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믿음
기도
명상과 사색
신에 내맡김
은총
신의 종
깨달음
거룩한 이 순간을 당신께 드리오니, 맡아주소서
당신의 이끄심이 내게 평화를 준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당신을 따르옵니다.
15. 기도하는 사람되기 ; 사색과 명상
들어가며
영적수행자, 열성 신자나 잠재 신자가
직면한 과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개념적 영적 정보를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실재로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 결과
잠재성이 현실성이 되는 그 진행과정으로
점차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실천관습과 기술을
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여기에는
성실한 기도와 진실의 근원에 대한
참된 헌신이외에도,
그 의도와 헌신을 향상시키는 명상과 사색이라는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유서깊은 중요한 수단이 있다.
사색
정보는
차분한 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해
서로 통합되고 연결되며, 재맥락화된다.
그러므로
사색하는 상태는
목표지향적 활동보다
더욱더 이완되고 열려있고 자연스럽고 직관적이다.
사색을 하면
추론과 일반원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사색은
선형적 논리를 구체화하기 보단
본질을 분간하는 능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사색적 이해의 한 가지 장점은
'의미와 중요성을 드러내준다'는 것이다.
명상은
일반적으로
'세상과 세상의 활동에서 반드시 물러나야 하는 것'이지만,
사색은
삶의 내적/외적 경험과 관련된
간단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이다.
즉
세상에 참여를 허용하지만
적절한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의도가 있는 행동은
결과에 중점을 두지만,
사색은
크게 노력이나 힘을 들이지 않는
표출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 사고는
그 성격상 양에 해당하며,
사색은
매우 음적인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색은
항복을 촉진하며
끌림과 혐오,
그리고
모든 형태의 바람이나 욕구를
내려놓도록 유도하며
그 일을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사색은
의미를 인식하고
추상적 개념의 진화적 수준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사고는
선형적이다.
한편
이해는
맥락적이고 비선형적이다.
맥락의 확장은
사고의 중요성, 가치, 의미를 높여준다.
따라서
사색은
참나의 영향력을 이끌어 내어
자아(에고)의 활동을 무색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에고/정신의 목표는
주로 활동하고, 얻고, 수행하는 것이지만
사색의 의도는 "되는 것'이다.
지적인 사람들은
무언가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만
사색하는 사람들은
'앎 그 자체와 자율적 지혜'를 추구한다.
이성적 사고는
시간과 관련되어 순차적이고
선형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사색은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난다.
즉 비선형적이며
본질의 이해와 관련있다.
성실한 사색은
'인간의 삶이 기도가 되는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혹은 양식'이다.
내면의 영적 활동이 이루어지면
두개의 진행과정이
동시에 시작된다.
정신의 한 부분에서는
분노와 원망을 처리하는 일에 관심을 둘 것이고,
동시에 다른 부분에서는 영적 해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당면한 갈등은
재맥락화되고
초월을 통해 해결된다.
이때
내면의 진행과정은
마치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와 같다.
영은
부모이고
에고는
아이에 해당한다.
유치한 에고/자아는
반응이 민감하고
단기간에 초점을 두지만
현명한 부모와 같은
영적 참나는
장기적 진화의 결과에 관심을 둔다.
에고는
감정에 빠지기를 좋아하지만,
영은
재맥락화를 통해
감정을 초월하는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내면의 활동은
상당부분 본능에 기초한 감정성을
영적기반의 이해로 대체하는데 관여한다.
초월이라는 내면의 경험은
낮은 의식수준에서
높은 의식수준으로 이동한 결과다.
처음에는
노력의 과정과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나중에는
결국 주된 목표인 사랑, 의지, 헌신, 겸손과
진실에 몰두하는 태도가 도와주면서
그런 전환은 점점 친숙해지고 습관적으로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을 경험하던 옛 방식은 사라지고
부정적 감정과 지각도 없어진다.
만물을 다르게 보면
그 자체로 보상이 되며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느끼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을
영적 의도에 맞게 정렬시키며
삶의 의미와 중요성이 확장된다.
에고/몸/정신의 수명은
한계가 있고
일시적이지만
영의 삶은
영원하다.
따라서
영의 중요성은
에고의 만족이라는
일시적 이득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 결과
일치와 헌신과 합의를 통해
더 작은 것은
더 큰 것에 항복한다.
영적의도는
억지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저항도 점차 줄어든다.
또한 영적 진보는
그보다 중요하지 않은 동기와
목표에서 얻는 보상보다
더 크고 훌륭한 보상을 얻게 되는 일종의 탐색이다.
평범한 삶은
늘 일상을 유지하면서 기쁨을 주지만,
영적 진전이 주는 쾌락은
그저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잠재성을 성취하는 방향과 더욱더 조화를 이룬다.
잠재적 성장을 달성하고
참다운 삶의 의미를 인식하는 과정에는
내면의 고유한 쾌락과 만족이 있다.
우리 자신을
힘겹게 앞으로 몰아갈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영적 진보를 통해 장애물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는 것도 기쁜 일이다.
그 결과
우리는
과거에 휩쓸리거나 몰려가지 않고,
미래에 매료되고 이끌리게 된다.
자아가
점차 참나 안으로 녹아 들어감에 따라
인식은 더욱 더 널리 확산되고
온 세상으로 퍼져 전체를 아우르면서
곳곳으로 스며든다.
순차적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창조의 계속됨이 펼쳐지면서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발현되는 것을 목격한다.
개별적 나라는 개념은
이제 응집하는 조화의 총체성
즉 모두를 아우르는 자발적인 일체임안에서 점점 약화된다.
이로써
겉으로 단단해 보이던
일원화된 자아는
참나의 보편성안으로 사라진다.
평범한 의식의
경험적/현상적 장면아래에서는
원시적 고요함,
즉 전혀 방해받지 않은 평화와 고요가 발견된다.
모든 현상은
잠재성의 현시가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슬로 모션처럼 자동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 펼쳐짐은
우주자체의 표현으로서 매우 부드럽지만
동시에 무한히 강력하다.
인간은
지배적 실재로 완성되기 위해서
완전한 변화쪽으로 움직인다.
생명과 우주가 출현한
이 맥락화의 본질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고등양자역학과 이론 물리학의
최신 발견과도 일치한다.
그 발견들은 본 저자의 여러 저작에서 밝혔듯이 시간과 위치와 공간은 의식의 투사이며, 어떤 내재적 실재도 없다는 명제를 과학적으로 확증시켜준다. (하로코포스의 "운동원인으로서의 힘", 린즈의 "시간과 양자역학", "마인드풀 유니버스"에 나온 H 스텝의 여러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등 물리학과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확장된 인식은
신비주의자의 주관적 인식과 관련있다.
실재의 확장된 패러다임은
믿음과 이성사이에 생겨난
어떠한 환상의 간극도 다 소멸시킨다.
신성한 계시는
창조에 대한
하향식 설명을 제공한다.
한편
이와 동시에
어쩌면 과학적 이론은
상향식 설명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상향식 과학이론은
우주를 설명할때
더욱 선형적 성질을 띤다.
이제 만물은
창조의 표현으로서 시간 바깥에서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펼쳐진 결과이며,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깨닫게 된다.
궁극적 근원과 잠재성은
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의 신성함은
시간을 초월한 창조의 총체성이자
창조의 진화적 펼쳐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념적 사고와 함께
분류하고 설명하는 성향이 사라지면서
전부임, 하나임, 조화, 신성한 실재의 총체성은
눈부시고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이 빛은 모든 창조에 내재된 타고난 성질이다.
따라서
실재로 형상이 없는 궁극의 근원은
형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안에 존재한다.
복잡함이 무너지면서
단순함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만물은
그저 그 본질의 완벽한 표현으로 기술되거나 지각되지 않은
정확히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각되거나
기술된 모습은
존재자체의 고유한 실재와는 무관한 것이다.
명상
하나의 연구주제로서 명상에 대한 정보는 포괄적이며 광범위하기 때문에, 명상을 두고 때로는 별로 관련도 없으면서 일상적으로 재미있게 하는 이야기도 포함시킬 수 있으며, 또 때로는 더욱 상세하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명상은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계시를 통해서
영적 진실에 접근하는 유서깊은 방법이다.
명상으로 인식의 중대한 도약을 이루고
의식수준에서는
신속한 초월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수세기에 걸쳐 여러 문화와 종교에서 명상에 관한 수많은 구체적 기법들이 진화해왔다. 게다가 뇌파 진동수에 대한 뇌전도 연구와 더불어 변형된 뇌 생리학과 자기영상에 대해서도 과학적 연구가 많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이런 연구는 빠른 알파파와 베타파를 대체하는 느린 세타파의 출현, 그리고 진동수와 진폭 양자의 감속을 밝혀주었다.
명상기법에도
선불교와 다양한 요가 수행의 사례처럼
정신 단련기술과 양식이 포함된다.
그 수행기법 안에는
마음으로 그려보기, 숨쉬기, 자세까지 들어있으며,
이 모두는 차크라 시스템을 통해
쿤달리니의 영적 에너지가 상승하는 흐름을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수행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에 상응하여 의식측정 수준이 반드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토리(득도)의 경험은
일상생활을 재개하면 사라지는,
과도기적 장점을 찍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될 수 있다.
의식자체의 관점에서 볼때,
그 과정은 점진적으로 더욱 포괄적이고 맥락적으로 변한다.
또한 사고, 이미지, 저서의 끌림을 벗어나기 위해서
정신적 작용과 감각적 기능에서 나온
자아인식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
의식의 비선형적 맥락을
주관적으로 깨닫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그 목적이다.
의식은 인식의 빛이자 기층이다.
거기에 바로 존재와 존재임이 발생한다
(내안의 참나를 만나다 참고).
명상의 한가지 장점은
정신의 에너지 장애는
기본적으로 사고, 감정, 이미지가 없으며
이런 활동이 전체 정신에너지 장의 단 1%만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는 점이다.
파도아래 바다가 있는 것처럼
정신의 99%는 잔잔하고 고요하며 텅 비어있다.
만약 이 사실을 연구자와 수행자에게 알리게 된다면 곧 그 사실을 탐지하고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사고, 이미지, 감정 등
정신의 활발한 내용은
훈련되지 않은 정신을 매료시키고 부풀리고 미화시킨다.
이런 활동이 에고/정신에게
나름의 미묘한 자기도취적 보상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 미묘하고 지속적인 보상을 알아차리고
이 환상의 이득에 기꺼이 항복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 자아에 한정되지 않은
고요한 에너지 장으로서의 정신에게 일체감을 느끼고 동일시해야 한다.
에고는 정신작용에 중독되어
설령 그 안에 부정적 요소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그 작용의 지속적 즐거움과 자극을 갈망한다.
육체적 "나"가 카메라처럼 이미지와 사물을 등록하듯이,
정신은 바로 자아의 나에 해당한다.
그 나는 개별적인 고유한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환상을 영속시킨다.
사실 그 정체성은 사고, 의도, 욕망 등의 본래 주인에게 저당잡힌 상태가 있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환상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 삶의 거의 모든 양상은
사실상 에고 내부에서 자동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영적 진보가 상당히 진행되면
어느 순간 '죽음의 공포나 무'로 사라져 버릴 것같은
두려움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두려움은
자기통제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에고의 나르시시즘적 핵심에서 벌이는 저항이자 분투다.
여타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이 두려움도 환상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것을 신에게 항복하는 편이 안전하다.
그렇게 하면 편재하는 신의 현존으로서
참나를 깨닫는데 걸리는 장애물을 치울 수 있다.
통합
지금까지 명상과 사색을 편의상 서로 다른 연구 주제인것처럼 설명했지만, 기실 명상과 사색은 별개의 분리된 활동이 아니다. 실제로 두가지는 서로 합쳐져서 의식과 인식이 공존하는 하나의 스타일로 발전하고 습관이 된다. 명상과 사색은 의식의 맥락장으로서 인식을 이끌어내는 비언어적이고 주관적이며 비선형적맥락을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정신적으로 인식한 선형적 내용을 붙들고 있다가
정신이 목격하고 관찰하는 내용은
그저 정신안에서 벌어지는 자동적 현상임을 깨닫는 변화가 의외로 쉬운 일이 된다.
의식연구로 입증되었고,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영적 진보를 이루고 명상과 사색을 실천하여 얻는 부가적 자산은
바로 절대적 스승의 오라에 담긴 고주파 에너지 장이다.
스승의 저작을 읽고
스승의 이미지를 그려보고,
더 강력하게는 그 오라의 현존속에
육체적으로 존재하게 되면
그 에너지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에너지 주파수는 그 수행자 영의 오라장으로 영원히 통합되어 광막한 시간을 건너 과거의 육체성이나 생애에도 계속된다. 그것의 목적은 앎을 고요하게 펼치는 것이다. 앎은 의식의 진화된 상태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상태는 비개념적이고 비선형적이다.
의식의 고양된 상태에서는
더이상 기억이나 정신작용이 없다.
표면적으로 고요한 무를 통해 앎이 발생하고,
그 앎은 에고-자아의 마지막 잔여물이 항복하도록 돕는다.
그 다음, 하나의 상태나 조건이 개인적 정체성이나 개별적 특성을 누르고 승리한다.
요약
명상, 사색, 진실한 가르침, 진실이 옆에서 도와주면서
의도를 선명하게 하고,
자기 발전을 하고 영적일치를 하는 데다가
뛰어난 스승의 에너지 장에도 접근할 수 있다면,
의식의 거대한 도약은 예기치 않게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의식연구로 확인된
그런 내용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과거 어느때보다 천배 이상 늘어났다.
그 결과 이를테면 무조건적 사랑의 의식수준에 도달하는 일은
매우 가능성이 높은 실질적인 목표가 된다.
일단
무조건적 사랑의 수준에 도달하고,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수행의 길은 점점 더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
의식수준 600이 되면
무한하고 잔잔한 고요와 침묵이 찾아오며
거기서부터 전진하면 신의 의지, 카르마, 그리고 영적 오라안의 잠재된 앎까지 올라간다.
고요의 영역
에고/정신은
정신의 선형적 내용과 그것이 만드는 이미지, 사고, 기억, 감정의 끝없는 처리에 집중한다.
에고는 색다른 것에 매료될 뿐 아니라,
문제해결과 사전준비를 통해 불안을 줄이는 활동을 즐긴다.
또 상실에 대한 슬픔이나 죄의식, 실수나 오류를 저지를 후회같은 부정적 감정이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럴때 의지는 무기력한 것처럼 보일 것이고,
그러면 인간은 마치 정신이 가하는 끝없는 고문의 희생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한다.
정신의 두서없는 행보를 중단하려면
정신의 숨겨진 동기를 찾아내고
환상에 불과한 보상을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저항보다는 항복이 정신의 표면적 통제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에고는 자기내부에서 벌어지는 순차적 정신작용에 현혹된다.
현혹되지 않으려 저항해도 소용없다.
에고는 부정적 사고와 감정을 처리하면서 만족을 찾는다.
에고는 증오를 사랑하고 마음껏 누린다.
텔레비전 방송에 "증오" 컨셉트로 유명한 연예인과 프로그램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런 작용은 이익과 보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적 정서는
그것이 주는 은밀한 보상때문에 끈질기게 이어진다.
이 "에고의 과즙"이 줄어들면
사고는 점차 희미해지고 그런 다음에 사라지곤 한다.
그 후에 정신은 텅 비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텅비게 되면 지루함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잘 관찰해보면
정신은 미래를 예상하느라(두려움) 바쁘고,
또는 과거에 매달리고(후회, 증오, 죄책감),
또는 과거로 계속 회귀하면서 쾌락을 추출하기 위해 과거를 음미하느라 몹시 분주하다.
그 결과 정신은 무언가를 행하는 것으로 얻는 즐거움의 진원지가 된다.
이런 저런 생각들 "사이에" 접근할 수 있는 고요가 존재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험해보면 그것은 실제로 경험에 기초한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질 것이다.
사고는 1만분의 1초로 발생하는데,
이는 정신이 그 사고를 지각할 수 있는
"지각자"기능이 발동되는 것보다
속도면에서 더 빠르다.
그 결과,
정신이 어떤 생각이 시작된다는 것을 지각할때 쯤이면,
이미 정신은 그 생각을 처리하고 있다.
사실 지각자/처리자 기능보다 관찰자/목격자 기능이 앞선다.
관찰자/목격자 기능은
의식자체의 장이 갖는 비개인적 기능으로서
본래 자율적 성질을 타고났다.
관찰자/목격자는 생각/사고하지 않으며
기실 의식자체도 생각/사고하지 않는다.
(오직 정신만이 생각/사고한다).
말하자면
순수한 의식의 인식기능은
영원히 존재하고,
의지와 무관하며,
논의와 상관없는 한마디로 고요한 원시의 상태다.
사색/명상을 통해서
그 고요하고 형태가 없는 상태는
존재대 비존재라는 이원성을 넘어선 원시적 기층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우주처럼, 과도기적 내용으로 오염되지 않은 붓다의 상태다.
그 순수하고 형상없는 고요는 궁극의 맥락으로,
설령 역사상 때때로 "불성"이라고 불릴지라도
언제나 모든 이름 너머에 존재한다.
비록 형상은 없지만, 그 궁극의 상태는 공(850)의 무와 대조적으로 전부임으로서 모두를 아우른다. 이점은 이미 "의식수준을 넘어서"에서 자세히 논의한 바 있다.

첫댓글 기도, 명상, 사색하는 사람되기
비선형적 사색
재맥락화
에고의 해체
깨달음!!
무조건적 사랑
유머
사색/명상을 통해서 그 고요하고 형태가 없는 상태는 존재대 비존재라는 이원성을 넘어선 원시적 기층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우주처럼, 과도기적 내용으로 오염되지 않은 붓다의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