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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
포병 |
공병 |
치중병 |
기타 |
인원수/말 |
2개 여단 4개 연대 12개 대대 |
1개 연대 3개 대대 |
1개 대대 3개 중대 |
1개 대대 2개 중대 |
위생대, 특무중대, 화학소대, 수색대 등 |
17,584명/3,387필 |
물론, 37년까지도 이 편제대로 정원을 제대로 채운 부대는 하나도 없었고 중앙직계군조차도 1개사단 인원은 많아야 8천에서 1만정도 였습니다. 어쨌든 당시 독일군사고문단으로 온 팔켄하우젠대장의 주도로 육군의 개편을 추진하는데, 이에 필요한 독일제 신식장비의 도착이 지연되자 일단 있는 장비와 무기로 개편하고 나중에 장비가 도입되는대로 보충키로 합니다. 이로서 36년 말까지 총 20개사단이 "개편사"로 재편되었고 37년 7월 노구교사변까지 추가로 10개 사단이 재편됩니다. 그러나 대일개전까지 계획대로 독일식 최신 장비를 갖출 수 있었던 부대는 8개 사단(제1사단, 제3사단, 제6사단, 제9사단, 제14사단, 제36사단, 제87사단, 제88사단)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포병전력은 당초계획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연대였지만 실제로는 1개 대대(산포 16문)를 갖추는 것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이조차도 갖추지 못합니다.
제가 종종 방문하여 참고하는 "길잃은 어린양의 놀이터"님의 블로그에 보면 당시 중국 육군의 편제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링크 : http://panzerbear.blogspot.com/2010/12/blog-post_05.html
게다가 30년대 초중반까지 서로 꽤나 우호적인 관계였던 중독 양국은 우리의 영원한 오덕 히틀러가 갑자기 니혼짱이 좋아졌는지 친일로 돌아섭니다. 여기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에 대한 군수물자 판매를 금지시킵니다. 이것은 중국군 근대화 계획에 그야말로 치명타였죠. 38년말까지 적어도 20개 사단분량의 장비를 홍콩을 통해 수입키로 되어 있었는데 죄다 틀어집니다. 이 부족분은 이후 소련의 강력한 원조로 한동안 때우게 됩니다.
따라서 총 30개 개편사중 8개 사단을 제외하고는 22개 사단이 재편성과 독일식 훈련을 마친 상태에서 장비 교체는 완료 하지 못한채 부족분에 대해 다른 부대에서 회수한 장비들로 숫자만 채웁니다. 그나마 남들보다는 나은 축에 속하죠. 독일식 8개사단을 비롯해 이 중앙군 30개 사단이 대일전쟁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공병과 기갑병, 통신병, 치중병(수송병) 등 특수병과를 창설하여 중앙 직속으로 1개 철도공병단, 1개 차량병단, 2개 통신병단, 2개 공병단을 편성합니다. 또 37년 5월에 그동안 해외에서 도입한 잡다한 기갑차량(3개 대대 규모)에다 독일에서 수입한 대전차포대대, 오토바이 중대, 장갑차 대대, 고사포 대대 등을 모아서 독일 기계화 부대를 모방한 육군 장갑병단(단장 : 두율명)을 창설하였고 이후 전략예비대인 제5군 산하 제200사단로 개편됩니다.
※ 제 200사단에 대한 상세한 자료 보기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0444677
이와 함께, 대일 항전을 대비해 근대공업의 건설과 자체 군수산업 확충 역시 추진됩니다. 당시 주요 근대공업은 주로 북경-천진과 상해, 남경 등 동남연안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대일 개전시 가장 먼저 목표가 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따라서 군령부 주도로 군수산업의 중심을 내지로 옮기는 "병공창 재배치" 계획이 수립됩니다. 각 공장은 전시에 대비해 호남북, 사천, 귀주 등으로 이전키로 하고 35년 6월부터 추진되지만 노구교사변의 발발로 계획의 일부만이 시행되죠.
또 서안, 남창, 금릉 등의 군수공장과 화약공장의 생산규모를 확충하여 무기, 탄약 생산을 증대합니다. 중국 특유의 짝퉁정신을 한껏 발휘하여 독일제 소총(Gew98, Kar98k), 24형 맥심중기관총, 체코 ZB26 경기관총 등을 복제하여 자체 생산합니다. 또 방독면, 장갑차량, 박격포 등도 자체 생산하고 향후 이를 확대해 장갑열차, 중포, 통신장비, 차량 등에 대한 생산공장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역시 예상보다 훨씬 빠른 일본과의 개전으로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의 군수 능력은 단지 박격포와 기관총, 소총 등 경화기와 탄약을 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그것도 기껏해야 중국군의 수요의 일부를 충족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해공군은 육군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 처지였는데, 당시 중국은 상해의 강남조선소, 복주의 마미조선소, 하문조선소 이렇게 3개의 조선소가 있었는데 모두 청말 양무운동시절에 만들어진 낡은 조선소들이었습니다. 또 해군력은 주로 청말에 수입된 노후함 55척, 총배수량 3만 9,610톤, 장교 78명, 사병 810명에 불과했습니다. 거의 뭐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죠. 따라서 해방은 고사하고 연해작전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청일전쟁때 아작나기는 했지만 세계 8위의 해군력을 갖추고 있었던 청해군보다도 형편없었죠.
따라서 해군 재건을 위해 해군부는 해군 건설 6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자체 조선소 건설 및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수입을 추진합니다. 일본에서 경순양함 "정해"를 수입하여 짝퉁판인 "평해"를 강남조선소에서 건조합니다. 또 독일에서 소형 잠수함을 수입하는 등 37년 7월 개전 당시 중국해군은 5개 함대 120척, 배수량 6만여톤으로 증가됩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다 예산마저 군사비의 1%에 불과한지라(총액 2억원중 육군이 1억 2천만원, 해군이 229만원, 공군이 7천만원, 참고로 37년 당시 정부세수의 약 55%가 국방비) 2척의 경순양함(이라 쓰고 구축함만도 못하다고 읽는다)과 몇몇 함을 제외하고는 매우 노후되고 소형함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본해군에 비하면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력인지라 개전과 동시에 단숨에 일소됩니다. 그러나 포함과 어뢰정 등 일부 잔존함으로 양자강 상류와 중류에서 기뢰를 살포하고 일본 강상 수송함대를 습격하는 등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죠.
※ 중국 해군에 대한 상세한 자료 보기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0444639
삼군중에 그나마 가장 눈부신 발전을 한 것이 공군이었습니다. 30년에 이미 육군항공대에서 공군을 독립시켰고 군과 민간 항공산업 발전을 적극 추진합니다. 특히 1차 상해사변에서 장개석을 비롯한 군 수뇌부들은 일본군의 공중폭격을 보면서 근대전에서 제공권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접 눈으로 깨닫죠. 따라서 34년 7월에 군사위원회 직속으로 항공위원회를 설립하고 장개석이 직접 위원장을 맡습니다. 또 와이프 송미령이 비서장을 맡아 중국 공군의 육성에 적극 활약합니다. 미정부에 공군자문을 요청하였고 나중에 "플라잉 타이거즈"로 유명해지는 퇴역군인 센놀트대위를 미정부에 요청해 군사고문으로 초빙하여 중국에 그가 도착하자 송미령이 친히 마중까지 나가죠. 나중에 스틸웰때랑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인듯....(똑같이 생고생했지만 잘나가던 인생 종친 것이 스틸웰이고 막장인생에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것이 센놀트이죠. 사람 인생 모른다는...ㅋㅋ)
34년부터 미국과 이탈리아, 독일 등과 합작하여 항공기 제조창(상해, 항주, 남창 등)과 수리공장(남경, 남창, 낙양, 광주, 항주, 중경 등 총 6개소)을 건설합니다. 항공기 제조창에서는 라이센스 생산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성능도 상당히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항주에 미국인 교관을 초빙해 중앙항공학교를 설립하였고 정비사 양성을 위해서 남창에 항공기계학교도 설립됩니다. 또 37년 5월에는 전국을 6개 공군구로 나누어 12개 주요 비행장에 262개 비행장을 보유했고 3개 폭격대대, 2개 정찰대대, 3개 구축대대, 1개 공격대대 등 9개 대대 26개 중대가 있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사령부 직속으로 4개 수송대가 있었습니다. 항공기는 500~600대에 달했으나 상당수가 너무 노후된데다 가동률도 절반이하에 불과했습니다. 라이프 2차대전사에 보면 센놀트가 중국공군의 부패함과 무능함을 성토하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 이는 과장 왜곡된 것이며 센놀트는 중국공군의 파일럿들이 매우 용감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 중국 공군에 대한 상세한 자료 보기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0444492
30년대 전반에 걸친 이러한 개혁은 당시 중국군에게는 정말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으나 시간상 너무 촉박했다는 점이죠. 겨우 2년정도의 시간은 대일전에 대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공산군에 대한 토벌전과 36년의 양광사변, 지방군벌들의 복속 등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장애물은 너무 았고 남경정부의 재정은 항상 심각한 적자에 허덕입니다.
따라서 일본과의 격차는 여전히 너무나 컸으며 특히 해공군력과 산업능력에서는 압도적으로 열세하였습니다. 육군 역시 규모는 세계 최대였으나 중앙군 30개 개편사를 제외하고 약 300개에 달하는 사단들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그나마 가장 나은 독일식 사단조차도 일본 보병사단에 비한다면 화력과 기동력, 인원수에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응흠은 일본 상비사단(갑종사단)은 개편사 4개 사단이상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평시 일본의 17개 상비사단에 대응하기 위해서 중국은 적어도 68개 개편사가 필요하며, 전시에는 무려 200개이상의 개편사가 필요했으나 실제로는 30개 사단에 불과했고 그나마 최신 장비를 갖춘 사단은 8개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었죠. 여기다 해공군과 포병화력의 열세를 생각한다면 그 격차는 훨씬 더 큰 것이었죠.
※ 자료출처 : 중일전쟁시기 국민정부군 대일군사전략 변화, 기세찬교수, 국방대학교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전의 친일 매국적인 집권자(원세개, 단기서, 장작림 등)들과 달리, 또 국민당내의 왕정위, 주불해 등 친일파들, 여러 군벌, 모택동의 공산당까지도 말로만 반일을 주장할뿐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했던 것과 달리 장개석은 한편으로는 국내의 반일운동을 탄압하여 욕을 먹으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일본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일본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군의 일대 개편 및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서 현실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책은 시간상 촉박하여 성과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다방면에 걸쳐 매우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런 점이 그를 단순히 무능한 독재자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이죠. 뭐 스틸웰은 그를 매우 무능하고 부패한 "땅콩"으로 묘사하여 미국쪽 시각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출처] 중일전쟁 직전 중국군의 군사력 실체에 대해.|작성자 욱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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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습 그 자체군요
재정과 시간. 내부의 비협조자와 외부의 적. 프리드리히대공님 말씀대로 안습 그 자체네요.
그런데 글을 계속 읽다보니 장개석의 평가가 상승하는 것과 별개로 일본의 평가도 상승하네요. 중일전쟁은 그냥 반자이 전쟁인줄 알았는데 태평양 전쟁 즈음까지 중국을 내버려 뒀으면 일본은 더 어려운 전국을 맞게 됬을 테니 말이죠.
처음부터 중국은 일본이 혼자서 요리해 먹기에는 너무 큰 먹잇감이었습니다. 만주 정도가 최대치인데 그 선을 넘어버린거죠.
뭐, 만주는 커녕 조선조차 완전히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만.
그건 별개로 치고 일단 한번 베어물어 본다는 전제 하에서는 최고의 타이밍이지 않았나요?
그냥 중국을 내버려 됬다면 예전에 삼킨것도 뱉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