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내가 평화롭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원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내가 원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평화롭기를
내가 원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 . "
김포시 한별정신병원 최훈동(51)원장은 아침이면
자신을 비롯한 우주 만물이 행복하기를 빈다.
자리에 고요히 앉아 우주 만물에 자비의 기운을 보낸다.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만물의 밝고 맑은 원래 성품은
이들에도 당연히 깃들어 있다.
상담을 하고 진료를 할 때 그들 안에 찬란히 빛나는
우주의 본성을 본다.
의사라는 생각이 없다.
자신은 환자의 정신과 삶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일뿐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병원을 치료공동체라 부른다.
"치료는 대학병원 수준으로
비용은 동네 의원 수준으로" 운영해
의술이 아닌 인술을 펴고 있다.
이 병원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환자는 110여명.
의료진은 전문의
정신과 전문 간호사등 40명이나 된다.
다른 정신병원에 비해 의료진 비율이 높은 편이다.
약제도 대학 병원에서나 쓰는 고가품을 쓴다.
의료진 비율이 높고 값비싼 약을 쓰면서도
상대적으로 치료비가 싸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병원을 운영할 정도의 수익은 난다고 한다.
최 원장의 이런 병원 운영 철학은 어린 시절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는 발원에서 비롯됐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삶에 회의가 들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았다.
함석헌 선생이 펴낸 <씨알의 소리>를 구해 읽었고
신문 사설을 뒤적였지만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마음이 힘들자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걸인, 부랑자, 노숙자, 노점상 등.
저들은 왜 저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2년 동안 방황했으나 의심은 풀리지 않았고
대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발심'을 했다.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판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독재정권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게 싫었다.'고 한다.
의사가 되기로 했다.
집안이 어려워 개업을 하더라도
고가의 의료장비를 사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
별다른 시설이 필요없는
정신과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 원서를 내는 날도
아버지는 눈물로 법대에 진학할 것을 호소했지만
그는 '지금은 불효자라 생각하시겠지만
10년 안에 불효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그는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는다.
유신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희귀한 의대생 곁에는
늘 정보과 형사가 따라다녔다.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에게 잠복해 있던 화두가 떠올랐다.
고교 때 화엄사에서의 경험이
기독교 신자인 그를 불교로 이끌었다.
고3여름, 그는 친구들과 화엄사에 놀러가
하룻밤 묶기를 청했다.
그 절의 스님은 예불 참석을 조건으로 걸었다.
마지못해 참석한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오던 그에게
스님은 "어디에 절을 했느냐?" 고 물었다.
당돌하게 스님은 어디에 절을 하셨냐고 되물었다.
"나 자신에게 절을 했다"는 스님의 말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화엄사에서의 경험은 대학 2학년때 기억의 창고에서
다시 햇볕 아래로 나왔다.
육조 혜능 스님의 <육조단경>
불교 초기 경전인 <아함경>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등
불교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파천황. 불교는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이든지 1등을 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 생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난사람보다는 된사람이,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보다는
내면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의과대불교학생회를 만들어
고승을 모시고 법문을 듣던 그는
본과1학년 때 아예 학교를 쉬면서
정동진 부근의 한 암자에서 정진하며
출가를 준비했지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속세로 돌아온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저에게만은 명부에서 저승사자가 왔는데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시면서
이전에 법대에 가라고 한 데 대해
미안하다고 하면서 우시더라고요.
캐럴 소리가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 아침
저의 독경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 뒤 출가보다는 고교 때 결심했던
남을 돕는 의사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당시로는 드물게 개업의의 길을 선택해
구로동에 첫 정신과 의원을 열어
13년 동안 빈부귀천을 구별하지 않는 인술을 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큰 병원을 만들어 많은 이들을 돕고 싶었다.
96년 뜻을 같이하는 다른 의사 세명과 함께
김포병원을 만들었다.
21세기는 동서의학이 융합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양한방 협진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이엠에프 사태로 병원은
2년 만에 부도위기에 몰렸다.
10억원대의 은행빚 이자를 갚느라
적자만도 매달 2천만원.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병원을 만든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억울했다.
"부도 위기에 몰리니까 정말 피가 마르더라고요.
하루에 2-3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생활을
2년 넘게 했습니다.
자살하고 싶은 적도 많았습니다.
실직자들의 고통을 알겠더군요.
그게 큰 공부였던 것 같아요.
그 경험이 없었다면 환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피상적으로만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영적으로 순수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다시 불교의 구도정신이 살아났다.
부처님의 초기 설법을 담은 경전을 뒤적이다
깨달음이 왔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온다.
집착을 소멸시키면 평안을 얻는다.
그랬다.
집착이 원인이었다.
병원에 대한 집착
내 삶에 대한 집착.
어느 순간 집착에서 풀려났다.
이어 평온이 찾아왔다.
집착이 사라지자 문제도 해결됐다.
"친구들의 귀한 후원"으로 급한 불을 껐다.
병원 규모도 줄였고 자신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정신병원으로 진료과목도 단순화했다.
마음이 평온해지니
환자들을 정성스럽게 대하게 됐고,
병원은 곧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그는 삶 속에서 체득한 명상을
환자들에게 접목시키는 일도 시작했다.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정신이 건강해져야 한다는 '깨달음'에서다.
그는 이를 위해 지난해 목동에
한별심리연구소를 만들고
명상모임도 꾸렸다.
그는 국가가 국민의 정신 건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부모, 선생님 등 어른들의 정신이 건강하면
아이들이 밝고 올바르게 큽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병리 현상도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게 근본원인입니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정신건강특별위원회 정도는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권복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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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저 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을 혼자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또 죽고싶단 생각을 했다니....정말 부끄럽습니다 ... 제 정신부터 고쳐야 겠어요..정신이 올바르지가 않은것 같아요...아침 햇살이 제 얼굴에 비추네요..진실님 이 햇살만큼 오늘하루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