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1 살림교회 송구영신예배
순례의 여정에서
시편84:1~7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오늘 공동기도문으로 기도드린 것처럼, 한 해를 돌아보면 힘들고 지친 시간들이었고, 또 아쉬움과 회한이 남는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다시 그 모든 시간들을 잊고 이제 새로운 시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실은 매일 매일이 새해 첫날처럼 살면 좋겠지만, 특별히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고 작은 의례를 행합니다.
먼저, 한 해의 끝 지금은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감싸는 시간입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하고 , 약함과 한계를 받아들이며, 한 해를 애써 살아낸 것에 대해 “힘든 중에도 애썼다!” “올 한 해 수고했어!” 자신에게 쓰담쓰담 해주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잘못과 실수, 약함과 한계를 자신을 책하거나 위축시키는 자료로만 쓰지 않고, 좀 더 겸손해지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료로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올 한 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 중에, 좋았던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소중한 기억, 진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기억 말입니다.
<새명상의 씨>에서 토머스 머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억은 무수히 많은 “기억들(memories)”에 의해 오염되고 망가집니다. 내가 진정한 기억을 가지려면, 반드시 먼저 잊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기억이 단지 과거와만 연관되어 있다면 기억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은 기억은 지금 여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참된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전혀 기억이 아닙니다. 사실들과 과거의 사건들 밖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은 기억상실의 희생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한 해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습니까? 그 기억이 여러분의 삶의 층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랍니까? 지금 여기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 기억을 갖기를 원합니까? 그러려면, 무수히 많은 기억들을 먼저 잊어야 합니다. 진정한 기억은 단지 과거의 사건들이나 사실들이 아닙니다. 지금 오늘 여기를 풍성하게 살아내게 하는 힘이 진정한 기억입니다. 과거의 기억들에 매여서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는, 현재를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우리가 오늘 이것만 기억한다면, 오늘 이 시간은 절대 의미없는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시편84편의 말씀은 주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순례자의 마음이 잘 표현된 시편입니다. 순례자는 주님의 집을 사모하고 그리워합니다.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거지요. 참새도, 제비도 제 집을 짓고 새끼 칠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어디 멀리 여행을 다녀와서 다시 돌아올 집이 있으면 행복하지요. 집에 도착해서는 뭐니뭐니해도 집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짜 집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행복할까요? 시인은 노래합니다. “행복합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이들!”
“사랑의 굴복한 삶”(A life surrendered to Love)이라는 유투브 영상에서 누군가 키팅 신부님께 이렇게 묻지요. 토머스 신부님, 남은 여생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라고 여겨집니까?
그때 키팅 신부님이 수줍은 듯 웃으며 말하지요. “(바라건대) 이미 집에 온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온 생애가 하나님의 집에 사는 것이지요. 여기서 집이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희망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권능에 있습니다. 희망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선행, 혹은 자기 삶의 어느 시점에 행한 공로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아무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라는 바흐 성가가 있지요? 죽음은 달콤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한 침잠이나 자기 상실로 가는 마지막 장벽 혹은 하나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할 때 달콤합니다. 이 광활한 공간 속 충만한 생명, 그것이 선한 모든 것의 집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신기합니다.”
순례자는 이런 마음으로 이런 집을 향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하나의 의례로 행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오늘 말씀에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라고 노래합니다. 시온을 향해 떠난 사람은 주님의 힘을 얻어 순례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순례의 길이 쉽고 가벼운 길은 아닙니다. 거기로 가려면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이 말의 원어는 “바카 골짜기”인데, 아마도 시온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서 순례자들이 지나는 골짜기였나 봅니다. 주석가들은 이 “바카 골짜기”를 “메마른 골짜기”, “물이 없는 골짜기”라고 이해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눈물의 골짜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 “메마른 골짜기” “물이 없는 골짜기” 이는 분명 우리 앞에 놓인 현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너무나 실감나게 경험하는 골짜기입니다. 올 한해도 이런 눈물의 골짜기를 경험했고, 또 내년에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골짜기가 우리 앞에서 싹 사라지기만을 기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그들이 ‘눈물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그런데 그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샘물도 같이 있음을 봅니다. 가을비가 내려서 샘물을 가득 채우고 있음도 봅니다. 이러한 시선은 분명, 감춰져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말해주는 시선입니다. 그때 우리는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내년 일 년 우리에게 꽃길만 열리지는 않을 것을 압니다. 또 우리가 꽃길만을 열리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순례자의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눈물 골짜기”에도 “샘물”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넓히고 의식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순례자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광활한 공간 속 충만한 생명”을 경험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보름 전에 저는 어머니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지켜보았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 한 것처럼, 어머니의 육신은 한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쩌면 매우 허망한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그 창세기 말씀은 이렇게 이어지지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 인간조건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지요.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가 이 세상을 영원히 살 것처럼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이 화구로 들어가 한 줌의 재로 나오는데, “어머니가 큰 짐을 내려놓고 먼지처럼 가벼워졌구나, 저 장면을 잘 기억하자.” 생각했습니다. 키팅 신부님이 이런 말도 하지요?
“영적인 삶이란 우리가 죽을 때 해야 할 일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2022년은 이제 과거로 돌아가고 곧 새해가 올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 자녀”라는 여러분의 정체성에 해를 끼치는 과거의 기억들은 잊어버리고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을 잘 기억하는 한 해의 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고 있고, 아니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