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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요12장24,막 4장20)
성경본문:요한복음 12:24절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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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 20절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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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이 땅을 기경한다는 것
우리가 수확하는 열매는 정확한 법칙이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듯하지만, 썩은 씨앗으로 결실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조선 땅에 들어왔던 복음의 역사는, 척박한 땅을 기경하는 역사와 함께 시작되어 열매를 맺었습니다.
마가복음 4장 20절에 “좋은 땅”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NIV 성경에 보면 “…hear the word, accept it, and produce a crop…”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땅이란 처음부터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경하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조선 땅에 수많은 선교사가 들어와 죽었고 썩어져 열매를 맺도록 토양을 만든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식적인 선교 역사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정말 기적적인 ‘만남’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로 결국은 고종 황제의 윤허를 받아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들어왔죠.
하지만 역사를 조금 더 공부해 보면, 공식적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의 밀알이 될 수 있도록 이 조선 땅을 기경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 전 해인 1884년 9월 23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인 알렌 목사가 의사의 신분으로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들어온 선교사들 역시 의료와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사역이 우리 근대사 속에서는 ‘선교의 역사’로 보이거나 기록되지 않은 단순한 구제사역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선교사들이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었을까요?
땅을 가는 사람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사람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직접 전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일궈놓은 좋은 옥토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는 것이 참 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나죠?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
사도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요?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인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교인 사이에 서로 지지하는 다른 리더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이 부분이 참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 성도들에게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인정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아볼로에게 자신보다 더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는 것이죠.
자신으로 인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데는 아볼로에게 훨씬 더 나은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심는 자가 있으면, 물을 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 한다 해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이죠.
그렇게 고백하고 나니,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사역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고,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사람을 보니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그 일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꿈꾸는 목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분명하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대로 가장 잘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교회에서 제가 담임목사로 있지만, 저보다 더 사역을 잘하는 목사님들이 나타날 때 그것을 기뻐할 수 있다면 정말 담임목사로서의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를 통해 이루실 때 그것을 기뻐하는 것 말입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짐에 대한 감격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 한 사람 하는 일들이 너무 귀하고, 그것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말입니다.
제가 선교학을 공부하던 때 가장 큰 논쟁 중의 하나가 복음전파의 수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것이 복음을 위한 수단이냐, 아니면 학교와 병원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냐는 논란이었습니다.
혹 여러분이 이런 논쟁을 보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느낄지 모르지만 아주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물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 것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병자를 고치셨나요?
저는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제 입장은 그 어떤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죠. 이 땅에 들어왔던 의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병자를 고치고 학교를 세웠다면 이런 논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만일 학교와 병원 사역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그러한 일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할 때 쉽게 그만둘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그것이 아닐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교육과 의료 행위는 우리가 받은 사랑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복음의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우리가 의료와 교육행위를 통해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중앙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아주 전설적인 선교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지 아틀레이라는 젊은 선교사는 중앙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윈체스터 연발총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손에서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맞아 죽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겠다고 들어온 자신이 살기 위해 총을 쏜다면 그 마을 선교에 큰 지장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자기들을 죽인 자가 전하는 복음을 누가 듣겠습니까?
선교사를 죽인 원주민들은 그 젊은 선교사가 죽은 후에, 그가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충분한 탄환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이 늦게나마 회개하고 돌아와 그리스도를 영접한 계기가 되었죠.
아마도 그는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었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원주민들의 마음 밭을 기경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기경한 땅에 밀알이 된 사람들,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이 땅의 수많은 선교사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아시나요?
우리나라에 많은 선교사가 있었지만, 특히 결핵 퇴치와 관련된 4대에 걸친 ‘유진 벨’ 목사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895년 4월 아내와 함께 한국에 도착한 이래 전라도 광주와 목포를 중심으로 의료와 교육 사업에 힘쓴 선교사죠. 잘 알려진 <수피아여고> 그리고 <광주 기독병원>도 유진 벨 부부에 의해 세워진 기관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참 짧았습니다. 아내 로티 위더스푼이 두 자녀를 남기고 1901년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심장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던 중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고, 유진 벨 선교사는 선교사역 중 격무로 인해 1925년 57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유진 벨 선교사의 자녀 중에 딸 샬롯 벨은 미국에서 자랐으나 성인이 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선교사였던 윌리엄 린튼과 결혼하여 함께 조선에서 선교사역을 했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1937년 강제로 출국을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자 윌리엄 린튼 부부는 다시 돌아와 <한남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40여 년간 전라도 지역에서 학교를 세우며 선교사역에 전념합니다.
윌리엄 린튼과 샬롯 린튼의 셋째 아들인 휴 린튼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참배 거부로 추방되어 미국에서 성장합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 유진 벨과 아버지 윌리엄 린튼의 선교사역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습니다. 그는 3대를 이어 전라남도 섬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세우고 농촌과 간척지 사역에 집중하게 됩니다.
휴 린튼은 검정 고무신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정도로 검소하고 겸손하게 지역 주민들을 섬기기 위해 봉사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 남겨진 휴 린튼의 아내 로이스 린튼은 남편을 이어 의료사역에 매진하였는데, 이 나라에 가장 공헌한 일은 결핵을 퇴치하는 운동의 선봉에 선 것입니다.
1960년대 전라남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면서 결핵이 유행했을 때 그의 자녀 셋도 결핵에 걸리게 되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후 35년간 결핵 퇴치 사업을 벌이고 1994년에 은퇴합니다.
<유진 벨 재단>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둘째 아들인 스티브 린튼과 막내아들인 존 린튼(인요한)이 자신의 외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와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에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면서부터입니다.
<유진벨 재단>은 자연스럽게 남북한의 분단 현실의 아픔을 보면서 북한을 돕는 일에 나섭니다. 가뭄과 수해로 극심한 고난을 받던 때 북한 돕기에 나섰고, 1997년 북한의 보건성으로부터 결핵 퇴치 공식 지원 요청을 받아 돕고 있습니다.
이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저는 린튼의 여섯 째 아들인 인요한(존 린튼) 교수를 만났을 때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연세대 교수로 있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푸른 눈의 금발머리 한국인입니다.
인요한 교수로 인해 유진 벨 가문은 4대째 한국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인요한 교수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죠.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인요한 교수가 어린 시절 전라도에서 자라며 정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며 만났던 환자 중에는 아버지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결핵균이 있는 가래침을 뱉은 사람도 있는데, 왜 아버지는 그 사람들을 돌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게 한국 사람을 사랑했던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고 당시 구급차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국에는 그런 차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요한 교수는 우리나라에 적합한 한국형 응급차를 만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가문에 우리 민족이 진 빚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인상적인 것은 그가 자서전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의사의 길을 택한 이유에 대해 조상들처럼 “남들이 잘 가려 하지 않는 길 위에서 내가 가진 재능과 기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싶었다”며 “그것이 선교사 아들로서의 숙명이자 내가 한국 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라고 밝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자란 여섯 째 아들이 이 나라에서 의사가 되고, 그의 형 인세반(스티브 린튼) 씨가 <유진벨 재단>을 세워 이제는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과 인도적 차원의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이 보았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 때문은 아닐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휴 린튼과 그의 아내 로이스 린튼의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 주인공 같은 얼굴. 그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았을 삶, 한 알의 밀이 되어버린 그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지더군요.
인요한 교수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 민족에게, 그 어떤 복음의 메시지보다 강력한 메시지는 이 땅에서 그렇게 살다 죽어간 그 부모들의 삶이 아닐까요?
한국의 역사책은 알렌 선교사를 1885년에 <광혜원>을 세운 의사로 기억합니다. 유진 벨을 이 땅에서 결핵을 퇴치한 인도주의자로 기억할지 모릅니다.
또한, 스크랜턴은 1886년 남대문 근처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할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지도 못했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을 보며, 무지함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 민족에게 한글을 보급하고, 미신 때문에 압박당하는 백성들을 보며 미신을 타파하고, 남녀 차별로 신음하는 여성들을 위해 남녀 평등사상과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이 술과 담배, 도박으로 가난해지는 모습을 보며 금주운동과 도박을 퇴치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조선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가슴에 품었던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우리 교회이고 우리 자신들과 자녀들이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사실은 ‘죽음에 빚진 자’들이 아닐까요?
그들이 이국땅 조선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인생을 낭비한다고, 그들의 삶이 아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밀알의 기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 케냐에서 매년 SAM 운동에 많은 헌신을 합니다. 볼리비아에 매년 보내는 헌금이 적잖은 양입니다. 그 돈으로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칩니다. 또한,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을 배우고 볼리비아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가도록 배려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 혹은 그 땅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종종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헌금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멀리 아프리카 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땅을 기경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땅의 젊은이들이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소망을 볼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고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헌금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지만, 언젠가 그 후손들이 썩은 밀알을 기억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당시 조선은 참담한 패배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변의 열강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복음을 알고 배움을 갈망했던 젊은이들이 일어났습니다.
복음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국경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조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 위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한말 이 땅에 한 알의 밀이 되었던 선교사들로 인해 소망을 가진 사람들, 가슴에 불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 한 알의 밀이 되는 이들로 인해 새로운 소망을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것을 위해 오래전 선교사들이 이 땅을 옥토로 기경해 놓은 것은 아닐까요?
밀알은 죽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초기 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민중들의 오해였습니다. 소위 ‘영아소동’으로 불리는 사건인데, 이 일로 인하여 많은 고초를 당했지만, 결국은 이 어려움으로 복음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888년 6월 서울 시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공짜로 먹이고 입히는데 다 꿍꿍이속이 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리고 남색을 즐긴다더라”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잘 먹인 다음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판다더라”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 신체를 해부용으로 쓰고 눈알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더라”
프랑스 공사관 요리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 오봉엽이란 자는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를 잡아 연한 살은 칼로 썰어 먹고 피를 잔에 받아 마시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덜 익혀 피가 내비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자르고 붉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인육을 먹는 것으로 착각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서양 오랑캐, 서양 귀신으로 공포의 대상이던 선교사들이 아이 유괴 혐의까지 덧 쓰여 민중은 흥분하게 되었다.
군중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 고아원, 학교에 몰려가 아이들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도 시위대가 몰려왔고 흥분한 이들은 돌을 던졌고 선교사 집에 고용된 한국인도 폭행하였다.
이후 자국 공사관에 보호를 요청하여 사태가 해결되었고 선교사들의 존재와 사업에 대한 오해도 풀게 되었다.
1888년 여름 서울 근교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선교사와 교인들의 헌신적 진료활동으로 선교사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민중은 오히려 선교사들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선교 사업을 돕기까지 하였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영아 소동을 민중의 시험기라고 표현했다. 영아소동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반대자가 지지자로 바뀐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아소동’을 통해 선교사들을 제대로 알게 된 조선 사람들에게서 걸출한 민중 출신의 지도자와 전도인을 얻은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일은 ‘영아소동’의 진실을 알기 위해 선교사의 집에 숨어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가난한 농부 출신으로 장사꾼, 머슴, 마부 등 바닥 생활을 하던 김창식이라는 인물이 올링거 선교사 집에 사환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위장 취업을 했던 김창식의 고백입니다.
“내가 맨 처음 일하던 집은 미국 사람 올링거 목사의 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 주인 내외의 생활을 매우 주의하여 살펴보았으나 아무리 살필지라도 조금도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몇 해 동안 그 집에서 일하는 가운데 그 집 주인 내외가 가히 본받을 만한 사람인 줄 깨닫고 그들에게 감화를 받아 예수 믿기를 작정하였다.”
그렇게 기독교로 개종한 김창식은 2년 후에 세례를 받고 감리교 전도인이 되어 1893년 의료 선교사였던 홀과 짝이 되어 평양에 내려가 선교지를 개척하는 일을 합니다.
당시 보수적이었던 평양에서는 선교사가 직접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형편이라 김창식이 나서 선교사의 사택과 병원, 학교, 교회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1901년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전덕기 목사의 경우도 비슷한데, 그는 대표적 민중 목회자로 일제에 항거한 민족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 역시 영아 소동 때 정동으로 달려가 군중과 함께 돌을 던졌을 정도로 선교사를 미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던진 돌을 맞고도 화내기보다 미소를 띠며 좋은 말로 권면하는 선교사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도 선교사의 집에 들어가 실체를 보고자 결심하게 되죠.
전덕기는 스크랜턴 선교사의 요리사로 들어가 병원 일을 도우며 선교사 가족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무려 4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곳에서 전덕기는 선교사들에게 감동을 받고 특히 스크랜턴 대부인이 전덕기를 배려하여 소외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한국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보고는 감동하게 됩니다.
하인 신분이었던 자신에게 언제나 높임말을 쓰고 자상했던, 그리고 같은 식탁에 앉도록 배려했던 스크랜턴 박사에게서 감동을 넘어선 충격을 받게 되죠. 그 후에 그는 스크랜턴 박사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하게 되고 1896년 스크랜턴에게서 세례를 받고 1905년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결국,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선교사들, 온갖 억압과 핍박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냈던 선교사들에게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열매가 되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가면 윌리암 홀 선교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 선교사로 1891년 31살의 나이로 한국에 파송된 의료 선교사입니다. 당시 조선은 청일 전쟁 이후에 피폐한 상황에서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고, 죽어가는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중 과로로 인해 말라리아에 걸려 34살의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온 지 3년 만이었죠. 그의 미망인 로세타 셔우드에게는 겨우 돌을 지낸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셔우드 홀입니다.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로세타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1897년 아들 셔우드와 딸 에디스를 데리고 다시 한국의 선교사로 나오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을 기념하여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병원의 이름은 ‘기훌병원’이었고,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 에스더를 배출합니다. 고려대학 의과대학의 전신이 된 한국최초의 여자의학 교육 기관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도 세우게 됩니다.
남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남편의 이름을 기념하여 세워진 병원, 그리고 조선 땅에 떨어져 썩은 남편으로 인해 조선 땅에는 여성들을 위한 의료사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1911년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 살던 셔우드는 18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유니온 대학을 거쳐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처음에는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며 해주 의창학교 교장직을 겸하였고, 그 후에는 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1928년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해주에 설립합니다.
1932년 12월에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1940년까지 14년간 한국에서 의료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던 그는 인도로 가서 23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뒤 1963년 은퇴를 합니다. 1978년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책을 출판했고, 1992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죽어야 밀알이다!
밀알이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썩어야 합니다. 썩는다는 것은 자신의 형상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온전히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것이 단순히 생명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서 생명을 내놓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육신의 생명과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여수를 갈 때마다 거의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기념관입니다.
어릴 적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던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인 사람, 그리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다가 순교한 사람.지난해에도 여수에 들러 기념관에서 다시 보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아홉 가지 감사기도를 보았습니다.
늘 보던 것인데 왠지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내어놓고 드린 기도가 감사라는 것이, 그리고 그의 감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하나님께 돌아왔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복음의 열매가 없고, 교회에 생명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썩어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홉 가지 감사의 기도’입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내게 맡겨주신지 감사합니다.
3) 4남 3녀 7남매 중 가장 아름다운 장남과 차남을 주님께 바치게 되어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감사하고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함께 순교를 했으니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복인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6) 두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가려 했는데 그보다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을 마음에 부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8) 내 아들의 순교 열매로 무수한 천국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며 감사합니다.
9) 견디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걸음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어져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그 밀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자’라고 말합니다.
종자는 쉽게 취급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물어 어려운 시기를 지나도 종자는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종자로 인해 다음 생명과 열매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죽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찮게, 아무렇게나 버려져 죽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야 하는 시기를 지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미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바로 종자인 ‘한 알의 밀알’이죠.
한 알의 밀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이죠.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면 불행이지만, 죽음이 많은 생명을 낳기에 축복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미련하지 않은 이유는, 부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므로 인해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진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자기 부정’의 종교가 아니라, 자기 부정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자의적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사람들, 아니 밀알도 되지 못하고 누군가는 그 밀알이 떨어질 땅을 기경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우리가 지금 예배하는 이 시간이 누군가의 죽음과 썩어짐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믿음의 도전이 무엇인가요?
밀알의 신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썩어짐이 가능하지만, 그 신비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썩어짐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 밀알의 신비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 복음을 살았던 모든 이들은 이 신비를 믿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썩은 밀알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그 밀알의 열매를 거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밀알 되었던 사람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하나의 밀알이 되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