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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7일 주일예배 설교
사도행전 1:6-14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의 회복
오늘 본문은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제자들의 이 질문, 어떻게 보이시나요?
당시 제자들의 질문을 후대의 눈으로 마냥 어리석게 보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는 수백 년의 기다림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외세의 지배 아래 살면서,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려온 사람들의 기대가 가득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우리는 이 질문의 간절함과 진지한 기대를 잘 알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질문, “언제입니까? 지금입니까?”를 마치 입버릇처럼 달고 살기도 합니다. ‘언제 이 고통이 끝날까, 언제 일이 풀릴까, 언제 관계가 회복될까, 언제 세상이 달라질까?’ 이 물음은 지금, 하루속히 이것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안타까움의 탄식이자 호소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의 이 질문을 ‘정치적이다, 민족적이다, 여전히 구시대적이다, 맹목적이다’ 폄하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가혹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또 “그런 일은 없다” 부정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단지 이렇게 말씀하실 뿐입니다.
“때나 시기를 아는 것은 너희 몫이 아니다. 그것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으로 정해두셨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어쩌면 예수께선 요즘 식으로 말하면 T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남아있을 제자들의 그 간절한 기대, 하나님의 회복이 언제 이루어질지 고대하는 것을 “그건 너희 몫이 아니다. 그러니 거기엔 관심 갖지 말고, 신경 쓰지 마라.” 단칼에 정리하시는 것을 보면요. 그러면서 곧바로 방향을 바꾸시는데요. 관심 가져야 할 실질적인 부분이 무엇인지 그 대안,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능력을 받을 것이다, 너희 위에 성령이 임할 때에. 그래서 너희는 내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와 온 유대에서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끝까지.”
‘언제’라는 물음을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로 전환하십니다. 아시듯이, 증인이란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법정에서 증언하는 목격자입니다. 예수께선 제자들의 질문에 공감하시면서도 “그대들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아는 해설자가 아니라, 그 일이 지금 자신들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살아내는 증인이다”라며 관심과 생각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환기하십니다.
또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로 전환 시키십니다. 예수가 그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증언하며 살아갈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도록 전환하십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면, ‘하나님, 언제입니까?’라고 묻기보다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고 활용하는 게 적절하지 않겠냐며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기대를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한 민족이 군사적·정치적으로 강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증언하는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선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이해하셨으며, 이것은 구약성서에 기초한 것입니다.
‘되찾아 주다’로 번역된 헬라어(ἀποκαθίστημι, 아포카티스테미)는 ‘회복하다’는 의미로, 70인역에서 포로 귀환이나 다윗 왕국의 재건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됐습니다. 마태복음 17:11이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데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아포카티스테미, ἀποκαθίστημι)"”
이것은 말라기 70인역의 표현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들은 히브리어 사본을 따라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번역하는데, 70인역에서 ‘돌이키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바로 본문과 마 17장의 단어입니다. 그러면서 내용도 살짝 바뀌는데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그의 이웃에게로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약 2200년 전에 이미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는 진정한 회복을 이렇게 이해하고 바라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가족 안에서 세대 간의 화해를 넘어, ‘사회 공동체 전체의 연대와 이웃 사랑’으로요. 물론, 여기서 이웃이란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배제한 동족 유대인만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이후 사도들과 신약 저자들은 이 이웃을 사마리안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 온 인류, 하나님의 피조물로 이해하며 증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이 단지 땅이나 나라를 되찾는 외적인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언서 안에서도 이미 확인됩니다. 예레미야 24:6-7절에서도 이 헬라어가 사용됩니다.
“내가 그들에게 눈길을 두어 선을 베풀 것이며, 그들을 이 땅으로 회복시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알게 하는 마음을 줄 것이다, 바로 나야말로 주님인 것을.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될 것이고 바로 나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두 차원의 회복을 동시에 말합니다. 외적 회복인 포로로부터의 귀환과 내적 회복인 ‘하나님이야말로 주님이심을 알게 하는 마음’을 받는 것. 그리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오래된 언약 공식이 나오는데요.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되고, 바로 나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예언자들과 구약은 이것이 회복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땅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첫 단추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백성,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마음을 받아 그것을 살아내는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 그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회복으로, 오늘 본문의 언어로 말하면 ‘예수의 증인들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1:8에서 말씀하신 방향인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는 지평은 단순한 지리적 확장만이 아닙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기피하는 사람들이 사는 땅입니다. ‘땅의 끝까지’ 역시 어느 곳이나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이고 회복되는 것이라고 본문은 암시합니다.
이것은 12절 이하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함께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끼리만 지내지 않았습니다. 여자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빈 무덤을 처음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헛소리”라고 일축당했던 바로 그 여자들입니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사역할 때 누가복음에서조차 그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는 그 가족들입니다.(눅8:19-21) 물론, 제자들 중에는 스승 예수를 적극적으로 부인한 베드로도 있었고,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친 다른 공관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에선 비록 두려워 멀찍이 서 있었지만 그래도 스승의 죽음을 지켜본 제자들도 있었습니다.(23:49, 예수를 아는 사람들) 그런 그들이 지금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한때 믿었던 사람과 한때 믿지 않았던 사람이, 실패한 사람과 상처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 가릴 것 없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이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각양각색의 이 사람들을 같이 모이고 지내게 했을까요? 그들 각자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여자들은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예수의 동생들은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이 자신들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세 번 부인한 자신을 예수께서 찾아오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셨음을. 바로 자비와 사랑, 용서와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과 그분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억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다가오신 그 하나님을, 예수를 통해 드러난 그 하나님을. 본문은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임 자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알게 하고 증언합니다.
여자들을 헛소리 취급하지 않으신 분, 적극적이지 않던 가족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분,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 곧 무시당한 자, 믿지 않았던 자, 실패한 자 쪽으로 먼저 향하시고 찾아오시는 분으로요.
그 앎이, 그들에게 이식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마음’이, 그들이 서로의 차이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용납하고 포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여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을 계속해서 담고 유지하기 위해서요. 그분을 더 알기 위해서요. 그 사랑과 은혜를 모르는 자처럼 망각하고는, 서로를 탓하고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기 위해서요. 기도하지 않고, 각자의 소견대로 이말 저말 아무 말이나 하지 않기 위해서요.
이 부분에서 지난 주간의 <오늘의 묵상> 하나가 떠오릅니다. 시편 102:17절(새한글성경)입니다.
“벌거벗은 백성이 기도하는 쪽으로 여호와가 향하셨네.
여호와는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네, 그들의 기도를.”
‘벌거벗은 백성’이라고 번역된 이 표현을, 시편 권위자들은 예레미야 17:6에 ‘사막의 떨기나무(가시나무)’와 같은 어근을 공유한다고 분석합니다. 즉,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나 억눌린 자를 넘어,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서 잎사귀 하나 없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자, 철저히 고립되고 헐벗은 상태’를 의미하는 극단적인 은유로 봅니다. 이 ‘벌거벗은 백성’은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의 자기 인식과 정체성으로 발전합니다.
이 시편은 노인인 화자가, 하나님께선 이들과 그 기도를 업신여기지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고 그러니 앞으로 창조될 하나님의 백성이 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라면서(18절) 노래하고 기도하는 내용인데요.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도 기도하는 것이며, 다음 세대도 이 하나님을 알고 기도하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과 연결되는데요. 연결되는 <오늘의 묵상>이 또 있습니다. 사무엘상 2:2절(사역)입니다.
“주님 같은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참으로 당신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이것은 한나의 찬양입니다.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해 멸시 받고 괴롭힘 당하던 여성입니다. 그 괴로움 때문에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제사장이 술 취한 사람으로 오해한 여성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께선 아들을 주셨고, 한나는 약속대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찬양하는 게 이 노래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제사장이자 예언자이자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이 두 말씀은 동일한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빼앗긴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멸시받는 자의 기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히려 그쪽으로 향하시는 하나님. 그쪽으로 얼굴을 향하시는 하나님. 특히 사무엘상은 여성인 한나의 입을 통해 “주님 같은 거룩하신 분은 없다, 참으로 당신 말고는 없다”라는 친밀한 고백뿐만 아니라, 이것을 뛰어넘어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은 없다”라며 이스라엘 공동체와 사회의 찬양으로 증언합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와 구조가 변두리로 밀어내고 고정한 사람(여성)에게도 하나님께선 다가가셨고, 그 외침과 호소, 기도를 들으셨고, 그 사적인 고백을 공적인 공동체의 노래로 만드셨음을 성서는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이 다함께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은 없다”고 노래하도록요. 개인적 앎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공적인 찬양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본문인 사도행전 1장 다락방의 공동체는 바로 이 하나님을 알고 함께 기억하며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발가벗겨진 자 쪽으로 몸을 향하시는 분, 상처 입고 실패한 자를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을 알기에, 그 하나님을 내 마음과 일상에 온전히 모시기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은,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에게 다가오신 그 하나님을 함께 기억하고 공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를 계속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의 삶에 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발가벗겨진 자 쪽으로 몸을 향하신 그분을, 한나의 입술에서 시대의 찬양을 빚으신 그분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내 마음과 말과 일상에 모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시편 102편의 기도자는 빼앗기고 벌거벗겨진 것 같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면서도, 그 처지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한나는 멸시받는 자신의 현실을 토로하면서도,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다락방의 그 공동체는 각자의 실패와 상처를 안고 모여, 그들 모두를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을 함께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말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또한, 성서는 이 모든 것을 공통의 기억으로 기억하며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는 기도입니까? 그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말과 일상에 모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알고자 구하는 기도입니까? 우리의 공동체는 벌거벗겨진 자들의 기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까? 사회와 공동체의 구조와 문화가 변두리로 밀어낸 사람에게 다가가시고 그 사람의 노래를 찬양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공동체입니까? 정말 그 하나님을 아는 백성입니까? 그 하나님을 죽기까지 신실하게 증언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삶입니까? 정말 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예수의 공동체로 회복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증언하는 회복이 우리와 이 땅에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그 증인으로 세우시고 그에 합당한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한마음으로 함께 기억하고 기도하는 각자의 삶과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부디 유대인과 이방인, 성공자와 실패자,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연장자와 연소자, 원로와 신입, 종교와 종파의 차별 없이 다가가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받아들이고 아는 우리와 이 땅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부터 그것이 ‘언제냐’ 묻기 전에 지금 내가 그 역사의 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주신 마음 곧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마음과 그 능력을 활용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