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나라의 탄생과 멸망
황(黃)나라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 년 전 주(周)나라 초기의 많은 제후국가 중의 하나로서, 현재의 하남성(河南省:허난성) 회하(淮河:화이허)의 지류인 황수(潢水:황수이) 부근의 황천(潢川:황촨) 지방에 있던 나라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황천(潢川) 정성(定城) 서쪽 12리 지점이 황(黃)나라의 중심지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치고 중국의 주도권을 잡을 때, 중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국가들의 지방자치를 허락하며 제후로 봉(封)하여 주었는데, 황나라도 이 때 제후로 등록되어 중국을 지배하는 세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황나라가 세워진 시기가 은나라 때인지 주나라 때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황나라를 세운 사람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전해진다.
첫째, 고대 중국을 지배했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하나이며, 현대 중국인이 모두 자기네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황제(黃帝) 임금인데, 그 아들 소호(少昊)가 분주(汾州)에 봉(封)해졌다. 그 후손이 황나라 등 많은 나라를 세웠다.
둘째, 역시 삼황오제 중의 하나인 제곡축융(帝嚳祝融) 의 아들 육종(陸終)의 후손이 황나라를 세웠다.
셋째, 역시 삼황오제 중의 하나인 순(舜) 임금 때 백익(伯益)이 영성(嬴姓)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 후손이 황나라를 세웠다.
영성은 영(嬴), 진(秦), 서(徐), 강(江), 황(黃), 담(郯), 거(莒), 종려(終黎), 운엄(運奄), 토구(菟裘), 장량(將梁), 수어(修魚), 백명(白蓂), 비렴(蜚廉) 등 14성으로 되어 있는데, 주(周)나라가 중국 전체를 지배하기 이전부터 중국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성씨들로 알려져 있다.
황나라가 정확히 언제부터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나라가 서울을 낙양(洛陽:뤄양)으로 옮기고 천자(天子)의 힘이 현저하게 약화된 춘추시대 초기에 이미 황나라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훨씬 그 이전인 은(殷)나라나 주(周)나라 초기에 건국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춘추시대 초기에 중국 전체에 흩어져 있는 제후국들의 분포를 보면, 주나라 천자의 직계인 동성(同姓) 제후와 이미 그 이전부터 독립해 나간 이성(異姓) 제후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비교적 큰 제후국의 이름은 대개 다음과 같다.
동성 제후 : 주(周), 제(齊), 진(晉), 초(楚), 오(吳), 월(越), 정(鄭), 식(息), 수(隨), 채(蔡), 조(曺), 등(騰),
노(魯), 위(衛), 연(燕)
이성 제후 : 황(黃), 방(房), 당(唐), 등(鄧), 신(申), 기(夔), 용(庸), 진(秦), 허(許), 기(杞), 송(宋), 진(陳),
임(任), 설(薛), 담(郯), 거(莒), 기(紀), 서(舒), 동(桐)
춘추시대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중국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교대로 발휘한 나라가 다섯 나라가 있었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서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한다. 순서대로 열거해 보면 제(齊)나라, 진(晉)나라, 초(楚)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 등이 된다.
조그마한 도시국가였던 황나라가 주위의 힘센 나라들로부터 위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제(齊)나라가 첫 번째 패자(覇者)로 막 발돋움할 때였다. 산동(山東)지방에 있던 제나라와 양자강(揚子江) 중류의 초나라가 모두 황나라에 욕심을 내고 있었는데, 제나라가 천자의 나라 주나라를 등에 업고 더욱 확고한 패자(覇者)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초나라가 자그마한 황나라를 먼저 합병시켜 버렸다. 황나라는 중국 땅에서 최소한 500년 이상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황나라 멸망 관련 기록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황나라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658년 9월에 제, 송, 강, 황나라 임금이 관에서 동맹을 맺었다.
/ 이는 (제나라가) 강, 황나라를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僖公二年秋九月 齊侯宋公江人黃人 盟于貫 / 秋盟于貫 服江黃也)
기원전 657년 가을에 제, 송, 강, 황나라 임금이 양곡에서 만났다.
/ 이는 초나라를 치려 함이었다
( 僖公三年秋 齊侯宋公江人黃人 會于陽穀 / 秋 會于陽穀 謀伐楚也 )
기원전 656년 가을에 (노나라가) 강, 황나라와 함께 진(陳)나라를 쳤다.
/ 이는 불충을 토벌한 것이었다.
( 僖公四年秋 及江人黃人伐陳 / 秋 伐陳 討不忠也 )
기원전 655년 가을에 초나라 사람이 현(弦)나라를 멸하였다. 현나라 임금은 황나라로 달아났다.
/ 초나라 영윤(令尹) 투곡어도(鬪穀於菟:子文)이 현나라를 멸하니, 현나라 임금은 황나라로 도망갔다. 이 때는 강,황,도,백나라가 모두 제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을 때였으며, 현나라와는 모두 인척관계에 있었다. 현나라 임금은 이를 믿고 초나라를 섬기지도 않고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망하였다.
( 僖公五年秋 楚人滅弦 弦子奔黃 / 楚鬪穀於菟滅弦 弦子奔黃 於是 江黃道柏方睦於齊 皆弦姻也 弦子恃之而不事楚 又不設備 故亡 )
기원전 649년 겨울 초나라 사람이 황나라를 쳤다.
/ 황나라가 초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 겨울에 초나라가 황나라를 쳤다.
( 僖公十一年冬 楚人伐黃 / 黃人不歸楚貢 冬 楚人伐黃 )
기원전 648년 여름 초나라가 황나라를 멸하였다.
/ 황나라 사람들은 많은 제후들이 제나라와 친한 것만 믿고 초나라에는 공물을 바치지도 않으면서, 「초나라 서울로부터 우리 나라까지 900리나 되는데, 어찌 우리를 해칠 것인가?」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여름에 초나라가 황나라를 멸하였다.
( 僖公十二年夏 楚人滅黃 / 黃人恃諸侯之齊睦于齊也 不供楚職曰 自郢及我九百里 焉能害我 夏 楚滅黃 )
황나라는 제나라가 끝까지 보호해 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제나라는 서쪽 오랑캐 융(戎)의 위협을 받고 있던 천자의 나라 주나라를 보호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초나라는 갈수록 커지는 제나라의 세력을 견제하려면 자기들도 영토를 미리 많이 넓혀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크고 작은 제후국가들끼리 서로 먹고 먹히는 춘추시대에 비옥한 토지를 가진 평화스러운 작은 나라 황나라는 인근의 커다란 나라에 언젠가는 통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황(黃)나라가 있던 이 땅은 한(漢)나라 때 익양현(弋陽縣), 당(唐)나라 때 광주(光州), 송(宋)나라 때 광산(光山), 원(元)․명(明)․청(淸)나라 때 광주(光州)로 이름이 바뀌어 오다가 1913년부터 하남성(河南省) 황천현(潢川縣)으로 확정되어, 지금은 구리 광산(鑛山)과 쌀 유통의 집산지(集散地)로 유명한 지역이 되어 있다.
3. 황씨의 탄생
황(黃)나라가 초(楚)나라에게 합병된 이후, 옛 황나라 백성들은 황나라 왕족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성씨를 「황(黃)」으로 정하였다. 황씨는 대부분의 중국인이 자기들의 조상이라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황(黃)”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자와 같은 혈통을 가졌다는 영성 14성(嬴姓十四姓) 중의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이 갖는 자부심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황제(黃帝)의 직계라고 주장하는 성씨가 한둘이 아니지만 황(黃)이란 글자를 쓰고 있는 황씨가 직계 논쟁에서 항상 유리하였고 남이야 뭐라 그러든 황씨는 황제의 후손임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황나라의 후손들은 황나라가 망해서 성씨를 황씨로 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황제(黃帝)의 직계라 자처하며 더욱 당당하게 살아 왔다는 말이 된다.
황나라가 망한 후 황나라 왕족의 후예들은 그 생활영역이 오히려 더 확장되어 동정호 북쪽과 동쪽의 양자강 유역 일대가 거의 황씨천하가 되어 버렸다. 황씨들이 이 부근에서 계속 번창해 나가자 원래 주(邾)의 땅이었던 이 지역의 지명에 「황」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곳이 점차 늘어 나기 시작하였다. 결국에는 이 지역에 황주부(黃州府)라는 이름의 부(府)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황주부는 원래 황나라 관할이었던 점주(蔪州)를 포함하여 황강(黃岡), 황안(黃安), 점수(蔪水), 나전(羅田), 마성(麻城), 광제(廣濟), 황매(黃梅) 등을 가진 1주7현(一州七縣) 규모의 양자강 교통의 중심지였다. 황씨들이 이 곳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살아 온 것이 벌써 2,500년이 넘었고, 아직까지도 「황」자가 들어가는 곳이 황주시(黃州市:황쪼우시)를 위시하여 황석(黃石:황시), 황피(黃陂:황피), 황매(黃梅:황메이) 등 여러 곳에 이른다. 현대에 들어 와서 이 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무한(武漢) 시내에도 「황가대만(黃家大灣)」이나 「황학루(黃鶴樓)」 같은 곳이 있어 여기에서 살았던 황씨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준다. 어쨌든 이 지역은 이후에도 여러 번 중국 역사의 중심지로 등장하는데, 황개(黃蓋) 장군이 조조(曹操)의 대군을 격파하였던 「적벽대전」의 「적벽(赤壁)」도 이 지역에 있고,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적벽(赤壁)」도 이 지역에 있다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정리 : 후손 문학박사 황재순(창원황씨 시중공파 23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