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예(濊)는 동해안 지역에 자리한 세력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종족 명칭인 예족(濊族)과 구분해 흔히 동예(東濊)라고 부른다. 동예는 옥저(沃沮)처럼 주변 여러 세력의 통제를 받아 내부적으로 강력한 정치 권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료에 보이는 동예 사회의 모습도 여러 읍락이 서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엄밀히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산천(山川)은 수렵과 채집 및 어로 활동의 중요한 터전이었다. 그러므로 이를 구분해 서로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제 활동의 단위가 읍락으로 제한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읍락 내부의 결속과 유대는 강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읍락이 점유한 산천은 소수의 읍락민이 독점 내지 과점하기보다 다수의 읍락민이 공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공동체적 생산 양식으로 생각되는데, 흔히 이러한 동예 사회의 풍속은 원시 사회의 유산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