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310주일설교 요한2서1:12(기쁨이 충만한 삶)
본문: 요한2서1:12
제목: 기쁨이 충만한 삶
오늘은 요한2서 1:12의 말씀을 가지고 “기쁨이 충만한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기쁨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릅니다. 조비산 같은 곳은 길어야 한 시간이면 오릅니다. 구봉산은 2시간 정도면 올라갑니다. 지리산 천왕봉은 빠르면 4시간이면 오릅니다.
더 높은 산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오를 수 있습니다. 말이 4시간이지 거의 죽을 힘을 써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직하면 주영이가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간 것도 아니고 중턱 정도 갔는데 하는 소리 왈 지리산을 확 깍아 내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려면 숨은 차고, 다리는 아프고, 목은 마르고, 싶하면 하늘이 노래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산에 올라갈까요? 그것은 정상에 올랐을 때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시원하게 부는 바람,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과 들녘과 강과 바다를 보고 느낄 때 오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미천에도 새벽에나 밤 중에 운동을 가보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그 찌를 바라보며 차가운 날씨에 혼자서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잘은 모르지만 고기가 잡힐 때 오는 손맛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 사람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을 합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서 먹기도 합니다. 그래서 식도락이라고 합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옷을 사기도 하고 다른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돈을 많이 씁니다.
저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랑이라는 열매를 살펴보았습니다. 기초과정으로 애통함과 겸손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잘 열려 있어서 보기도 좋고 쓸모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과나무라고 하지만 열매가 없거나 열매가 별로 안 열리거나 보기가 좋지 않다면 그것처럼 보기 싫은 것은 없습니다. 사과나무의 꽃은 다른 나무의 꽃보다 예쁘지 않습니다. 나무 자체도 그리 쓸모가 있지 않습니다. 사과 열매가 없다면 사과나무는 초라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정상적인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자라고 하지만 몇 년이 신앙생활 했다고 하지만, 무슨 직분을 가졌다고 하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처럼 초라하고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의 열매 두 번째인 희락이라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희락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희락은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무엇이고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기쁨은 어떤 만족감에 의해 느끼는 즐겁고 흥겨운 감정
즐거움은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쁨을 말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기쁨은 느낌이라면 즐거움은 어떤 상태를 말할 수 있습니다. 명확하게 즐겁다와 기쁘다를 구분할 수 없고, 같은 뜻이거나 비슷하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희락이라고 말하는 것은 흥겹고, 흐뭇하고 기쁘고 행복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기를 원하고 흥겹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한가지 바로 성령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듯이 성령의 열매는 성령 안에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1.거짓 기쁨이 있습니다.
거짓 기쁨이란 성령 안에서 오지 않는 기쁨입니다. 세상은 기쁨을 준다고 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기쁨을 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하는 것들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는 기쁨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들을 합니다.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공부해서 무엇을 할까요? 공부해서 취직하겠지요, 취직해서 무엇할까요? 돈 벌겠지요, 돈 벌어서 무엇을 할까요? 개그 콘서트 란 프로그램에서 말합니다.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요”
소고기 사먹는 것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풍자한 것입니다. 인생이 결국은 소고기 사먹는 것으로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인생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일까요?
왜 공부를 할까요? 왜 돈을 벌까요? 왜 그렇게 인내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왜 병원은 가고 왜 힘쓰고 애쓰며 살고 있을까요? 결국 넓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맛있는 먹자고 하는 일일까요? 그것이 기쁨일까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일까요?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인생을 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에서 말하듯이 힘쓰고 애써서 고생하여 올라간 정상에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상에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고생한 결과가 결국 허무한 상태가 전부일까요?
우리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즐거움 곧 희락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즐거움을 향해 나가야 하며, 어떤 기쁨을 얻기를 위해 힘써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희락의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우리가 가고 있는 추구하고 있는 기쁨의 길은 바른 길일까요?
2.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거짓된 기쁨이란 성령 안에서 오지 않는 곧 다른 것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기쁨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거짓된 기쁨이며, 우리의 눈과 우리의 귀와 우리의 느낌을 속여 기쁨인 것처럼 보이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거짓을 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 서재에는 그림이 한 장 걸려 있습니다. 바다가의 모습입니다. 파도가 있고, 그 파도들이 작고 큰 돌에 부딪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그림을 보면서 아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시원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이기에 바다 냄새도 없고, 바람도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거짓을 표현하려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바다의 느낌과 풍경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바다는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을 벌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고,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올라가고, 자신이 원하는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기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를 기쁘게 시작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을 기쁘게 살려면 복권을 사고, 한 달을 기쁘게 살려면 차를 사고, 일 년을 기쁘게 살려면 집을 사라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기쁨들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기쁨을 얻었지만 그 기쁨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기쁨을 얻기 위해서 다시금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먹고 금방 또 물을 찾아야 하듯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도 그렇게 말할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이사야51:11)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우리 아닙니까?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드리러 나온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그때 영원한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이고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나갈 때 영원한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어떻게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세상에 기쁨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기쁨이 있다고 말하고도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나에게 나오는 것도 세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희락이 기쁨이 즐거움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듯이 요한사도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직접 보고서 말씀을 전하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들에게 기쁨이 충만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특별히 로마서14:7에서 천국은 곧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더 먹기 위해서 더 마실 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정욕으로 쓸 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는 다른 것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려고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16:24)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기쁨이 있기에 그 이름으로 구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7:13에서도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리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앞에서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배반하는 제자들이 있어도 예수님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세상이 다 떠나고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무너져도 어떻게 예수님께는 기쁨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기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살았기에 영원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쁨이 즐거움이 곧 희락이 성령의 열매이기에 그렇습니다. 분명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얻어진 열매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성령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얻어지지 않은 기쁨은 거짓 기쁨이며 일시적인 기쁨이며 사라지는 기쁨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얻어지는 기쁨만이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까요? 어떻게 기쁨이라는 열매를 맺도록 하실까요?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알려 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듣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참된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성령님을 만나는 장소는 예배 때입니다.
2.성령님을 만나는 때는 말씀을 읽을 때입니다.
3.성령님을 만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 말씀을 깨달아 져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이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면 오직 성령안에서 예배와 기도와 말씀 읽기와 듣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영원한 기쁨 속에 있게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푯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리라”
(히브리서 12:2)
보좌 우편=기쁨이 충만한 곳. 천국=기쁨이 충만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