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역사 속에는 여러가지 재미있던 민속놀이가 있었다. 다행히 그 가운데 많은 민속 놀이가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맥이 끊겨 찾아볼 수 없는 놀이도 적지 않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놀이는 거의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민속놀이는 단순한 오락 이전에 우리 민족의 정서와 흥이 담긴 문화적 유산이다. 그러므로 묻혀졌던 민속놀이를 찾아내어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귀중한 책임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조선시대에 크게 행해지다가 지금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민속놀이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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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가 건국된지 약 20여년이 막 지났을 무렵이다.
- "혜정교(현 서울 광화문우체국 옆에 있던 다리) 거리에서 곽금, 막금, 막승, 덕중이란 아이들이 타구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각각 공에 대해 이름을 부쳤는데, 하나는 주상(태종),하나는 효령군(태종 둘째아들), 하나는 충령군(태종 세째아들, 뒤에 세종이 됨), 하나는 반인(하인)이라고 하였다. 신나게 서로 공을 쳤는데, 공이 다리아래 물속으로 빠지니 한 아이가 이를 빗대어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 고 소리쳤다."({태종실록} 13년 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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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열 살 안팎의 곽금이, 막금이 막승이, 덕중이라는 개구장이 아이들이 즐겼던 이 놀이는 바로 '타구(打毬)'라는 놀이였다. 막대기(杖)로 공을 친다해서 '장치기'라고 불렀다. 그런데 마침 이 부근을 지나던 효령군의 유모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당황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효령군이 진짜 빠졌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이 장난인줄 나중에야 안 유모가 이 아이들을 혼을 내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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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즐긴 장치기는 길 위에 여기저기 구멍을 파놓고 긴 막대기로 둥글고 작은 공을 쳐서 그 구멍에 들어가게 하는 놀이다. 구멍은 가능하면 공이 잘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에 움폭하게 만들되, 까딱하면 빗나갈수 있는 다리끝이나 평지라도 도툼한 곳에 구멍을 파논다. 그래야 아슬아슬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에 아이들이 혜정교 다리에서 장치기를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재미와 관련이 있다. 아이들은 장치기를 할때 각자의 공을 구분하려고 이름을 정하였는데, 왕·왕자·하인과 같은 인물들을 공에 비유하면서 놀이에 흥미를 더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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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다른 기록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한 세종대 초반의 일이다.
- "태상왕(정종)이 왕(세종)과 더불어 처음으로 새로 지은 궁 뜰안에서 타구놀이를 하였다. 날씨가 추워서 교외에는 나갈 수 없으므로 (궁안의 뜰에서) 이 놀이를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왕을 모시고 함께 공을 친 사람은 효령대군 보, 익평부원군 석근, 경녕군 비, 공녕군 인, 의평군 원생, 순평군 군생, 한평군 조연, 도총제 이징·이담, 광록경 권영균 등이다."({세종실록} 3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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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은 새로 건축한 경복궁에서 태상왕을 비롯난 종친들과 타구인 장치기를 하였다. 그런데 하루도 아니고 겨울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 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장치기를 즐겼는지 짐작이 갈만하다. 이처럼 장치기는 아이들뿐 아니라 종실은 물론, 최고의 통치자인 왕까지 몇 달씩이나 푹 빠질 정도로 신나는 스포츠요 오락이었다. 위에서 잠깐 설명한 바와 같이, 그렇게 신나는 장치기란 다름아닌 오늘날 골프와 비슷한 방식의 놀이였다. 즉 편을 나누어 채(긴막대기)로 공을 쳐 여러개의 구멍속에다 넣으면 점수를 얻어 승부를 내는 놀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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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기는 몇사람이 하는 개인전과 열명 이상이 편을 갈라서 하는 단체전이 있었다. 채의 손잡이는 두꺼운 대나무를 합해 만들고, 공을 치는 부분은 숟가락과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하고 가죽으로 감쌌다. 공의 탄력이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채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공의 크기는 달걀만 한데, 나무로 만들거나 혹은 차돌맹이를 사용하기도 한다. 구멍은 땅을 밥그릇 모양과 같이 파는데 궁전을 넘어 다른 궁전 사이에, 돌층계 틈 사이에, 또는 평지에 만들기도 한다. 여러군데 파놓은 구멍을 돌아다니면서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공치는 자세는 무릎을 꿇거나 선 채로 공을 때리는데, 목표한 구멍이 위치한 데에 따라 적당하게 친다. 무릎을 꿇는 경우는 구멍 가까이에서 신중을 기하려고 취한 자세로 보인다. 특히 궁전 사이의 구멍에 공을 넣으려면 궁전 지붕 위로 공을 높이 그리고 멀리 날려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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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구멍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는데 계산 방법이 여러 가지였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만이 전한다. 곧 구멍마다 세 번까지 칠 수 있었데. 한번 쳐서 구멍으로 들어가면 2점을(1점짜리 대막대기를 두 개 준다), 한번 쳐 들어가지 못하고 공이 멈춰 있는 곳에서 두번 세번 쳐서 들어가면 1점을 얻었다. 한번 쳐 넣으면 더 치지 않고, 두번 쳐 넣으면 역시 더 치지 않고, 세번까지 쳐 구멍에 넣지 못하면 죽는
- 다. 다른 구멍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음 친 공은 비록 다른사람이 친 공과 부딪쳐도 죽지 않지만, 두번째 친 공이 다른 사람의 공과 부딪치게 되면 죽는다. 두번째 공은 일부로 맞추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뒤에도 이와 같다. 이렇게 해서 얻은 점수를 합하여 승부를 내는데, 진편은 이긴 편에게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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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장치기는 고려시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에 들어와 더욱 크게 성행되어 이에 대한 기록이 자주 발견된다. 장치기 놀이는 아이들도 왕도 신분을 막론하고 즐겼던 신나게 즐기는 오락이자 스포츠였다. '격구(擊毬)'라고도 표현되는 이 장치기는 세조대에 이르면 막대기로 즐기는 놀이라 해서 '봉희(棒戱)'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장치기라고 불리우는 놀이는 여러개의 구멍에 공을 넣은 방식 말고도, 골문을 만들어 놓고 공을 쳐넣는 방식도 있었다.(그 놀이에는 말을 타고 하는 기격구(騎擊毬)와 땅위에서 하는 보격구(步擊毬)가 있었다). 그 가운데 구멍에 공을 쳐넣는 장치기는 놀이 기구가 간단하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또 생활 주변의 빈공간을 이용해서도 얼마든디 놀 수 있기 때문에 왕실이나 귀족층 뿐 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까지도 즐길 수있는 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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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널리 행해지던 장치기는 15세기를말 부터 차츰 사라졌다. 성종대를 고비로 왕실애서 거의 행해지지 않게 되면서, 민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교적 질서가 정착되고 문치주의가 조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재로 성종대에 으르면 놀이문화에도 유교적 예법이 강조되어활쏘기나 투호(화살을 던져 병속에 넣어 승부를 가리는 놀이) 등은 계속 장려되는 반면 야외놀이나 무예활동 등은 꺼리게 된다.반면에 주로 앉아서 하는 쌍륙, 승경도, 바둑, 장기 등의 실내 놀이가 발달한다. 장치기 놀이도 이라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장치기 놀이를 통해서도 조선 전기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을 엿볼수 있다. 장치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놀이에 장점이 있었다. 오늘날 씨름이나 태껸이 힘을 겨루는 운동으로서 인기를 얻고 널리 보급되는 것 처럼, 장치기 놀이는 과거 우리 민족의 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놀이로서 발굴하고 보급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