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뒤져보니 피카소가 고흐보다 28살이 적다.
그러니 몽 마르트르시절에 그들의 만남이 있어봐야 별 교류는 없었을듯 싶지만
야수파나 초기입체파가 고흐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피카소도 알게 모르게 고흐의 영향을 받은게 아닐까 생각된다..
고흐가 복잡한 파리생활과 화단에 염증를 느끼고 프로방스쪽 "아를"로 향한데 반해
피카소는 자살의 충동을 느낄만큼 핍박한 생활을 극복하여 화단의 인정을 받는다.
예술의 가치를 금전화하여 평가하는 일만큼 무식한 짓거리도 없으나
경매사상 서로 최고가를 경신하는 두사람의 족적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엇갈려서 하는 대비이다.
살아생전 몇십명의 마누라를 갈아치운 피카소만큼, 부와 명예를 만끽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長壽하다가 죽은 화가도 없거니와, 살아생전 장가 한번 못가보고 연속 뺀치나 맞다가
스스로 처절했던 삶을 마감한 고흐같은 短命의 화가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에게 실연을 안겨준 사촌인 과부, 케이와 연을 맺었다면 고흐의 생은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여자의 입장도 그럴테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인의 존재란 그만큼 중요하다.
테오의 마누라이자 빈센트의 제수씨인 조안나라는 여인이 없었더라면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668통의 서신은 쓰레기통으로 향했을 것이며
있어도 신통찮은 여인이라면, 지긋지긋한 두형제 연짱 잘 갔다며 재취자리 알아보느라 바빴을 터였다.
마누라 복은 없어도 제수씨 덕은 있었는지 그의 생각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 귀중한 편지들은 몇년뒤 지혜로운 조안나에 의해 서간문의 형식으로 출간된다.
그 사람을 알수있는 제일 좋은방법은 그와 마주앉아 대화하는 일이다.
타임머신의 부재로 인한 차선책으로, 자서전이나 전기를 통한 만남도 있겠지만
그 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없지 않으니, 편지야말로 속내에 대한 가늠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숙부의 화랑에서 일도 해보고, 신학공부하며 전도사의 꿈도 가져봤던 빈센트가
실제 화가로서 활동한 시기는 10년이 채 안된다. 그것도 거의 절반은 데생과 수채화에 매달렸다.
그럼에도 900편 가까이 유작을 남긴 다작의 원인은, 빈센트가 테오에게 품고있는 원죄 때문이다.
畵商일을 하는 신통찮은 벌이의 동생에게, 숙식제공과 그보다 더한 화구비용을 부담케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무력감과 죄책감,자괴감의 발산을.. 그저 캠퍼스 앞에다 쏟아부은 까닭이다.
테오는 그러한 형의 생각을 신경쓰지 않도록 편하게 만들고저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는 진심으로 형을 존경했으며, 예사롭지 않은 빈센트의 글이 담긴 편지를 보며 즐거워 했고
빈센트의 그림 속에서 번득이는 천재성을, 세상에서 제일 처음 알아본 동반자이기도 했다.
1889년 앵데팡당전에서의 높은 평가와 유력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고독한 화가,고흐"라는 호의적인 평론기사에도 정작 빈센트는 무덤덤했지만
"이제야 세상이 형을 알아보기 시작한다"며 뛸듯이 기뻐한 것도 테오였다.
브뤼셀 20인전에 전시되었던 "붉은 포도밭"을 안나 보흐 라는 이가 400 프랑에 샀고
그게 그가 살아생전에 팔아본 유일한 유화작품이라고.....는 되어 있지만
실은 그것도 테오의 연출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확인사살 불가)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고흐와 고갱이 같이 지냈다길래, 형제라서 같이 산줄 알았다.(정말이다.)
아를에서 홀로 지내면서 고립감을 느낀 빈센트가 파리에서 알고 지내던 고갱이나
베르나르와 함께 하기를 테오에게 원했고, 그것은 그가 늘 꿈꾸던 화가 공동체의 시작이기도 했다.
화가 공동체란 화가마다 일정 작품을 내고 그 수익금을 고루 나눠 갖자는 사회주의 성향의 발상이다
게다가 고갱 역시 테오의 지원을 받는 처지여서 이중 생활비를 줄여보자는 이유도 있었다.
기록에 의한 인간형을 얘기하자면
이미 가족이 있던 고갱은 어디를 가도 자기가 중심적 위치여야 했는데
그게 우리편이라면 카리스마지만, 적군이라면 독선적인 오만한 인물일 뿐인데 반해,
고흐는 매우 겸손하고 지적이며, 지도 없으면서 그저 없는 이에게 베푸려 했던 인물이다.
고갱은 후일 남태평양 타이티로 가서 원주민 처자와 새장가도 가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 아를에서 있었던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이다.
액면가 그대로 고갱의 말에 의하면,
저녁에 라마르틴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뒤에서 느닷없이 고흐가 나타나 면도날로 위협했다..
깜짝 놀라 그를 진정시킨 후 불안해서 집에 안가고 호텔로 갔다.. 이게 다고,
경찰조서에는, 그후 11시쯤 사창가에 나타난 고흐가 라첼이란 매춘부에게
"이거 잘 간수해"라며 종이에 싼 귓불을 넘겨 주고 가버렸는데
다음날 자기침대에 의식없이 쓰러져 있는 고흐를 경찰이 병원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하는 고갱의 말이 듣기싫어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알고있는
이 사실과 진실에 대하여, 바로 최근 함브르크 대학의 한스교수 가라사대
"그의 귀를 자른것은 고갱의 펜싱검이었으며, 검을 휘두른 사람은 고갱이다"고
그의 저서 "반 고흐의 귀, 그리고 침묵의 서약"에서 주장하며,
고흐는 친구를 감싸기 위해 죽기전 까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친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여러 정황과 편지 내용을 설명하려면 넘 길어지니 생략하지만 이게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테오에게 쓴 "고갱이 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편지 내용과
고흐가 죽기전 고갱에 대한 마지막 언급에서
너는 말이 없구나,나 역시 그럴것이다(You are quiet,I will be too)고 남긴 점도 석연치 않다.
어찌됐건 그 즈음의 고흐는 정신분열 증세가 있었다. 조울증으로 유추되는 상태로 인해
80여명의 아를 주민들이 고흐가 나다니게 냅두면 안된다는 진정서를 내서 구금되기도 했고
본인도 병원에 가려했으나 병원비 마저 테오에게 부담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
북아프리카 외인부대로 입대를 생각하기도 한다.자신에게 환각증상이 온다는걸 인정도 했다.
결국 생레미 요양원을 거쳐 파리의 피갈로 갔다가, 다시 오베르 쉬즈 우아즈로 향한다.
그곳에는 의사이자 화가이며 폴 세잔과 친구인 닥터 가셰가 있기 때문이다.
가셰의 초상과 오베르의 교회를 그려낸 그 동네가, 지금 "고흐의 집"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1890년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 침대위에서 피투성이의 그를 발견한다.
스스로 가슴을 겨눈 총탄에, 이틀동안 괴로워하던 빈센트는 29일 새벽, 테오의 품에 안긴채
"이 모든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마감했다.
광기 어린 영혼은 동반자를 원했던지 그가 죽은 6개월 뒤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테오도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테오 반 고흐의 유해는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옆에 나란히 안치 되었다..
7월 24일 테오는 빈센트에게서 받은 마지막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는데,
테오에게는 그게 마지막이었지만, 빈센트에게서 부치지 못한 편지가 하나 발견 되었다.
다정한 편지와 50프랑 잘 받았다..
中略.....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에서 너에게 말할수 있는건,
죽은 화가의 그림을 파는 화상과
살아있는 화가의 그림을 파는 화상 사이에는
아주 긴장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 내그림들..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겠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이미 망가져 버렸지. 그런 따위는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네 입장을 정하고 진정으로 사람답게 행동할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도대체 넌 뭘 바라는 것이냐?.....
그는 운명을 예감한듯, 마지막 작품으로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남겼다..
고흐는 유독 많은 40 여점의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가 모델료를 지불할 돈은 없는데
자신이 거울을 보며 그리는건 공짜였기 때문이죠.. 밥은 굶더라도 모델을 쓰고 싶어 하다가 위장병을 얻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그림 팔아서 물감비용 이라도 건지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 참고문헌 : 반고흐 영혼의 편지
* 노래 올릴줄 알면 Don Mclean 을 첨부 했을텐디..으음
첫댓글 지난번 여행기에서 쓰다만 얘기 이곳에 올립니다.. 그림에 대한 평가나, 고흐 내면의 세계는 글 기럭지 관계로 생략했습니다.
ㅎㅎ/ 기럭지..참 맛갈스런 우리말입니다.^*^글 잘 읽었습니다.고흐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고흐가 정신질환이 생긴게 자의식이 엄청 강한 그가 테오에 대한 마음 때문에 생긴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거울보면서 자화상 그리는 마음은 오히려 장난끼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게 다른데 이유가 있었군요. 고수님의 짧지않은 그러면서 깊이 있는 글을보니 이젠 시차적응 완전히 하셨나 봅니다.
접짝에다가 다시 쓴다 해놓구 미루다가, 좁을듯 하여 일루 이사했다는..^^ 시차 아직도 완전치가 않네유..
드뎌 엉아가 글을 올리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근디 기럭지가 좀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긴 기럭지을 원합니다. Don Mclean의 노래는 유작님이 올리실 듯....
기럭지 짧다는 사람은 호락님밖에 읍따는.. 아래 코콜님만 해도 이것두 길다할게 뻔헌디.. 코골님 말대루 본문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야그가 맞다는..따로 올려 뭣혀, 따로 국밥이지..으음
음..빈센트의 삶 자체가 차말로 힘들었지만..그나마 테오가 옆에 있어서 월매나 다행이었을꼬..방콕하면서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아까는 이거하고 똑 같은 글이 하나 있었는데 없어졌다는.....음악은 파일첨부 눌러서 찾아 넣으몬 돼요..
음악파일은 없을테고...있어도 파일로 맹글어져 있지 않을테고..... 빈센트요거 Daum검색창에 쳐서..노래 나오모..또 드래그되는 걸로다가 하나 건져...여기 첨가시켜 놓으면...노래만 동동 나오게 하는건 다시 갤쳐주징
기딴건 코고는척 하믄서 모른척 하시라는..으음, 음악 올리는게 그렇게 말처럼 쉬우면 내가 왜 못허것냐고요.. 욜렛아짐 야그는 더 헷갈린다는..
시방 저녁준비하고...낭중에 감상문...휘리릭 =3=3=3333
이미 밥값은 다 했으니께 냅두구, 저녁 준비하다가 남는거나 있으면 좀라는.......나 그지
不狂不及..광기란..어쩌면.. 천재의 전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했던 단발머리 여고생이 떠오르는 저녁입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했던 단발머리 여고생이 어느결에 할매가 되서 파스를 뗐다 붙였다 한다는.. 피카소나 고흐나 둘다 그런 과 같아요.. 장수하거나 요절 한다지요..
때로는 작품이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들이 있다. 그래서 위대한가
빈센트의 마지막 편지는 7월 24일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두 형제가 돈때문에 약간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날 쓰긴 했는데, 내용이 넘 거시기하여 빈센트가 부치지는 않은듯..
참..글도 맛깔나게 잘 쓰십니다입으로도 계속 투덜거리면서리...
미소님의 추진력은 대단하신듯.. 어느결에 제천엘 다 다녀오시고.. 투덜이 제조의 원조마님..
기래기 긴 글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군요. 우쨌기나 저쨌기나 반갑습니다. 내공이 쌓이지 않은 사람은 기래기 긴 글을 절대 쓸 수 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문맥을 연결하기 위한 전개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찰시키기 위해 또한 정당한 논리를 들이대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로 하지요. 유명한 예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광기라는 것입니다. 한데 이 광기를 치유해 버리면 심금을 울리는 세기의 명작들이 나올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이 광기가 정신병의 일종인데 이 광기가 창조의 원천이 되지요....정작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울지....
"기럭지"가 아마 경기 사투리 같은데, 갱상도는 "기래기"인가 보군요..^^ 천재와 또라이는 백지 한장 차이라고 하지요.. 그림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하도 안팔리니까 고흐는 낭중에 물감이나 캔퍼스 원가 따지고 있었는데, 참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정말 예술세계에 빠져 세상살이에 미숙한 예술가는 뭐 국가가 혹은 자선사업가가 팍팍 밀어주고 후원해 주면 안될까요 거꾸로 예술을 빙자해서 성공의 수단,치부의 수단으로 는 자는 쪼매 혼좀 내주공. 둘 중 어떤 사람이 더 나은지는 각자의 가치관에 려 있겠죠.그런 면에서 고호는 전자에 속하는 인물.그나저나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면 그 양반 이유가 뭐였을까요 고흐가 고갱의 입을 꿰매었다면 쉽게 이해가 가겠지만서두.
고갱이 펜싱의었다는군요.. 그즈음 테오에게도 고갱은 이미 마음이 아를을 떠났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사건 후에도 둘 사이에 서신왕래는 있었고, 고갱은 고흐의 그림을 높게 평가해서 뻑하면 그림을 서로 바꾸자고 했는데, 근디 고흐는 싫어 했다는.. 사건 내용에 대해서는 고흐의 성격이 워낙 떠벌이는걸 싫어하는 스탈이라, 테오에게도 구체적인 내용을 안썼다는..
남자나이 40,(지금의 40과 그 때의 40은 개념이 다르겠죠)에 가정과 사회적지위를 포기하고 그림세상으로 뛰어든 고갱도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그 고갱과 고호가 한판 붙어서 그리 된 일이 아닐까요 그 사실이 맞다면 고갱이 머나먼 타히티로 떠난 것도 그 영향이 클 듯 합니다.
고갱이 타이티로 떠난 시기는 고흐가 죽고 나서 입니다.. 속사정이야 사실 정확히 알수는 없으니, 걍 그런갑다고 할밖에..고흐는 알팔릴지언정 본인 작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해바라기를 높게 평가하는 고갱에 대해 안목이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두사람은 악연이 맞을듯.. ^^
오랜만이유. 프랑스에 갔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디 몽마르트 거리에서 깡마른 빈세트 마냥 밥은 안 굶었는지
간다구 소리나 안했으면 몰라두, 조만간 여주에 함 갈꺼라 해놓구 못가뵈서 영 죄송시럽구먼유.. 그간 잘 기셨는지.. 밥은 잘 챙겨 먹구 댕겼시유..이제 애덜 개학하면 다시 바뻐지시것네유..
이글 올린지 꽤 되어 제가 맘 먹고 함 읽어보려고 ~~ 잠시잠시 들어오는 컴이라.... 프랑스 다녀오신 고수님은 문학과 예술을 두루두루 ~~하고 오신듯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고수님의 댓글에 빠져 미칩니더....
메모장에서 보니께 어디 좋은데 다녀 오신다구요.. 좋은 여행이 되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댓글이라도 재미있게 느끼신다니 다행이지만 본문에서도 느껴 주시길 바래유.. ^^
고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갱이 베르나르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요./ '정말 슬픈 일이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슬프지는 않네. 그 가여운 친구가 자신의 광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알기 때문이네. 지금 세상을 떠난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까. 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환생하여 그가 전생에서 한 훌륭한 일로 보답받을 수 있을테니까 (불교의 교리를 따른다면)' / 고수님. 고마움은 아래 답글로 대신합니다.^^"사실 이 글을 빨리 보았었는데 음악 파일을 찾느라 ...아래 음악파일 올려드릴테니까 복사해가시면 지울게요
고흐와 고갱의 인연과 뒷사연은 당사자들 만이 알듯.. 귀 사건 후에도 그들간에 서신 왕래는 계속 됐었지요.. 으음, 들님이 불교교리중 윤회사상을 (잘 안어울리신다는..).. 글구 음악 파일은 배꼽만 나와유.. 하지만 마음은 이미 받은거나 진배 없다고 사료됨.. ^^
질 읽었습니다. 나는 왜 김소월시인이 생각나는지...
그렇지유, 소월도 생활고 때문에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편먹구 자살했으니께.. 요즘 답안지 제출하고 난 수험생 심정일듯.. 부모의 맘이란게 당사자 보다 더 하다는거.. 으음 하지만 잘 될껴..진인사 대천명, 넘 신경쓰지 마시라는..
격려의 말씀, 감사...관리실항의, 그 용기가 많이 필요한 한국인데...^^;
관리실항의 라는 말이 뭔소리다요 거 코 좀 한번 휑풀고 야그하라는..
ㅎㅎ 투덜님의 관리비사건...ㅋㅋㅋㅋ
벨걸 다 기억하는 남자..으음
이런글을 안써주시면 저는 무식한채로 잘났다고 살고 있겠지요. 잘 마음에 양식을 담고 갑니다.
또하나님 글 쓰신거 보니께, 아주 잘 쓰시더구먼유.. 괜히 그러지 마셔유..으음
지금쯤은 여독이 다 풀리셨을까요 ^^ 음 ...이글을 읽으니 작년 1월 시립미술관 고흐전을 찾았던 풍경이 ...혼자 고즈넉이 감상하고 와야지 하고 찾았던 미술관엔 인산인해로...고흐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줄은 미처...불안정한 영혼이 그려낸 그림에 그저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왔던 기억이 나네요...
맹탕호흡에서 탈피하려믄 자주 봐야 한다는.. 으음, 요즘 광주도 무지 덥지유? 고흐전 할때 가보셨는데 인간들이 무지 많았었던듯.. 문화생활에서 당췌 빠지는 데가 없는 냥반..^^
고흐와 클림트를 주제로 쓴 논문이 있는데 상당히 비슷한 생각을 가지셨군요.
낭중에 시간되실때 그 논문 요약해서 함 올려주시믄 잘 볼것 같다는 생각이..^^
들꽃님의 빛나는 협조에 의해 지가 드디어 음악파일을 첨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음악의 머리올림이지요..역쉬 음악이 함께 하니 허접 글이라도 뽀대나는듯 하다는..으음, 지혼자 좋다는군요.
고수님 참 잘 하셨어요 짝짝짝
그들의 서신이 책으로 나와 있어서 수년전에 사서 읽으며 엄청 감동 받았었지요 글 너무 잘 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