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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요 19:28-30)
할렐루야! 오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다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아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 어떤 형편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 땅에 오실 구원자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 53:4-6절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멸시와 조롱 속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믿는 사람이거나,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탄생과 죽음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은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말할 수 없는 멸시와 수모를 받으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곱 마디 말씀을 간단하게,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일곱 마디 가운데, 오늘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짧은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무엇을 성취하셨을까요?
존 파이퍼가 20년 전 쓴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 당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장면부터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12시간의 행적을 사실적인 영상으로 담아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기 전이나 보고 난 후, 읽을 수 있도록,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성경적인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쓴 책이었습니다. 부제로는 “예수가 못 박힌 50가지 이유”였는데, 이번에, 그 책이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50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다시 출판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왜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셨는가?”라고 질문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으로 무엇을 성취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그토록 고난받으셔야 했습니까? 갈보리에서, 세상을 위해 무슨 큰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자는 “저는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50가지 이유를 신약성경에서 찾아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느냐보다 무한히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무엇을 성취하셨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50가지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50가지 이유 가운데, 몇 가지만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위해 /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기 위해 /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기 위해 /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 /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 우리를 향한 율법의 법적 요구를 제거하기 위해 /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 /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무엇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어마어마한 능력을 왜 보여주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우리 모두의 대속물로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는데,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길로 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쉽고 편한 길, 넓고 잘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좁고 힘든 길, 포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울퉁불퉁한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올라가신 갈보리 산, 그 골고다 언덕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만 합니다.
숱한 핍박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던 사도 바울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국회의원 선거운동 기간입니다. 후보들 모두,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지만, 비례 정당을 포함하여, 38개의 정당이라고 하는데, 비례 투표용지가 51cm가 된다고 하는데, 그 많은 후보들 가운데, 마지막 날 웃을 사람은 당선된, 단 한 사람일 것입니다.
당선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요? 지금까지의 경험상, 당선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일까요?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신 모든 것들이 다 성취된 것일까요? 더 이상 성취해야 할 다른 것은 없는 것일까요?
기독교는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이 중요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부활을 향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첫걸음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다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라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 십자가에서 죽어야, 우리는 부활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지 않았는데, 어찌 다시 사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죽음을 넘어 부활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에,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삶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어느 가수는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어느 작곡가는 8번 교향곡을 쓰다가, 미완성인 채로 멈추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곡을 가리켜,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부릅니다. 위대한 화가들도 보면, 작품을 온전하게 완성하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겨진 작품들이 많다고 합니다. 보령 대천항으로 들어가는 길에 보면, 짓다가만 아파트가 26년째,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미완성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 이루었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에 당선될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다 이루었다”라고, “드디어, 내가 이루고자 했던 소망을, 가문의 영광을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가운데, 다 이루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33세의 나이,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내 인생은 다 끝났다. 허무하다. 시작도 못했는데, 망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채,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시며,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다 이루었다”라는 헬라어의 원어를 보면, “테텔레스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그 당시, 누구나 사용하고 있는 아주 흔한 말이었다고 합니다.
먼저,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은 종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시키면, 종이 그 일을 다 마치고 난 후, 주인에게 돌아와서는 “테텔레스타이”(제게 시키신 일을 다 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하고자 하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는데, 아버지의 원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다음으로, 화가들이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어느 화가가 멋진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실에 들어갑니다.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려,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크게 기뻐하고, 뒤로 물러서서, 그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며, “테텔레스타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림을 다 완성했다”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솔직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예언과 표적, 의식과 상징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약 성경을 미완성인 그림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모든 그림을 완벽하게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구약 성경을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이해가 되어집니다.
첫째, 구약의 모든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단번에 완성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제 더 이상, 양과 염소와 소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구약의 모든 율법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셋째,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메시야 탄생, 사역, 생애, 배반당하심, 죽음과 부활 등의 모든 예언이 그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출애굽할 때,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름으로, 장자의 죽음이 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미리 구원의 그림을 보여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심으로, 그 구원의 약속들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은 종들이 “주인이 시킨 일을 다 마쳤습니다.”, 화가들이 “작품을 다 완성했다”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상인들이 흔히 쓰는 말이었습니다. 한 상인이 회사에 물건을 납품합니다.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6개월짜리 어음이나 1년짜리 어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회사에 납품한 물건값을 금방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6개월짜리 어음은 6개월 후에나 받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6개월 후에 찾아가면, 3개월짜리 어음을 다시 발행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건을 납품하고도, 돈을 받을 수가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일을 해 주고도, 월급을 받지 못해,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송에는 새로운 아파트를 비롯하여, 많은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건물이 세워진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분양이 되어야 합니다. 짓고 있는 건물들 앞에는 분양한다고 하는 광고물들이 넘쳐납니다. 파라솥과 탁자를 갖다 놓고, 그곳에서 분양을 상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새 건물 앞에, “입주도 하는데, 분양대행 대금을 지불하라. 1년 동안 기다렸는데, 밀린 임금을 지불하라”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열심히 분양 상담하던 사람들이 1년이 넘도록, 건물주로부터 그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그 현수막을 본 건물주가 그들에게 임금을 다 지불하면, 현수막을 걸었던 사람들이 “돈을 다 받았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하는 말이 바로, “테텔레스타이”(돈을 다 받았다)입니다.
시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4)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대출금을 남김없이 속량해 주셨습니다. 다 갚아주셨습니다. 더 이상 갚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은 법정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판사가 어떤 죄인을 재판하다가, 이 사람의 죄가 없다고 무죄를 선고할 때,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죄가 없다”라고, “테텔레스타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법정 공휴일이나 국가 기념일을 맞이하여, 대통령이 특별사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회의 동의도 필요없이, 오직 대통령의 권한으로 특별사면을 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사면을 받게 되면, 형 집행이 면제됩니다.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있던 사람도, 특별사면을 받으면, 자유의 몸이 되어 감옥을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 집행이 면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형 집행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기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시고,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나를 지옥에서 건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셨기에,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마 27:51).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가상 칠언 가운데, 두 마디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목마르다”(28절)
“다 이루었다”(30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얼마나 목마르셨을까요?
다윗은 예수님이 당하실 이 목마름의 고통을 예언했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5)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우리의 모든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한 자가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라는 이 말씀은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습니다.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죄 많은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새 길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총이며, 축복입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기쁨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부활의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주님을 의지함으로, 부활의 참된 기쁨과 승리 속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