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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성과 속 영과 육체에 영과 육은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세속도는 없다고 이제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마는 종교는
영적이고 성스럽고 거룩하고 수순함을 토해서 세속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취약한 인간들에게 심ㄹ적인 피난처가 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막스같은 분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는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종교에서는
안식을 얻읍니다.
비판
종교전문기자이므로 종교적 인 가치를 제대로 종교적 측면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서두출발선 부터 비판해 나가기로 합니다.
성과속이라 性(성) 은 무엇이고 俗(속) 은 무엇인지를 밝혀보기로 합니다.
성과 속의 본질은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과 속은 생명에 대한 본질을 논 하는 것이 종교라 할 수 있읍니다.여기에서 性(은) 은 성품성인데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한자어로 쓴다면 見 을 말합니다.보는 성품을 性(성)이라 합니다.그런고로 성품을 (性) 보는 는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俗(속)은 풍속 俗(속) 인데 속은 무엇인가 역시 見(견) 하는 생명의 본질로서는 같읍니다.단지 속성(俗性) 이라 이름할 뿐이지 견성하는 것과 매양 똑 같으나 생명운동의 현상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처럼 육을 지니고 있아나 견성 하는 이도 있으며 , 속성으로 늘 게속 見 하는 속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견성은 무엇이고 속성은 무엇인가
깨어나면 견성이고 께어나지 못하고 잠이 늘 주어지면 속성입니다.24 시간 잠을 자지않으면 깨어있음이며 24 시간 중 약 얼마라도 잠을 자게되면 속성입니다.
그렇다면 24 시간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있는가? 있읍니다.잠을 청하여도 잠을 자는 듯 하여도 늘 자지 않고 깨어있는자들이 있읍니다.性을 보고 견성 한 자들은 24 시간 잠을 자지 않읍니다. 이거 놀랄일이고 황당하게 들리지요?늘 사람은 잠은 잡니다 하지만 영혼은 깨어나 있음을 늘 자각하는 상태로서 피곤기만 가시게 내분비 운동이되어진다는 사실로서 잠을 온존하게 들 수가 없는 자리를 말합니다.
속성인자는 하루 에 반을 자야합니다. 내지 8 시간은 자야한다는것과 매 한가지인 예가 됩니다.이를 깨어나지 못한 자라고 이름할 수 있읍니다.
견성된자는 영을 봅니다, 찰나지간에 O 의 360도를 다 보며 늘 깨어나 있으므로 영생하므로 생과사를다 잡아쥐게 됩니다. 육에 의존하지 않읍니다.
견성이 되지 못한 속성을 지닌 분은 O 의 반경인 180도만 바라보고 오온을 (신경전해질) 행하기 때문에반반 봅니다, 이를 속성이라 이름하는 것이 다릅니다.하지만 속성이나 견성이나 성 이나 속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육에 의존하기만 합니다.
영 은 性 의 본성품인 보는 見 이 항상 깨어있는 자리를 말하는데 (속을 비유하여) 늘 깨어있으므로 이를 소개하기로 합니다(마태복음 36절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젯세마네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셨읍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읍니다""내가 저기에 가서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37절 그리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아들을 데라고 가셨읍니다. 예수님게서는 매우 근심하시면서괴로워 하시기 시작하였읍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
앉아 있으라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뜻입니다. 보는 性 의 見 의 보는 성품이 늘 깨어있음이므로이를 영 이라 하는데 예수의 제자들도 전부 깨어나 있지 못하는 까닭에 매우 근심하시면서괴로워 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깨어나 있지 못하면 하나님의 기도함에서 하나님 뜻을 듣지 못하는것이기 때문에 증거할 수 없으므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도중에도잠을 자게 되므로 알지 못하는 까닭에 괴로운 것입니다.
40절: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셔,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들고에게 말씀하셨읍니다."너희들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41절: 깨어서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기도는 한마음으로 집중하여 사랑함을 늘 지니는 상태)영은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구나..
<함께 깨워있는 자가 있어 기도가 한마움으로 울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읍니다>
조현기자는 이러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거나 경험하고서야 성과속 영과육을 논 해야 합니다.
지금 조현기자는 성과 속 영과 육의 본질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다 하더라도 다 주어진 것인바 현실적으로 주어진 동태에서 충실하면서 개인이거나 사회적인 관계에거나 실천하게 됨인데, 종교행위로서는 개인의 안식처를 구하는 피난처럼 여기는 멘트를 하면서 해당 좌담회를 끌고나가려고 하고 있읍니다.그것도 12,3 계엄사태를 딱 꼬집어서 문제선상으로 올려놓고 기독교인들이 현재 탄핵반대 운동을 하는것을 꼬집어 내어 그 모순점을 비판하고자하는 의도를 지닌 좌담회라고 할 수 있읍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영과 육 성과 속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져 있음은 맞읍니다.그런데 인류들중에서 성인의 가르침을 받은자 들에게만 영 을 발견하는 것입니다.성인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영을 볼 수 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고로 종교와 사회운동적인 관점에서 두가지 측면으로 바라본다면 종교와 사회운동적 인 관계를 동시적이고 일체과 같음을 보는 시각이 주어져야 맥락이 풀리는 좌담회인데.도리어 종교를 논하지 않았다면 토론은 되는 고로 흠잡을 수 없음인데 종교기자라 함으로서 이러한 본말의 서두부터 잘못 진행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 양보해서는 아니되겠다 명제의 필여성이 있으므로 이로서 생명본질의 종교적 의미와 현실적 사회참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성속의 영육이 분리되지않음으로 유지된다는 생명운동의 현상론으로 반드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언드립니다.
종교를 모르면 종교를 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하여
조현:
종교가 개인적인 구원이냐 아니면 안식처냐 아니면 세상을 개벽할 동력이냐 아니냐
이런 논쟁은 2천년전에 예수당시 혹은 그전부터 있어와는데요.
기독교는 예수님의 본뜻이 이제 주기도문에 나오듯이 하나님나라가 여기에 실현되느냐
즉 살아있는 지상천국도 여기서 만들것이라는 그런것이냐라는 주장도 있지만
한국에서 여전히 예수믿고 천국가라. 현재 천국극락을 노력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천국가고
극락가고 복을 얻고 개인적으로 안식을 얻으려고 기도하는 신자가 대다수인게
현실입니다.
비판
종교가 개인적인 구원이냐? 종교가 개인적인 구원을 하게 한다면 이미 동시에 전체적인 모든 생명운동을 보는 관점이
같음을 보는 자리이므로 개인적인 확실한 구원이라면 온 인류이거나 생명운동에 관계없이 모두가 구원되는 소식을
지니고 함축되어 보는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견성이 됨이니 개인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의 하나이신 O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하실때 예수께서는 모든 백성을 자기 와 동일한 심정으로
자기 자신임을 보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몸 바쳐 돌아가신 소식을 알아야 종교인이 됩니다.
지금 조현작가는 남과 나 개인적인 전체적인 등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려고 하는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적어도 종교의 본질을 그러하다 입니다.
아니면 안식쳐냐? 는 말에 대하여 ...
안식처는 편안한생각을 하는 곳 이라는 거인데 종교적 본질에서 안식처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안식처라 함은 개인 스스로 어떠한 행위나 의지작용으로 행동할때 그 반대의 급부를 함께 동시에 보는
인과율을 보는자리로서 O 을 자각하는 깨어남이 주어지는바 이를 안식처라 이름합니다. 이를 예류과에 들어선자라 이름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도는 모두 안식처를 본 자들입니다. 견성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확연하게 볼때 (見) 현실상황의 직면된 소식을 죄다 이해할 수 있는 자리! 이를
인과율을 본다하는 것이고 이를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회개" 입니다.
돌이켜 본다는 것입니다, 돌이키면 O 의 자리로 오게된다는 소식을 말합니다.
자유의지로 행한 연역된 과정을 돌이켜 다시 봄이니 이를 비추어주시어
돌이켜 비추어주시는 분을 성령이라 하고 하나님의 권능이라 함이니, 결국 성속에서 성인의
가르침을 받고 믿어지니면서 계율을 지켜 반경만 보고 취해서 살아온 사실을 수신하며 닦고 참구하며 믿음을 지닌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회개하고 O 의 온존함
을 모두 보는 자리로서 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종교의 교지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하나님께서 비추어주시는 명견에 (광명을 봄)
따라 온존하게 이해하므로 이제까지 살아온 과정을 회개하고 온존한 길을 걸어가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으므로 감사함을 느끼면서 가는 행로를 안식처라 하는 것입니다.
경험측이므로 논리로 이성화로 주관적인 생각에 미치는 지력가지고 종교의 본질을 논 하는것은 위험하다 할 수 있읍니다.
세상을 개벽할 동력이냐 아니냐 에 대하여
개벽이라 함은 개벽(開璧) 인데 둥근 옥구술처럼 열어제쳐져 있는 O 을 본 자리를 개벽이라 합니다.
무엇인가 뒤집는 것이라는 사실도 맞는 의미입니다.
O 을 보고 인과율을 보는 자리가 개벽의 자리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개벽을 논해서는 아니되며
잘 못 잡아 돌리면 혁명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모르고 척 하는 문화에서 지성력을
자만하여 무엇인가 시도 한다며는 스스로 인과율에 매 달리게 되는 속성의 한계점만 더더우기 벗어날 수 가 없는것입니다.
속성을 가진이들은 전도몽상 하여 살아가기 때문인데 생각으로 만 오염되어서 마치 뒤바뀐 생각의
인과를 받아 반경만 보고 행하므로 이를 뒤집어야만 O 입니다, 이를 전도몽상이라 이름하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나오는 반야경에 수록되어있읍니다.
세상 전체가 개별할 동력이냐 아니냐는 순전히 개벽하게되면 온 세계가 다 구제 됨과 같음이니
개별적인 개벽이 세상의 개벽을 하는 동력인자가 되는 것이므로 따로 분리해서 생각으로 정할 일이 아닌것입니다..
세상의 개벽과 개인의 개벽을 분리 할 수 없는 자리가 견성이며 O 을 보는 자리라는 종교적 본질에서
그 답을 찾지 않으면 이렇게 헷갈려서 종교를 곡해하며 관성적으로 정신체게가 굳어버리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백선생님 개인이 바뀔때까지 이제 우리는 기달릴 수 밖에 없다고 변화의 선후 를 두는게 개벽사상을 서로
관계하는 개인이 먼저냐 전체와 함께 이렇게 해야 되느냐
선후관계를 두는 것은 속임수같다 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읍니까?
비판
그러므로 개벽운동이라는 것인 개인과 사회전체의 선후관계를 두는 것은 종교의 속임수다라는 것인데
개인의 관점과 사회전체의 선후관게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견성이나 성속이나 영이나 육이나 간에 불가분한 관계이며 생명운동의 양태가 다르게 차이를 낼 뿐이지
인과율을 어디에나 적죵되는 성품에서 비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소 세상일이 바쁜대 일단 개인적으로 개벽을 한 후에 사회전체로 나아가는 선후관계를 두게되면
언제 사회개벽을 하는 가 하면서 기존 종교적인 관점의 개인 안식처나구하고자 하는 데 시일이 걸리게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종교적 가르침은 사회개벽의 전체적인 울림의 운동으로 보아서는 하나의 속임수이며
어떠 무엇인 기득권자의 권원이 작용하여 종교테두리로 신도를 묶으려는 작난아닌가라는 이야기를 강조하려고
하는 서두인 것 같읍니다.
백낙청
지금 그렇게 보셧읍니까?
질문이 끝날때는 간단한 질문을 단도직업적으로 하셨지마는
조현 ㅎ ㅎ
백낙청
그 앞에 하신 말문중에서는 여러가지 중대한 질문이 뭐 몇개가 들어있어요.
조현
: 하 하
백낙청:
그런지 않나요?
조현:
죄송합니다.
백낙청:
그래서 애초에 조대표께서 날 보고 처음 질문했을때 답변은 5 분내로 하라
조현:
하 하 5 분내로 안하셔도 됩니다.
백낙청:
내가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을 해 왔는데 이 질문은 5분내로 답할길이 없어요.
조현:
아 -- ㅎ 그렇게 안하셔도 됩니다.
백낙청:
종교가 안식처가 되는거, 안식을 주는 종교냐 아니면 개벽의 동력인가
조현:
근본적인 변화를
백낙청:
근본적인 사회변화도 줘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너무 이분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아니 아무리 열성적인 운동가라 하더라도 또는 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리고 서가식 동가식
하는 운동가들이라도 다들 하루가 끝나면 어딘가에 들어가서 잠을 자야지, 그 다음에
또 활동을 할거 아닙니까?
비판
종교적 추구의 목적이 있다면 성속에서 견성으로 바뀌는 회개로서 O 을 보는 것을 추구하는 생명본질의
발견을 하므로서 생명운동을 인과율에 맞게끔 스스로 세상을 이해하고 온존하게 작용한다 라는 것을
종교의 본질이라 말했읍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나야 하는 것을 본분사로 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마태복음에서 하신말씀을 실례를 들어
설명했읍니다.
그런데 백낙청씨는 열성적으로 사회변혁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하루일이 끝나면 잠을 자는것에 비유하여
안식처를 해석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읍니다.
견성인자들은 속성자입자에서 조금더 발전하여 24 시간 잠에게 깨어남을 늘 유지하는 그 자리로서
인과율을 보게되면 안식처인데 , 그러함을 이렇게 비유하는것은 노무현 말로 지금 막나가자는 것밖에는
아니되는거 아닙니까?
조현:
그렇지요.
비판
종교전문기자인데 이러한 백낙청씨의 안식처나 사회운동을 비유하는 것에 잠을 자는 곳이 있어야 안식을 얻는다는
것을 너무 잘못된 비약같은데 조현께서는 이를 아시고 동조하시는지는 몰라도 비약이 너무 벌어지므로
삼천리로 빠지는 종교담화 가 아닌지 모를일입니다.
백낙청
그ㅡ게 무신 안식처이든 자기 집이든 아니든 그러니까 종교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안식을 줘서
더 활동성을 높여주는 그게 나쁘다고 볼것 없고요.
다만 고것만 하고, 세상바꾸는것 이건 뭐 다 예수님의 뜻에 어긋나는것이라든가
어 그런 종교란에 정치다, 뭐 이렇게 나가는 거에 대햐여는 이제 우리가 거 해야 하는거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 약간 수정해서 표현한분이 이미 뭐 세상을 바꾸는 것이 좋고
정치변화도 좋은데 그건 내가 먼저 제대로 바뀌고 수양이 다 된 다음에 해야지 옳지않냐며 수양이 안된
사람이 그런것 부터 하면 (사회운동) 어떻게 하느냐 이게 요런건데 그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이건 또 일종의 속임수가 될 수 있다. 이게 내 주장인데
비판
수신제국 치국평천하 는 유교경전의 맹자 말씀인데 자기 "몸을 먼저 닦고 가정을 다스리고 그리고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고 마침나 천하를 평화하게 한다" 라는 것을 비유하였는바
수신만 하다가 시간다가고 사회운동은 언제 하는가 라는 의미도 되는바 당시 역사사실에 있어서
이러한 말을 한 시대는 영토를 쥔 제후 의 기준에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활용한 속임수로서 백성들의 정치참여를교묘하게 방해하거나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라는
뉘앙수를 주는 백낙청씨으 견해입니다.
사람은 말입니다, 성과 속으로서 말할 것 같으며
속성으로서 육을 위지하고 살아감에 있어서 성품을 지닌 것을 예로 한다면
본 만큼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주변을 바라보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자기 생각의 경험측을 반영하여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를 제한된 반경의 6 처를 (눈으로 보이는 세계,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세계.
귀로 소리를 듣는 만큼 의 세계, 혀로 맞을 느끼는 세계, 자기 의 신체의 접촉으로
느끼는 세계 등오 오온으로 감지하는 지각체로서 앎을 내는 것이니
수신한만큼 제가가 되는 것이며 제가 되는 만큼 같음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고
사회활동하는 경계만큼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맹자의 말씀은 수신의 입장차이
에 따라 세상은 천차만별로 형성되어진다는 것이니 이는 무위자연설을 뒷바탕하여
하신 말씀인바.
수신의 제일 중요한 도리를 닦는것은 곧 제가하고 치국평천화 를 할 수 있는 초석이
된다는 것이지, 선후를 논하는 말씀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맨처음 태어나면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나 사회주변의 도움으로 살아낼 뿐입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주어진 인연에 따라 수신이 되면 성년이 되어 군자도 되고 무식장이도
되며 주어진 환경과 예와 무도 학문등의 정진에 따라 그와 겉 맡게 제가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의 출발은 수신이라 하는데 학문으로 친다면 기초학문과 그 가르치는 환경에
의하여 도리를 닦는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야 사회진출을 자연하게 하고 거기에 같맞은 포부를 펴는 것이 수신제가 치국평천화응
천차만별의 양태를 벌어지는 무위의 도 속에서 기초학문 기초교양 기초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동시에 포함하여 나라를 화평하게 하는 전제가 된다는 거입니다.
바쁘다고 똥 안싸고 사회활동하는 그러한 것은 없다, 항상 질서와 시간적 때의 당위성을
혹보한다음 사회진출을 한다는 것이고,. 생계는 그 기능과 능력에 따라 공정한 기회와 균등을
얻어지녀 그와 같음으로 결과치를 획득하는 그런과정을 연속으로 경험하는 가운데
인과율이 나오고 안식처가 나오고 사회변혁의 기수가 나오고 그런것이지
따로 분리하는자체가 이분법현상이므로 종교적이 의미를 사회운동의 어떤 인위적 목적 추구
작용에 대입해서는 위험하다 이 말입니다. 아니면 문학이나 학설을 종교와 비유를 하지 말던지
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자신의 변화만 자기 개혁 또는 유교식으로 말해서 수신을 거 완전히 내 팽겨치고세상을 바꾸겠다 그러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인데, 수신이 완전히 끝난 뒤에야제가를 하고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를 말하는 것 같음)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제가가 완전이 끝난다음에야나라를 다스리는데 참여하고 이를 유교에서 말할때 치국은 세장전체가 아니라 이게 사실 그 당시에는제후의 영토이지요.영토를 오랫동안 차지 하고 기득권좌를 지닌 영주들이 백성들에게 수신제가를 먼저하라면서정치에 관여함이 요원하도록 하는 방법인데 그거는 여기서 속임수라고 보는 건데 반면에 그걸 너무 2 분법으로 해서 그거 하는 것도 또 지나친 거라고 봅니다.막수의 경우는 그가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다 말을 한것이 사실이고 또 굉장히 반 종교적인 그런것에 강했던사람이지요.그게 이제는 우리 막스가 살아온 서양사상전통의 그 맥락에ㅓ 이해해야지그런데 우리나라는 막스가 말하는 그런 종교는 없어요. 없었어요.
비판: 개인의 안식처에만 주안점을 두거나 구원을 바라거나 하는 종교적 사상의
서양문명을 관하고 비판한 막스의 "종교는 민중의 아편"
이라는 명제는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종교라는 사상이 그러한면은 없었으므로 막스만 잣대로 제어서도아니된다는 의미입니다.
에수님은 뭐 신이다 정하고 그 들에게 잘 보여서 하나님 예수님께 잘 보여가지고 천당가고 그런거 있잖아요 우리 유교 그런 시점에서는 서양사람들의 종교가 아니다라는 소리로 하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종교는 아니지요.또 불교도 여러 형태가 있고, 가 뭐 시주도 많이 하고 불공잘들여 가지고 복받으려고 그렇게 그야말로 민중의 아편비슷한 역활을 안한것은 아니지마는어떠한 교리던지 너 이걸 믿으면 천당가고 아니면 안 간간다는 게 아니고 열심이 도를 닦아서세상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그거를 개인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길도 있지마는사회 전체에 고통을 덜어주는 역활도 다 포함 되거든요.
막스의 반종교 사상이라는 것은 ,서양 측면의 풍토에서 증세 가톨릴 교리의 공덕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도 중요한 역활을 했읍니다.
그런데 특히 후기로 갈수록 교회가 완전히 타락해가지고 뭐 나중에 면죄부를 팔고.---
에 그 다음에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이 종교개혁 역시 개인의 신앙 여기에 치중을 했고요
그리고 막스라는 사람은 서양사상에서 과학시대로 또 합리적인 사상 이것이 굉장이 중요한테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공격하고 반대한곳은 교회를 말하거든요. 인류가 제대로 진보하기 위하여는 교회라는미신소굴을
우리가 제거 해야한다는 그런 신념을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 옛거에는 이제 진보 진보주의를 한다는 사람들이
그거를 완전히 맥락이 다른 사회로 기져와서 가지고 종교도 무조건 아편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저는 그건
이제 서양중심주의 , 근대 주의에 물든 결과라고 봅니다.
비판
기독교가 예수님한테 잘 보이면 천당가는 종교도 아니요
불교에서도 보시를 많이 하면 복 많이 받는 것이 본질도 아닙니다.
한참 빗나간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판을 잘 받는 것을 구원이라 이름합니다.
성이 아닌 속으로 성속에 처해지며 영혼과 육을 겸지한 백성들은
반만 보는 관게로 반경을 스스로 의지로 작용하고 나머지 반은 여호아께서 다시 돌이켜
백성들에게 비추어주시므로서 같음을 행하여 항상 O 을 유지하게 하여 영생토록 이러한
과정으로 같음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고로 이러함을 미리 본자가 성속에서 해개하여 O 을 보는 견성되는자가 그러한 인과가 여실한것을 미리알고 홰게하게 되는
모범을 실천하여 성인의 말씀을 온존하게 보신 선지자들에 의하여 지평이 열리는 것인바.
모든 죄악이나 잘못된 모순이라는사물의 자체놀리가 자성이 (스스로 자기 성품이 없음) 없으므로 회개함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을말함이니 이를 안식처를 구한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라는 의미를 몰록 다 받아지니는 성령의 은총을 받으면서 몰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모든백성들은 상이 있고 보는성품이 있어 ( 하나님의 입김을 받으심) 성령의 은총이 임하는자가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
종교의 생명본질을 참구하는 교지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보시를 하면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타력적 신앙으로 방편인데 누구를 위하여 보시하는 마음이 스스로 자기 공덕으로 같음으로 오는 이치를 알기 때문에 (인과율로서 한마음의 자리로 발하는 계기)스스로 복을 짓는 것이므로 틀리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부처님전 앞에 복적에 돈을 넣으면 부처님이 받아쥡니까?성스러운 전당을 지키는 스님들과 그리고 성스러운 분위기에 의하여 모두가 한마음으로 모아지는기운에 자기에게 임하므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거룩은 무엇인가 인과율이 엄정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는 것을 거룩함이라 합니다.그런고로 견성한자는 거룩한 자 들입니다. 이는 수신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험측입니다.
백낙청 씨 처럼 종교의 본질을 아직은 잘 모르거나 스스로 생각으로 지성력을 동원해서 나름대로 사고방식으로결정한 것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자신만만한 지력에 의존하는 것 가지고 종료를 논해서는 아니됩니다.
거룩함, 온전함, 안식, 구원, 개별성과 전체성 등의 개요나 개념을 이치적으로 잘 헤아리지 못하는 단계에서 마구 남용하면
종교의 본질이 이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모르고 아는 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함은 모호성으로 지력을 삼아 안개를 자꾸 뿌리는 역활만 하기 때문에
혹세무민하는 계기도 주어지는 동기부여를 하기 때문에 혼란성만 더 가중되게 되고 결국은 그러한 인과를 받아지어야 한다는
초유의 사실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해서 조현과 백낙청의 이번대담주제은 <세계적 K 사상을 위하여 조현 한겨려 종교전군가와 백낙청의인텨부편을 12,3 내란 사테를 변화하는 종교인들의 속임수라는 부제를 담고 말씀을 나누는 편을 이러서 소개하겠읍니다.
글을 써놓고 외출을 잠시 같다오면 지워지고 지워지고 해서 다시 반복해서 소개하느라고 어려웠읍니다, 컴퓨터를 새로 바꾸었거든요.. 양지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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