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리는 수두 자리에 점찍듯 발라놓은 연분홍물약 같은 의존형색(色)이다 개화 후 일주일이 절정이라며 취하고픈 사람들 흐드러진 밤길을 걷는다
송이마다 차차 깊어지는 까만 꽃동자, 또록 개구리 알 같다
어둠이 눈을 뜰 때부터 새벽이 반쯤 감길 때까지 핑크빛 물큰한 웃음에
누드다, 뇌쇄다, 싸구려다
간격 맞춰 피어 있는 꽃망울을 손가락으로 간 본다
“낮에 약을 쳐서 지금은 못 먹는다니까”
여우비 오는 것처럼 알아차리지 못하게 딱 한 잎만 따먹어 보겠다고
처음도 아닌데 불안하다
옹골진 가지가 출렁, 허락받은 일주일을 피었다 흐드러졌다 서서히 지쳐간다
흉곽을 빠져나가는 오류의 꽃들 와락 쏟아 내려도 나는 한창이다
도래솔
소소리 바람 바스락
나뭇결 휘감아 어릴 때
이승이 보이는 머리맡에 허리 펴고 붓붓이 서서
마음이 바잡아 어지러운 발자국들무릎 아래 겹 내려놓고
곁눈질 없는 경주말처럼
그렇게 떠나라고
듬쑥한 제 등을 내밀며
수직으로 오르도록
하늘로 하늘로 까치발 곧추선다
‘너무 사이가 좋으면 하나를 먼저 데려간다더라’
그림자를 쫓아 주둥이에 피 맺히도록
하염없이 거울을 쪼는 짝 잃은 앵무(鸚鵡)
검은 얼룩 어룽지는 명주 짜며
항아리 속에서 혼을 잃은 *허웅애기야
皐復, 皐復, 皐復
뒤돌아봐지기 시작하면 浮游하는
시우(時雨)같은 바람
하늘틈새로 자맥질을 하다
배밀이하는 햇무리아래 도래솔
온몸으로 위로하는 배웅
* 허웅애기 : 사람이 이승과 저승을 왕래할 수 없게 된 내력을 밝힌 제주지역의 서사무가* 도래솔 : 무덤가에 둘러선 소나무
신자씨 슭에는 별밭이 있어
그녀는 이마에 뿔 하나 달고 소꼬리모양 치맛자락 늘어뜨리고 있었지요
뭉툭한 말발굽에 다리엔 불꽃모양 갈기를 하고 사슴처럼 달렸지요
바람 안으로 웅크린 눈이 굴을 닮아서
등에 비누 덩어리 같은 혹이 자라던 남자 새벽녘 뭍으로 나가고
벽지와 장판 새에 뿌리혹박테리아가 피었지요
기린 같은 여자 혈관 속으로 장창을 든 기사가 달리는 날이면
대가리 뚝 자른 묵은지로 강다짐을 하고
애 업듯 세릅배기 개를 들춰 업고 나서는 슭에는
소란히 공중제비 하는 포말
헛웃음을 듣기만 하는 바다가 있었지요
남자의 잔손금처럼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고
바람의 손을 느낄 때마다 앞섶을 내주는 흰죽 같은 눈으로 굴을 까다
벽 얇은 옆방 신혼부부 속살대는 밤
감잎에 물 흐르듯 또글한 기억이 옥양목보 너울 타고 오면
삶의 고비 다듬다 갈물 든 손을 들어
넓적다리 안쪽 처마에 툴툴 거리는 빗물을 털어냈지요
마을 회관 아낙들과 낮술이라도 한잔 걸친 날에는
마당에 일광욕을 하는 시뻘건 고추 무더기를 바라보다
주어에서 목적어에서 풀려나 후련하다고
아포리즘 5% 링거액 같은
애 녹이는 라디오 유행가 따라 훌렁훌렁
새벽별밭까지 뛰어가 속에 핀 꺼먹 검댕이를 털었지요
아버지는 남기는 걸 좋아했다
너무 아프면 미련 두지 말라고 슬그머니 가위를 내주고
죽어도 후회할 것 같으면 눈 딱 감으라며 풀을 내주고
지우개와 연필, 수정펜을 내놓더니 주름진 거죽만 남았다
빨아도 지지 않는 검버섯이 얼룩 거린다
정이 집착이 되어 떼어 놓지 못하고 끌고 다녔다
헝겊필통에서 마른 침 넘기는 소리, 엉덩이 긁는 소리,
뒤척이다 나를 데려가 달라는 두꺼비가 쉰 마리쯤 운다
검은부리아비 깃털이 돋고 닫힌 문밖에서 밤새워 따오기
청도요 웃음이 날아오르고
고개 끄덕이는 아버지 웃음에 물만두 얇은 피 같은 주름이 잡힌다
홀씨 베고 서리 침낭 이마너머 까지 당겨 덮고 가는 한 生
거리 네온이 들고, 검은 하늘을 달궈 댈 교회의 경건이 붉게 박힌다
아버지는 잔혹한 환희 송곳을 열쇠처럼 찔러 열고 문밖으로 나섰다
거칠게 혹은 조심스럽게 무장해제 시키려고 코끝 싸한 그 방에 다녀 가셨나보다
고장 난 손목터널에 든 고양이 울음 티끌이 닿았던 날
피안의 벽에 선만 그으면 생기는 계단을 지나
망루에 서 살뜰하게 챙긴 회한의 폭을 손나팔하고 분망하게 외치는 동안
딱 5분 다녀간 햇살이 그늘에 구멍을 내고 동굴을 만들었다
그날 중환자실에서 아버지는 코마환자와 같이 한 두려움에 입술을 모아 휘파람 소리를 남겼을까!
그 방에 호두 두 알을 남겼다
옷장 속 남녀
겨자 빛 그믐달에 톡 쏘인 멍게 같은 구름이 두어 개 지나가고
바깥이 궁금할 일 없는 남자는 옷장에 붙여둔 그림과 한나절 이야기 나누다
척추에 좋은 자세를 연구 한다
철제 바구니 안에 등 말고 앉았다가 팔 다리 접고 서랍 속에 개켜져 있더니
세탁소 로고가 박힌 비닐 속에 어깨 늘어뜨리고 옷걸이에 걸려있다
천장을 보고 누워 두 팔은 양쪽 골반 옆에
가지런히 모은 발끝은 품위를 유지하고 어떤 소리가 들려도 눈을 뜨면 안된다
아랫배에서 길어 올린 숨을 세 번 내쉬고 주문을 외운다
낙타머리, 사슴뿔, 토끼눈, 소귀, 뱀목, 조개의 배, 잉어비늘, 매의 발톱, 호랑이발바닥
손바닥을 두 번 마주치며 합체, 합체 …….
어김없는 용(龍)의 조합이다
초파리도 한숨 돌리는 느긋한 저녁
남자를 임대받은 여자의 잇속을 내보이는 소리 박하향처럼 올라온다
“당신 임대기간이 얼마나 남았죠?”
집게손에 매달린 남자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사이
옷장에서 동거하던 다듬이 벌레와 자충들이 먼저 나가고
남자는 숨소리에서 좀약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삼거리 병원 앞 히물히물 웃는 아내의 얼굴이 보이는 풍경에
“사람을 임대합니다.” 현수막이 펄럭인다
제습제를 겹쳐 베고 꼼짝 않는 연습을 하다
임대계약 해지 통보 받은 남자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부는 삭일(朔日)
말미잘 같은 여자가 옷장에 들어갔다
등을 꼿꼿이 펴고 양손을 내밀어 박수치기 두 번 짝짝
前 기러기, 後 기린, 뱀의 목, 물고기 꼬리, 황새 이마, 원앙 깃털, 닭 부리
봉(鳳)이든 황(凰)이든 되려고 …….
임희선
1974년 대전 출생.
현재 대전에서 독서논술지도 학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