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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그리고 석굴암에 숨겨진 정치풍경
신라 중대(中代)에는 사찰과 부대시설을 건립하고 부처를 받드는 불사를 나라의 모든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날로 심해지는 귀족의 반발과 각종 내우외환으로 근심하던 경덕왕은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으로 왕권강화와 귀족세력 억제효과를 노렸다. 글 이주천(원광대 교수) 사진 연합
신라 중대의 정치·문화
경주를 가면 반드시 관람해야 할 것이 바로 토암산 중턱에 위치한 석굴암이다. 우리나라 국보 24호로 지정된 석굴암은 원래 석불사(石佛寺)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명칭이 바뀌었다. 석굴암은 신라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35대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에 의해 시작돼 20여 년이 걸려 혜공왕 10년(774)에 완공되었다.
석굴암이 준공된 때는 한반도 통일 이후 약 100년이 되는 시기로 통일신라가 그야말로 문화적으로 절정기를 이룬 시대였다. 김춘추 태종무열왕계가 왕권을 독점 계승해 왕권강화를 추진했던 시기를 신라 중대라 하는데, 경덕왕이 이 시기 마지막 왕이다.
석굴암과 같은 대규모 불사를 추진하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진골귀족 태종무열왕계 김춘추와 가야계 김유신은 신라의 지배구조를 변화시켰다. 그런데 신문왕의 장인이면서 김유신 사후 가야계 수장으로 활약하던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가야계를 중심으로 한 화랑도 세력이 대거 숙청되면서 삼한통일에 공을 세운 공신들의 기세가 꺾였고, 이를 기회 삼아 문무왕·신문왕 등 태종무열왕계의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왕위계승에서 밀린 서라벌 귀족의 저항은 완강했다. 신문왕 9년, 수도를 경주 서라벌에서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천도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지방세력과 연대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귀족의 반발로 수포로 돌아갔다(『삼국사기』 제8권).
경덕왕의 왕권강화책
통일 이후 신라 왕실은 귀족세력 억제와 전제왕권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742년에 왕위에 오른 경덕왕도 마찬가지였다. 경덕왕은 이름이 헌영이며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효성왕의 동생이다. 왕은 즉위 후 선대왕처럼 전제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아래의 세 가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첫째, 외척세력을 견제했다. 경덕왕은 즉위 후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구실로 삼모부인(三毛夫人)을 출궁시키고 후비인 각간(角干)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왕비로 세웠다. 의충이 성덕왕 말기에 대당외교를 주도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친위세력인 친당파의 우두머리임을 알 수 있다. 경덕왕은 왕비의 교체를 통해 외척세력을 물리치려 했다.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의 “음경(陰莖)이 여덟 치나 된다”고 자세히 언급했는데, 음경의 길이가 약 24cm로 상당한 호색(好色) 군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천제(天帝)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들에 집착했다. 얼마 후 만월황후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혜공왕이다.
둘째, 한화(漢化)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김춘추가 즉위하기 전 나당동맹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친당세력은 서라벌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정치 신진세력으로 등장했다. 통일 이후 친당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외교적 사대주의와 문화적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경덕왕은 여러 지명을 한자어로 바꾸고 중앙 부처를 개편하면서 부서명까지도 중국식으로 개명하고 국학과 박사를 두었다. 특히 국학의 설치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친위세력을 육성하려는 시도였다.
셋째, 불교 중흥정책을 천명하면서 국론을 통일하고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이전부터 신라 왕실은 불교를 삼한통일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고, 통일 이후에는 부처님의 힘을 빌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기원했다. 신라 왕실이 최후로 믿고 정신적 안식처로 삼았던 곳이 불당이고 부처님이었다. 삼한통일의 과정에서 뛰어난 승려의 활약은 대단했다. 원광법사는 화랑도의 세속5계를 지침으로 정해 국가적 대사에 솔선수범했다. 나당전쟁 당시 당의 장안에 체류한 의상대사는 유학을 포기하고 급히 귀국해 귀중한 군사정보를 신라 왕실에 전달했다. 또한 자장법사는 ‘불국토사상’을 제창했다. 이는 “신라의 불교는 결코 새로운 종교가 아니며 과거세(過去世)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인연이 깊은 이상국(理想國)”이라는 주장이다. 자장은 중국·일본·말갈 등 9개국이 신라에 항복하고 삼한통일을 부처에게 빌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황룡사9층탑 건조를 건의했다.
“신라 27대 왕으로 여왕이 즉위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여러 오랑캐들이 침범했다. 만약 용궁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잠재울 수 있다고 했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中華),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거란,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濊貊)에 해당된다.” (『삼국유사』)
불국사·석굴암 창건
경덕왕 시절은 신라 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때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각종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재위 연간에 발생한 총 25차례의 천재지변이 기록되어 있다. 재난의 형태는 대부분 다음의 두 가지로 이뤄졌다. 첫 번째는 경제난으로 굶주림에 지친 농민이 도적떼가 되어 땅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는 경우, 두 번째는 국가가 가하는 무거운 부역으로부터 도망을 가거나 고향을 등지는 경우였다.
경덕왕은 성품이 검소질박하지 않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과시소비형 군주였다. 정치적 안목과 식견이 부족했던 그는 천재지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차례 무모한 역사(役事)를 진행했다. 동궁과 영창궁을 수리하고 궁궐 내부에 큰 못을 파기도 했으며 서북지역에 대규모 축성(築城)사업을 벌였다. 게다가 경덕왕은 자신의 궁궐을 중수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대규모 불사(佛事)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불국사를 중수하고 석굴암을 건축한 배경이다.
원래 불국사는 법흥왕 때 창건(創建)되었고 진흥왕 때 중창(重創)되었으며 경덕왕 때 두 번째로 중수(重修)되었다가 혜공왕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불국사는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이 전생(前生)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현생(現生)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성 생전에 완공하지 못해 그의 사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았다.
경덕왕은 대규모 불사를 일으켜 왕실의 존엄을 과시하고 나라의 안녕을 부처님에게 호소하려는 일거양득의 정치적 효과를 노렸다. 그는 불력(佛力)을 통해 서라벌 귀족을 억누르고 왕권강화를 통해 자자손손 태종무열계의 왕실이 번영하기만 빌고 또 빌었다. 왕은 만약 그 소원이 성취만 된다면 왕실의 무리한 재정지출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규모 불사로 인한 경덕왕의 실정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라 왕실이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하고 선동한 인물이 바로 김대성이다. 그는 예술가의 조각적 재능과 정치적 감각을 동시에 소유한 보기 드문 인물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풍미했던 조각가이며 천재인 미켈란젤로에 비견될 수 있다. 김대성은 효행으로 서라벌에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불심(佛心)이 깊었다.
그는 재상을 지낸 김문량의 아들로, 745년(경덕왕 4) 집사부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불국사와 석불사 창건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김대성은 경주 모량리(牟梁里) 가난한 집의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 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했는데 그 후 얼마 안 가 죽었다. 그러나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 전세의 어머니 경조를 모셔다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좋아했던 김대성은 곰을 잡았다. 그날 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며 환생해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은 자기를 위해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불국사와 석불사를 세웠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에는 김대성은 물론이고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 김부식은 김대성과 그의 업적을 철저하게 외면했던가? 고려 중대를 살았던 철저한 유학자요 현실정치가인 김부식이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대규모의 불사를 추진했던 김대성의 행위 자체를 신라 왕실 재정파탄의 원인으로 간주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은 자명하다.
김대성은 심해지는 귀족의 반발과 각종 내우외환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경덕왕의 의중을 어떻게 위로했을까.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불사를 통해 부처님의 힘으로 왕실과 나라를 안정시키자’는 것이었다. 경덕왕 시대로 오면서 신라사회에서는 각종 사찰과 부대시설을 건립하고 부처를 받드는 불교 중흥정책이 나라의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선덕여왕 때 건축한 황룡사9층탑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귀족과 백성의 심한 반발이 있었지만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국가존망의 위기라는 점에서 이를 간신히 무마할 수 있었다. 어쨌든 황룡사9층탑의 창건과 부처님에 대한 기도의 효험이 있었던지 삼국 중에서 국력이 가장 약한 신라가 삼한통일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러나 불국사와 석굴암 건축을 위해서는 재원과 부역조달에 귀족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한편으로는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소유한 부역을 강제동원하고 재원조달을 독촉하지 않으면 안됐다. 귀족이 이에 격심하게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경덕왕은 사찰뿐 아니라 대종(大鐘)에 대한 집착 또한 강했다. 754년에 황룡사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3치, 두께는 9치, 무게는 49만7천581근이다. 그리고 길이 6자8치가 되는 종도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무게가 30만6천700근 되는 분황사 약사여래상을 만들었다. 또 돌아가신 부왕(父王)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12만근을 들어 큰 종을 만들었는데, 그의 아들 혜공왕 때인 770년에 완성되었다. 그 종의 이름을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 했다(『삼국유사』 제3권 제4 탑상편).
경덕왕 시절에 일으킨 각종 대규모 역사와 불사는 왕실에 대한 민심이반(民心離叛)을 가속화시켰고, 신라 왕실의 재정난을 초래해 왕실의 안녕은 커녕 조세를 둘러싸고 왕권과 귀족 간의 대립과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으며, 왕실을 경비하는 호위군과 관료들에게 주는 봉급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국 이는 경덕왕이 추구했던 한화식 개혁정치의 후퇴를 가져왔으며 친위그룹이 물러나고 귀족을 다시 등용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후일 혜공왕 시절 귀족이 반란을 일으키는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재위 16년 “서울과 지방 관리들의 월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경덕왕 말년 왕의 실정(失政)에 대해서 질책·충간(忠諫)하는 신하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흔들리는 왕권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다. 경덕왕 재위 15년 “상대등 김사인이 천재지변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이유로 왕에게 상소하여 시국정치의 잘잘못을 극론했던바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한 왕이 죽기 2년 전인 재위 22년에 왕이 총애하는 신하가 갑자기 산으로 은거생활에 들어갔는데, 왕이 풍악을 즐긴다는 말을 듣고 즉시 찾아가 간언(諫言)하기를 “옛날에 걸주(傑紂)가 주색(酒色)에 빠져 음탕한 오락을 그칠 줄 몰라 정치가 결단나고 국가가 망하고 만 것을 경계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왕의 반성은 잠깐이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정지하고 그가 말한 오묘한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며칠 동안 듣다가 그쳤다.” (『삼국사기』 제9권)
또 「안민가(安民歌)」에 얽힌 설화도 당시 경덕왕의 정치적 실패를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경덕왕이 죽기 직전인 재위 24년에 법명(法名)이 충담사(忠談師)라는 승려가 왕 앞에 나가서 「안민가」라는 노래를 바치고 사라졌다. 이 노래의 핵심은 백성이 굶주리고 있으나 지배층은 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또한 이들이 임금과 신하들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신라 쇠퇴의 서막
통일신라의 문화적 전성기였던 경덕왕 시절, 신라는 타국과의 외교관계는 개선하지 못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조공무역을 위주로 한 외교는 타국 특히 일본이나 발해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했으며 신라는 서서히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당에 지나치게 의존한 사대주의 외교로 통일신라는 외교적 역동성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100년 전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담판하여 토굴에 갇혀 자칫하면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고, 모진 풍랑이 몰아치는 현해탄을 건너 왜국과 관계를 개선하려 했으며, 또 당과 군사동맹을 추진하기 위해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김춘추의 개인외교는 이제 구식이 되고 만 것인가?
경덕왕 즉위 원년에 일본 사신의 접견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거절했고, 753년에는 다시 내방한 일본 사신의 태도가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만으로 접견을 거절하였다. 나당연합군과 백제-왜의 연합군이 벌인 백강전투(AD 663) 이후 근 100년이 지났지만 신라와 왜 양국 간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일본과의 외교관계 단절은 신라의 경제와 대일교역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는 서라벌 귀족 가운데 대일무역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경남·남해연안의 상업세력들에게 손해를 입혔다. 그 결과 당과의 사대외교를 통해 조공무역을 독점한 왕실, 이를 호위한 친위그룹인 친당세력들과 상업세력의 반목이 날로 심해졌다.
경덕왕의 한화식 개혁정치는 그의 사후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됨으로써 완전히 실패했다. 혜공왕 재위 16년간 무려 5차례에 걸쳐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김양상의 반란으로 왕이 살해되고 무열왕계는 단절되었다. 이로써 국운이 쇠퇴하는 신라 하대가 등장하는 것이다. 충담사의 표현대로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답지 못하고, 백성답지 못한 사회’가 시작되었다. 이제 귀족 간의 왕권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살벌한 유혈(流血)의 정치무대가 막이 열렸다. 비록 경덕왕-혜공왕대에 와서 무열왕계가 독점한 왕권은 대가 끊어지고 사라졌지만 끊어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신라문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국책 불사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완성되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사찰이며 조각건축물로서 영구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위대한 예술 건축 작품이 결국 왕위를 집어 삼키고 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덕왕은 아들 대에서 권력을 상실했지만 대신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소중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는 점에서 지하에서나마 약간의 위안으로 삼을 것이다. 과연 신라 천년왕국은 언제까지 그 화려한 영화(榮華)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