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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청주] 용서하는 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지혜 1, 1 - 7
† 복음 : 루카 17, 1 - 6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곧,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를 입은
모습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다.
★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다정한 영이다. 그러기에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남을 죄짓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며,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으면서도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언젠가 ‘평화방송’에서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납니다. 윤 대주교는 교구장으로 지낸 삶을 회고하면서 1984년 5월에
있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광주 방문을 떠올렸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를 맞아 한국을 처음 방문한 교황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광주를 꼭 가 보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980년
광주 시민들이 군부 독재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부르짖는 과정에서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광주를 찾은 교황은 시민들이 겪은 시련을 언급하면서 ‘용서’라는 주제로
역설하였다고 대주교는 회상하였습니다. 이에 인터뷰하던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용서’라는 주제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지금도 의문점이 많지만 그 당시는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에 대해 정부가 확실히 밝힌 시점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윤
대주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진상을 밝히는 것과 용서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용서란 잘못한 것에 대해 무조건 덮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히 물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 사람도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야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용서란 상대방의
허물을 무조건 덮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는 것과
죄를 묻는 것은 별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악을 퍼뜨리는 죄 그 자체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의 대상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용서하는 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 17,1-6
복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 번 용서를
청했던 자기를 기억한다면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 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환영받지 못할 일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 용서해 주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신앙에서 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평화와 기쁨,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물질적인 기준만을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나만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통해 나 역시
행복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의 아픔으로 나 역시 아픔을 겪는 곳이
바로 주님께서 만든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진리가 아닌,
나 혼자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입니다. 이 세상을 영약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대단히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혼자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절대로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2010년쯤인가 양심배추라는 이야기가 한창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배추 값이 폭등해서 절임 배추 20Kg 한 상자가
10만 원 이상 호가했지만, 농민들이 기존 고객들에게 지난해 가격
그대로 받은 것입니다. 소비자가 우리를 생각해서 제값에 사줬는데,
비싸졌다고 소비자를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수천만
원 이상의 이득을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김장철이 되자 금값이던 배추 값이 확 떨어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농사를 망쳐서 그 지역 배추의 상품이 모두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농민들은 솔직하게 배추의 상품성이 떨어짐을
소비자들에게 양심적으로 연락했지요.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소비자들 860여 명 중 23명만 예약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받기로 한 것입니다. 농민들의 양심에 대해 소비자들 역시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지요.
만약 배추 값이 비싸졌다고 그 가격을 올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순간적인 이득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후에 배추 값이 떨어지고
상품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모두가 예약을 포기하고 항의를
해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만이 아닌 함께 사는 삶을 생각했기에
그 마음을 받아들인 소비자들도 이해하고 함께 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물질적인 기준만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뜻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더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또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이 의미 있고 참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로
어려운 길입니다. 세상의 유혹을 눈 딱 감고 이겨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은
물질적인 안락함이 아닌, 바로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믿음이 아닐까요?
나는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인 사랑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행복에서 불행의 거리는 고작 한 발짝밖에 안 되지만, 불행에서
행복의 거리는 매우 먼 거리다(유대 격언 중).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부조상.
내면이 바뀌어야....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한 남자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하느님께 졸랐지요. 이 남자와
영원히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습을 아름다운 여자로 바꿔달라고
말입니다. 하도 간청을 해서, 또 그 순수한 사랑이 아름답다는 생각에
고양이를 아름다운 여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만나서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었지만 고양이의 본성도 바뀌었는지가 궁금했던
하느님은 살짝 쥐 한 마리를 근처에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여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고양이처럼 갑자기 쥐를 잡으려고
달려든 것입니다. 이렇게 겉모양만 바뀌고 본성은 바뀌지 않은 것을
보고 하느님은 실망해서 다시 본래의 모습인 고양이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겉모습은 얼마든지 바꾸기가 쉽습니다. 하긴 요즘에 거리를 나가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본래의 모습일수도
있지만 조금만 가꾸고 꾸미면 다 그렇게 될 수 있다고들 이야기하네요.
그러나 정말로 바꾸기 힘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그리고 이 내면이 아름답고 멋진 사람만이 주님께서도 인정할 최고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죄를 짓게 하는 일들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죄로 기울어질 수 있는 상황은 늘 존재합니다.
동시에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도 늘 존재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2013년11월11일 연중 제 32 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루카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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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와 “남을 죄짓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두 문장의 차이를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오늘 말씀의 첫 문장인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우리의 삶은 남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게끔 되어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그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는 것이지, 반드시 남을 죄짓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영어번역본을 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죄를 짓게 하는 일들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난다.”
(Things that cause sin will inevitably occur.)
다시 말하면 남들에게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죄짓게 하는 상황은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삶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 굴복해서,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이들은 불행하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차라리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무서운 말씀까지 덧붙이신다.
그런데,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쉽게 생각하자. 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지은 죄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은 죄도 그 죄는 서로
연결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내 죄로 인해서 타인마저 죄에 빠지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직접적으로 타인을 죄짓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둘 모두 내 죄에서 비롯된다.
결국, 내가 스스로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이 아닐까?
나만 죄를 짓고 죄값을 치르겠다는 어설프게 숭고한 척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지은 죄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죄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도 죄를 지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생겨난 죄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주실 것을 믿는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참되게 뉘우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죄를 짓게 하는 상황은 늘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기도를 통한 자기 싸움밖에 없다.
기도해야 한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 청해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2013년 다해 11월11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10월 31일에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용문에 있을 때, 기차역에서
만난 자매님의 남편을 위한 장례미사였습니다. 고인의 가족들은
신앙이 없었습니다. 저와의 인연으로 고인께서는 대세를 받았습니다.
고인의 아내께서는 제게 연락을 주셨고, 제게 고인의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고인과 가족을 위해서
출관예절과 장례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어제는 고인의 가족들이
명동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시는 것 같습니다. 어제 후암동성당
있는 동창신부님께서 저녁미사를 부탁하였고, 저는 마침 저를 찾아오신
고인의 가족들과 함께 후암동성당에서 고인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저는 모처럼 주일날 숙소에서 쉬고 있었고, 고인의 가족들은 주일날
저를 찾아 오셨고, 동창신부님은 제게 저녁미사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처럼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통해서 한 가족을 신앙에로 초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랑의 눈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떨어지는 나뭇잎은 분명 쓸쓸하고,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지는 나뭇잎은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뭇잎이 떨어져야만 나무는 긴 겨울을 이겨낼 수 있고, 봄이
오면 떨어진 나뭇잎의 자리에서 새로운 잎이 나오게 됩니다.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불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미움과 분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정말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인내와
용서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또 그렇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를 죄짓게 하는 이 ''세상''
2013년 다해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복음 : 루카 17,1-6
< 우리를 죄짓게 하는 이 '세상' >
‘아바타’라는 영화를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 지구는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나먼 행성
판도라에서 대체 자원을 채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독성을 지닌 대기로 인해 자원 획득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인류는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 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탄생 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합니다.
한편 하반신이 마비된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제안 받아 판도라에 위치한 인간 주둔
기지로 향합니다. 그 곳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된 제이크는 자원 채굴을 막으려는 나비의 무리에
침투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습니다. 임무 수행 중 나비의 여전사
네이티리를 만난 제이크는 그녀와 함께 다채로운 모험을 경험하면서
네이티리를 사랑하게 되고, 지금까지 자신이 일해주고 있었던
인간들이 한 평화로운 세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갈취하려는 나쁜
무리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끔 우리도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이크는
나비족을 구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누렸던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인간
친구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제이크는
인간이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 세상
전체를 등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한 쉰들러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이 자신이 살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쉽게 그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쉰들러는 자신이 독일인이지만 독일인들에게 적이 되고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을 감수하며 유태인들을 구해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 그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저는 ‘하와’를
연상합니다. 하와는 이 세상에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 줄 유일한
짝입니다. 그러나 그 하와가 들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입니다. 만약 내가 그 열매를 받아먹지 않으면 하와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죄짓게 했습니다.
하와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일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이 우리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들고 우리 옆에 서 있는 하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와와
함께 사는 한 결코 하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귀, 육신과 함께 ‘세상’을 인간이 싸워야 할 원수로
가르쳤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는 세상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북한에 사는 사람들이 북한 체제에 대해 모두 찬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런 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무언가를
잃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체제 속에서 그 체제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체제 속에서 살다 죽었다면
그 사람은 그 체제가 받게 될 벌을 같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우리를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살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돈과 권력과 명예와 힘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은 언젠가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를 죄로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 깊이 빠져 사라지게 될 바빌론, 이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또 큰 능력을 지닌 한 천사가 맷돌처럼 큰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말하였습니다. ‘큰 도성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질 터이니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계시 18,21)
그렇다면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당당히 이 세상과
맞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기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가 이 세상의 조류 안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과 함께 멸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부자가 되기를 강요할 때 예수님은
가난해지기를 원하셨고, 이 세상이 명예를 찾을 때 예수님은 멸시를
찾으셨고, 이 세상이 편안함을 찾을 때 예수님은 고행과 희생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만이 이 세상, 즉 바빌론과 함께
멸망하지 않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이 세상에 순응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 됩시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인간에게만 베푸신 특혜, 자유의지
2013년 다해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 17,1-6
인간에게만 베푸신 특혜, 자유의지
가끔씩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는 희대의 끔직한 사건들을 접할
때 마다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착한 유전인자만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저런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만드시는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착하고 모범적이고 ‘품질 좋은’ 1등급 인간들만
규격품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희대의 살인마들을 만드셔서 오늘 우리를 ‘맨붕’ 상태에
빠트리실까?
안 그래도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죄의 유혹에 쉽게 휘둘리는
것이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비록 자주 선을 인식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악을 되풀이합니다. 고상하고 가치 있는 대상을 선택해야한다고
마음먹지만 삶을 바닥을 헤맵니다. 이성이 감각에 굴복하고 사랑이
이기주의에, 겸손이 자만에 압도당합니다.
나약한 인간존재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때 마다 차라리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서 그런 악한 유전인자들을 쏙 빼버리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
설계도에 따라 자유의지가 없는 피조물로 창조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
보다도 우리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표시로 자유의지와 이성과
자기결정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자유의지와 이성과 자기 결정권을 베푸셨는데
이는 우리 인간에게만 베푸신 특혜요 총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고유한 품성과 위엄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의지와 이성과 자기
결정권을 빼버리셨다면 우리 역시 본능과 생존욕구, 번식 욕구에 따라
살아가는 어류, 파충류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 각자의 구원과 저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은 절대로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우리 인간 각자의 자유의지에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각자가 하느님의 초대 앞에 어떻게 처신하는가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강렬한 구원의지 앞에
우리 인간 각자의 적극성과 열린 마음이 정말이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죄 중에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하는 죄’도 꽤나 큰
죄입니다. 누군가를 평생토록 누군가를 용서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은 죄에 앞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잘 파악하고 있듯이 용서 없이 내적인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용서 없이 하느님 체험도 요원합니다. 용서 없이 진정한
구원도 없습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현실을 잘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력한 권고 말씀을 건네신 것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시테파노 신부 -
◈ [서울]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이 형제
2013년 다해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이 형제
부모 가족 식구 친구 이웃 스치는 사람 모두가 형제들이라면 좋지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모두 형제이고 자매라 하셨습니다.
돈 재물 권력 이기심 욕심을 아버지로 모시면 그저 옆 사람이겠지요.
작은 성당일수록 가족 같은 기분이 강합니다. 얼굴까지 다 아니까요.
아는 얼굴이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이 형제일 수밖에요.
그런 형제라면 꾸짖을 수 있고 하느님 앞에 회개할 수 있어 용서해야지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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