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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수필
지구문학 수필 계간평
앎의 문학, 삶의 문학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의 시대가 왔다. 수필은 앎의 문학이요, 삶의 문학이다. 사회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적 가치를 지향한다. 수필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지성인이어야 한다. 지식인이어야 지성적 사고가 가능한 것이다. 고사 위기에 있는 인문학을 위해서라도 우리 수필가는 삶을 잉태하는 사회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공자는 ‘안다’는 것은 바로 ‘사람을 아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측면에서 수필은 가장 인문학적 가치를 근본으로 깔고 있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 정보화 시대, 우리 수필가는 참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또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다. 어떤 수필가는 자동차에 대해, 또 어떤 수필가는 부동산에 대해 전문가가 따로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정작 ‘수필’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하는 데 활용하는 수필가는 많지 않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해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난 2006년 <지구문학> 겨울호에 실린 수필 중에는 오경자의 <청계천 물길의 빛잔치>, 조정제의 <박나물 그 맛>, 정해영의 <취객> 등 읽을 만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작품 두 편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삶과 앎을 바탕으로 구축된 안명수의 <내재율>과 송명화의 <회한> 두 편이라 하겠다.
II.
안명수의 <내재율>은 우선 재미가 있어 즐거움을 준다. 앎과 삶이 녹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미적 구도로서의 문학이 추구하는 쾌락성을 단 번에 구축해서 좋다. 머리도 즐겁게 하고, 가슴도 즐겁게 해준다. 계간평을 쓰기 위해 제일 먼저 안명수의 <내재율>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몽테뉴의 말이었는데, 몽테뉴는 ‘나는 단지 재미를 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바가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은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독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읽는 책이 재미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비록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해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재미가 있어야 금상 첨화다. 지루하거나 무미건조한 글은 독자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책은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 안명수 수필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을 허심탄회하게 풀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기에 독자를 끌어당긴다. 지적인 것은 부드러운 틀 안에서 잘 녹여내고, 정적인 것은 예리한 지성적 사고로 잘 버무려낸다.
대학 시절 잔디밭에 앉아서 문학 토론을 하며 즐기던 시절의 연상을 초임 시절 교무실에서의 방담과 연결시켜 한 편의 멋진 수필을 건져낸 것이 바로 <내재율>이란 작품인데, 이 수필은 평소 박학다식한 작가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장미’와 ‘국화’를 두고, 상호 비교하여 대비시켜 풀어낸 결론은 영문학도가 아니면 근접할 수 없는 차원 높은 것이다. 문학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이나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해석이 불가능한 것일텐데, 그는 반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내재율’에 얽힌 토론의 핵심을 그대로 기억하고 이를 토대로 한 편의 수필을 썼는데, 그는 ‘못생긴 얼굴의 주인공은 몸 속에 잠재해 있는 아름다운 내재율이 흘러, 사려 깊고 포용력이 넘치는 큰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양’이라는 인생의 지혜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외면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외재율이라고 한다면, 못생긴 외모를 보이지 않는 내면의 내재율로 덮어 여성에 대한 예를 갖추는 작가의 모습이 재밋기도 하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유머스런 화소를 가지고 성찰적인 주제로 승화시켜낸 것이 쾌미였다.
(가) 답사를 보내야 여교사는 ‘얼짱’과는 거리가 먼 관상의 소유자였다. 얼짱이라 추겨 세우면 못생긴 관상을 비꼬는 악담으로 들리기에 알맞은 그런 사진이었다. 그에게는 별명이 두 개가 있었는데, 여학생들은 ‘돈비’ 즉 돼지코라 불렀고, 남학생들은 ‘드럼통’이라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런 사정 때문에 덕담 보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득 학창 시절 잔디 언덕에 앉아 열을 올렸던 내재율에 얽힌 문학토론 장면이 떠올랐다.
(나) “X 선생님의 몸 속에는 실내악처럼 아름다운 내재율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내재율은 비단결처럼 아름다워 교육자의 심성에 자긍심을 넘치게 합니다. 대표적인 외유내강, 현모양처형 여성의 바탕입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라는 간지러운 덕담을 흘리고 말았다. 박수가 터지고 짓궂은 농담이 있었지만 그날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복도에서나 출퇴근길에 단 둘이 지나치게 되면 그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하였다.
(가)에서처럼 수필의 문장은 직설적인 언술보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간접화를 이끌어야 손맛이 난다. ‘못생겼다’는 것을 안명수는 ‘얼짱과 거리가 먼 관상의 소유자였다’고 표현한다.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을 잘 생긴 미모의 소유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한 작가는 문득 학창 시절에 ‘내재율’에 얽힌 이야기를 들고 와서, (나)처럼 처녀 교사에게 간지러운 덕담을 들려준다. 이런 삽화나 예화로 수필이 끝난다면 좋은 수필이 될 수가 없다. 이런 체험과 관련된 내용들이 전개부를 장식하는 주요소라면, 예화가 끝나는 지점에 와서 작가는 주제와 관련된 전개부 구체적 사례들을 모아서 일반화하는 작업을 해주어야만 문학수필이 된다. 바로 주제의식의 의미화인데, 안명수는 “젊었을 때 못생긴 사람이 나이 들면 잘 생긴 얼짱보다 더 품위 있게 늙어가는 인생을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하며, 내재율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서 결말부에 “세파에 찌든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인생의 내재율이 흐르고 있다. 천하의 미남이라며 으스대기를 좋아했던 C군의 이마도 세월 앞에는 속수 무책이었던지 王주름이 더 많아 보인다”며 주제의식을 상상화해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것이 수필이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수필의 특성과 본질, 그리고 아름다움을 모두 간직한 수필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수필이 다른 수필보다 더 재미있게 읽히는 요인은 뭘까?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안명수 선생은 다방면에 박식한 식견을 가진 지성적인 교양인이라는 점이고, 둘째 이유는 그의 글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의 글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해학적이라는 데 있다. 억지로 웃기려고 꾸민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나름의 독특한 시각으로 참신하게 풀어내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글이 예민한 감각과 신경에 호소하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이성과 정서를 끌어들여서 독자를 흐뭇한 감동으로 이끄는 것은 수필을 쓰면서 닦은 탁월한 서술적 기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문학정신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송명화의 <회한>도 수작이다. 앎과 삶이 녹아 구축된 작품이다. 문학은 특히 수필의 세계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큰 축으로 형성된다. (나) 단락에서 작가는 “어떤 사람의 희망은 명예에 있고, 어떤 사람의 희망은 황금에 있지만, 그래도 나의 큰 희망은 사람에 있다”는 윌리엄 부스의 말을 음미하며,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고, 세월의 흔적 따라 더욱 절실해진 나의 길이 확고함에 나는 이런 난감함 앞에서도 안도한다. 작가의 이 말은 수필 <회한>에 담긴 작가의 중심사상이다. 독자에게 던지는 자신의 메시지요, 자기 철학의 드러냄이다. 물질 문명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로 소외감이 극에 달한 아이들의 타인에 대한 불신감은 상상외로 크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어린 아이들의 이중성은 사랑도 인간의 따뜻한 체온마저도 희롱한다는 아니 희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햇병아리 처녀 교사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가) 비죽이 눈가에 밴 눈물 자욱이 느껴져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재가 대충 가방을 수습해 내 손에 쥐어준다. 늦은 시각까지 컴퓨터실에서 방과 후 활동을 하고, 집에 갈 때는 꼭 교실에 들러서 내 얼굴을 보고 가는 이 아이가 새삼 고맙다. 나보다 더 놀라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르던 아이. 사고로 엄마를 잃은 후 집안 살림을 맡아야만 했던 아이. 가만히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따뜻하다.
(나) ‘어떤 사람의 희망은 미술에 있고, 어떤 사람의 희망은 명예에 있고, 어떤 사람의 희망은 황금에 있지만, 그래도 나의 큰 희망은 사람에 있다’는 윌리엄 부스의 말은 내게 늘 교사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공부 잘 하고 집안 형편이 좋았던 애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살아가는 자체를 힘들어하던 애들은 그 이름 그 모습이 빛바랜 앨범을 들추지 않더라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고 세월의 흔적 따라 더욱 절실해진 나의 길이 확고함에 나는 이런 난감함 앞에서도 안도한다.
인용된 (가), (나)에는 작가가 갖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설익었던 내 품이 아니더라도 살아오면서 인생 도처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밝은 생활을 누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적 관측은 인연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만나게 될 것이라는 해석을 낳고 있다. ‘한 번 버린 어린 아이의 고운 동심을 어찌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고민하는 작가에게 ‘영재’는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인물이다. ‘영재’라는 인물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아이도 환경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 아이’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아이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어머니 교사인 송명화의 교육철학과 다정한 손길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송명화의 문단 구성 능력은 탁월하다. 첫 단락은 절박한 상황을 잘 묘사한 대목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급한 상황에서도 제자의 손을 잡고 두어 계단씩 뛰어오르는 장면이 주제에 앞으로 전개될 내용의 암시적 기능을 잘 해내고 있다. 두 번째 단락에서의 “한 겨울 알바람이 밀어닥치듯 가슴 한 켠에 모진 통증으로 시려왔다‘는 대목이 마지막 문장 ’그 아이의 완벽한 이중성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일로 내 기억 속에 소롯이 남아 있다‘는 말에 잘 호응되고 있다. 세 번째 단락의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와 단락의 마지막 문장에 놓인 ’그 아이는 마음 붙일 곳이 얼마나 절실했을까‘로 이어지고 있는 점은 문단의 연결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연결성은 다음 단락에서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나는 그 아이에게 과연 무엇이었나를 생각하게 된다.‘는 첫 문장과 마지막의 ’자책감에 오랫동안 마음이 편칠 않았다‘라든가, 그 다음 문단의 ’미로 같은 골목길‘은 마지막 문장의 ’결코 풀리지 않을 응어리‘와 잘 매치되고 있는 부분들이 이를 증명한다.
(나)의 라스트 센탠스, “작은 손이 따뜻하다”는 이 글의 전체적인 중심 사상을 한 마디로 함축하는 대목이다. 이런 주제의식의 의미화는 수필의 시작부터, 영재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든지, 그 애 손바닥 내 손바닥 같이 맞추며, 끌어안는다든지, 가만히 손을 잡았다는 주제의식의 구체화로 잘 뒷받침되고 있다. 여섯 째 단락의 “그때 만약 나이가 많고 경험도 풍부하며 지금처럼 녀석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 선생님이었다면, 시행착오 없이 좀더 잘하지 않았을까‘하는 반성적 가정은 ’어머니 같은 가슴으로, 큰누나 같은 눈빛으로 다시 한 번 보고싶다‘는 모성적 원리를 불러들인다. 결국 송명화의 관심은 소외 받은 아이들에 귀착되며, 이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그녀 자신이 세운 명제와도 부합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송명화의 체험론적 교육관은 교육의 본질도 모르고 현장의 교사들을 백안시하는 교육관료들, 특히 탁상에서 교육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교육의 경험이 없는 교육행정가들에게도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문학 활동을 하면서도 한시도 마음을 본업인 교육의 현장에서 놓아본 적이 없음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III.
위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두 편의 수필 외에도 지난 겨울호에는 좋은 수필이 더러 눈에 띈다. 오경자의 <청계천 물길의 빛잔치>은 복원이 된 청계천의 물길 따라 걸으면서 현재의 청계천과 어린 시절의 청계천을 비교하면서, 국태민안을 비는 작가의 애국적인 자세가 감동을 준다. 조정제의 <박나물 그 맛>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좋은 수필이다. 잃어버린 동심의 꿈을 되살려 줄 것 같은 하얀 박꽃 같은 작가의 마음이 잘 그려져 있다.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연가가 세파에 찌든 우리 도시민의 영혼을 청량하게 씻어 줄 것 같은 수필이다. 정해영의 <취객>은 술에 얽힌 경험담을 재미있게 쓴 수필이다. 만취로 지옥을 다녀온 작가가 다른 취객의 취한 행동을 감싸 안아주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취객의 편안한 귀가를 걱정하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감동을 준다.
결론적으로 수필가는 두 가지에 대해 전문가여야 한다. 하나는 앎이고, 다른 하나는 삶이다. 두 수필가는 우선 누구보다도 수필과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근본으로 하는 삶의 수필을 썼기에, 두 분의 수필이 살고, 두 수필가가 빛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좋은 수필은 인문학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수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하고, 두 번째가 소통이 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수필, 진실의 문학, 진리를 추구하는 수필가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하다. 감동의 창출을 통한 소통을 위해서는 본격수필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 품격을 갖춘 수필만이 감동을 줄 수 있고, 제대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중이 디지털 시대의 주인이 되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해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고지는 ‘고급’쪽이다. 그래야만 ‘수필’이 살 수 있다. ‘본격’이나 ‘고급’을 지향하지 않으면 수필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즐기는 정도에서 수필을 써서는 안 되는 이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수필은 문학이다. 예술의 한 분야다. 그러나 “수필은 문학이다, 예술이다”라고 명제화한다고 해서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필가의 치열한 수필정신 또는 장인정신에 의해 문학이 되는 것이다. 삶을 잉태한 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지식은 수필가에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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