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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회주의역사] 발표자료 3장 4절. 마르크스, 국제 노동자 동맹, 그리고 파리 코뮌 발표자료입니다!
윤교06 이이슬 추천 0 조회 319 08.06.29 19:02 댓글 9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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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07.02 01:13

    프랑스의 중간 계급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요?

  • 08.06.30 21:46

    이번 4절은 마르크스이론이 국제적으로 퍼지고 영향력 또한 성장한다는 것을 느낄 수있는 발표였습니다.1864년 국제 노동자동맹이 결성되고 위원장인 마르크스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조직이 필요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조직이 자치정부 , 소요라는 코뮌이었습니다. 특히 파리코뮌은 19세기 최초의 노동계급 지배의 실례, 진정한 노동자의 통치 조직이라는 의의를 가진 것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구현체, 볼셰비키 혁명의 모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결국 붕괴되었습니다. 역사에서 보면 반란이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이라고 합니다. 과연 파리코뮌은 반란일까요? 혁명 일까요?

  • 작성자 08.07.01 23:27

    후대에 그 의식의 부정이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는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였지만 혁명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 08.07.01 18:47

    코뮌의 프랑스 파리에서 그들 노동자 계급이 행정을 장악하고 노동자계급의 선거에 의해 시의회가 실시된 것은 사회주의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 총선거에서 많은 하층 계급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쿠데타라고 해야 하나) 군사행동으로 총선거로 선출된 의회를 수도에서 몰아냈다는 것을 보고 코뮌이 대다수 인민의 의견을 무시했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08.07.02 01:17

    도시의 행동가들이 농촌민들에게 옹호를 받지 못한건 사실이지만, 보수적인 의회를 몰아낸 것이 파리 시민의 군사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08.06.30 21:34

    파리코뮌의 등장은 막스의 이론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후 소련의 볼셰비키에 영향을 끼칩니다. 1864년, 막스는 국제노동자 동맹을 탄생시키며 공산주의의 모습을 더욱 갖추어 나갔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의 목표 중 첫 번째인 혁명을 위해 기존의 정치질서 및 구조의 붕괴를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독일인이었던 그의 대다수 회원들은 애국심이 강하였었기에 공산주의의 성장을 더디게 하였습니다.

  • 작성자 08.07.02 01:18

    자신의 생각을 담아 댓글을 달아 주세요.ㅜㅜ

  • 08.07.14 17:06

    프랑스와 독일 노동자의 단결분위기는 국제노동자 동맹을 결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르크스는 바로 노동자동맹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으며 이 동맹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노동자들을 조직하는데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반영한데서 드러납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시민연대가 파리의 모든 권한을 갖는 파리코뮌이 일어납니다. 파리코뮌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회개혁, 즉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재산의 재분배 등을 실시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의회를 주도하는 세력에 밀려 실패하고 맙니다.

  • 08.07.13 15:47

    * 한정아 : 1) 들어납니다. ->> 2) 재분배등을 ->

  • 08.07.14 17:06

    수정하였습니다!!

  • 08.06.30 22:03

    비록 실패하였을지라도 파리코뮌은 평생 마르크스가 구현했던 이론에 가장 실재적인 모델이었습니다.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파리코뮌은 볼셰비키 혁명, 즉 러시아 혁명의 모델이 되어 그들의 정부조직을 만드는 원리가 되었습니다.

  • 작성자 08.07.02 01:24

    국제 노동자 동맹을 통한 마르크스의 이상 실현 시도! 자신의 신념을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은 익히 수업 시간에도 언급하였지만, 자신의 이상 실현의 장으로 삼았다는 측면은 교묘하게도 가리워진 부분이었군요!^^ 이미 만들어진 것에 마르크스 자신의 것을 껴 넣으려 애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성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었네요.^^

  • 08.06.30 22:46

    4절에서는 드디어 마르크스 이론의 구체적인 모델이 등장합니다. 파리코뮌은 마르크스가 목표했던 가장 구체적인 이상사회의 모델이며 19세기 최초의 노동계급지배의 실례이기도 합니다.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파리코뮌이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갖는 역사적인 의의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물으셔서, 그 질문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파리코뮌이 유럽 사회주의 역사에서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초의 경험이었고 막시즘이 현실화되어서 나타난 최초의 형태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 08.06.30 22:54

    비록 파리코뮌이 결국 티에르의 책략으로 인해 진압되어 아쉽게도 그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왔던 사회가 잠시나마 현실화되었던 점과 민중들이 선거를 실시하여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들고 평등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파리코뮌은 사회주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든든한 초석과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닙니다. 발표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작성자 08.07.02 01:25

    맞습니다. 분명 든든한 초석과 원동력이 되었지요.^^

  • 08.06.30 23:07

    파리코뮌의 의의는 지금까지의 어떠한 사회주의 행동들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들은 붕괴 되었지만 최초의 노동계급의 지배라는 점에서 1848년의 반동의 승리 이후 침체되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다른 노동계급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즉 다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사상으로 급부상시킬 수 있는 사상으로 만들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주의가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작성자 08.07.02 01:27

    분명 파리 코뮌의 의의는 분명 크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글 쓰신 의도가 이전보다 성숙했다는 것이라면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 08.06.30 23:02

    1871년 프랑스에서는 총선을 통해 나폴레옹 지지자들이 의회를 주도하게 되고 의회와 파리 사이에는 심각한 대립이 발생하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코뮌이 파리를 장악하고 혁명을 주도 하게 됩니다. 결국 실패로 끝나긴 하지만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을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실현이라 하였습니다. 파리코뮌은 후에 볼셰비키 혁명의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파리코뮌과 같이 노동계급 자신에 의한 성취와 함께 마르크스는 노동자동맹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어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 작성자 08.07.02 01:28

    훌륭한 요약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 08.06.30 23:03

    파리코뮌의 중요한 의의는 '최초의 노동계급의 지배'이다. 파리코뮌은 마르크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노동자의 통치조직이 형성되고, 헤게모니의 장악이 이루어 졌지만, 모든 면에서의 사회주의의 실현은 구현할수 없었다.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곧 티에르에 의해 파리코뮌은 붕괴되지만, 프롤레타리아의 단합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었고, 러시아 혁명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파리코뮌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의 온건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작성자 08.07.02 01:30

    파리 코뮌시기에는 명백한 헤게모니의 장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발표에서 말씀드렸는데요.ㅠㅠ 또 마르크스는 온건한 신념을 가진 이는 아니었습니다.

  • 08.06.30 23:34

    파리 코뮌은 노동자계급의 동맹자 문제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봅니다.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최초 경험이었음과 동시에 중요한 국민적 과제와 완전히 부패한 제정이 초래한 결과의 일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점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이익은 당시 프랑스 중간계급의 이익과 합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파리 코뮌은 노동자계급 투쟁이 갖는 국제주의 성격을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파리 코뮌은 '노동 해방'이라는 세계 노동자의 공통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다른 나라 노동운동과 국제노동운동 발전에서 중요한 계기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08.07.02 01:34

    프랑스의 중간 계급은 누구인가요?ㅜㅜ 완전히 부패한 제정이 초래한 결과의 일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의 필요 부분은 아주 잘 언급해 주셨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08.07.02 21:35

    맞습니다. 이후에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 파리 코뮌만큼 그의 사상에 이상적인 모델도 없었지요.^^

  • 08.07.13 15:50

    * 이우인 : 1) 이상모형들이 -> 2) 쳬계적으로 ->> 3) 맹정이 ->> 4) 마무리 되었지만 -> 5) 볼수 있겠지요. ->

  • 08.06.30 23:41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통한 노동자의 해방은 공산당 선언에서 이미 주장되었다. 그 현실화로 국제노동자연맹(1864)을 결성하게 되었으나 국가에 대한 애국적 감정과 마르크스의 독일에 대한 민족주의의 오해로 인해 국제 동맹의 성장은 더디기만 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에서 프랑스에서의 파리코뮌의 성공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실례라는 의의를 남겼다. 이로써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현실로 나타났으나 파리코뮌의 실패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주의 혁명 이 후의 실제적 접근이 없다는 점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이자 순수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작성자 08.07.02 01:39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언급의 부재. 저도 계속 문제 삼으며 보고 있는 측면이죠.^^

  • 08.06.30 23:56

    마르크스는 국제 노동자 동맹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곳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보였는데 이는 마르크스가 이를 이상 실현조직으로서 보았기 때문이다. 국제 노동자 동맹의 공산당 선언에서 전세계 프롤레탈리아인이여 단결하라! 에서 알 수 있듯이

  • 08.07.01 14:10

    실질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단결과 헤게모니라니, 또 하나의 사회주의 역사에 큰 획이라 생각됩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실적용으로서 국제노동자동맹과 파리코뮌은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점차 진화해간다는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이제껏 사회주의의 이론 성립과 그것의 세공과정을 차근차근 살펴왔는데, 3장의 4절을 통해 드디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접할 수 있게 되어 제가 다 기쁠 정도였습니다. 그 두 조직이 비록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문득 우리 속담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가 머릿속에 스치며 그 이후의 사회주의 양상과 막시즘의 영향에 기대를 해 봅니다.

  • 작성자 08.07.02 01:41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고 엄정수 학우도 저와 같이 기쁘셨군요!^^ 열 번 찍어 레닌의 사회주의가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분명 맨 처음 나무를 찍던 나무꾼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지요,

  • 08.06.30 23:59

    사회에 기계화로 인한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예전의 지방분권적 현상 대신 중앙집권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공산당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와 독일 등의 각국 노동자들은 런던 국제 박람회를 갖게 되고 국제 노동자 동맹을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이때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현실화될 것을 믿으며 애를 써보지만 노력에 비해 장애가 많았고요. 그러던 중에 역사성을 지닌 코뮌이라는 자치 조직이 파리에서 일어나 잠깐이지만 정부에 맞서 승리하게 됩니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이론이 현실화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 작성자 08.07.02 01:48

    중앙집권적 현상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내용을 설명해 주셔서 연결해 이해하기 쉽습니다. 뒷 내용도 아주 정리가 잘 되어있네요.^^

  • 08.06.30 23:58

    프롤레탈리아의 국제주의를 주창한다. 막스가 주장한 것은 프롤레탈리아 계급에 의한 정권주도 인데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파리코뮌이라고 할 수 있다.

  • 작성자 08.07.02 01:36

    댓글의 급박함이 느껴집니다.ㅠㅠ

  • 08.07.01 00:00

    이 절에선 파리 코뮌을 통해 마르크스가 이룩하려 했던 사회가 현실로 구체화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실제 노동계급에 의해 의회가 새로이 설립되고 그들이 통치자로서 등장한 최초의 시도입니다. 비록 티에르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파리 코뮌은 마르크스 이론의 현실적인 가능성 여부를 보여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였던 파리 코뮌은 노동계급의 통치라는 개념 외에도 그들 스스로 계급의식을 탈피하여 나아갔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됩니다.

  • 작성자 08.07.02 01:55

    스스로 계급 의식을 탈피했다는 표현은 모호하군요.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 08.06.30 23:59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최초의 노동계급 지배의 실례라고 묘사했습니다.

  • 작성자 08.07.02 19:29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성의를 가지고 댓글을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 08.07.02 20:02

    시간에 쫓겨서 그만...죄송합니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최초의 노동계급 지배의 실례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는 파리 코뮌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파리 코뮌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모델이 됨으로써 사회주의 역사상 의의를 갖게 됩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그 자신이 주장-"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한 대로 국제화 되면서 제1차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그 구현체라 할 만한 파리 코뮌의 발생에서 사회주의의 일련의 흐름이 보다 범위를 넓혀 구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 08.07.01 00:37

    영막스는 다가올 사회를 꿈꾸던 사상가였다면, 올드막스는 직접 행동하는 실천가였습니다. 영막스의 오랜 기다림은 마침내 1864년, 제 1차 인터내셔널로 알려진 노동자동맹이 결성됨에 따라서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각국의 민족성분에 따른 이질성 때문에 마르크스는 조심해야 했지만 그의 신념을 실행시킬 수 있는 기회에 가슴벅차하였습니다. 이후에 잿더미가 된 프랑스에서 파리코뮌이 생기자 그는 그의 사상적 기반을 더욱 확실히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이론뿐인 사상가에서 직접 대중을 조직하는 실천가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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