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경우가 많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은 일생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남이 평정하기도 한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우리를 겸허하게 행동하는 데에는 죽음이다. 살아있을 때보다 아름답게 살기 위해선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인 것이다. 어느 야생화도 혼자 피는 꽃은 없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지나가고 그곳에 사랑스러운 친구가 있어야 꽃이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이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공통적인 부분을 찾아 문학과 문예를 창작한다. 물질과 물질의 만남은 과학이다. 서로 교합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 공간이 우리가 살아갈 현실인지 모른다. 생각할 수 있는 공간과 생각할 수 없는 무념의 공간 사이에 우리의 운명이 숨을 쉬고 있다. 온도가 낮아지고 빛이 짧아지면 꽃을 피고 열매를 맺는다. 이게 가을 야생화다. 봄여름 활기차게 살아왔던 모습들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수렴하는 공간으로 채워진다. 길게 쓴 장문들을 줄이고 줄여서 시를 쓴다. 다양한 색을 줄여서 간결한 색을 칠한다. 물론 자연이 칠해준 색이지만 내 마음이 따라가면 내가 칠한 거나 다름없다. 며느리배꼽 야생화는 하늘색을 닮았다. 모든 식물이 그렇지만 해와 달 그리고 우주를 닮았다. 꽃과 열매는 둥글다. 하나의 작품은 원에 가깝다. 살아가는 데에 원은 가장 유리한 점이 있다. 강한 비바람을 견딜 수 있는 모양은 둥글어야 한다. 생각과 감정이 각이 지면 부딪치기 십상이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선 꽃처럼 원 모양으로 진화되어 왔다. 하나의 야생화가 며느리배꼽으로 불리기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할미꽃, 사위질빵, 며느리밥풀, 애기똥풀 등은 세대 간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같은 시대 안에 윤리를 중요시했고 고유의 품성을 인정했다. 위 사람을 공경하고 미래의 세대에 희망을 주었다. 야생화 이름을 보면 성별의 차이도 없다. 이웃집 할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친근한 마을 동생들 이름이다. 춘자, 춘순, 영자, 복순 등의 이름들은 야생화처럼 아름답다. 가장 촌스러운 이름이 부르기도 쉽고 정이 넘쳐난다. 야생화가 자란 공간은 낯익다. 내가 살던 공간에서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기를 기도한다. 꽃이 아름다운 건 곧 시들기 때문이다. 무념무상의 공간으로 가는 것은 축하할 만하다. 올여름은 역대급으로 더웠다. 그래서 가을꽃들이 그리워진다. 내 안에 그리운 것들은 일교차가 커야 더 그리워진다. 서로 다르면서 맞춰보는 것이 세상살이다. 며느리배꼽 열매 중에 쪽빛 하늘이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