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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4월 15일 수요일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자, 사도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늘 복음의 이 구절 안에는, 우리의 신앙을 떠받치는 세 가지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 사랑하셨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대상은 ‘잘난 사람’, ‘의로운 사람’만이 아니라 죄로 흔들리고 방향을 잃은 인간까지 포함한 ‘온 세상’입니다.
둘째, “너무나 사랑하셨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광야에서 구리 뱀을 바라보기만 해도 살아났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생명이 열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강렬한 구원 의지가 먼저입니다.
셋째, “외아들을 내주셨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온전히 내어놓으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셔서, 그 목숨까지 내주십니다. ‘이만큼이면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전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은 ‘노력만 남은 의무’가 되기 쉽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도 공허함이 남고, 기쁨보다 부담이 앞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먼저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정말 그 사랑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 사랑의 힘이 삶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이러한 성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간단한 공식이자 신앙의 신조(信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목,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공식이자 신조(信條)가 있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 3장 16절 이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더 나이 들어 머릿속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이 공식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달 외워둬야겠습니다.
그 공식의 저자는 요한 복음사가인데,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①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② 그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③ 예수님이 이 땅에 파견되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④ 이 세상 그 누구든, 그 어떤 대역 죄인이든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표현에 제 마음이 한참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밥먹듯이 죄를 짓고, 동일한 잘못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이 자주 등장합니다. 읽을 때 마다 끔찍한 생각과 함께 밀물처럼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큰 일이네 이거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사실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들에 대한 성경 저자들의 표현은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보다 우리 인간 각자가 자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혹은 불신의 결과로 구원 또는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신앙이냐? 불신이냐?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가 여부에 따라 심판과 구원, 단죄와 영원한 생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그 간단한 공식, 신앙의 신조(信條)를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굳게 믿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억지로 한 사랑 실천은 위선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리에 따라 사는 이는 빛으로 나아와,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요한 3,21)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빛'과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실존적인 고민에 빠집니다. '선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알겠는데, 내 마음이 안 따라줄 때는 어떡하지?'라는 고민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실천할 때 '진심'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 하는 선행을 '위선'이라 부르며 꺼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억지로라도 선행을 하십시오. 다만 진실해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안 좋은 것이 바리사이적 선행입니다. 이것이 진짜 위선입니다. 겉으로는 완벽한 선행을 베풀지만, 사실은 그 선행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의로움'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즐겁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행이 나를 빛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위선의 모델은 가리옷 유다입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 (요한 12,5).
말만 들으면 유다는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자선가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은 그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으로서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12,6).
유다는 '선행'과 '정의'라는 명분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방패로 썼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지만, 사실은 자기 영광이라는 거짓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위선자는 빛으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빛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선행이 위선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대부분이 속해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선'이 싫다며 아예 선행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당당합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안 해. 내키지도 않는데 사랑한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에는 '정서적 추론(Emotional Reasoning)'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믿는 오류입니다. 1964년 뉴욕에서 일어난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이를 비극적으로 증명합니다. 한 여성이 30분 동안 괴한에게 습격당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38명의 이웃 중 누구도 돕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고백한 이유는 소름 돋습니다. "내가 지금 불편하니까 저 소리는 별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죠." 그들은 '돕고 싶지 않은 기분'을 '돕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로 둔갑시켰습니다. 이는 솔직함을 핑계로 어둠 속에 누워 있는 게으름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평생 준비운동만 하다가 끝나는 분들입니다. "주님, 저도 사랑하고 싶어요. 제 마음을 뜨겁게 해주세요. 그러면 그때 제가 전 재산을 다 바칠게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런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기서 '운전과 주유소'의 비유가 필요합니다. 운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길가에 있는 주유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유소는 그에게 풍경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운전대를 잡고 길을 나선 사람은 다릅니다. 차를 몰고 가다 보면 곧 기름이 떨어집니다. '내 힘으로는 더 갈 수 없구나!'라는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 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주유소 간판만 보입니다.
선행도 이와 같습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려고 억지로 노력해본 사람만이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어줬는데 속에서는 천불이 납니다. 저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라는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채워주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성령의 주유소)를 절실히 찾게 됩니다. 주유소가 필요한 건 차를 움직이는 사람뿐입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 성령의 은총은 필요 없습니다.
베트남의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자기를 증오하는 간수들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침을 뱉는 그들을 어떻게 진심으로 사랑하겠습니까?
그는 훗날 『희망의 유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내 감정은 결코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미소 짓고, 억지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내게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추기경님은 그 '억지 사랑'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간절히 성체를 원했습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저 간수에게 1분도 웃어줄 수 없습니다. 제발 제 안에 오셔서 저 대신 사랑해 주십시오." 그는 몰래 전달된 포도주 세 방울과 빵 부스러기로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그 '억지 사랑'을 채워갈 신적 에너지를 수혈받았습니다. 결국 그 억지 사랑에 감동한 간수들이 회개하고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추기경님이 억지로라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성체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출처: 구엔 반 투안, 『희망의 유서』 2000)
선행에는 위선이 없습니다. 다만 위선자가 선행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빵을 주어도, 그 빵은 굶주린 아이의 배를 채우는 '진실한 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빵을 주느라 내 손이 떨리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드디어 자신 안의 어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규합니다. "나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18.24). 바오로는 억지로라도 선을 행하려 투쟁했기에 자신의 비참함을 보았고,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로마 7,25)라고 외치며 '참 빛'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사랑하십시오. 내가 억지로 신호등을 지킨다고 그것이 위선일까요? 법을 지키는 것이기에 위선이 아닙니다. 미운 사람에게 억지로 커피 한 잔을 건네십시오. 마음은 부글부글 끓어도 입으로는 축복의 말을 뱉으십시오. 그것이 주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솔직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깨달을 것입니다. '아,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주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 정직한 절망이 우리를 참 빛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은 1년에 두 번 시간을 바꾸고 있습니다. 3월과 11월에 시간을 바꾸는데 이것을 ‘Daylight Saving Time(일광절약시간)’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Summer Time’이라고도 부릅니다. 저도 미국에 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그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계의 바늘이 한 시간 앞으로 가기도 하고, 다시 뒤로 가기도 합니다. 시간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간에는 서로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서는 시간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며, 1년은 365일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준으로 정해진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부자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침이 오면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 되면 하루를 마칩니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의 삶도 함께 흘러갑니다.
하지만 성서는 또 다른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카이로스, 의미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결혼기념일이 있습니다. 서품 기념일이 있습니다. 축일이 있고 생일이 있습니다. 은경축이 있고 금경축이 있습니다. 이런 날들은 단순히 달력에 적힌 날짜가 아닙니다. 그날에는 우리의 삶을 바꾸었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날을 떠올리면 감사가 떠오르고, 기쁨이 떠오르고, 때로는 눈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람은 바로 이런 의미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동물들은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종족 보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미의 시간을 통해 문화와 역사와 예술과 철학과 종교를 만들어 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의미의 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의미의 시간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기도 합니다. 어쩌면 종교도, 그리고 부활 신앙도 바로 이런 의미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대사제들과 사두가이파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도들은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다시 성전에 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도들이 전하는 진리를 두려워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힘은 언제나 두려워합니다. 부당한 권력은 언제나 떨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잡아 가두고, 침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권력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힘도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박해와 멸시를 받았던 사도들은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밝혀주는 빛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 차이입니다. 권력과 힘은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그 힘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있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과 희생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시계는 돌아가고 하루는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사랑과 진리로 채워진다면, 그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담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는 패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카이로스 안에서는 구원의 순간이었고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도들의 감옥 생활도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는 고통이었지만, 카이로스 안에서는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루는 그냥 지나가는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발견하는 삶, 평범한 하루를 은총의 시간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하루가 단순히 지나가는 크로노스의 하루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카이로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훈나 (Hunna)
활동년도 : +679년
신분 : 평신도
지역 : 알자스(Alsace)
같은 이름 : 후바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공작의 딸로서 후바(Huva)라고도 알려진 성녀 훈나는 후노(Huno)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특히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가난한 이들을 자주 씻겨 주었기 때문에 ‘씻어 주는 거룩한 부인’(Holy Washerwoman)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사망 후 그 지방에서부터 그녀를 공경하기 시작하다가, 1520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녀는 세탁부의 수호성녀이다.
성녀 바실리사 (Basilissa)
활동년도 : +65년경
신분 : 사도들의 2제자,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바실리싸
근거는 희박하지만 성녀 바실리사와 로마(Roma)의 귀부인 성녀 아나스타시아(Anastasia)는 개종자들로서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박해를 받아 죽은 두 성인의 시신을 발견하여 장사지냈는데, 이 일로 인하여 그들 역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후 네로 황제의 명에 따라 참수되었다고 한다.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Damien de Veuster)
활동년도 : 1840-1889년
신분 : 신부, 선교사
지역 : 몰로카이(Molokai)
같은 이름 : 다미아노,다미아누스, 다미앵
벨지움의 트레머루에서 태어난 성 다미안 신부는 브렌느-러-꽁트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860년에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하여 다미안이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지원하여 하와이 선교사로 파견되었고(1864년), 같은 해에 호눌루루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그는 9년 동안 푸노와 코알라 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1873년, 이번에도 자신의 요청에 따라, 그는 몰로카이의 나환자 촌으로 파견되어, 여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였다.
1885년, 그 자신도 이미 이 가증스런 병에 걸렸지만 1889년 4월 15일에 운명할 때까지 몰로카이에 계속하여 생활하며 나환자들을 돕는데 생명을 다 바친 것이다.
그는 환자들로부터 냉대를 받은 적이 있고 또 중상모략으로 곤경에 처한 경우들이 많았어도, 그의 성덕과 애덕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 영원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1977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유언
1) 주님이 나 프란치스꼬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
내가 죄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2)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3)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한센병의 정의
한센병은 인간의 가장 오랜 질병의 하나로 만성 감염성 면역질환이며, 1874년 노르웨이의 Hansen 박사에 의해 사람의 병원체로는 최초로 발견된 한센균이 원인균이다.
한센균이 호흡기나 피부를 통해 체내에 감염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센병에 걸리지 않고 불현성감염 상태로 한센균이 소멸되어 버리나 신체의 면역이 저하되거나 불량한 환경상태에 놓이면 3-7년의 잠복기를 거쳐서 임상적으로 발병하게 된다.
한센균은 1차적으로 표제성 말초신경을 침범하고 2차적으로 피부를 때로는 눈, 상기도점막, 근육, 골 및 고환을 침범하기도 한다.
한센환자의 개념
한센환자의 개념은 두 가지로 사용되는데 첫째는 사회적 개념을 무시한 단순 의학적인 개념의 환자와 둘째는 사회, 경제적 측면까지 고려한 개념으로 과거나 현재에 한센병력을 가진 전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우리 나라의 통계는 후자의 개념을 사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