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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종합(5) |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8) |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8)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종합(5)
11.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이미 앞선 장들에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에 대해 반복적으로 다루어왔다. 여기서는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간략하게 결론부분만 다루고자 한다. 준비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하게 분석하고 다루었으므로 필자가 추가로 자세하게 분석하지 않고 간략하게 분석하기로 한다.
혹 자세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독자들은 아래를 참고하기 바란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6539§ion=sc46§ion2=〉
1)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마지막 준비과정
❝ 안도지구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던 우리는 그런 억측이나 뜬소문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군사훈련에만 열중하였다. 소사하부녀회원들이 매일같이 점심밥을 함지에 담아이고 토기점골등판으로 올라왔다.
우리는 3월중순경에 안도에서 동만의 여러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소조의 지휘성원들을 위한 단기훈련(단기강습)을 조직하였다. 지방들에서 20명 가까운 지휘성원들이 소사하 토기점골로 모여들었다.
단기훈련은 2일간 진행되였는데 첫날에는 리론강의를 하였고 다음날에는 동작훈련을 하였다. 나는 조선혁명의 로선과 방침문제를 가지고 정치학습에 출연하는 한편 유격대의 생활규범과 활동준칙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군사훈련은 주로 박훈이 맡아 지도하였다. 우리는 그때 그 강습에서 대렬동작이나 무기분해결합법과 같은 초보적인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습격, 매복조직과 같은 전술적문제에로 훈련을 점차 심화시켜나갔다.
안도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본부로, 중심으로 되였다. 두만강연안의 여러 현들에서 공작원들과 통신원들이 우리와의 련계를 지으려고 소사하로 자주 찾아왔다. 우리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한입 건너 두입 건너 국내에까지 퍼져나갔다. 그 소문을 듣고 조선과 만주각지에서 20살안팎의 열혈청년들이 사선을 헤치며 안도에 모여와 참군을 요청하였다.
변달환이 입대를 지망하는 오가자의 청년들을 8명이나 데리고 안도로 나오다가 일본군경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으로 끌려간것도 바로 이무렵이였다. 해방직후 나를 찾아왔던 변대우로인은 아들이 참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해동안 속절없는 감옥살이를 한데 대하여 몹시 아쉬워하였다.
간도 여러 현들중에서도 특히 연길지방사람들이 우리를 제일 많이 찾아왔다. 연길지방에는 적의 통치기관들과 폭압수단들이 집중되여있었고 밀정망이 발달되여있었다. 1932년 4월초에는 라남 19사단소속의 38려단 75련대를 기간으로 하고 포병, 공병, 통신병으로 증강된 이께다대좌휘하의 간도림시파견대가 동만지방《토벌》을 목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연길을 비롯한 간도일대에 쓸어들었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그 고장 지하조직에서는 참군을 요청하는 청년들을 안도로 많이 보내주었다. 조직의 추천과는 관계없이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청년들도 많았다.
돈화의 진한장도 호진민(호택민)이라는 중국청년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호진민은 화룡에서 사범학교 교원을 하던 사람이다.
어떤 날에는 청년들이 한꺼번에 10여명씩 무리를 지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
그때 어떤 동무들은 유격대대렬내에 로동자성분이 적은것을 가지고 몹시 우려하였다. 100여명이나 되는 입대대상자들을 조사해보니 대부분이 학생출신과 농민출신들이였다. 이 실태에 놀란 몇몇 동무들이 로동자성분이 적은것은 혁명군대를 조직하는데서 맑스ㅡ레닌주의원칙을 위반하는것으로 되지 않는가, 그것은 또한 장차 혁명군의 변질을 가져올수 있는 요소로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견해를 표시하였다.
나는 그런 견해에 대해 로동계급이 혁명군의 주구성성분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은 맑스ㅡ레닌주의군사학의 일반적원리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민이 주민의 압도적다수를 이루고있으며 로동계급은 농민에 비해 수적으로 매우 적은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로동계급의 수자가 많아질 때까지 유격대창건을 뒤로 미루고 기다릴수는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민이나 학생출신도 다 로동계급 못지 않게 혁명의식이 높고 민족성이 강하다, 출신이 달라도 로동계급의 사상을 가지고싸우면 된다, 농민이나 인테리출신이 많은것이 혁명군이 변질될 요소로는 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깨우쳐주었다.
우리는 지휘체계를 세우는데서도 기존공식을 절대시하지 않고 유격전쟁의 특성과 요구에 맞게 구령을 치는 사람보다 구령을 집행하는 싸움군을 많이 내는 방향에서 대오를 짜고 편제들을 결정하였다. 말하자면 지휘체계를 고도로 단순화하였다. 그러므로 부대에 후방부서나 그것을 주관하는 지휘관도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가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싸움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정치공작도 할수 있게끔 준비시키였다.
그때 우리에게 그라우제위쯔의 《전쟁론》과 같은 책이라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은 계시를 받았겠는가. 당시의 우리 수준이란 그저 부대편성에서의 3.3제는 나뽈레옹이 창시한것이라는 정도의 상식에 머무르고있었다. 그라우제위쯔에 대해서는 이름이나 알 정도였다.
나는 2차 세계대전때에야 그라우제위쯔의 《전쟁론》을 처음으로 입수하였다. 지휘체계를 단순화하여 싸움군을 많이 내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나를 쉽게 공감시킬수 있었다.
반일인민유격대는 중대를 기본전투단위로 하여 조직되였다. 나는 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선거되였다.
유격대의 군복은 가둑나무 물을 들인 록색천으로 지었다. 왼쪽가슴에는 다섯모가 난 붉은천을 오려붙이고 거기에 중대번호를 써넣었다. 군모에는 붉은별을 달기로 하였으며 다리에는 흰 행전을 치기로 하였다. 유격대창건의 마지막세부작업이라고 할수 있는 복장제도를 하나하나 마무리지어나가기란 참으로 가슴흐뭇한 일이였다.
우리가 진지하게 토의하고 결정한 복장제도에 따라 부녀회원들이 떨쳐나서 군복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부녀회원들과 함께 온갖 정성을 기울여 군복을 마르기도 하고 재봉침을 돌리기도 하였다. ❞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위 인용문은 주요한 몇 가지의 사실을 담고 있다. 그에 대해 간략히 보기로 하자.
첫째. 유격대구성원들의 출신성분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장들에서도 여러 번 다루었다. 문제발단의 기본은 유격대 지원자들 대부분이 공장노동자가 아니고 농민 혹은 학생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용문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당시 새로운 사조 즉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계층에서는 쉽게 허용될 수 없는 문제였다. 즉 맑스 - 레닌의 이론에서는 혁명의 골간이자 기본구성원들은 노동자이다. 따라서 당시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에는 농민이나 기타 기층민중들에 대해서는 터부시하는 교조를 범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장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192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 조선의 젊은 공산주의자들 역시도 이전 공산주의자들이 범했던 교조주의의 오류를 일정정도 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용문에서 유격대지원자들에 대한 문제에서 가장 논의가 분분했던 것이 바로 구성성분이었는데 이는 노동자의 개념을 대단히 협소하게 본 데 근본 원인이 있다. 즉 노동자라는 것은 자본을 소유하지 않고 그가 어떤 분야에 종사하던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나간다면 당연히 그들 모두는 노동자인 것이다. 소작농이나 적은 규모의 농토를 소유한 소농들은 모두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 먹거리를 생산해내는 농업노동자이다. 물론 학생계층은 예외로 할 수 있다고 하나 그들 역시 자산가계급이나 대지주의 자식들이 아니고 노동자, 농민의 자식들이라면 문제가 또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였다는 젊은 공산주의자들조차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교조를 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당까지만 해도 노동자의 개념이 인민들에게 필요한 상품이나 그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계를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노동하는 이들만 노동자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자세는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역 땅에 가서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유격대원이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모두 배척한다면 그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바로 이 점을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견해에 대해 로동계급이 혁명군의 주구성성분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은 맑스ㅡ레닌주의군사학의 일반적원리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민이 주민의 압도적다수를 이루고있으며 로동계급은 농민에 비해 수적으로 매우 적은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로동계급의 수자가 많아질 때까지 유격대창건을 뒤로 미루고 기다릴수는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민이나 학생출신도 다 로동계급 못지 않게 혁명의식이 높고 민족성이 강하다, 출신이 달라도 로동계급의 사상을 가지고싸우면 된다, 농민이나 인테리출신이 많은것이 혁명군이 변질될 요소로는 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깨우쳐주었다.”
물론 많은 세월이 지난 후인 오늘 날에 당시 상황을 묘사한 자료를 보니 모순이 확실하게 보이겠지만 아마도 필자 같아도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가졌던 범주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상황판단과 문제해결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밖에 더 설명할 길이 없다. 그와 같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에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내고 15년 이상의 긴 세월동안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 수 있었다고 본다.
본 문제 역시 지도자의 사리에 맞고 논리 정연한 설득에 의해 참석했던 모든 성원들이 지지 성원하여 잘 해결되었다.
둘째. 유격대원 모집에 관한 것이다. 인용문을 보아서 알 수 있지만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지휘아래 유격대가 창건된다는 소문을 들은 조선의 젊은이들은 굳이 앞장에 선 조직원들이 모집을 하고자 나다니지 않아도 무리지어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유격대를 지원해온 젊은이들 모두가 지도자를 굳게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믿음이 없다면 강제로 떠밀어도 절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간도일대에서 조선의 젊은 지도자에 대한 신망이나 명망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유격대원모집에 대해서는 전혀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셋째. 유격대 창건 사전준비과정에 대한 문제이다. 인용문을 보아서 알 수 있지만 유격대가 창건된다고 하니 당시 동북만 특히 동만에 거주하던 모든 조선인들에게는 조국을 해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올랐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당시 조국도 아닌 이역 땅에 와서 어렵게 살면서 인용문과 같이 유격대 준비사업을 쉽게 도와 나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하지만 부녀회원들은 너도 나도 나서서 유격대가 입을 군복지에 가둑나무 물감을 들이고 밤낮이 없이 군복을 지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곧 창건되게 될 《반일인민유격대》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조국을 찾아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 인용문에 “소사하부녀회원들이 매일같이 점심밥을 함지에 담아이고 토기점골등판으로 올라왔다.”라고 언급되어 있지만 본 문제는 그리 쉽게 언급할 것이 아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훈련을 하였으며 1932년 4월 25일 최종적인 창건선포식을 가졌던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 필자가 직접 올라가보았지만 산을 오르는데 서툴러서 그런지 몰라도 이창기 기자와 필자는 무려 두 시간 이상의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사적지에 겨우 다다를 수 있었다. 그것도 맨 몸이었음에도 그리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소사하 부녀회원들은 대원들이 먹을 점심밥과 반찬, 물을 담은 무거운 광주리나 함지박을 이고 올랐을 것이니 현재를 사는 필자로서는 솔직히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아마도 현재 남쪽에 사는 여성들에게 당시처럼 할 수 있느냐구 물어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할 수 없다고 할 것이 99%이다.
당시라고 어찌 어렵고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곧 무장을 갖춘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이 되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조국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에 그다지도 힘든 것도 참아내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유격대창건준비에 모든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넷째. 지휘체계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지휘체계를 세우는데서도 기존공식을 절대시하지 않고 유격전쟁의 특성과 요구에 맞게 구령을 치는 사람보다 구령을 집행하는 싸움군을 많이 내는 방향에서 대오를 짜고 편제들을 결정하였다. 말하자면 지휘체계를 고도로 단순화하였다. 그러므로 부대에 후방부서나 그것을 주관하는 지휘관도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가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싸움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정치공작도 할수 있게끔 준비시키였다.”
무조건 다른 나라 혹은 앞서간 나라의 규범이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실정에 맞게 우리에게 놓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특성에 맞게 훈련하고 조직하여 유격대원들을 키워낸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사실 현재 특히 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군사편제는 무척이나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지휘체계 역시 간단치가 않다. 명령전달체계 역시 너무나도 복잡하고 많아서 상부에 보고하고 현장으로 최종적인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적어도 수십여 분이나 걸린다고 군사전문가들은 말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른 나라의 지휘체계는 수시로 이동을 하면서 적들과 맞서 싸워야하는 유격대에 적용될 수는 없다. 따라서 보고체계와 지휘체계는 될수록 간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인용문은 이 점을 말 해주고 있다. 모든 것은 우리 실정에 맞게 자주적 대를 가지고 조직하고 훈련을 해야한다.
또 모든 대원들이 밥도 짓는 취사원도 되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적으로 대원들을 각성시킬 수 있는 정치위원도 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유격대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이와 같은 만능 유격대원으로 키워내기 위해 훈련을 하였다는 것을 인용문은 말 해주고 있다. 또 지휘체계 역시 유격대의 특성에 맞게 조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유격대원들을 훈련시키고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들에 대한 훈련이다. 이 역시 네 번째 항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현실에 맞게 해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3월중순경에 안도에서 동만의 여러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소조의 지휘성원들을 위한 단기훈련(단기강습)을 조직하였다. 지방들에서 20명 가까운 지휘성원들이 소사하 토기점골로 모여들었다.
단기훈련은 2일간 진행되였는데 첫날에는 리론강의를 하였고 다음날에는 동작훈련을 하였다. 나는 조선혁명의 로선과 방침문제를 가지고 정치학습에 출연하는 한편 유격대의 생활규범과 활동준칙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군사훈련은 주로 박훈이 맡아 지도하였다. 우리는 그때 그 강습에서 대렬동작이나 무기분해결합법과 같은 초보적인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습격, 매복조직과 같은 전술적문제에로 훈련을 점차 심화시켜나갔다.”
인용문을 보면 지휘관들에 대한 단기훈련 역시 앞선 항에서 언급한 지휘체계의 단순성과 유격대원들에 대한 훈련 방향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즉 유격대 지휘성원들이라고 하여 일반유격대원들과 특별한 대우를 받는 지위에 있지 않으며 그들 또한 전투요원이자 정치지도원이며 또 평범한 대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수행해내는 지휘관이 되는 것이다. 이 역시 당시 유격대를 창건하기 준비과정에 주어진 조건과 향 후 벌어지게 될 유격전의 특성에 맞게 지휘관들을 양성해내기 위함이다.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것 역시 다른 나라의 모범을 기계적으로 따른다거나 다른 나라의 훈련체계응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실정과 현실에 맞게 지휘성원들을 훈련하여 키워내는 것이다.
여섯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 전투의 기본단위의 설정이다. 이는 지휘체계의 단순성과 지휘성원들과 유격대원들에 대한 훈련내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즉 유격전의 특성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적과 맞서 전투를 할지 모른다. 따라서 유격전에서 부딪히는 모든 전투단위는 정규군이 펼치는 군단, 사단, 여단, … 등과 같이 둘 수가 없다. 유격전에서는 신속성과 불의성 그리고 기습성이 특징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대단위는 너무 작으므로 중대를 전투의 기본단위로 두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말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반일인민유격대는 중대를 기본전투단위로 하여 조직되였다. 나는 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선거되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일곱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마지막 준비작업을 하던 안도현은 곧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아마도 당시 간도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조선인들의 조국해방의 희망으로 믿었던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유격대창건을 준비하던 지역이 안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지역들에서도 《반일유격대》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래도 조선인이라면 동북만과 남만을 아우르는 간도지역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을 이끄는 지도자가 지휘하는 유격대에서 활동하고 싶은 욕망을 가졌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따라서 동만 각 지역에서 반일감정을 가진 조선의 젊은이들이 안도로 몰려드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말 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안도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본부로, 중심으로 되였다. 두만강연안의 여러 현들에서 공작원들과 통신원들이 우리와의 련계를 지으려고 소사하로 자주 찾아왔다. 우리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한입 건너 두입 건너 국내에까지 퍼져나갔다. 그 소문을 듣고 조선과 만주각지에서 20살안팎의 열혈청년들이 사선을 헤치며 안도에 모여와 참군을 요청하였다.”
이는 첫 번째 항의 유격대원모집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체 조선인들의 신망의 대상이 유격대를 창건한다고 하니 수많은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 지원해나서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또 그들 대다수는 지도자가 직접 유격대창건을 준비하고 있는 안도로 모여드는 것 역시 자명한 이치이다.
여덟째. 조-중 인민 간의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단계로 넘어갔다. 이전에 중국 구국군과 벌인 담판성공으로 우사령부대의 별동대를 내옴으로서 본격적인 조-중 양 인민 사이에 큰 규모의 《반일통일전선》을 맺었다. 하지만 인용문에 언급된 것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인용문에서 언급된 “돈화의 진한장도 호진민(호택민)이라는 중국청년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호진민은 화룡에서 사범학교 교원을 하던 사람이다.”라는 사실은 구국군과 맺은 별동대의 성격과는 완전히 다르다. 비록 두 사람이기는 하지만 돈화의 진한장이 데리고 온 호진민은 아예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반일 · 항일세력들과 아예 조-중 양 인민이 하나가 한 전호 속에서 싸우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본격적인 조-중 양 인민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항일의 길에서 한 길을 가는 작지만 큰 《반일통일전선》이 실현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홉째. 유격대 지원자들 가운데 길림출신들이 가장 많았다는 점이다. 유격대 지원자들 중에 길림출신이 가장 많았던 이유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간도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간도 여러 현들중에서도 특히 연길지방사람들이 우리를 제일 많이 찾아왔다. 연길지방에는 적의 통치기관들과 폭압수단들이 집중되여있었고 밀정망이 발달되여있었다. 1932년 4월초에는 라남 19사단소속의 38려단 75련대를 기간으로 하고 포병, 공병, 통신병으로 증강된 이께다대좌휘하의 간도림시파견대가 동만지방《토벌》을 목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연길을 비롯한 간도일대에 쓸어들었다.”
인용문은 간도지방에서도 길림지방에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마수가 가장 높은 밀도로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간도 특히 동만의 여러 지역들 중에서도 길림지방의 조선인들이 가장 가혹한 탄압과 억압을 받았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이다. 또 반일 · 항일의 길에 나선 투사들이 개별적이나 규모가 적은 투쟁을 벌이기에는 조건이 매우 불리하였음을 말 해준다.
“작용과 반작용”은 자연과학법칙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사회의 사회과학법칙에도 존재를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라고 본다. 인간세계에도 가혹한 탄압이 있는 곳에 극렬한 저항과 반항이 있게 마련이다. 길림에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탄압기구와 밀정들을 대대적으로 들이밀어 억압과 폭압을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강화를 했으니 그에 대한 반일감정과 더 나아가서 무력으로 대응하여 물리치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 번째. 인용문의 “이런 실정으로부터 그 고장 지하조직에서는 참군을 요청하는 청년들을 안도로 많이 보내주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1932년 초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는 이미 《유격대원》들을 충분히 모집할 수 있는 지하조직들이 전 간도지역에 결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간도지역에 결성된 지하조직망은 비단 유격대원들을 모집하고 지원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때 서로 다른 지역의 유격대간에 긴밀한 연계를 맺고 협동작전을 벌일 수 있고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동시작전을 벌일 수 있다. 이는 유격전술의 장점이자 특징이며 그 효과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즉 적이 유격대의 전략이나 전술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에 적정에 따른 치밀하고도 정교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전투에 나갈 수가 없다. 또 적의 힘을 분산시키실 수 있으며 혼란을 유도할 수 있고 공포감과 패배주의를 심어줄 수가 있다.
본 내용은 비록 짧지만 대단히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1931년 말에서부터 1932년 중반까지 동북만과 남만 등 간도지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이면서도 대대적으로 반일유격대가 창설된 것을 결코 우연히 일어난 자연발생적인 것도 아니고,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동만특위에 내려 보낸 한 장의 유격대창설 문건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훨씬 이전부터 치밀하고도 철저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때가 되면 어느 때라도 간도 여러 지역에서 항일무장대가 조직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대비가 되어있었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이다. 또 각 지역의 지하조직들이 그물망처럼 치밀하게 연계가 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그동안 끈임 없이 강조하지만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피타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2)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하다
사진1.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한 토기점골등판에 세워진 기념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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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높은 단계의 반일 ·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한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의 지도자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화성의숙 재학시절인 1926년 10월 17일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무은 《ㅌ · ㄷ》 이후 5년여 동안 단 하루 아니 한시도 멈추지 않고 치밀하게 준비해왔던 항일무장대오인 《반일인민유격대》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창건되었다.
1932년 4월 25일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는 단순한 한 무장단체인 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우리겨레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당시 창건된 항일무장대오 《반일인민유격대》는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겼으며, 1910년 8월 22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무력강압에 의해 치욕적으로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조선의 모든 국권을 빼앗기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나라를 찾겠다고 의병대도 조직하고, 무장독립군도 묶어 투쟁도 해보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일제는 더욱더 강건해지고 독립투쟁의 의지는 꺾여 내리막길을 걸음으로 대다수 조선인들은 희망보다는 절망만을 안고 살아가던 시기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어둠이 가시고 동녘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내린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가져다주었다.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됨으로서 우리겨레는 당시 세계 최강에 속했던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까지 하루 한 시도 멈추지 않고 가열차게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이 벌인 항일무장투쟁은 비단 우리겨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공산주의 세대들인 조선의 젊은 항일투사들이 항일무장대오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아시아의 맹주를 외치면서 《대동아공영권》 실현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했으며, 또 침략을 단행했던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에게 연전연승을 거둠으로서 일제에게 치명타를 안기었다. 이러한 항일무장투쟁은 만주지역에서 일제의 발목을 강력하게 잡아당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일제의 힘이 약화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꿈꾸었던 《대동아공영권》의 최종단계인 중국내륙에 대한 완전한 점령과 시베리아점령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일제는 힘이 분산되고 약화됨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정오(당시 동경표준시, 현 남쪽과 일본이 사용하는 표준시) 일본 왕 히로히또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패망하고 말았다.
그럼 아래에서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우리는 1932년 4월하순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최종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입대지망자들에 대한 마지막심사와 함께 유격대결성식날자와 장소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였으며 당면한 활동지역을 확정하고 유격대의 활동과 관련된 전반적대책을 수립하였다.
이 회의후 입대지망자들은 3도백하의 입구인 류가분방(발재툰)에 모였다가 소사하에 집결하였다. 입대지망자는 100여명이였는데 그들중 지금까지 이름이 기억되는것은 차광수, 박훈, 김일룡(소사하), 조덕화(소사하), 곰보(별명, 소사하), 조명화(소사하), 리명수(소사하), 김철(김철희, 흥륭촌), 김봉구(흥륭촌), 리영배(흥륭촌), 곽ㅇㅇ(흥륭촌), 리봉구(삼인방), 방인현(삼인방), 김종환, 리학용(국내), 김동진(국내), 박명손(연길), 안태범(연길), 한창훈(남만)밖에 없다.
1932년 4월 25일 아침
우리는 토기점골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가지였다.
이깔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등판의 공지에 새 군복을 떨쳐입고 무기를 휴대한 대원들이 구분대단위로 정렬하였고 그 공지의 한쪽변두리에 소사하와 흥륭촌일대의 인민들이 모여서서 술렁대고있었다.
대원들의 생신하고 름름한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는 내 눈앞에는 가지가지의 회억들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이 무장대오의 결성을 위하여 우리의 동지들이 길은 얼마나 걸었고 모임은 얼마나 가졌고 연설은 얼마나 하였고 준령은 얼마나 넘었으며 그 과정에 가슴아픈 희생은 얼마나 당하였던가. 반일인민유격대는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겨운 로고와 피어린 투쟁과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우리 혁명의 고귀한 산아였다.
나는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동지들과 고인들을 토기점골등판에 모두 불러오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시작하였다.
내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하자 대원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짧지만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날이다. 오늘 날 북에서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한 날인 4월 25일을 조선인민군창군일로 제정을 하고 기념하고 있다.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혁명투사들의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함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의 거대한 줄기가 뻗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또 북의 선군정치의 든든한 줄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사와 북의 선군정치사에 대한 역사적 뿌리와 줄기에 대해서 도식화 해보면 아래와 같다.
ㅌ · ㄷ(두 자루의 권총) → 카륜회의 → 겨울명월구회의 → 반일인민유격대창건 → 항일무장투쟁 → 선군정치
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지금까지 항일무장투쟁사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계속 강조해왔지만 위 도식에 나타나는 사실들은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갈라진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후손들이 민족갈등과 모순이 없는 조선반도에서 평화와 안정 그리고 안전이 담보된 삶을 영위하게 된다면 그때 후손들은 위 도식에 나타난 사실들을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들이었다고 평가를 할 것이다.
두 자루의 권총을 포함한 1927년 10월 17일에 무어졌던 《ㅌ · ㄷ 》가 항일무장투쟁사나 북의 선군정치에 있어 씨앗이라고 해석을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반면 1930년 6월 30일부터 3일간 있었던 《카륜회의》에서 손에 무장을 들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자고 토의 결정된 사항은 그 씨앗을 움을 틔운 것이다. 또 1931년 12월 16일부터 10일간 안도현 명월구에서 개최된 《겨울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움을 싹으로 활짝 피워낸 회의였다. 그 후 4개월 후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선포는 항일무장투쟁과 선군정치사에 있어서 그 어떤 평지풍파에도 쓰러지는 것은 고사하고 잎사귀 하나 흔들리지 않는 곧고 굵고 굳센 무력(武力)의 줄기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혁명투사들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함으로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까지 단 하루 아니 일분일초도 조금치의 흔들림 없이 머뭇거림이나 주저함도 없이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벌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계기들은 민족과 인민을 무한히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걸어갈 수가 없는 피어린 혈전만리의 길이었다. 우리는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용문을 보면 개인적으로도 얼마나 가슴 아픈 회억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인용문의 “나는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동지들과 고인들을 토기점골등판에 모두 불러오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눈물이 앞을 가려 연설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피와 살 같은 동지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걸어온 길에 얼마나 많은 피와 땀 그리고 목숨을 바쳤던가. 이러한 가슴이 막히는 민족사의 비극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우리겨레가 적어도 1백만 년 이상 발을 디디고 살아온 이 땅을 빼앗겼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민족의 한(限)을 풀고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온 사랑하는 우리겨레들이 외세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손에 무장을 들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 민족과 인민만을 사랑했던 숭고한 동지들이 본격적인 무장대오인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보지 못하고 수도 없이 많은 희생을 했으니 어찌 눈물이 앞을 가리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서 인용문도 그 순간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가졌던 감정을 아래와 같이 전해주고 있다.
“대원들의 생신하고 름름한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는 내 눈앞에는 가지가지의 회억들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이 무장대오의 결성을 위하여 우리의 동지들이 길은 얼마나 걸었고 모임은 얼마나 가졌고 연설은 얼마나 하였고 준령은 얼마나 넘었으며 그 과정에 가슴아픈 희생은 얼마나 당하였던가. 반일인민유격대는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겨운 로고와 피어린 투쟁과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우리 혁명의 고귀한 산아였다.”
비록 짧지만 인용문의 내용이 그간 있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다 설명해주고 있다. 그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본 연재 10여회 중반부터 약 30여 회 차에 걸쳐 상세하게 다루었다. 바로 그와 같은 든든한 씨앗이 있었고, 그 씨앗이 뿌리내리고 움을 틔웠으며 싹을 활짝 피웠기에 그 어떤 천지를 다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풍파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조국해방을 위한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을 지키기 위한 반외세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굳센 줄기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자란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고 낯설고 물 설은 이역 땅에서 온갖 천대와 멸시 설움 속에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을 보고 마치나 이제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다는 감격과 감동 그리고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있었던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은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그만큼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3) 갓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의 안도현성 열병식 거행
사진2. 반일인민유격대가 열병식을 거행한 안도현성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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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은 6일 후 국제노동절인 1932년 5월 1일 당시로서는 안도현성이었던 소사하(현재의 지명은 송강)에서 열병식을 가졌다. 이에 대해 북측자료를 인용해서 보기로 한다.
❝ 만국로동계급의 전투적명절인 5월 1일 우리 반일인민유격대는 붉은기를 앞세우고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보무당당히 열병행진을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김일룡이 이날의 행진에서 노래선창을 담당하였다.
그날은 시민들뿐아니라 반일부대장교들과 병사들까지 거리에 떨쳐나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환영의 인사를 보내고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다.
무력시위를 끝낸 대오가 토기점골로 돌아왔을 때 차광수와 김일룡이 우리 집으로 달려가 몸져누워있는 어머니를 데려왔다.
병고에 시달린 얼굴, 미간에 생긴 주름살, 머리의 흰오리,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고요히 웃고있었다. 어머니는 리영배의 곁에 다가와 총이며 탄띠며 오각별을 오래오래 만져보았다. 그 다음 김철, 조덕화, 김일룡, 방인현, 차광수의 앞을 거닐면서 이 총도 쓸어보고 저 총도 쓸어보고 이 어깨도 만져보고 저 어깨도 만져보고.
미구에 어머니의 눈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우리 군대가 생겼으니 이제는 됐다. 왜놈들을 치고 나라를 꼭 찾아야 한다!》
음성도 퍼그나 젖어있었다. 어머니는 분명 우리에게 바친 자신의 지성은 까마득하게 잊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먼저 떠나간 아버지와 애국지사들의 로고에 대하여 생각하였을것이다.
그후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련이어 조직되였다. 김책, 최용건, 리홍광, 리동광 등 조선의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북만과 남만에서도 유격부대들이 련이어 태여나 적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1932년 봄은 항일대전의 총성속에서 무르익어갔다. ❞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인용문을 보면 당시 벌어졌던 열병식을 직접 보지 못했다 해도 열병식을 대하는 조선인들이나 일반 중국의 인민들이 얼마나 열광을 했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필자는 직업군인이나 또는 군사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연구를 한 적도 없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열병식이라는 것이 우군과 지지자들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반면 적들에게 잘 짜여진 질서정연하고 보무당당한 열병식을 보여줌으로써 기(氣)를 꺾어 버림으로서 실제 전투에서 승리를 담보할 수 있는 가정 우선되는 군사적 행위이다.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불과 6일 후에 그것도 안도현의 중심인 안도현성에서 열병식을 가졌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역 땅에 와서 온갖 설움과 압박을 받으면서 절망 속에 한(限)많은 세월을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 조국해방의 희망과 신심을 안겨주고자 진행했던 것이다. 또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반일 · 항일세력들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는 사실을 만방에 과시하는 선전효과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인용문의 “그날은 시민들뿐아니라 반일부대장교들과 병사들까지 거리에 떨쳐나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환영의 인사를 보내고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다.”는 내용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안도현성에서 열병식을 거행한 행위는 비록 국가적 정규군이 아닌 유격대이지만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세상에 대고 공식 전선포고를 한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결국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열병식을 거행한 것은 대일(對日) 선전포고가 되니 간도 이 곳 저곳에서 반일유격대 창설을 준비하고 있던 조선의 젊은 반일세력들은 승리의 신심을 가지고 본격적인 반일유격대 창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간도 각 지역의 반일유격대 창설을 지휘하였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그후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련이어 조직되였다. 김책, 최용건, 리홍광, 리동광 등 조선의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북만과 남만에서도 유격부대들이 련이어 태여나 적들에게 포문을 열었다.”라고 하여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당시 간도 각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유격대를 창설을 지휘하였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본격적인 항일무장을 할 수 있는 무장대인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고, 6일 후 안도현성에서 가진 열병식을 기점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 까지 가열찬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1932년 봄은 항일대전의 총성속에서 무르익어갔다.”라고 하여 당시 있었던 《반일인민유격대》 창건과 열병식을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차지하는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2. 맺음 말
지금까지 1932년 4월 25일에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에 대해 그 준비과정과 그에 따른 실천적 행동 그를 뒷받침 해주는 사상적 토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손에 무장을 들고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조국을 해방시킬 일념으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사고와 말 그리고 행동을 다 한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피 타는 노력은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이라는 결실을 가져왔다. 젊은 지도자가 유격대 창건이라는 결실을 가져오기 위해 밤낮도 없이 일분일초의 쉼도 없이 걷고 걸은 길은 또 얼마였던가.
독립군 간부양성학교인 화전에 있는 화성의숙을 다니던 시절인 1926년 10월 17일 독립군 총관 김시우의 집에서 8명의 동지들과 무은 《ㅌ · ㄷ》로부터 시작하여 길림시절 조선인길림소년회(후일 류길학우회로 개편), 1927년 8월 28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지하투쟁을 시작하였다.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 사이 3일간 카륜의 진명학교에서 열렸던 《카륜회의》에서 당을 창건하고, 손에 무장을 들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반일감정을 가진 모든 조선인들은 일치단결하여 항일투쟁에 나서자는 반일민족통일전선(반일통일전선) 결정을 하였다. 이때로부터 지하투쟁과 병행하여 직접적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중국공산당에서 좌경모험주의로 결론지어진 소위 이립삼 노선을 추종한 조선의 이전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 5월 1일 국제노동절에 조선인들을 폭동으로 내몬 《5 · 1폭동》을 시작으로 《5 · 30폭동》 《8 · 1폭동》과 그 이후 1931년 중반까지 각종 명목으로 벌어진 수백여 차에 이르는 폭동의 후과로 합법조직 뿐 아니라 지하조직까지 혹심하게 파괴된 조직을 수습하고 복구하기 위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동북만은 물론이고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인 온성에까지 나와 공작사업을 벌였다.
당시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공작사업은 단순히 파괴된 조직을 수습하고 복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향 후 본격적으로 벌이게 될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조직을 정교화하고 확대하였으며 무장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무장대오를 조직지도 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였다. 당시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동북만과 조선북부국경일대의 공작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각 조직 간의 상호연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물망식 조직구성을 하였다. 우리는 이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인민들과의 사업도 결코 등한히 하지 않았다. 국가적 후방지원도 정규군의 전략적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당시 조선인들이 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면 인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 살 수가 없다.”라는 표현으로 유격대와 인민사이의 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유격대와 인민들 사이의 이와 같은 관계설정에 따라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완고하기로 소문난 그 어떤 이념도 혁명적 구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자칭 이상촌이라고 부르던 오가자 마을에서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내어 마을 혁명화를 위한 공작사업을 벌였다. 오가자 마을에 대한 지도자의 공작사업은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간도와 조선북부국경일대의 농촌마을에 대한 혁명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즉 오가자 마을은 농촌혁명화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상촌 오가자 마을에 대한 혁명화 사업은 다름 아닌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유격대와 인민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지를 가늠 할 수 있는 인민혁명화의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관점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까지 벌인 항일무장투쟁시기 내내 단 한 번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지도자는 항상 “우리는 인민을 믿고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믿을 것은 인민밖에 없다.”고 유격대원들에게 강조를 하였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적수공권의 상황에서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거해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인민에 대한 이러한 기조는 북에서 오늘 날에도 여전히 절대불변의 법칙으로 되어있다. 바로 인민과의 사업 역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철저하면서도 치밀하게 사업을 벌였다. 당연히 지도자의 그 모든 사업의 최종 목적은 인민을 위한 것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대동아공영권》 실현이라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전 만주점령계획에 따라 조작한 일본인 소유 심양역(당시 봉천) 류조구철도폭파 사건을 빌미로 《9·19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이를 빌미로 하여 전격적으로 만주침공을 개시하였다. 일제의 만주침공은 일면 그들의 군사적 강대성을 대내외에 시위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침략을 당한 중국인들에게는 대오각성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반일감정이 폭발을 하였다. 또 국제사회에서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주침략은 일제입장에서 긍정과 부정적인 측면을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이전 세대들인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나 공산주의항쟁가들과는 완전히 새로운 높은 단계의 항일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과 그 지도자에게는 대일(對日) 무장투쟁을 하루 속히 앞당겨 와야 한다는 당위성과 결단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에 따라 1931년 12월 16일부터 10여 일간 현(現) 안도현 명월구(당시 연길현)에서 조선인들과 7명의 중국인을 포함하여 반일혁명가들 40여 명이 모여 《겨울명월구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들어가는데 대해서 논의가 되었다. 당 회의에서는 국가정규군의 지원도 후방도 없는 투사들에게는 유격전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 이를 위해서는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겨울명월구회의》에서 토의결정된 유격전은 주로 산악지형이면서 수림이 우거진 조선북부국경지대와 가까운 동북만과 남만지역에서 벌이기로 결론을 내린다. 유격근거지 역시 해당 지역에 건설하기로 하였다.
일단 《반일유격대》를 창설하기로 결정이 되었지만 유격대원들이 손에 들고 있어야 할 무기가 없었다. 이때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적의 무기는 나의 무기이다.”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투사들을 독려한다. 이 구호를 받아든 투사들과 인민들은 목숨을 걸고 적의 《무기탈취투쟁》에 나선다. 이 무기탈취투쟁과정에서 가슴 아픈 희생을 치루기도 했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고 항일혁명의 길에 나섰던 투사들은 《반일유격대》를 창설하여 투쟁할 수 있을 정도의 무장을 하게 된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에 앞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반일 · 항일혁명의 길에 나섰던 투사들의 항일투쟁에 커다란 장애를 조성했던 《9 · 18만주사변》 이후 반일투쟁에 들어선 중국의 브르조아 민족주의계열의 구국군과 목숨을 건 《반일통일전선》 사업도 벌였다. 당시 구국군인 우사령부대와 담판을 벌이던 그 순간에도 7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을 잡아다가 처형을 하겠다고 하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긴박했고 또 극적이었겠는가.
결국 이와 같이 조성된 긴박하고도 위험스러운 상황에서 열렸던 담판 역시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현명한 상황판단능력과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무지하기 이를 데 없었던 우 사령을 이해시키고 설득하여 형식상의 우사령 별동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담판을 성공시킴으로서 이제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구군군 부대인 우사령과의 담판의 성공으로 간도일대에서 반일 · 항일투쟁의 길에 나선 조선의 젊은 투사들이 무장대오를 창설하는 데에 걸림돌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1931년 말부터 1932년 중반 사이에 동북만과 남만 각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반일유격대》가 창설되게 되었다.
1931년 말에서부터 1932년 중반 사이에 동북만과 남만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반일유격대》가창설되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와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남쪽의 학술자료들은 전혀 언급이 없다. 반면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는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동만특위에 《반일유격대》를 창설하라는 문건을 보냄으로서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분석하고 살펴본 바와 같이 문건 한 장으로 그렇게 넓은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일유격대》가 창설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동안 분석하고 살펴본 자료들은 이와 같은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의 논리적 모순과 현실적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는 반증을 충분히 제시하였다고 본다. 이에 대해 북측 자료는 아래와 같이 직접적으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청년들가운데서 차광수, 김일룡, 박훈, 김철(김철희), 리영배를 비롯한 18명의 핵심들을 골라 그들로써 먼저 유격대소조를 조직하였다. 이와 함께 연길, 왕청, 화룡, 훈춘지방에서도 같은 형태의 무장대오를 꾸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현마다 10~20명안팎의 인원으로 되는 무장대들이 꼬리를 물고 태여나게 되였다. 적은 인원으로 무장대를 꾸려가지고 살금살금 활동하면서 무기를 확보하고 경험을 축적하고 대렬을 늘이다가 일단 조건이 성숙되면 매개 현별로 대규모의 무장대오를 꾸리자는것이 명월구회의에서 토의결정된 방침이였다.”
북측 자료를 인용한 위 내용은 1931년 말부터 1932년 초 사이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어떻게 하여 동시다발적이고도 대대적으로 《반일유격대》가 창설되게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반일유격대》 조직에 참가하였던 유격대소조의 이름과 지역 그리고 그때 꾸려졌던 유격대원의 인원이 몇 명인지에 대해서까지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다. 또 유격대소조를 꾸릴 당시의 사회분위기까지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결론적으로 1931년 말부터 1932년 초 사이에 동북만과 남만에서 대대적으로 《반일유격대》가 창설된 것은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높은 단계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의 지도자의 피 타는 노력에 의해 그 조직적 기반이 닦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동북만과 남만 각 지역이 유기적으로 연계를 가질 수 있었으며 동시다발적으로 《반일유격대》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또 향 후 가열 차게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의 기반도 이때 튼튼하게 조성이 되었다.
1926년 10월 17일 화전에서 토의 조직되었던 《ㅌ · ㄷ》이래 약 5년여의 기간에 벌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피타는 노력이 결실을 거두고 드디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 당시 창설되었던 《반일인민유격대》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까지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사령부가 되었으며, 조선의 모든 항일투사들이 일분일초도 멈춤 없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기둥이 되어 연전연승하는 힘을 주었다. 또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의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패망을 이끈 항일무장투쟁의 거목으로 자라났다.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6년 8월 30일
이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