백호원장은 평상시에 사범들의 업무와 지도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참견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백호원장은 사범들이 수업을 하는 동안에 뒤쪽에서 슬리퍼를 신고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사범들에게 잘못된 것을 지시) 체육관 발전과 더 나은 지도를 위해 그런 건 한편 이해하지만 최소한 서로가 규칙과 예절을 지켜줘야 즐겁게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대회를 마치고 회식자리에서 좋게 화해를 하여 이사범은 먼저 집으로 갔고 다른 사람들(본인 포함해서 백호원장 가족과 백호관장 친구 가족들)은 고양시 탄현동 백호관장 자택 부근에서 백호원장, 서동민사범(본인이 입사 하기전에 사범생활을 한 사범), 관장 친구 자녀들과 함께 또 다시 회식을 하게 되었다. 그 술자리에서 백호관장 친구와 자녀들 앞에서 본인에게 모욕적인 말(‘너 같은 놈들은 태권도 세계를 떠나야 한다.’ ‘필요 없는 존재다.’등)과 체육관내 근무 얘기를 사석에서 꼭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얘기를 하게 되면 체육관에서 얘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상황은 백호원장과 이사범이 마찰이 있었는데 본인은 잘못과 이유도 모른 채 그런 자리에서 모욕적인 말(백화관장이 본인에게 하는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백호원장은 당시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웃고 있었음)을 듣게 되어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다.
드디어 1년 동안 기다리던 사범이 2001년 6월 18(월)일에 정복인 여자사범(용인대 태권도학과 졸업 및 용인대 시범단 출신, 당시 36살 이하 정사범)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땐 정사범이 얼마나 오래 근무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는데 관원생들에게 잘해주며 적응도 잘하고 이사범 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더 열정적으로 근무와 수업을 하였다. 그리고 2001년 6월 29일(금)에 90만원(식대 10만원 포함)에서 100만원(식대 10만원 포함)으로 월급 인상되었다. 본인이 노력한 만큼 월급은 받지 못했지만 정사범과 수업을 함께 하고 나서부터 본인의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수업에 대한 보조 및 지도에 마음이 통하는 사범과 함께 근무하니 서로 흥이 나고 의욕이 생겼으나 열악한 근무조건 때문에 몸과 마음은 여전히 힘들었다. 이때부터 정사범(36살)과 이사범(33살) 관계에서 업무에 대한 마찰(이사범의 근무태만 때문)이 있기도 했다.
6. 2001년 7월 23일(월)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수업시간이 6부재로 변경
※ 수업시간:(오전 7시, 9시30분, 11시, 오후 2시 30분, 4시, 5시 30분) 휴식시간 있음
※ 국, 공유일 근무일: 없음
※근무시간: 오전 7시 ~ 오후 7시까지 (총 12시간 근무)
- 토: 오전 9시~오후 2시까지(대회 및 승품 심사 연습 때문에 출근)
이번 2001년 여름방도 2000년 여름 방학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7시까지 출근하였다. 2000년 여름 방학보다 육체적으론 더 힘들었지만 조금이나마 정신적으로는 덜 힘들었다. 왜냐하면 체육관에 가면 반갑게 인사하고 반겨주는 정사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과 정사범은 수업하는데 호흡이 잘 맞았다. 그리고 인생선배로 사범생활에 대한 격려와 배려도 많이 해주었기 때문에 정사범에 대한 신뢰가 한편으로 컸다. 이런 사항은 약 몇 개월 못 가서 과중한 업무 인해 서로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로인해 본인과 정 사범은 지쳐가 정신적으론 위안을 해줄 수 있었으나 육체적 피로와 업무를 줄이는데 도움이 못 되었기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 뒤로도 정신과 육체도 힘들어져 정사범은 더 이상 체력적으로 힘들어 퇴사(2002년 6월 29일 토요일)를 하고 정사범 개인 체육관 자리(신설)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본인과 정사범은 함께 잘 협조하고 도와가며 근무를 했지만 이사범은 계속된 지각과 근무태만 열의가 없는 수업(구령을 말없이 호루라기로 이용해서 한 시간 동안 수업 함)등 때문에 정사범이 잘못 된 행동에 대해 얘기를 했지만 그런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2001년 여름방학은 여러 행사를 정사범과 함께 치르면서 일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다. 정사범을 알게 된 것이 본인의 사회생활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7. 2001년 8월 27일(월)에 개학하면서 수업시간은 6부재에서 7부재로 변경
※ 수업시간:(2시, 3시30분, 4시30분, 5시30분, 6시30분, 7시30분, 8시 30분) 휴식 시간 없음, 9시30분에 입시체육(고등학교 3학년 태권도학과 지망생 3명)준비한 시기
※ 국, 공유일 근무일
-8월 10(토)일 오전 11시~11(일)일 오후 6시까지 1박 2일 연천 검은 띠 캠프
-9월 23(일) 오전 8시~오후 5시까지 승품단 심사, 고양종합고등학교 체육관
-10월 13(토)일 오후 2시~14(일)일 오전 8시까지 1박 2일 백호체육관에서 합숙훈련
-10월 28(일)일 오전 7시~오후 6시까지 고양시장기 태권도 경연대회 고양종합고등학교 체육관
※근무시간
-월: 오전 10시 ~ 오후 11시까지(13시간)
-화~금: 오전 11시 ~ 오후 11시까지(12시간)
-토: 오전 11시 ~ 오후 5시까지
위처럼 수업은 7부재(오후 2시에 시작하여 오후 9시30분까지 수업)였지만 실질적으로 수업은 8부재(오후 2시~오후 10시30분까지 수업)로 운영하였다. 왜냐하면 백호체육관 관원생들이 220명(입사 전 120명 → 이 시기 220명 상승 함)이 넘다 보니 각 수업시간 마다 운동 공간 부족한 현상이 많이 발생하였고, 시간이 늦을수록 운동하는 저학년 보다 고학년이 많았고, 오후 8시30분 수업시간에서 함께 운동한 고등학생들은 어린 관원생들과 실력 차이가 많아 수업하는 운동공간(백호체육관 평수가 30평정도) 부족현상(1시간 수업은 관원수가 20~30명 정도 수업, 40-50명 이상일 때도 있었음)이 더욱 심화되어 옥상에서 운동을 했지만 주민들의 불편 때문에 그것마저 할 수 없어 부득이 오후 9시30분부터 1시간 ~ 1시간 30분 동안 수업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용을 백호관장에게 보고하여 승인을 받고(수업해도 된다) 지도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소한 휴식시간도 없는 수업과 식사문제는 해결 못해 줘 저녁 식사는 먹을 시간이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밤 11시 넘어 퇴근하면서 정사범과 본인 주엽역(전철 일산선 그랜드백화점 앞)부근에서 떡볶이로 저녁식사를 대처를 하였다.
2001년 8월 27일 월요일부터 심야버스를 타고(고양시 일산 → 영등포 → 부천시 송내동) 집에 도착하면 새벽 2시가 넘게 되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어 소화 장애와 수면부족으로 인한 신경성 두통과 눈의 피로, 식욕감퇴, 체력저하와 장시간동안 서서 수업진행(백호체육관 바닥은 탄력 없는 마루바닥)과 반복된 운동 동작(백호관장은 ‘태권도사범은 말로 하는 직업이 아니고 몸으로 하는 직업이다’란 말을 함, 백호체육관 사범들은 각 시간마다 직접 시범을 보여야 했다. 특히 오후 8시30분 및 오후 9시 30분은 대학 입시 고등학생과 함께 겨루기 및 운동을 더욱 격렬하게 함)으로 인해 무릎에 점차 이상을 느꼈지만 괜찮아 질 줄 알고 참고 그냥 넘어가게 되었다. 이시기는 본인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시기였다.
2001년 8월 31일(금) 승급심사(한 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태권도에 관한 실기시험) 때였다. 본인과 정사범과 함께 심사를 계획하고 연습을 했지만 이사범은 왠지 모르게 연습을 건성으로 하였다. 그 결과는 이사범이 승급심사 진행하면서 나타났다. 승급심사는 2부재(오후 3시, 5시)로 하는데 1부는 이사범 2부는 본인이 지도했다.(1부 진행은 연습을 잘 안 해서인지 제대로 진행을 하지 못했고, 2부는 진행은 매끄럽게 승급심사를 보았다.) 이런 심사내용에 불만을 느낀 백호관장은 사범들을 질책하면서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본인은 아버지 생신으로 승급심사가 끝나고 바로 시골집으로 가게 되었다. 나중에 정사범과 통화 중에 듣게 되었는데 이사범이 본인 잘못으로 승급심사를 잘 못 보았다란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문제(이사범이 제대로 된 연습을 안 해서 승급심사를 잘못 보았는데 잘못을 본인에게 떠넘긴 말과 행동 때문) 때문에 정사범과 이사범이 그 자리(백호관장 앞)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정사범이 이사범에게 ‘왜 잘못 없는 장사범(본인)에게 책임을 떠 넘기냐. 이사범이 승급심사 연습을 잘 했으면 승급심사를 잘 보았을 것이다.’ 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백호관장은 2001년 9월 3일(월)에 출근할 때 시말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본인이 백호체육관에서 (2000년 4월 ~ 2001년 8월)1년 4개월 넘게 근무하면서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었지만 이번만은 어이가 없고 잘못도 없는데 시말서를 써야하니 깨끗하게 퇴사를 하는 것이 낳겠다 싶어 정사범과 상의를 하였다. 정사범 또한 그런 대우와 이사범과 함께 근무 할 바에 퇴사하겠다고 해 본인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2001년 9월 3일(월)에 출근하여 첫 사직서(백호체육관에 근무하면서)를 제출하고 미팅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도 이사범은 계속 잘못은 본인 때문이라는 말을 했고 이사범은 퇴사 의사는 없다고 말했다. 본인은 이사범이 그렇게 까지 말을 할지 몰랐다. 왜 본인 잘못인가, 정사범과 본인은 승급심사를 잘 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사범은 그렇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사범이 이사범에게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냐’와 근무태만(지각, 성의 없는 수업, 뒤에서 보조하는 행동이 없었음)얘기를 하였다. 이때 백호관장이 ‘책임을 누가 지겠냐?’고 물었다. 본인은 ‘제가 책임을 지고 퇴사를 하겠다.’라고 말을 했으나 백호관장은 ‘배짱이 좋다. 그러나 일주일의 생각할 시간을 주고 그 다음에 다시 얘기 한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란 말을 했다.(그 당시 이상관사범은 고용보험에 가입된 상태였다. 그리고 정사범 입사 전 백호관장이 정사범에게 ‘이사범이 금전적, 수업에 문제가 많다.’ 란 설명과 이사범을 퇴사를 원했으나 근거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상태이었다고 함. 또한 본인과 정사범에게 2002년 4월회의 시간에 고용보험을 가입하려면 보험료를 50대 50으로 분담하자고 해 본인과 정사범은 백호체육관에 공동 사업주가 아니기 때문에 사양하였다)
그래서 본인과 다른 사범들은 일주일 동안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있는 동안 열심히 일하기로 했지만 이사범은 여전히 변한 게 없이 근무태만이었다. 이사범은 운동보조는 또한 없었으며 정사범과 본인은 오후 9시 30분 수업시간을 지도했으나 이사범은 먼저 퇴근했다. 가정이 있어서 먼저 퇴근하는 것은 이해했지만 근무태만(지각, 열의 없는 수업)은 바꿔지지 않았다. 2001년 9월 10일(월) 미팅시간에 본인 다시 퇴사를 하겠다고 말을 했고 정사범 또한 장사범(본인) 퇴사를 한다면 이사범과 근무를 못하겠다며 퇴사를 하겠다. 란 말을 하였다. 그 후 백호관장은 본인에게 ‘정사범과 일을 하면 퇴사를 안 하겠냐’란 질문에 본인을 ‘그렇게 함께 도와주고 격려와 고통을 나누고 수업보조(뒤에서 수업을 도와주는 행동)해 줄 수 있는 사범이 있다면 함께 근무 할 수 있다.’란 의사를 밝혔다. 정사범에게도 똑같은 질문에 답변이 본인과 근무하면 퇴사를 안 하겠다 라며 대답을 하였다.
그래서 이사범이 퇴사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사범은 사범자리(새로운 직장)가 나올 때까지 근무하기로 하였다. 이사범이 생각지도 못하게 퇴사하게 되어 본인으로선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근무를 잘했으면 그런 일까지 없었을 텐데 다른 곳에 가서는 열심히 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혹시나 이사범이 사고를 일으키고 퇴사 할까봐 백호원장은 많이 노심초사하였다. 그 뒤 2001년 9월 11일(화)에 영등포에 위치한 체육관에 사범이 필요해 이사범은 그쪽에서 근무하기로 하고 백호체육관을 퇴사(200년 9월 11일 화요일 퇴사 당시 관원생은 240명 전후이었음) 하였다.
갑작스럽게 이사범이 퇴사하여 차량운행 및 수업에 차질이 있었다. 예전보다 많이 늘어난 관원생(120명 → 240명 상승)과 수업시간 때문에 수업 할 때 보조사범(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보조할 사범이 없으면 앞에서 밝혔듯(휴식 시간 없이 한 사범은 수업만, 다른 사범은 차량운행) 수업진행이 어려웠다. 그래서 본인과 정사범은 서로 의지하며 수업을 했지만 두 사람이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와 수업은 벅찼다. 백호관장이 차량운행을 도와주면 1시간씩 교대하며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백호관장이 차량운행을 도와주지 않으면 오후 2시에 시작해서 오후 10시30분까지 정사범은 차량운행 본인은 수업만 했다. 그렇게 본인은 출근해서 수업을 할 때 앉지 못하고 마루바닥에서 서있는 자세로 한 시간 내내 수업보조 및 지도(하루 평균 11시간 넘게 서 있었음)를 하고 나면 휴식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시간조차도 없었다.
또한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계속하여 근무는 강행되었다. 아마 정상인 사람도 하루에 수업을 8부재(아침 10시 및 11시에 출근하여 오후부터 2시, 3시30분, 4시30분, 5시30분, 6시30분, 7시30분, 8시 30분, 9시 30분, 이렇게 휴식시간 없이 12시간 이상 근무)를 앉지 않고 서있는 상태에서 각 수업마다 1시간 동안 함께 뛰고, 소리 지르고(특히 레크리에이션 할 때 더 열량 소모가 큼)나면 기운이 없고 녹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장기적으로 계속하면 어떤 누구라도 질병이 발생 할 것이다. 본인은 이런 생활을 반복하며 계속 장기간 근무를 하였다. 그래서 근무조건 개선과 절대적으로 사범 한 사람 더 꼭 필요했다.
2001년 10월 중순 바라던 젊은 국관호사범(당시 27살 용인대 태권도학과 졸업, 이하 국사범)이 들어오게 되었다. 미팅 시간에 여러 얘기를 나누고 이때부터 본인은 수석사범(사범자리에서 제일 윗자리)이란 직위를 가지게 되었다. 부담은 갔지만 잘 할 수 있다는 신념은 있었다. 그러나 말뿐인 수석 사범이지 수석 사범이란 대우(다른 체육관에서 관원생들이 240명 이상이면 월급을 약 170~200만원 수준이고, 여러 보너스까지 혜택 있었다. 그러나 본인 월급은 식대포함 100만원 이였음)는 전혀 없었다. 불만 있었지만 겉으로 표현이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사범 3명(정사범, 국사범, 본인)은 분위기 좋게 수업을 하고 도와주며 재미있게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본인과 국사범은 같은 지역(국사범은 인천시 부평역, 본인은 부천시 송내역)에 살고 있어서 퇴근하여 심야버스를 함께 타고 많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귀가하게 되었다. 국사범과는 동감(27세)이라서 인지 빨리 친해질 수 있었고 대화 또한 잘 통했다. 국사범 들어온 지 일주일 뒤에 고양시장기 태권도 경연대회(2001년 10월 28일 일요일)가 있었다. 국사범은 이사범과 달리 서로 도와주며 경연대회 준비 및 대회장(시험장소)에서 연락을 잘 협조(본인은 다른 곳에서 대기하며 연습을 하고 있었고 국사범은 경기장에서 백호체육관 참가순서를 잘 연락했고 협조 또한 좋았다. 하지만 퇴사한 이사범은 그런 행동보다 경기관람을 열중함)하여 대회가 빨리 진행될 수 있었다. 그 당시 백호체육관에서는 태권로빅, 격파, 개인, 단체 품새를 참가했었다. 격파나 품새는 순위에 들었지만 태권로빅은 다른 체육관 보다 잘 했는데도 순위에 들지 못하였다. 이런 사실을 대회에 참가한 백호체육관 학부모들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 와중에 백호원장은 참가학생 및 학부모들에게 ‘백호체육관은 꼴찌에서 2번째 했다’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본인과 다른 사범들에게 계속 된 확인과 대회가 끝날 무렵까지 결과를 알기 위해서 기다린 학부들도 있었다. 본인과 다른 사범들은 백호원장이 성의 없이 한 말 때문(관원생 및 학부모에게)에 그 말을 수습하려고 우리 사범들은 부단히 노력한 것이 기억이 난다.
고양시장기 태권도경연대회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돌아오면서 국사범은 백호관장이 경연대회 전후 말한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예를 들면 관장은 사범들한테 ‘수고했다는 말보단’, ‘너희들이 준비한 게 뭐야?’, ‘그렇게 밖에 못하냐?’, ‘내가 쪽팔려서 협회에 못나가겠다.’는 등의 말로 사범들의 의욕을 저하 시켰다.) 또한 국사범은 백호관장 말에 대해 이해가 안가며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근무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점차 지나면서 백호원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얘기를 하였다. 본인은 국사범에게 좀 참으면 견딜 수 있더란 말과 사범들끼리 열심히 일자고 위로 해주었다.
또한 2001년 10월 달은 본인과 사범들의 노력과 열심히 일한 결실이 입관으로 나타나 관원이 250명이 넘었고 그래서 인지 2001년 11월부터 저녁 간식이 제공(김밥 및 어묵)이 되었다. 하지만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시간과 휴식이 부족(사범 3명중에 한 사람은 차량운행, 다른 사범은 수업 때문에 돌아가며 간식을 먹었음, 식사시간은 약 3-4분 정도 소유)하였다. 그리고 본인 월급(100만원)이 적당하지 않다고 정사범의 건의로 2001년 10월 30(화)에 월급이 20만원 인상되어 120만원(식대 10만원 포함)을 받았다.(몇 개월 지나 알게 되었는데 월급 인상은 국사범 월급이 130만원 지급하기로 했기 때문에 먼저 본인을 월급 인상 준 것을 알게 되었음) 이제 노력 한 만큼 월급을 받는 느낌이었지만 타 체육관과 근무조건 및 수석사범 대우 월급을 비교하면 부족하였다. 그리고 백호관장이 먼저 월급 인상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고 정사범 건의로 인상해 주워서 정사범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렇게 월급을 받으면서 육체적으로 지치고 힘들었지만 본인은 더욱 열정적으로 근무를 하였다.
2001년 11월이 들어와 퇴근시간이 더욱 늦어지고 집에서 취침 시간보다 100회 공개승급심사 준비(백호체육관 8주년 기념 학부모 및 가족 초청하는 행사 2001년 12월 22일 토요일에 시행)로 체육관에서 잠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100회 공개승급심사 준비 때문에 수석사범 위치의 본인은 다른 사범보다 더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것에 심리적으로 부담이 많았고 소화불량(위의 통증, 설사)까지 발생해 더욱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래도 사범 3명(정사범, 국사범, 본인)은 심사를 더욱 잘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사범이 지각이 많아 졌고 근무하기 힘들어했다. 이때 또한 백호원장과 국사범이 마찰(수업에 대한 간섭 및 휴식 시간 없는 관계와 백호체육관 학원 차를 타고 오는 관원이 많았기 때문에 차량운행은 두 대로 운행해야 했는데 잘 도와주지 않았음 그리고 백호원장이 차량운행을 도와주지 전에는 정사범 개인차량으로 관원생들을 태우고 체육관에 왔지만 백호관장은 기름 값을 제공하지 않았음)이 있었다.(2년 4개월 근무하면서 새로운 사범들이 오면 매번 백호원장과 업무에 대한 마찰이 있었다.) 국사범은 백호원장에게 직선적으로 말로 표현(수업을 간섭하지 말고 백호원장의 개인 차량키만 주고 집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잘못이지만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렇게 까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국사범이 말을 잘 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 백호원장은 사범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보다 더욱 불편하게 해서 사범들에게 직장 스트레스를 증진시키고 업무에 활력을 떨어지게 하였다. 이 계기로 백호원장은 심기가 불편해서 인지 체육관에 나오지 않았다. 백호원장이 체육관에 나오지 않아서 우리들(정사범, 국사범, 본인)의 휴식 공간 등이 더욱 늘어난 느낌이고 마음이 편해졌다. 솔직히 타 체육관 원장들은 사범들에게 부담과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 가족이 특정한 일이 없으면 체육관에 방문하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수업 할 수 있게 분위기 조성 및 간식 등을 만들어 주는데 백호원장에게선 그런 모습은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또한 자녀들까지 백호체육관에 나와 놀이 공간처럼 사무실을 많이 혼란스럽게 하고 돌아간다. 자녀들이 놀고 간 뒤 사범들이 청소를 했을 시에는 괜찮았지만 그렇지 못 할 경우 사무실로 학부모들이 상담문의 하러 오는 경우는 정말 난감했다. 이런 사소한 행동이 함께 근무하는 사범들에게 불편과 직장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한번이나 생각해보았는지 궁금하다. 백호체육관은 관장이나 원장의 개인 소유지만 직원(사범들) 또한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재산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아끼고 보살펴야 하는데 백호관장이나 백호원장에서는 그런 것이 정말 부족한 것 같았다.
2001년 11월, 12월 100회 공개승급심사 준비하기도 무척 바뿐시기에 백호관장은 용인대 동문 겨울 체육복 판매 사업(2001년 10월 ~ 12월)으로 본인과 다른 사범들에게 창고 청소와 박스 정리, 택배 전달하기 위해 사범이 수업을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것 또한 사범들에겐 스트레스를 받게 하였고, 부담스럽게 작용했다. 이 때 창고정리하고 박스를 나를 때 본인은 망막박리 수술(99년 11월에 눈 속 망막에 구멍이 생겨 수술)때문에 조마조마하면서 무거운 박스를 날랐다. 망막박리 환자들에게는 무거운 것을 드는 행동은 금물이었다. 이런 말을 백호관장에게 말을 했는데 이해를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조심해서 박스를 날랐으며 본인 심정을 못 이해하는 백호관장에게 섭섭함이 있었다.
2001년 12월에 들어와 더욱 100회 공개승급심사 준비로 집에 들어가는 일보다 백호체육관에서 잠자는 생활이 많아졌다. 만약 새벽 1시~2시경 퇴근하게 되면 정사범 승용차로 부천까지 되려다 주었다. 본인과 다른 사범들은 모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고 체력적으로도 힘이 들었다. 근무한 지 1개월이 좀 넘었는데 국사범은 계속된 지각과 일에 대한 실증과 불만으로 더 이상 근무 못하겠다며 본인에게 호소하였다. 이 때부터 본인과 정사범에게 점차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본인과 정사범은 회식자리를 마련하여 마지막까지 잘 100회 공개승급심사 준비하자고 국사범을 위로 해주었다. 이렇게 잘 해결되어 공개 승급심사 1주일 남기고 본인과 국사범은 백호체육관에서 자고 먹는 생활을 하며 100회 공개 심사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오랜 준비과정(200년 10월부터 2개월 동안 준비, 심사 전 서동민 사범을 만나 여러 준비 얘기를 하였다. 그 자리에서 서동민 사범은 정말 꼼꼼하게 잘 준비했다란 말을 함)과 힘들게 연습한 사범들과 관원생들의 모습을 가족에게 소개할 좋은 결심의 날 2001년 12월 22일(토) 오후 3시(일산 홀트학교에서 시행)가 다가 왔다. 먼저 홀트학교에 가서 준비하고 심사를 보게 되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관원생들은 가족 앞에서 진지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임했으며 진행도 깨끗하게 잘 되었다. 그러나 열심히 준비한 백호체육관 시범단 관원생들이 태권도시범을 못 보인 것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하여 좋은 결말로 100회 공개승급심사를 마치고 저녁 회식자리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백호관장 말이 ‘다른 체육관 승급심사와 비교가 안 되게 정말 잘했다’라며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아쉽게 칭찬을 다른 대회 때도 해주었다면 사범들이 정신적으로 힘들게 생활을 안 했을 것이다. (회식자리에서 백호관장이 본인 대학동기 언더그라운드 가수 김구봉에게도 ‘장사범 때문에 밥 먹고 살고 있으며 아이들을 잘 지도하고 체육관에 꼭 필요한 사범이 다란 칭찬을 함)
또한 약속대로 승급심사 및 동복판매에 대한 보너스(20만원)를 지급 받았다. 하지만 사범들이 노력(관원생 향상, 장시간 근무)하고 동복판매사업(겨울 태권도 체육복)에 도와준 것에 대한 대가가 작아 보였다. 그 30평(백호체육관 면적)이 조금 넘은 작은 장소와 백호체육관 주변 경쟁 상대 8개 체육관(경희대, 상록, 한국 , 월드, 태극, 새 경희, 정무, 서교체육관)이 많은 가운데 관원생들이 270명이 넘었다는 것은 본인과 다른 사범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지도했는가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백호관장은 사범들이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백호체육관 위치가 좋아서 입관이 많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체육관 입지조건이 좋아도 사범들이 지도를 못하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누가 입관(99년 경연대회장에서 박종환사범이 학부모에게 욕설을 해 관원생이 180명에서 120명 수준으로 감소된 일이 상기된다. 그 후 2000년부터 본인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 함)을 하겠는가? 그런 와중에서 300명을 목표로 입관 달성하자란 말까지 나온 시기였다. 그러나 본인과 다른 사범들은 몸이 힘들어 예전과 달리 그런 의욕이 사라졌고 노력한 만큼 대가와 돌아오는 것 부족했다. 그리고 백호관장은 사범들에게 ‘항상 프로답게 행동하란 말’을 자주 했으나 정장 백호관장은 사범들에게 프로대우를 하지 않고 아무추어 대우를 하였다.
8. 2001년 12월 24일(월) 겨울방학이 되면서 수업시간은 7부재로 변경.
※ 수업시간(오전 9시, 10시30분, 오후 2시, 3시30분, 5시, 6시, 7시) 5시 이후 휴식시간 없음
※ 국, 공유일 근무일: 없음
※ 근무시간
-오전 9시 ~ 오후 8시 30분 (총 근무시간 11시간 30분)
-토: 오전 10시 ~ 오후 2시까지(대회 및 승품 심사 연습)
본인과 다른 사범들은 100회 공개 승급 심사(2001년 12월 22일 토요일)를 마치고 충분한 휴식 없이 무리한 업무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계속하여 수업을 2001년 12월 24(월)일부터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얼굴 상태(건조한 피부, 얼굴에 종기 등)가 말이 아니었다. 사범들은 피로 때문에 며칠 동안 몸살로 고생을 하였고 더욱이 국사범은 이러한 증상이 심해서 퇴근하면서 본인이 ‘힘내라 3개월 정도만 참으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될 것이다’라는 위로가 이젠 한계에 도달하여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점차 국사범은 몸과 마음이 지쳐 간다고 호소했고 ‘천안 박사체육관에 근무했을 때가 편했고 대우가 좋았다’란 설명을 해주었다. 본인은 2년 가까이 백호체육관에서 힘들게 참고 근무했는데 국사범이 이러한 상황에 적응을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본인 또한 몸과 마음이 무척 힘들었지만 ‘본인 체육관 경영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생각에 참고 견디었지만 그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결국엔 참고 견디는 것이 몸속에 질병(망막박리, 무릎통증, 전립선염, 이명, 돌발성 난청 등)을 키우게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2001년을 마무리하고 2002년 월드컵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2년 첫 행사로서 스키 캠프를 2002년 1월 17일(목)~19일(금)까지 백호관장과 가족, 정사범이 참석했고 본인과 국사범은 승품, 단 심사(국기원 발행 태권도 품, 단 심사, 2002년 1월 19일 토요일에 시행)연습과 스키캠프 참석 못한 관원생들을 수업지도 때문에 참석을 못하였다. 이때부터 국사범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이상하게 행동하였다. 2002년 1월 17일(목), 18일(금) 출근(겨울방학 첫 수업은 오전 9시라서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함)을 오전 10시 가깝게 출근하였고, 수업은 제대(수련계획표 대로 하지안고 얘기 위주로 수업)로 하지 않았다. 본인이 ‘왜 그러냐. 이유가 뭐냐 물었더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 부당하게 대우받으며 노동하는 체육관이 어디 있냐. 그리고 고생하면 뭐하냐. 대가가 없는데 언제 돈을 벌 수 있냐.’라며 대답을 하고 퇴사를 하겠다고 하였다. 본인 그때 국사범이 백호관장에게 서운한 면(처음 스키캠프를 국사범이 가기로 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스키캠프 전 백호관장은 도저히 국사범을 못 믿겠다며, 정사범이 가기로 다시 결정 한 점과 여러 근무상황 등)이 있어서 그렇게 얘기한 줄 알았다.
그러나 2002년 1월 19일(토)에 승품, 단심사가 오후 2시에 고양종합고등학교에서 시작(차량운행이 꼭 필요했음)하는데 국사범은 오후 1시가 넘어서도 출근하지 않는 것이었다. 본인은 스키장에 있는 정사범과 상의한 후 시험을 볼 학생들과 전철을 타고 고양종합고등학교(승품, 단 심사장소, 차량으로 20분 정도 소유거리)에 가려고 했다. 그때 마침 오후 1시 20분 넘어 국사범이 출근해 간신히 그곳에 도착하여 심사를 치렀다. 승, 품단 심사를 마치고 백호체육관에 돌아와 정리를 하면서 다시 얘기를 해보았지만 국사범은 200년 1월 21일(월)부터 체육관을 안 나오겠다며 다시 한번 말을 했다. 그리고 본인에게 ‘그렇게 열심히 일 해주면 뭐 하냐, 월급도 작고 고향 선배이지만 뭐 도와주는 것 없이 고생만 시키는데 그렇게 까지 열성적으로 일하지 말고 그만 두어라’ 면서 비꼬듯이 얘기하였다.(나중에 국사범이 말 한 것이 사실로 나타 나였다.)
또 자기는 월급을 150만원을 받는다고 설명해주었다. 본인은 장난하지 마라 백호관장은 그럴 분이 아니다. 왜 거짓말을 하느냐란 말에 국사범은 ‘넌 속고만 살았냐. 그리고 바보냐 하면서 계속하여 월급을 150만원을 받는다고 강조’를 한 다음 퇴근하였다. 본인 바로 정사범과 연락을 취했는데 정사범 또한 황당하다며 국사범이 거짓말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날 저녁에 스키장에 돌아온 정사범과 다시금 얘기를 했지만 우리들의 결론은 국사범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판단했다. 백호관장이 설마 그럴 분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2002년 1월 21일(월)에 되었는데 역시 국사범은 출근하지 않고 핸드폰 통화도 안 되었다. 그 다음날 1월 22일(화)요일에 오전 11시 넘어서 국사범은 출근했지만 수업은 안하고 백호관장과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국사범은 잠시 나와 있다가 백호관장에게 무언가를 받고(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월급지급에 대한 각서였다.) 아무 말 없이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오전 10시 30분 수업(겨울방학기간에 오전 수업이 있음)이 마치고 백호관장, 정사범과 함께 점심식사 도중에 국사범 얘기가 나왔다. 백호관장이 먼저 국사범에 대한 얘기를 하였다. 그때 종이는 월급에 관련된 각서를 써줬다. 그리고 국사범이 퇴직금 요구했는데, 백호관장은 퇴직금을 6개월이 지나야 지급하는 데 국사범은 근무가 3개월도 안 되어 지급 못한 다란 얘기를 했다. 그 뒤로 우리가 예상한 월급 얘기가 언급되었다. ‘처음 국사범이 들어 올 때 수석사범 자리와 월급을 150만원을 주기로 하고 데려왔는데 첫 달 월급은 130만원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본인과 비교하니 수업지도 실력과 관원생 관리면에서 본인보다 여러 조건이 부족해서 110만원을 주었다. 그래서 본인을 수석사범 자리에 올리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말을 들은 정사범과 본인은 무척이나 당황하였고 정말로 국사범이 말한 것이 진실이었다는 점에 대해 놀랐으며 그때 본인은 더 많은 충격을 받았다. 그 뒤 백호관장은 말을 실수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빨리 수습 하려했지만 그렇게 안됐다.
본인은 그때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배신감이라 할까? 백호체육관에 근무하면서 마음속으로 불평이 쏟아졌지만 이렇다 할 불평 (월급인상과, 저녁 식사제공, 업무로 인해 늦게 퇴근하면 교통비 문제, 근무조건 개선 요구 등)없이 묵묵히 헌신적으로 근무를 했었다. 그러나 믿었던 백호관장이 본인에게 상처받는 행동을 하다니 정말 힘들게 노력하고 관원생 인원도 많이 상승(입사 초기 120명에서 이 시기 2002년 1월 260명으로 상승시킴)시켰으며 식사도 제대로 해결(타 체육관에서는 점심, 저녁 모두 제공, 그러나 백호체육관에서는 제공하지 않았으며 연속된 수업 때문에 저녁 먹을 시간 없음)하지 못하고 본인 가족 일보다 체육관 일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체육관 발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담았건만 돌아오는 것은 상처와 배신감 이어서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이때 느낌은 본인을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퇴사 후 아무런 보상도 없었고, 과중한 업무로 발생한 질병에 대한 책임 회피도 하였다.)
그 후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정사범과 간단한 얘기(국사범이 말한 얘기)를 나누고 체육관에 돌아왔다. 정사범은 바로 차량운행 때문에 나갔고 본인은 가슴과 속이 답답해서 화장실로 가서 다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몇 개월 근무 안한 국사범이 본인과 정사범 보다 믿음이 갔는지 모르겠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그리고 월급 결정은 백호관장이 하지만 함께 근무를 하고 있는 사범들에게 최소한 능력저하 되지 않게 했어야 했고 말뿐인 수석사범 본인에게 미리 얘기했으면 이렇게 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과 정사범을 가장 분노했던 것은 백호관장이 정당하게 월급을 얼마 준다는 말을 못했느냐는 것과 그런 얘기를 본인과 정사범에게 비밀로 해라란 말을 국사범에게 지시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국사범과 퇴근하면서 근무에 대한 얘기 및 본인 월급이 얼마란 얘기를 하였는데 국사범이 속으로 얼마나 본인을 비웃었을까 생각하면 더욱 참지 못하게 했고 고생하면서 이룩한 것(백호체육관 나쁜 이미지 개선과 관원 상승)이 모두 허사였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그때 본인은 이용당한 기분이 들었고 얼마나 억울했는지 계속 눈물만 나오기 시작했으며 점심식사 한 것이 소화가 안 되어 구토까지 나왔다. 그렇게 하여 화장실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백호관장과 대화를 시도하기로 하였다.
정사범이 차량운행을 마친 후 함께 그런(국사범 월급내용) 얘기를 백호관장에게 말을 했지만 백호관장은 계속해서 회피했으며 잘못이 없다란 답변(‘왜 그런 내용을 니들에게 하냐.)을 해 본인 그 자리에서 이젠 믿음이 없어졌다란 생각이 들어 /이런 상황에선 수업을 못하겠고 더 이상 근무 못 하겠다 판단하여 사직하겠다고 말‘을 했다. 백호관장은 ’저녁에 다시 말을 하자‘며 본인과 대화를 피했다. 그리고 백호원장이 본인과 정사범에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백호원장과는 대화를 하고 싶지(그때 본인은 백호원장에게 백호관장하고만 대화를 하겠다란 말을 했음) 않았다. 그래서인지 백호원장은 기분이 안좋아보였다. 이것 때문인지 그날 이후 저녁부터 간식을 1주일동안 시켜주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 되어 다시 백호관장에게 본인은 변함없이 퇴사를 하겠다란 말을 전달했다. 그때 백호관장은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했는데 본인은 ‘3일 여유를 달라 요구했지만’ 백호관장은 ‘안된다. 내일 다시 얘기 해 달라’란 말하였다. 정사범과 함께 퇴근하면서 얘기를 했지만 본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여 친형과 상의를 하고 싶었지만 형 또한 힘든 생활이었기 때문에 짐을 주기 싫었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본인 혼자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많은 생각을 정리하여 다음날 2002년 1월 23일(수)에 출근하여 수업을 마치고 저녁때 백호관장과 다시 대화를 했다.
그때 다시 퇴사의사를 밝히고 만약 근무하게 되면 월급을 인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정사범은 저녁식사 문제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본인은 월급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란 의문점이 가지고 월급을 170만원을 요구했다. 그런데 쉽게 백호관장은 월급 인상을 응했다. 그러나 월급은 17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조정되었다. 정사범은 100만원에서 120만원으로 인상되고 2002년 3월 월급부터 인상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 기간에 본인 백호체육관에 확실히 필요한 존재인가(지난 2002년 신정 전에 관원생 송한슬, 이경환, 이용호가 새벽까지 귀가하지 않아서 본인 친구 김대동과 함께 일산에 가서 행방을 알아보게 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PC방에 있어서 늦게 귀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 친구 김대동과 백호관장이 함께 술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백호관장이 ‘본인 때문에 밥 먹고 산다.’란 말을 하였다. 또한 용인대 동문체육관 모임 자리에서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음, 그리고 2002년 6월 23일 백호관장 어머니 칠순 잔치에 본인과 본인친구 이희철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위와 비슷한 말을 하였음)와 능력(다른 체육관 사범들보다 지도력이 뛰어나다고 다른 체육관장들이 간간히 말을 함)을 금전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대우와 월급인상을 더 좋은 일에서 인상해 주었다면 백호관장에게 좋은 이미지가 남게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였다.
또 다시 사범 2명(본인과 정사범)이 수업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겨울방학이라서 제자들(고3 수업생)이 가끔 수업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계속 수업을 할 수 있냐.’ 란 말을 했다. 그리고 1시간 ~ 2시간 운동은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뒤에서 서서 수업보조 하다보니 무릎이 뻑뻑하고 무리가 간다고 호소했다. 제자들은 본인과 정사범이 이렇게 힘들게 수업하는 줄 몰랐다며 위로 말을 해주었다. 늦게까지 수업을 하고 고교 3학년 입시생들을 위해서 입시체육(체대 및 태권도학과에서 필요한 기초체력운동과 태권도 발차기, 겨루기, 품새교육)준비해 준 결과 2002년 12월에 송한슬(용인대: 태권도학과), 2003년 1월에 최종천(전남과학대: 태권도학과), 조용기(전남과학대: 경호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이런 계기 때문인지 새 학기에는 오후 9시30분은 중, 고등부를 위한 수업시간이 되어 수련시간에 포함되었다.
9. 2002년 1월 28일(월) 개학하면서 수업시간은 8부재로 변경
※ 수업시간(오후 2시, 3시30분, 4시30분, 5시30분, 6시30분, 7시30분, 8시 30분, 9시30분) 휴식시간 없음
※ 국, 공유일 근무일:
-4월 20(토)일 오후 2시~21(일)일 오전 6시까지 1박 2일 연천 캠프
-4월 28(일)일 오전 7시~오후 6시까지 북한산 등반대회
※ 근무시간
-월: 오전 10시 ~ 오후 11까지(13시간 근무)
-화~금: 오전 11시 ~ 오후 11시까지(12시간 근무)
-토: 오전 11시 ~ 오후 5시까지(대회 및 승품 심사 연습)
2002년 2월이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본인과 정사범은 계속해서 사범 채용을 부탁했으나 사범 채용은 잘 안되었다. 약 6개월(2002년 1월 중순~6월 중순까지)정도 본인은 수업만 정사범은 차량운행을 하였다. 백호관장이 차량운행을 일주일에 두세 차례 도와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욱 많았다. 그 뒤 4월 말경에 운전기사가 들어와 오후 3시 30분 ~ 7시 30분까지 운행하고 그 나머지는 정사범이 운행을 하였다.(수업에는 큰 도움이 못됨, 휴식시간이 없었기 때문) 그리고 2002년 2월 승급심사(이론승급심사를 태권도관련 된 상식문제 필기시험)때 백호관장에게 바라는 글 란에 초등학교 6학년 김소영이 쓴 글이 생각난다. ‘관장님께서는 저희들 앞에서 사범들을 혼내지 마세요.’ 란 글을 보고 백호관장도 느끼는 점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그런 모습이 나쁘다(수업 도중 사범들에게 반말로 ‘장사범, 정사범 그게 뭐야, 그렇게 하면 되겠어, 똑바로 해 답답하다.’ 등으로 수업에 대한 지적 함)고 느껴 글을 썼을 것이다. 본인과 정사범은 관원생 앞에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수업 중에는 존칭으로 사범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예의지만 백호관장은 그런 배려가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본인과 정사범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범 한명을 더 원했지만 채용이 안 되어 수업과 차량 운행을 하는 것이 계속해서 강행되었다. 그런 와중에 2002년 3월 들어 교육비(태권도 월 수강료)가 기존 7만원에서 8만원으로 인상되었다. 예상대로 관원이 퇴관 되었다. 백호관장은 이런 퇴관된 관원생에 대해서 잘못이 본인과 정사범에게 있다고 질타를 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를 질책하는 것일까? 솔직히 우리 사범들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교육비가 인상되면 일반가정에선 금전적으로 학원비가 부담되어 관원생을 퇴관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교육비 인상으로 백호관장은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지 않았는가?(당시 관원 250명 기준으로 월 교육비가 대략 이천만원 들어왔을 것이다. 교육비 미납 관원생은 없었음)
또한 이 시기에는 국사범 퇴사 때 약속한 월급인상을 2002년 3월 29일(금)에 12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인상되었고 정사범은 100만원에서 120만원으로 이상 되었다. 월급은 인상되었지만 몸과 마음의 고통은 여전했다. 또한 2002년 2, 3월 동안 수업을 하는데 전보다 애로사항(앞서 언급)이 많았다. 부족한 운동공간과 조명의 밝기가 어두워 눈이 침침하고 쉽게 피로와 충혈, 안구건조 현상이 왔다.(백호관장은 체육관 기자재 등 본인과 정사범의 사비를 들여 사와 고치게 하고 영수증 제출하면 그 금액을 지급 함), 그리고 휴식을 취할 시간조차(수업과 수업사이에 휴식시간 없음)없었다. 하루 평균 근무가 12시간 이상(잠자는 것 빼고 거의 백호체육관에서 생활) 되었다. 휴식이 있다면 오후 2시 ~ 3시까지 수업을 마치고 30분 휴식 시간이 있지만 이때는 사무적 업무 때문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으며 그 다음 3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휴식 시간 없이 계속 반복된 수업을 해야 했고 매번 수업을 마치면 기력이 없고 몸이 피곤하여 체력 소모가 빨리 왔다.
본인이 입사(2000년 4월 3일)이후 해온 대부분의 수업은 발, 손, 목소리, 몸 전체를 이용한 근무였기에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눈과 무릎 등에 통증을 느껴 동료 사범에게 호소를 하곤 하였다. 그리고 정사범은 무리한 차량운행으로 인해 허리 통증을 느껴서 한의원에서 침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같은 근무조건 속에서 본인의 무릎에 통증을 느껴 아무리 더운 물 찜질과 파스를 이용해서 치료를 해봤지만 통증이 호전 없어 병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무릎 통증 발병 시기와 치료기간은 2000년 9월(이때부터 수업간격 휴식시간 없고 연속적으로 서있는 자세로 근무 시작) ~ 2003년 7월(현재 국산 비비테이핑으로 치료 및 파스치료)까지 무릎 치료를 하였다. 원인은 양쪽 무릎 밑에 통증과 뻐근함, 무릎에 붓기와 서 있는 자세가 힘든 현상이 생기면서부터 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24시간 중에서 식사시간 이 외엔 계속 서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2000년 9월부터 2002년 2월까지 통증이 있었지만 참고 견딜만해 파스와 더운물 찜질로 대처하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 후 2002년 3월경 무리한 운동과 근무로 인해 통증을 심하게 느껴 호소한 것을 동료 정사범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뒤 2002년 3월 중순에 백호관장에게 근무 조건을 개선해 달라 요구와 무릎 통증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개인체육관에서도 산재를 받을 수 있냐 란 질문하였다. 백호관장은 받을 수 있다란 말을 해서 그럼 본인 산재를 받게 해달고 부탁했지만 백호관장은 이를 묵인해 버렸다.
그렇게 통증은 2002년 4월에 들어와 더욱 심하고 무릎이 붓기(무릎이 부어오름)때문에 딱딱한 마루바닥에서 서 있는 자세로 근무하기 힘들었고 걷는 것까지 지장을 주었다. 그래서 2002년 4월 22일(월)에 연세정형외과에서 검사(X-ray)와 진찰을 받아 본 결과 ‘슬관절염(슬개건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의사 소견이 딱딱한 바닥(백호체육관은 탄력 없는 딱딱한 마루바닥)에서 장기간 반복적인 운동동작과 근무 때문에 무릎에 스트레스를 받아 생겼다. 그러므로 무릎에 안정이 절대적이며 운동량, 강도, 자세 등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란 충고가 있었다. 치료하는데 3개월 이상 필요하며, 상당기간 증상을 호소한 경우에 있어서 재발없이 통증이 없기까지는 6개월에서 1년 이상 필요하다란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2002년 4월 22일(월) ~ 6월 24일(월)까지 물리치료 후 많이 호전되었다. 그러나 치료비가 부담이 되어 다시 파스 및 더운 물 찜질로 변경하였지만 지금 현재(2003년 10월) 완치가 안 되어 일본 키네시오 테이핑, 국산 비비테이핑을 구입해(정형외과 및 신경외과에서 치료 목적 테이프) 집에서 치료하고 있으며 더운 물찜질 치료로 병행 중이다.
그렇게 바라던 사범 채용이 안 되고 2002년 4월 중순에 학원버스 운전기사가 왔지만 본인과 정사범은 운전기사보다 사범 한 명이 더욱 필요하였다. 2002년 4월, 5월에 운전기사가 있었지만 수업은 12시간 이상 넘게 근무하다보니 점점 지쳐 가는 몸과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나쁜 근무환경 요1소로 비뇨장애, 소화장애, 수면부족, 스트레스가 더 늘어나 질병이 발생되었다. 내과 질환은 빠른 시일에 완치되었지만 비뇨기과 장애(전립선질환)로 피로감, 전신권태감 주 ․ 야간 배뇨 횟수가 증가되어 항문 주위의 회음부 통증과 불쾌감 때문에 잠을 잘 못 이루고 생활에 불편을 느껴서 2002년 7월 9일(화)에 원당에 있는 유지호 비뇨기과에 진료한 결과 전립선염이란 병명을 판단 받았다. 의사 소견이 ‘과중한 업무로 인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고 그런 업무를 피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한다. 그리고 심리적, 육체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 을 하였다. 본인이 근무한 직장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쉴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회의시간에 이런 질병(무릎, 비뇨기과치료)을 백호관장에 말했고 수업분담을 덜기위해 사범 한 명을 더 채용해 줄 것을 백호관장에게 부탁했지만 ‘사범을 구하고 있다란 말’뿐 빠른 대처는 하지 않았다. 그 전립선 질환을 2002년 8월 9일(화) ~ 8월 24일(토)까지 유지호 비뇨기과에서 치료 후 점차 호전되고 있었지만 망막박리(눈 속 망막에 구멍이 생겨 시력장애가 오는 질병)가 2002년 8월 28일에 재발하여 비뇨기과 치료를 일시 중단하였다. 그리고 망막박리 수술과 회복을 거치면서 다시 비뇨기과 치료를 2003년 3월 11일(화)부터 부천에 위치한 현 비뇨기과에서 전립선염을 2003년 6월까지 치료를 받았고 현재(2003년 10월)는 관찰 중이다.
2002년 6월이 시작하면서 한일 월드컵 기간 때문에 수업과 승급심사는 축구 위주로 하였다. 2002년 7월, 8월 또한 비슷하게 수업을 진행하였다. 2002년 6월은 좋은 일과 섭섭한 일들이 있었다. 2002년 6월 24(월)에 새로운 김태영(당시 용인대 태권도학과 4학년 재학 중인 학생 신분, 이하 김사범) 사범이 들어왔으며 본인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믿고 의지하며 따르던 정복인 사범이 퇴사(2002년 6월 29 토요일)를 하였다. 정사범이 퇴사 전 백호체육관에 대한 업무를 본인과 정사범이 분담해서 일 했는데 정사범이 퇴사 후 분담해서 했던 일이 모두 본인에게로 인계되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본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김태영 사범은 사범 경력이 없어서 아직 업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수업을 못함) 그리고 정사범(당시 36세)은 1년 동안 근무(2001년 6월 18일 ~ 2002년 6월 29일까지)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젊은 사범들(퇴사한 당시 29세 이승용사범, 27세 국관호사범)도 백호체육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무척 힘들어하며 몇 달 안 되어 퇴사하는 일이 잦았다.
본인 또한 그 당시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2년여 동안 쌓은 것을 쉽게 버릴 수가 없어서 참고 견뎌왔었다. 그런 점에서 정복인 사범은 다른 젊은 사범들과 많이 달랐다. 본인보다도 인생선배로 여성이면서도 함께 일하면서 근무조건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직장을 그만 두지 않았고 직장생활에 관한 정당한 권리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관원생들을 성심성의것 지도하는 모습이나 적지 않은 나이와 여성인 몸에서 체육관의 일을 퇴사한 사범들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정말 본 받을 만한 인생 선배라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사범이 퇴사할 때 백호관장이 정사범에게 해준 것은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본인이 알기로는 퇴직금은커녕 아무런 대우가 없었다고 알고 있다. 정사범은 1년 동안 본인과 함께 체육관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범인데 백호관장은 아무런 보답 없이 퇴사(정사범 퇴사 전 ‘정사범 지금 나가면 체육관 운영하기 힘들다 더 사범 경력을 쌓아야한다며 계속 일하게 하였다’, 퇴직금도 주지 않았음)를 하게 하였는가? 이런 사정을 알고 나니 본인 또한 정사범과 같은 그런 대우를 받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일할 의욕이 저하되었다.(본인에게도 퇴사 후 정사범과 똑 같은 대우를 받음과 동시에 더욱 비신사적 행동을 하였다.)
본인의 몸 또한 체력적으로도 못 견딜 정도로 힘이 들었고, 본인이 의지하며 마음이 잘 맞던 정복인사범이 퇴사하고 나니 더 이상 체육관에 나와 근무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2002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근무하게 되었다. 또 몸과 정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여서 본인도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때였다. 정사범이 2002년 6월 29일(토)에 퇴사하고 나서 본인과 김사범(용인대 태권도학과 4학년 학생 지도 경력이 부족함)이 수업을 맡게 되었지만 수업은 거의 본인이 했다. 김사범은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사범지도 경력도 부족했으며 한 시간에 많은 관원생(30명 이상)들을 지도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2002년 7월 들어와 일주일은 수업보조하고 그 뒤 관원생이 제일 적은 2시부를 뺀 나머지 전 타임(오후 3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을 본인이 혼자 수업을 맡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2002년 여름방학 전까지 본인 5타임을 김사범이 3타임을 맡아 수업을 하게 되었다.
또한 2002년 6월, 7월, 8월에 월드컵 영향 때문에 축구위주(백호관장이 지시로 그런 수련계획표 작성, 축구공 다루기, 슈팅, 헤딩, 축구심사)로 수업과 각부별 야외 축구시합을 하다보니 무더운 날씨에 체력이 더욱 소모되었다. 다른 때보다 머리 쪽에 충격(헤딩, 뛰는 것, 점프 등)이 가는 행동을 많이 했으며, 이로 인해 눈에 더욱 충격(망막수술 환자는 머리 쪽 충격은 금물이지만, 직접 시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었음)과 무리가 가중된 것 같다. 정사범(6월에 퇴사한 여자사범)퇴사 후 계속해서 2002년 7월 여름방학 전후 백호관장에게 사범 채용을 부탁 했지만 운전기사가 있는데 또 사범이 필요하겠냐며 넘어가 버렸다.(그 당시 본인은 정말 체력이 바닥이었고 힘들었기 때문에 사범 채용 필요했다.) 그때 관원은 240명 이상 유지한 상태였고 휴식시간 없이 수업지도는 똑 같았다. 정말 본인의 몸은 힘들어했는데 백호관장은 전혀 배려를 안 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고통과 시련의 8월(망막박리 재발과 이명이 발생된 시기)이 다가왔다.
10. 2002년 7월 22일(월) 여름방학 시작하며 수업시간이 7부재로 변경
※수업시간(오전 10시, 11시, 오후 2시, 3시, 4시, 5시, 6시)
-지난 방학은 휴식시간이 있었음. 이번 방학기간 동안은 휴식시간이 전혀 없음
(점심시간 제의 본인의 수업 후 다음 수업시간엔 뒤에서 수업 보조지도 함)
-몸 상태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고 나른한 상태였음.
※국, 공유일 근무일
-7월 28(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승품, 단 심사, 고양종합고등학교 체육관
※근무시간: 오전 10시 ~ 오후 8시(총 10시간)
- 토요일: 오전 11시 ~ 오후 5시(승품, 단 및 대회 연습)
2002년 여름방학은 다른 여름, 겨울방학 때와 달리 휴식시간(수업과 수업사이) 전혀 없이 수업을 했고 김사범(용인대 태권도학과 4학년 재학생)과 수업을 하다 보니, 수업은 자연히 본인이 거의 맡아서 했으며, 2002년 여름방학동안 식사문제 해결을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핀잔뿐이었다. 본인은 그때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백호관장과 그런 내용 때문에 마찰이 있었지만, 식사 문제는 해결을 못 보았다. 2002년 여름방학 전에는 12시간 넘게 근무했고 2002년 여름방학 동안은 10시간 넘게 반복된 수업으로 본인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2002년 8월 들어와 더욱이 심해 돌일 킬 수 없는 사태(과중한 업무로 인해 발생한 망막박리는 2002년 9월 3일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에 입원 함)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또한 수업을 혼자 위주로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함께 근무하는 김사범이 2002년 8월 19일(월) ~ 24일(토)까지 일주일 동안 태권도사범 교육(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국기원에서 교육 및 자격증 발급)을 들어가 일주일 동안 근무를 못한다 말했다. 백호관장은 아무 수업대책 없이 승낙(김사범에 태권도 사범교육)을 해주었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범들이 행사 및 일이 있으면 수업을 감안해 주면서 본인의 가족행사(아버지 회갑, 조카 돌잔치, 질병, 경조사)가 있으면 왜 감안해주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특히 본인의 큰외삼촌께서 “상”을 당했(2001년 9월)을 때와 조카 돌잔치(2002년 4월)에도 체육관 행사 때문(연천 검은띠 캠프에 참가인원이 13명이라서 백호관장, 백호원장, 정사범 중학생 2명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본인이 없어도 캠프를 치 룰 수 있는 상태였음)에 참석을 못하였다.
그리고 본인이 백호관장에게 김사범이 사범교육에 들어가면 ‘수업은 누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냐?’ 란 질문했다. 그때 백호관장은 수업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본인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본인 혼자 힘들게 수업을 하는 것을 알면서 일주일 동안 2002년 8월 19일(월), 22일(목) 오후 2시부 품새반(승품, 단심사 및 겨루기 연습 시간) 이틀 동안 한 시간씩, 총 두 시간만 도와줬을 뿐이다.(이때 백호체육관 홈페이지가 생겼는데 본인이 혼자 어렵게 수업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면서 백호관장은 수업보다 홈페이지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음, 본인이 수업 중 인터넷 포커게임을 함), 입사 초기 1년 동안에는(휴식시간 있을 당시) 혼자 수업을 참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여름방학 현재 몸 상태가 무척 안 좋아서 백호관장에게 수업을 도와 달라와 사범채용을 부탁했지만 백호 관장은 또다시 ‘사범이 왜 필요 하냐 운전기사가 있는데’란 응답으로 넘겨 버렸다.(이때 본인이 입사하기 전 백호체육관에서 근무하고 퇴사한 서동민 사범이 본인에게 한 말이 기억이 난다. ‘가끔 내과에 가서 속 불편한 것 검사와 포도당 주사를 맞아서 피로를 풀어라’란 말 생각나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안 되었다.)
일주일 혼자서 수업하고 있는 기간동안(2002 8월 19일 ~ 24일 토요일)에 여름캠프(8월 21일 수요일, 장소: 용인 에버랜드의 캐리비언베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외래행사를 하려면 평상시 보다 더욱 긴장하고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이번 여름캠프(2002 8월)는 본인 혼자 준비하였고, 참가 못하는 관원생 어머니와 전화상담(약 30~40명 이상 전화통화, 백호관장이 캠프 참가인원을 200명 채우라고 함)등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여름캠프 당일 송한슬(용인대 태권도학과 제자)과 이경진(고3 제자) 및 중학생 2명이 도와주었지만, 그 넓은 캐리비언베이에서 어떻게 그 많은 참가자(수련생과 가족을 합하여 150명 이상 인원)를 혼자서 관리를 하겠는가? 그땐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관원생들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하여 아무런 일없이 체육관에 돌아 올 수 있었다. 그 후 백호관장 가족과 백호관장 친구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본인은 캠프에 돌아와 너무 피곤하여, 몸을 가룰 수 없어 승용차에서 잠시 잠을 청한 다음 함께 식사자리에 참석하였다. 혼자 수업하고 혼자서 여름캠프를 준비하여 무사히 마무리했는데, ‘수고했다’ 란 말 보단 백호관장은 여름캠프를 도와주러 온 제자들(송한슬, 이경진)이 일을 잘못해서 야단치려 했다란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어린 제자들이 뭐가 잘못이 있는가? 잘못이라면 본인을 도와준 것밖엔 없는데 그 학생들을 잘못 했다는 말에 정말 어이가 없었다. 역시 이번에도 여전했다. 본인이 열심히 일을 해도 백호관장한데 격려의 말보다 질책만 돌아 왔다.
2002년 여름캠프를 다녀오고 나서 본인의 몸은 이제 본인 것이 아니었다. 2002년 8월 22일(목), 23일(금) 혼자 수업해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머리가 아파 출근하기 짜증났다. 또한 2002년 8월 24일(토) 승품심사(국기원에서 발행하는 태권도 단증, 품증 시험)때문에 오전 11시 출근하여 오후 2시 ~ 5시까지 품새 및 겨루기 지도하고 나서 그날 저녁부터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고 두통이 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일주일동안 혼자 수업을 하며 고생하고 있는데 백호원장은 아무런 조치(간단한 음료 제공)도 없었다. 그땐 본인이 무슨 생각없는 로봇이나 기계였던 것 같았다. 2002년 여름방학 동안 간간이 대학생 제자들(송한슬, 최종천, 조용기)이 찾아와 수업을 보조 및 도와주었지만 크게 도움이 안 되었다. 그 젊고 패기 있는 대학생 제자들이 한두 시간 수업보조 한 뒤 힘들다고(서있는 행동)호소하는데 본인은 어떠하였겠는가? 군대도 아닌 직장생활에서 그 누구라도 본인처럼 장기간 그런 행동(휴식 없는 수업과 장시간 서있는 행동)을 하면 없던 병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김사범(용인대 태권도학과 4학년)은 2002년 8월 26(월)일이 대학교 개강이었다. 그래서 월요일, 목요일은 학교 수업 때문에 오후 7시 넘어서 출근해야 한다는 것을 백호관장에게 회의시간에 말을 하였다. 또한 이때는 승급심사 기간(한 달 동안 배운 것을 시험 보는 날 8월 30일)이라 더욱 정신적 압박과 스트레스로 인해 힘이 들었다. 과도한 업무와 반복적인 동작(운동), 정신적 긴장과 특히 쉬지 않고 수업(활동)을 하다보니 생리적으로 피로가 쌓여 몸에서 휴식을 요구하는 위험신호(현기증, 가슴 두근거림, 두통이 나타날 때 창고에 들어가 잠시 안정을 취함)가 나타났다. 그 과도한 업무(2000년 9월부터 휴식시간 없는 근무를 했으며 특히 8월 19일(월)~8월 26일(월)까지 일주일 동안 오전 10시 및 11시에 출근하여 밤 11시까지 혼자 수업과 여름캠프 준비, 승급심사준비)와 피로 인해 계속해서 입맛이 없어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다.(거의 점심식사는 자장면 및 볶음밥으로 대처), 만약 저녁식사를 먹게 되면 식사 후 소화를 위해 일정 시간을 쉬어야 하는데 본인과 다른 사범들은 돌아가며 3~5분 동안 식사 후 곧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영양분과 휴식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몸이 나른하여 자꾸 눕고 싶고 일에 의욕이 없어졌다. 또한 집중력도 떨어지고 신경도 예민해져서 백호관장과 대화를 할 때 신경질적으로 얘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무시간이 늘어나면 그 만큼 휴식시간이 늘어나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었다. (2000년 9월부터 오랜 기간 휴식시간 없이 수업 함) 휴식이 있다면 점심시간과 1부(오후 2시부)마치고 2부(오후 3시30분) 시작할 때 30분이 있는데 이것은 휴식에 전혀 도움이 안됐다. 그리고 계속되는 시간적 압박, 직장 내의 스트레스, 업무 폭주 등으로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으로 피로를 불러 일으켰으며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누적되어 쉽게 피로가 회복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중업무로 인해 과로가 깊어져 기존에 본인에게 있었던 안과질병 망막박리(눈 속 망막에 구멍이 생기는 현상)가 더욱 악화되어 2002년 8월 28일(수)에 재발하게 만들었다.(그 당시 1999년 11월 18일에 열공성 망막박리 수술을 받은 상태였고 그 사실을 백호체육관 입사 전 백호관장에게 밝힘), 이와 더불어 새로운 이비인후과 질병 이명(귀울림, 돌발성 난청)이 2002년 8월 27일(화)에 발생하였다.
11. 2002년 8월 26일(월) 개학하면서 수업 시간은 8부재로 변경(사직서 제출한 날)
※수업시간(오후 2시, 3시30분, 4시 30분, 5시30분, 6시30분, 7시30분, 8시 30분, 9시30분)휴식시간 없음
※국, 공유일 근무일: 없음
※근무시간
-8월 26일(월, 사직서 제출), 27일(화)오전 10시(11시)~오후 11시까지
-8월28일(수)오전 11시 ~ 오후 5시까지(병가 퇴근)
-이명발생(귀울림, 8월 27일화요일)과 망막박리 재발(8월 28일 수요일 퇴사)한 기간
여러 증상과 몸이 안 좋아서 병이 발생할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다시 망막박리(눈 속에 있는 망막에 구멍과 찢어진 현상으로 시력장애가 발생)가 재발할지 몰랐고 새롭게 이명(귀울림, 200년 8월 27일)과 돌발성 난청이 나타났다. 이 두 병은 다시금 겪고 싶지 않는 질병이다. 이 두 질병 치료기간은 망막박리를 2002년 8월 28일(수)발생해 2002년 9월 10일(화)에 중앙대학 용산병원 양한남 교수에게 수술(망막박리 수술 중 가장 힘든 수술인 유리체절제술 시행)을 받고, 2003년 10월 현재 치료 중 후유증이 포도막염(눈 속 염증), 후발성 백내장, 증식 유리체 망막증(망막박리가 계속 진행되는 현상), 광시증(번쩍거리는 현상), 물결현상(눈 속에서 파도치는 현상)이 발생해 치료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 또 이명(귀속에서 귀뚜라미나 매미소리가 나는 현상)과 돌발성 난청(청력손실이 나타나는 현상)은 2002년 8월 27일(화)발생해 2003년 3월 12까지(화)까지 치료 후 완치되었지만 소리에 대한 두려움과 민감(큰소리가 나는 곳은 피함, 노래방, 극장 등)하게 반응하는 후유증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증명서 작성도중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메느에르병 또한 발생하여 치료 후 현재는 관찰 중이다. 이 두 질병은 아래에 자세한 발생과 치료를 적어 보겠다.
위 근무 내용처럼 과중한 업무와 과로(피로누적)로 인해 2002년 8월 25일(일)부터 눈 속에 비문증(눈 속에 물체가 떠다는 것)이 생겨 이상을 느꼈다. 본인은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더 이상 근무하기 힘들다 생각하여 2002년 8월 26일(월)에 출근하여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사직서를 제출하니 가슴속은 시원했지만 긴장이 풀어져서인가 몸 전체는 더욱 기력이 떨어졌다. 그 후로 비문증(눈 속에서 물체가 떠다는 현상)이 2002년 8월 25일(일)보다 더욱 많아져 수업을 할 수 없었지만, 200년 8월 26일(월)에 관원생들을 지도할 사범이 본인 혼자(동료 김사범은 대학교 개강 때문에 근무를 저녁에 나왔음)라서 오전 10시에 출근하여 오후 11시까지 수업과 승급심사(정기적으로 한달에 한 번 보는 태권도 시험, 이때도 뛰어하는 발차기 위주로 심사연습)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때(8월 26일 월요일) 8타임(2시, 3시30분, 4시30분, 5시30분, 6시30분, 7시30분, 8시 30분, 9시 30분, 이렇게 휴식시간 없이 12시간 이상 근무) 중에서 단지 6시 30분(승품, 단 심사 대비반)만 백호관장이 도와줬다.
그날 오후 7시 넘어 김사범이 출근했지만 차량운행 때문에 수업은 본인이 계속하였다. 백호관장에게 본인의 퇴사 의사를 확실히 밝히고 현재(2002년 8월 26(월) 병세를 설명했더니 영등포 김안과에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유하고 함께 병원에 가자는 것이었다.(본인이 말한 질병이 진짜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 꼭 본인이 감시당하는 것 같았음) 그래서 2002년 8월 27일(화)에 영등포 김안과를 방문해 레지던트(김형정)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비문증(눈 속에 떠다는 물체)은 심하지만 망막은 괜찮다며 일주일 뒤에 다시 방문하라 말을 했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믿음이 가지 않는 말 이였다. 정확한 진찰이 아닌 듯하여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백호관장이 이날의 진료비를 지불해줄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없었고 체육관으로 돌아와서 계속 퇴사보다 함께 근무하자란 말을 반복하였다. 그 당시 체육관 자리를 파주 신도시에 알아보자며 더욱 근무를 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젠 그런 말이 귀에 들리지가 않았고 그런 말에 속지 않았다. 근무나 체육관 자리를 알아보는 것보단 본인의 몸에 이상 증상이 심해 당장 치료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호관장이 그 동안 본인이 원했던(사범 채용, 휴식시간) 근무환경을 조성해 주었다면 본인의 몸이 이 정도로 엉망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백호관장의 말은 중요하지도 않았고 더 이상 백호체육관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본인이 알고 있는 대부분 백호체육관에서 근무한 사범들은 백호관장과 업무적, 금전적 마찰로 안 좋게 퇴사함), 그리고 이때부터(2002년 8월 27일 화요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피로, 긴장, 과로, 스트레스, 정신적 긴장, 압박감 때문에 본인의 몸은 저항력이 떨어져 청각신경 손상으로 이어져 새 질병인 이명(귀울림)이 왼쪽 귀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2002년 8월 27일~ 10월 27(일)일까지 증상은 사람목소리가 계속 울려서 들렸고, 점차 강도가 심해져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리면서 들렸다. 그때 이명(귀속에서 귀뚜라미나 매미소리가 나는 현상)이 본인에게 대단히 힘들고 고통을 주었다. 이명(귀울림)이 다른 어떤 병보다 본인의 정신과 마음을 약하게 할 줄 몰랐으며 이명이 처음엔 무슨 병인 줄도 몰랐다. 정상이었던 사람의 귀속에서 큰소리가 지속적으로 난다고 생각해 보면 이는 참기 힘든 생활 일 것이다.(정상인 사람들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시적으로 이런 현상이 있을 때가 있음)
그리고 2002년 8월 27(화)일에 오후 7시 30분 김사범 수업 시간에 도저히 본인 몸 상태가 이상해 수업보조를 못하겠어 백호체육관 안에 있는 창고(기자재실)에 들어가 30분 동안 누워 있었다.(누워 있는 상태를 백호원장이 보고 왜 그러냐? 질문을 함), 몸의 이상 증상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와중 백호관장이 퇴근 후 보자는 말에 본인은 전화를 걸어 사양했지만 백호관장은 강압적으로 나와서 퇴근(밤 11시 이후)후 만나(오마중학교 재학 중인 학생 호프집 ‘Mr 골뱅이’에서 이경환 아버지와 백호관장, 김사범 본인)새벽 1시가 넘어서 까지 사적인(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체육관에 다니는 중 3학년 이경환 학생 진로 얘기 위주 대화)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당시 눈 상태가 안 좋아서 술을 못 마시겠다고 했는데 본인의 심각한 상태를 모르는 이경환 아버지가 예를 들며 계속 권해서 할 수 없어 두세 잔 먹었음) 2002년 8월 28일(수)에 아침부터 오른쪽 눈 상태(눈 속에 더 많은 물체가 생겨 떠 다녔음) 더 악화되어 전에 비해 보이던 것이 반도 안보이게 되었다.
백호체육관에 출근하여 오후 3시 수업 도중 오른쪽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더 이상 수업은 무리라 생각하여 백호관장에게 병원에 가야겠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런데 백호관장은 본인을 걱정하기보다 ‘수업을 어떻게 하냐? 며 수업에 대한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일산에 있는 인제대학교 백병원을 가겠다고 말을 했다. 체육관 앞에서 택시를 기다렸지만 택시가 없어 걸어가는 도중 백호관장이 차량운행을 하러 나오고 있었다. 백호학원차량은 타고 일산 백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 차안에서 백호관장은 본인 걱정보다 ‘승품심사(2002년 9월 8일에 심사를 보기로 했음)날짜가 2002년 10월로 연기되었다’란 설명을 하였다. 본인은 아파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하대 일산 백병원 안과에 도착하여 진찰 결과 망막박리가 재발하였으니 빨리 서울 큰 병원에 가서 수술하라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전에서 사범생활(1999년 3월 2일 ~ 2000년 3월 23일까지)할 때도 오른쪽 망막박리가 1999년 11월에 발병했다. 그 당시 충남대학 병원 안과 이성복교수에게 수술(1999년 11월 19일 약 2주 입원 후 퇴원) 후 망막이 잘 유착되어 휴식시간을 가지고 다시 12월 중순부터 대전에서 사범 생활에 큰 지장 없이 2000년 3월 24(금)일까지 했다. 하지만 백호체육관에서 2년 4개월 동안 무리하게 업무를 강행하다보니 다시 이병 재발하게 된 것과 다른 병까지 생기게 되었다. 다시 전신마취를 통해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백호체육관에 돌아와 백호관장에게 망막박리가 재발하여 수업을 못하겠고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설명하였다. 조금 있다가 친형에게 전화가 왔다. 친형과 백호관장이 통화하면서 본인의 형 한데 ‘일을 무리하게 시켜 병이 생긴 것 같다고 얘기하였다’란 말을 친형에게 말했지만 본인에게 말을 할 때는 본인이 어렸을 때(연령 5세 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병이 재발 한 것 같다며 책임 회피식으로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때 눈이 안보여 고통스러웠는데 백호관장은 그 상황에서 본인이 퇴사하더라도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체육관에 나와 Part time으로 학생을 지도해 줄 것을 권했고 또 다시 ‘파주 신도시 체육관 자리를 알아보자’란 말을 하였다. 그때 이런 말을 듣고 겉으로 웃고 대답했지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누구 때문에 본인이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본인 혼자 실수해서 망막박리와 이명이 왔는가?
그렇게 장기간 휴식없는 과중한 업무와 여러번 수업시간을 도와 달라 부탁했고 사범을 한 명 더 채용 해달라고 호소했건만 본인의 건의를 묵인해 버린 백호관장으로 인해 본인이 다시 망막박리 수술을 받아야 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수업지도는 몸으로 직접 운동시범(백호관장은 태권도사범은 몸으로 하는 직업이다란 말을 강조 함)을 보이는 행동과 일주일(토요일 포함) 넘게 12시간 이상 혼자 수업을 계속된 무리한 수업 때문에 피로가 쌓여 발생하여 과로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이 때 충격 때문인지 이명이 좀더 악화되어 사람 목소리가 더욱 울려 들리고 잘 안 들렸다. 그 상황은 정말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였다. 망막박리란 안과 수술 중에서 제일 힘든 수술이라서 안과 의사들이 전공을 깊이 하는 질환이다. 만약 수술이 잘 안되면 안구 축소(안구가 작아지면 눈 속에 기름을 넣어 안구 유지 및 의안으로 대처하는 병)와 실명(망막이 잘 붙지 않으면 시력이 상실)이 되는 병과 부작용 많은 병이다. 백호원장의 조카도 본인처럼 망막박리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백호원장은 이 질병(망막박리)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뒤로 퇴사(2002년 8월 27일 수요일, 이 시기에 관원은 237명 정도 유지한 상태)하여 집으로 돌아와 안정을 취하고, 그 다음 날 8월 29일(목)에 다시 영등포 김안과 이태곤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 망막박리 확인 후 수술을 위해 내과 진찰(심전도, 혈액, X-ray검사 등)을 받았다. 내과 결과를 본 다음 수술 날짜를 정하자고 했고 아무런 처방 없었다. 그리고 대처 및 주의 점을 설명해 주지 않고 집에서 안정하면서, 2002년 9월 2일(월)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 상태가 더욱 악화 된 상태로 2002년 9월 2일(월)에 다시 영등포 김안과에 방문하여 이태곤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의사 말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수술은 2 ~ 3차까지 수술을 할 수도 있고, 수술 날짜는 2002년 9월 17일(화), 18일(수) 중 예약하자고 했다. 본인은 더 빨리 수술 할 수 없냐 부탁드렸지만 수술 스케줄이 꽉 차있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 이태곤의사는 수술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표정이었으며 수술에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하여 친형과 연락을 하여 여기저기 수소문 한 후 그날 오후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안과 망막전문의 양한남교수에게 진료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양한남교수는 ‘왜 눈에 무리하게 운동을 했냐’ 그리고 이렇게 ‘아무대처 없이 망막이 떨어질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방치(김안과에서 아무런 대치를 안했음)해 두었냐’와 눈 속에 염증이 너무 심해 수술은 성공률은 50대 50이라 악의 없는 질책을 하셨다. 내일(2002년 9월 3(화)일) 아침에 내과진료 검사 후 오후에 수술하자는 설명과 집에 돌아가서 양쪽 눈을 가리고 바닥을 보고 누워서 잠자란 처방을 받았다. 부천 친형 집으로 돌아오면서 귀질환(이명) 때문에 송내역 앞 성명근이비인후과에 진찰을 받았더니, 코 때문에 증상이 나타난 것이라면서 처방을 받고 치료를 했지만 전혀 호전이 없었다.
2002년 9월 3일(화)에 아침 일찍 입원 수속을 하고 내과 검사를 받고 결과에 대한 양한남교수의 소견은 눈 속에 염증이 너무 많고 망막이 중심부 조금만 붙어 있고 주위는 다 떨어져있다.(망막은 원 모양임) 그래서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며 일주일(200년 9월 3일 ~ 9월 9일까지)동안 안정을 취하고 수술하는 것이 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귀질환(이명)으로 말소리가 울려 들리는 증상 때문에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고 싶다 했지만 레지던트 의사가 지금은 우선 망막박리가 중요하다 수술 후 진료 받는 것이 좋겠다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 계속하여 귀와 눈에 신경이 많이 가다보니 다른 통증(무릎, 전립선염, 내과)은 느낄 수 없었다. 눈(망막박리)은 점점 안정이 되었지만 이명(귀울림) 증상은 더욱 심해져서 TV소리가 잘 안 들렸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에 힘들었고 짜증이 났다. 계속해서 안과 진찰을 받으면서 이비인후과 진찰 받고 싶다고 의사한데 말했지만 의사는 눈 수술 후 치료받으라고 하였다. 이 두 질환으로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졌고 혈압까지 높아져 안압(안과 질환으로 안압이 높으면 녹내장이 생김)까지 높아지게 하였다.
2002년 9월 9일(월) 저녁에 수술 설명을 듣고 금식을 하여 9월 10일(화) 오후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시간은 약 3시간 30분 정도 예상을 했지만 눈 상태가 아주 심해 망막박리 수술 중에서 제일 어렵고 고도의 기술과 실력이 필요 한 유리체절제술과 함께 망막유착술, 망막내막 방피술, 수정체 초음파 유화술, 가스충천술로 인해 6시간 넘게 수술을 시행했다고 한다. 수술 대기실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3시간 넘는 수술로 알고 계셨는데 6시간 넘게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 하셨다고 한다. 이런 생각(본인이 수술하고 있는데 수술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께서 얼마나 가슴이 졸였을까)하면 너무 속상하고 죄송하며 본인 자신이 그렇게 후회 되게 백호체육관 근무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져 참기 힘들었다. 회복실에서 나와서 병실로 들어와 전신마취가 풀리면서 어지럼증과 구토를 동반(그 당시 친구 김기성이 면회를 왔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본인이 죽는 줄 알았다고 함)하였다. 또 이시기는 이명 때문에 정신력까지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2002년 9월 14일(토)에 백호관장이 다녀가고 나서 본인은 더욱 정신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백호관장이 아버지께 10만원 봉투를 주고 갔다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 사람의 성의를 돈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999년 3월 ~ 2000년 3월까지 1년 동안 대전에서 사범 생활(이곳에서는 점심, 저녁 제공함)을 했을 때 지금보다 수술 및 몸 상태가 심하지 않았다. 그때는 망막박리(열공성 망막박리)를 수술(99년 11월 19일 금요일)하였다. 그 곳 대전에 대학동문 관장은 수술비 및 위로비 목적으로 100만원 이상과 퇴직금을 주었는데 고향, 고교 선배이자 집안사정까지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백호체육관 전중수 관장은 그런 모습을 없었다.
본인이 백호체육관에서 2년 4개월(2000년 4월 ~ 2002년 8월까지) 동안 집안일보다 체육관 일이 우선 인 줄 알고 헌신적으로 열심히 근무했었다. 그러나 노력의 대가가 고작 10만원이라 생각하니 더욱 억울하고 속상했다. 이렇게 망막박리가 재발하여 수술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과연 누구인가? 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본인이 전신마취로 통해 6시간이상 동안 망막박리(유리체절재술)수술한 것과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진정으로 생각해 보았다면, 그렇게 성의 없는 행동은 못했을 것이다.
그 날 저녁부터 명치부분에 응어리가 생겨 그로 인해 소화장애로 가스가 계속 생겨 저녁식사를 죽으로 대처했고 간병인 노숙임 아주머니가 민간요법 손을 따주었는데도 별 호전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소화가 안 되고 뱃속에 무언가 꽉 찬 듯한 느낌이 들어 간호사에게 얘기를 했다. 간호사는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증상을 얘기한 후 본인과도 통화를 하였다. 그리고 약 처방을 받아 약을 복용하기도 하였지만 호전은 못 보았다. 이 증상은 퇴원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퇴원 후에도 몇 개월 동안 소화장애가 계속되어서 내과 치료와 2002 11월 11일(월)에 자생한방병원에 방문해 진찰을 받아보니 과로, 스트레스와 분노로 인하여 발생한 화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한약 치료를 3개월(1차 2002년 11월 11일, 2차 12월 6일, 3차 2003년 1월 3일) 동안 치료받고 화병은 많이 호전이 되었다.
수술한 지 3일이 지나 2002년 9월 13일(금)에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았다. 그때 청력검사와 X-ray 촬영 검사를 하였다. 결과는 이명있는 왼쪽은 청력이 정상인 보다 나쁘다는 판단과 축농증 증세 때문에 이명이 올 수 있다며 축농증 처방을 받고 약을 복용했지만 전혀 호전이 없었다. 이것 또한 잘못된 진료 판단이었다는 것을 퇴원 후 인터넷으로 알게 된 귀 전문 이비인후과(연쇄, 소리이비인후과) 진료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본인의 이명과 돌발성 난청은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 후 2002년 9월 18일(수)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주치의가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 장시간 열차 및 차를 타면 안 된 다란 처방 때문에 고향에 가는 것보다 부천 형 집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주의사항을 지시 받았다. 퇴원 후 부천 친형 집에서 명절(2002년 9월 21일 추석)을 고향도 못 가고 쓸쓸히 보내게 되었다. 본인은 아파하고 있는데 본인을 이렇게 만든 백호관장은 즐겁게 명절을 보낼 거란 생각하니 마음의 고통과 이명(귀울림) 증세가 심해졌다. 계속해서 소화장애로 속이 답답해 근처 성모의원에서 2002년 9월18일(수), 19(목)일에 내과적 처방과 성명근 이비인후과에서 귀울림(이명)에 대한 처방을 받았지만 역시 이명은 계속 호전이 안 되고 악화만 되었다.
그렇게 추석 연휴가 지나 2002년 9월 23일(월)에 중앙대 용산병원 안과에 방문하여 광시증, 물결현상, 반점 떨림, 눈 속의 염증 증상과 안압 검사를 하였다. 양한남교수가 치료를 마치고 이제 주의하고 정말 잘 보이는 왼쪽 눈을 보호하며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수술한 오른쪽 눈은 정기적으로 검사를 꼭 해야 한다란 진료결과 말하고 ‘이제 더 이상 격하고 무리한 운동(태권도)을 삼가고, 명상위주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 좋겠다. 고 양한남교수는 권해 주었다. 그리고 ‘계속해 머리에 충격과 눈에 충격이 가는 운동은 절대로 하면 안 되고 이로 인해 다시 망막박리가 재발 할 수 있고 또 다시 수술한다면 그 당시보다 더 힘든 수술까지 갈 수 있다. 수술해도 잘 유착되지 않으면 안구축소가 일어나 안구를 유지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란 당부를 하였다. 그래서 아쉽지만 태권도 운동은 무리라는 설명과 안정을 취하면서 수술한 눈 상태를 보자고 하였다.
본인은 중학교 때부터 꿈이 태권도 체육관 경영하는 것이었고 관장이 되어서 관원생 앞에서 모범적인 태권도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태권도관련 경험(대학때 태권도 동아리 ‘일도회’ 창단, 태권도 신문사 대학생 취재기자 역임, 대학 졸업 논문을 태권도 관련 작성, 태권사범 생활을 3년 넘는 경력)을 쌓아왔고 태권도 체육관 운영에 필요한 자격증(태권도 5단 취득, 3급 태권도 사범 자격증, 3급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 2급 경기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여 힘든 상황을 참고 생활하였다. 이렇게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는데 위의 양한남교수의 말대로라면 본인 소망과 꿈은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 본인의 심정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프고 힘들었다. 일단 몸 건강 회복이 우선이고, 수술한 오른쪽 눈과 레이저 치료한 왼쪽 눈(망막박리가 일어 날 수 있어 레이저 사용하여 예방)을 위해서 할 수 없이 본인의 희망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전신마취를 통해서 대수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백호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백호원장은 본인의 병세보다 ‘학부모들에게 거짓말(백호관장이나 백호원장은 관원생들에게 본인이 다시 백호체육관에 돌아온다고 본인의 의사와 달리 말을 함, 본인은 백호체육관에 다시 근무한다고 말 안 했음)하는 것도 힘들다며 본인이 언제부터 근무할 수 있느냐’란 질문을 했다. 본인은 의사가 말한 것을 백호원장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이제 운동을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설명과 수술비가 200만원 넘게 나왔다고 얘기하니 백호원장은 웃으면서 ‘돈 벌은 거 병원비로 다 섰네. 란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위로비를 받아도 본인의 마음이 편치 않은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본인이 왜 이렇게 까지 고통 받으면서 치료를 하고 있는가? 그것이 관연 누구 때문에 인가? 그 후 백호원장에게 다시 본인 의사를 확실히 밝힌 후 전화를 끊었다. 백호원장은 그런 상황을 백호관장에게 말하란 말에 본인은 백호관장에게 전화를 하여 백호원장에게 한 얘기를 되풀이하고 전화통화를 마쳤다.
2002년 9월 30일(월)에 다시 눈에 대해 진찰을 받았는데, 다른 증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염증은 많이 호전되었다고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몸 상태는 전보다 나빠졌다. 다름 아닌 눈 속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 이명(귀울림), 돌발성 난청과 답답한 내과 질환으로 더욱 신경성 때문인지 분노, 불안, 초조, 우울한 현상까지 겪게 되었고 대소변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말 몸 전체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2002년 10월이 되어서 본인의 마음의 안식처 시골 충남 홍성에 내려가 휴식을 취했지만 안정이 안 되었다. 부모님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죄송하고 억울한 느낌이 더욱 들었다.
또한 그곳에서 이명(귀울림) 때문에 2002년 10월 7일(월) 윤이비인후과와 10월 21일(월) 최이비인후과에 방문해 치료했지만 이 곳도 코 질환만 치료(이 두 곳도 잘못된 진료 이었음)해 전혀 이명 증상에 대한 질환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친누나 말을 듣고 2002년 10월 16일(수) 평택에 올라가 서울대 출신 코모키 이비인후과에 진료를 했더니 코 질환은 축농증이 아니고 비염증세가 있지만 이 것 때문에 이명이 발생하지 않는다며 증상은 이명이라 진단하고 이명은 완치가 힘들다며 이명 약을 처방하여 먹었지만 증상이 좀처럼 호전이 안 되다. 다시 홍성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여러 이비인후과에 본인의 이명(귀울림)증세에 대한 글을 올렸다. 그리고 2002년 10월 21일(월) ~28일(월)까지 자연한의원에서 침, 뜸, 부항으로 치료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2002년 10월 27일 전에 조용한 곳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이명 발생한 2개월 뒤 2002년 10월 27일(일)부터 조용한 곳에서 말소리도 없는데 귀속에서 더욱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벌떼 소리와 위잉~ 소리가 왼쪽 귀에서 들렸고 어지럼증 때문에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왼쪽 귀는 말소리나 텔레비전 소리는 아주 작게 들리게 되었다. 이명 소리는 본인 자신 이외는 아무도 들을 수 없어 주위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명 검사(청력검사, 청신경 손실검사)를 하면 그 증상이 얼마나 심한가를 알 수 있다. 본인은 이명소리 때문에 생활을 할 수 가없었으며 잠자기도 정말 힘들어 불면증(이명이 발생한 기간동안, 잠을 못 이룸, 우울감도 발생함)에 시달렸다. 다시 2002년 10월 30일(수)에 서울에 올라와 중앙대 병원에서 안과 진료를 받아 보았지만 광시증, 물결현상, 점 떨림은 변함없었고, 염증은 완치되었으나 새롭게 후발성 백내장이 생겨 현재까지 치료 중이다. 진료 후 양한남 교수에게 왼쪽 귀에서 소리가 크게 난다는 말을 드렸더니 ‘골치 아픈 병이라면서’ 이비인후과 예약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양한남교수가 지방에 개원 준비 때문에 오늘 마지막으로 진료해주고 부천 순천향대학 병원 온영훈 교수와 서울 대치동 열린성모안과 유진성 의사를 소개 해주셨다.
그 뒤 중앙대 이비인후과 김훈교수에게 진찰 결과 이명이라 판단해 약을 2주 처방해주었지만 호전이 없었고 인터넷으로 올린 상담 글을 확인 해 본 결과 믿음이 가는 두 곳의 연세, 소리 이비인후과가 있었다. 그 곳은 정확하게 본인 증상과 원인을 잘 지적해 주었고 이 두 곳은 귀 전문 이비인후과였다. 그렇게 하여 2002년 11월 1일(금)에 신촌에 위치한 연쇄이비인후과에 청력검사, 이명검사, 고막검사, 이관기능검사 결과로 왼쪽 귀에서 청각신경의 손상으로 발생하는 이명증과 청력저하로 나타난 돌발성 난청이라 진단이 내려졌다. 이 증상은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발생하여 더 악화되고, 조용할 때 그 증상(귀속에서 소리는 것)이 더 심하여 신경이 예민해져 악화 될 수 있으니 절대로 안정과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늦게 찾아 왔냐? 란 질문에 본인은 다른 이비인후과에서 축농증과 비염 때문에 발생 할 수 있다 해서 코 치료약만 복용했다 설명했는데 의사는 비염이나 축농증 때문에 발생하는 청각 증상은 일반적으로 약물 치료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점차 호전이 되지만 청각신경의 손상으로 발생하는 경우는 청각신경의 완전 회복 될 때까지 이명과 돌발성난청이 지속된 다는 설명하였다. 그리고 함께 본인이 늦게 찾아오고 이명, 돌발성 난청이 오래 되어서 약물치료를 한다고 하여 좋아질 가능성과 청력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말해주고 다시금 육체적 과로 및 피로, 스트레스를 피하고 체력을 보강하고 맘 편하게 생활하는 것이 빠른 회복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희망을 가지고 치료하자고 설명하였다.
이런 진료 판단을 받았지만 혹시나 하고 또다시 청담동에 위치한 귀 전문 소리이비인후과에 진료 결과 위 이비인후과와 동일한 원인과 질병이 이명과 돌발성 난청이라 2주 약 처방을 내리고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고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이명과 안과 질환 때문에 고통이 심해져 하루하루 불안과 우울하게 보내게 되고 신경계통 또한 힘이 빠지고 피로감 어지러움 나타났으며 피부질환으로 여드름(2002년 10월 7일(월) 유재명 피부과에서 1개월 치료)까지 나났다. 그 후 점점 정신력까지 약해져 본인의 신체증상 부위에 대한 병원 검사를 믿지 못하여 여러 병원(*아래 질병 치료 기간과 병원 현황, 처방전, 증명서류 참고)을 돌아 다녀 진찰을 해봐도 의사의 말을 불신하게 되었다.
* 질병 치료 기간 및 병원 현황
1. 정형외과 및 테이핑 치료
- 경기 고양시 연쇄하나정형외과(이우용 2002년 4월 22일~6월 24일까지, 2003년 6월 17일)
- 일제 키노시오(2003년 1월 9(목)일 6개) 국산 비비테이프(2003년 2월 12(수) 10개)
2. 전립선염 치료 병원
-경기 고양시 유지호 비뇨기과(유지호, 2002년 7월 9일~8월 24일까지, 2003년 9월 15일
망막박리 재발로 치료 중단
-경기 부천시 현 비뇨기과
(문현 2003년 3월 11일, 13일, 26일, 31일, 4월 8일, 18일, 5월 13일, 6월 7일)
3. 안과(망막박리) 치료 병원
-서울 영등포 건양대 병원 김안과(김형정, 유태곤, 2002년 8월27일, 29일, 9월 2일)
-경기 고양시 인제대 백병원(최규제, 2002년 8월 28(수)일)
-서울 용산구 중앙대 용산병원: 양한남, 2002년 9월 2(월)일~9월 18(수)일 입, 퇴원
(퇴원 후 치료 2002년 9월 23(월)일, 9월 30(월), 10월 30(수)일, 12월 17(화)일, 2003년 9월 18일)
-충남 홍성읍 김안과(김유강, 2002년 11월 2일)
-경기 부천시 윤안과(윤여동, 2002년 11월 5일)
-서울 대치동 열린성모안과(유진성, 2002년 11월 15일, 12월 7일)
-경기 부천시 순천향대 부천병원 안과(온영훈, 2003년 1월 3일, 2월 7일, 3월 7일. 7월 4일)
-서울 신사동 압구정성모안과
(정상문, 2002년 12월 18일, 2003년 1월 3일, 9월 27일. 김민호 3월 13일, 5월 6일, 5월 27일, 6월 17일, 8월 18일)
-서울 명동 아이안과(이병로, 2003년 3월 13일)
-서울 논현동 한길안과(김하경, 2003년 5월 2일)
4. 한방병원 및 한의원(이명, 턱관절, 화병, 스트레스성 피부질환)치료
-충남 홍성읍 유재명피부과의원(유재명, 10월 7일)
-충남 홍성읍 자연한의원(장춘, 2002년 10월 23일, 24일, 25일, 26일, 28일)
-경기 부천시 경희한의원(강인일, 2002년 10월 30일)
-경기 부천시 미소가아름다운 치과(김태훈, 이명, 턱관절 2002년 10월 31일)
-경기 부천시 하나한방병원(방대건 2002년 10월 31일, 이주강 2002년 11월 4일)
-경기 부천시 증서한의원(왕능상 2002년 11월 4일)
-서울 신사동 자생한방병원
(신준식, 박근용 2002년 11월 11일, 12월 6일, 12월 18일, 1월 3일, 9월 19일)
5. 이비인후과(이명치료 및 돌발성 난청)
-경기 부천시 성이비인후과(성명근, 2002년 9월 2일, 19일, 23일, 27일, 30일, 10월 15일)
-서울 용산구 중앙대 용산병원 이비인후과(백상흠, 김훈 2002년 9월 13일, 16일, 10월 30일)
-경기 평택시 코모키이비인후과(2002년 10월 16일) -이때 이명확실 하다란 진료
-충남 홍성읍 윤이비인과(윤동민 2002년 10월 7일,
-충남 홍성읍 최이비인후과(최성기, 2002년 10월 21일, 10월 23일)
-경기 부천시 백이비인후과(백기학, 2002년 9월 30일)
-서울 신촌 연쇄이비인후과(정운교, 2002년 11월 1일, 4일, 2003년 9월 16일)
-서울 청담동 소리이비인후과: 이승철, 박홍준, 전영명
( 2002년 11월 1일, 12월 7일, 2003년 2월 7일, 3월 13일, 6월 23일)
6. 내과(소화장애) 치료
-경기 부천시 성모의원(나명균, 2002년 9월 18일, 19일)
* 병원 처방전(이비인후과, 안과, 내과, 전립선)치료 약국
1) 경기 고양시 중앙프라자약국(2002년 4월 22일 ~ 25일) 무릎치료약
2) 경기 고양시 원당약국(2002년 1월 ~ 8월) 전립선약
3) 경기 고양시 건강약국(2002년 6월 27일 ~ 8월 24일) 전립선약
4) 경기 부천시 광장약국
(박혜영, 2002년 9월 2일, 19일, 27일, 10월 1일, 15일, 2003년 1월 3일) 이명, 안과 약
5) 경기 부천시 하나로약국(김수현, 2002년 9월 18일, 12월 7일) 내과, 안과 약
6) 경기 부천시 다모아약국(이명희, 2002년 9월 30일) 이명 약
7) 경기 평택시 평택종합약국(박수길, 2002년 10월 16일) 이명 약
8) 충남 홍성읍 종합약국(2002년 10월25일) 이명 약
9) 충남 홍성읍 서부약국(2002년 10월 28일) 이명 약
10) 서울 용산구 신용산약국 (.2002년 10월 30일) 이명 약
11) 서울 청남동 청담프라자약국(2002년 11월 1일, 2002년 6월 23일) 이명 약
12) 서울 신촌 신도약국(2002년 11월 1일) 이명 약
13) 경기 부천시 메디칼약국(서성원, 2002년 11월 4일) 이명 약
14) 경기 부천시 광장 기준약국
(최용희, 2003년 3월 11일, 13일, 26일, 31일, 4월 8일, 18일, 5월 13일, 6월 7일) 전립선약
15) 충남 홍성읍 신세계약국(허영 2003년 5월 8일) 이명 약
16) 서울 신사동 청솔약국(2003년 5월 6일, 6월 17일) 안과 약
그리고 인터넷 Daum(이명, 난청 동호회) 카페에서 이명치료를 잘하는 한의원, 이비인후과, 내과 등에서 이명과 돌발성 난청에 좋다는 것을 추천하면 먹어보고 찾아가 보았다. 이명치료(위~잉 소리, 벌떼소리)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본인의 신체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았다. 이런 증상 때문에 대인 기피증이 나타나 가족과 친한 친구 외 연락하지도 받지(백호관장이 전화가 오면 받지 않음, 이유는 본인 병세가 더욱 악화 될 것 같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도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다 본인이 어떻게 될 것(미쳐 버릴 것) 같아 정신수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홍성과 부천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여 평택에 사는 누나 집 근처(명법사) 사찰에서 명상과 기(氣)수련(산에서 수련)을 2개월(2002년 10월 30일 ~ 2003년 1월 8일까지)넘게 수양을 하였다.(이 기간에 병원 치료도 병행 함)
이명 난청 카페에서 추천해 준 서울 압구정에 위치한 자생한방병원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본인의 몸과 마음의 병이 호전될까 싶어 2002년 11월 11일(월)에 방문하여 신준식 원장과 박근용 한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본 결과 이명과 돌발성 난청, 소화 장애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하여 기혈 순환이 안 되고 흉부(가슴)부위에 화열이 뭉치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하고 손발에 힘이 빠지고 피로해지게 되며, 화열이 얼굴에 올라가 홍조가 나타나고 턱관절에 긴장이 발생하여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위~잉 하는 것이 귀에 들릴 수 있어 이명과 돌발성 난청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진단으로 2002년 11월 11일(월) ~ 2003년 1월 3일(목)에 치료와 화병으로 인한 이명을 다스리는 형방탕을 2회(두재, 2002년 11월 11일, 12월 6일)복용 후 많이 호전되어 3회차(2003년 1월 3일 세 번째 방문시)에는 기온을 도와 안정된 상태가 되는 환약을 복용하였다. 그리고 악관절(턱관절) 교정으로도 많이 호전되어 지금 현재 많이 안정된 상태이다. 그렇게 한약을 3개월 복용하고 명상과 기수련(산에서 수련)을 2개월을 하니 본인 몸 ․ 마음과 눈(망막박리), 귀(이명, 돌발성 난청) 상태가 점차 호전되어 가고 있었지만 무릎과 전립선염이 다시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는 이명과 안과 질환 통증 때문에 무릎과 전립선 통증을 못 느끼고 지낸 것 같다. 그 두 질병이 호전되면서 통증이 무릎 슬개건염과 전립선 통증 많이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릎에 파스보다 효과가 좋다는 일본 키네시오 테이핑 6개를 2003년 1월 6일(월)구입하고 2003년 2월 12일(수)에 국산 비비테이핑 10개를 구입해 지금 현재 2003년 10월까지 무릎을 치료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된 전립선 통증을 2003년 3월 11일(화)부천에 있는 현비뇨기과에 진료 결과 전립선염이라 다시 진단하여 현재 2003년 6월까지 치료 후 관찰 중이다. 본인을 힘들게 한 망막박리는 현재 순천향대교 부천병원 안과 망막전문의 온영훈교수에게 증식유리체 망막증, 후발성 백내장 등 정기검진을 받고 있으며 또 다른 곳 압구정 성모안과에서 망막박리 치료 중 포도막염(2003년 5월 6일)을 발견하여 김민호선생에게 치료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광시증(눈 속에서 번쩍이는 현상), 물결현상(눈 속에서 물이 흔들리는 것), 후발성 백내장, 증식 유리체 망막증(망막박리가 계속 진행되는 현상)이 완치가 안 되어 현재(2003년 10월) 망막을 정기검진을 받고 치료 중이다. 또한 이명은 여러 치료 방법과 마음안정으로 인해 호전되어 현재 완치되었으나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 남게 되어 정신적 후유증을 크게 남기게 하였다.
위 내용처럼 본인이 근무하면서 오랜 수업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발생한 과로로 인하여 신체기능이 저하되고, 질병에 대한 저항 능력이 감소되어 여러 질병이 발생한 것은 관장님은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도의적 보상을 떠나 당연히 보상받는 것이 본인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본인의 나이는 27세이고 올핸 28세 인데 지금 현재(2003년 10월) 한참 생활에 전성기와 일할 나이인데 수개월 넘게 병원 치료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손실과 시간낭비, 정신적 고통(육체적 포함)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2002년 9월부터 2003년 10월 현재까지 14개월 동안 수술비 및 병원치료비(진단서 포함)와 처방약(한약포함)으로 지출된 경비만 해도 약 500만원(병원비, 치료비, 수술비, 질병 치료에 대한 보조식품) 넘게 지급되었다. 그래서 2000년 4월 3일(월) ~ 2002년 8월 28일(2년 4개월)까지 근무한 퇴직금 등에 대해 보상과 요양비(정신적, 육체적 피해 보상)를 받음이 정당하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작성 할 때까지 수없이 생각했으며 질병 치료에 들어간 비용도 중요하지만 관장님께서 현재(2003년 10월)까지 본인에게 도의적 성의표시가 없었고 비인간적, 비도덕적, 비신사적 행동 때문에 본인은 부득이 냉정하게 판단하여 본인의 권리를 찾고자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늦게 작성한 이유는 지난해 2002년 9월 10일 망막박리수술 이후 안과 질환, 이명, 돌발성 난청, 전립선질환, 화병, 무릎 증상 때문에 치료에만 전념을 하다보니 작성이 늦어졌으며. 모두 완치가 안 되었지만 육체적으로는 점점 안정이 되고 있는 상태이다.
지금 현재 바라는 것은 산재판정을 받는 것과 보상을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처럼 부당한 대우 및 작업환경 때문에 질병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 및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와 현재 백호체육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범들이 아픔을 잘 파악해줘야 하며 휴식 시간과 노동 강도의 완화, 휴식시간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제 2의 본인처럼 계속된 질병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치료의 차원이 아니라 예방의 차원으로 근무조건을 개선해 나아가면 산업재해는 없을 것이고 억울함 또한 없을 것입니다.
본인은 위내용을 사실 그대로 백호체육관에서 2년 4개월(2000년 4월 ~ 2002년 8월)동안 근무한 과정에 대해 작성하였습니다. 위 글을 읽고 관장님께서 많이 불편하시리라 생각이 들지만 본인의 고통에 비해 비교가 안 될 것이라 생각 듭니다. 관장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줄 모르겠지만 병을 앓아 본 사람만이 그런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완치를 위해 지푸라기를 잡고 싶은 심정을 이해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관장님 본인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 받으면서 지금까지 생활하는 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가슴속에 가지고 있던 일들을 글로 표현하니 얹힌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린 듯합니다. 본인이 왜 이런 글을 써야 했는지 관장님은 조금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 백호체육관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본인은 헌신적으로 백호체육관 발전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한 가요. 또한 질병에 대한 대가가 고작 10만원으로 끝날 수 있었는가요. 본인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 죄책감 및 도의적으로 책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돈버는 이용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억울하였습니다. 고교․체육관․고향 선배인분께서 후배에게 위내용처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본인 생각으로 아직까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본인은 후배들에게 정말 그렇게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상과 같이 본인이 겪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따른 보상과 과중한 업무로 통한 질병치료 비용, 퇴직금을 정식으로 요구하는 바입니다. 만약 본인에게 납득할 만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끝으로 진심으로 백호체육관 발전과 백호관장 가족의 건강을 바랍니다.
2003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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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부탁드립니다.---------
지금 현재 그분이 전화가 왔는데 좀 욕설하고 있어요.
전 참고 있지만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