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부가 '아프리카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나미비아 집단학살을 시인하다
독일 정부가 100년도 넘은 나미비아 집단학살을 시인했다.
독일 정부는 1884년부터 1915년까지 서남 아프리카 나미비아 통치에 대한 연방의회 내 좌파당의 요청에 답변하면서 '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나미비아 집단학살은 독일 점령군이 1904년부터 수년간 현지 헤레로 족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10만여명을 살해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숨지도록 한 참극이다. 무려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이 사태에 대한 독일의 불분명한 태도는 그간 국제사회에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오스만제국이 1차 세계대전 때 아르메니아에서 저지른 대량살상이 집단학살로 불리자 크게 반발하고 있는 터키조차도 독일을 비난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독일은 헤레로 족 얘기부터 설명하라"며 "독일은 오스만제국의 행위를 운운할 자격이 없는 국가"라고 코웃음을 쳤다.
이에 대해 노르베르트 람메르트 연방의회 의장도 "나미비아 사태에 대한 명백한 설명이 한 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은 좀 당혹스럽다"고 그의 지적을 수긍했다.
당시 집단학살당한 헤레로 족의 유골
나미비아 집단학살을 독일이 이번에 갑자기 시인한 것은 물론 아니었고 그간에 공감대가 형성되려는 산통이 있었다. 독일은 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유엔 협약이 1951년 발효되기 전에 벌어진 사건이라며 나미비아 문제를 거론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4년 독일 경제장관이던 하이더마리 비쵸레크-조일(사회민주당)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용어를 들이대면 헤레로 족 사태는 집단학살"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 정부의 이름으로 사과까지 했다가 사죄가 보상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요슈카 피셔 당시 외무장관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정권이 바뀐 2012년에는 야당 사민당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의원이 나미비아 사태에 대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제안하기도 했다. 채택되지는 않은 이 가이드라인에는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이뤄진 나미비아 학살은 전쟁범죄이자 집단학살"이라는 문구가 적시됐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이 지침안이 현재 정부 정책으로까지 진화했다며 현재 독일이 나미비아와 진행하는 화해, 보상 협상의 토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도이체벨레는 이날 정부가 공식 문서에서 '집단학살'을 언급한 데 대해 "뒤늦게 과거사를 시인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사죄"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나미비아와의 협상이 올해 말까지 마무리된다며 정부가 2017년 총선이 열리기 전까지 집단학살 문제에 대한 최종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내다봤다.
1897년, 멀리 떨어진 소말릴란드에서 1889년에 발생했던 우역(牛疫)이 남서아프리카에 도달하여, 헤레로족의 가축사육을 황폐화시켰다. 독일 정착민들은 싼 값에 목초지와 생존가축을 구입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겼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1904년 독일제국에 대한 헤레로족의 봉기로 이어졌다.
1904년 1월 며칠 동안 헤레로족 전사들은 아이, 여성, 선교사, 다른 국적의 유럽인들을 제쳐두고 무장 가능한 독일인들만을 선별하여 100여명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여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로타 폰 트로타 장군이 지휘하는 진압부대를 보냈고, 나마족 인구의 50%와 헤레로족 인구의 80%가 학살당했다.
1904년 워터버그 전투에서 트로타의 군대는 3000-5000 여명의 헤레로족을 공격한 후, 생존자들을 사막지역으로 몰아 놓고 사막에서 나오는 자들은 사살하였다. 또, 수시로 여성에 대한 강간을 자행하고 피해자를 살해하거나 사막으로 버렸다. 당시 독일군의 가이드였던 얀 클로태는 저항할 능력이 없던 헤레로족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고 그 참혹상을 증언한 바 있다.학살 이후, 생존자들은 독일군대 또는 정착민의 노예로서 수용소에 수감되어 각종 고문에 시달렸고,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고문, 생체 실험, 중노동, 영양부족 등으로 많은 이들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독일제국에 의해 4 년여에 걸쳐 자행된 나마쿠아 헤레로족 대학살은 20세기 최초의 대학살로 알려져 있다. 1985년 UN의 휘태커 보고서에 따르면 이 학살의 결과 1904년 80,000여명이던 헤레로족의 인구는 1907년 15000여명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독일 해군은 1904년에 나미비아에서 헤레로족에게 습격을 가했다. 현재 나미비아의 헤레로족에게, 베를린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는 것은 식민전쟁을 대량학살로 인정받는 것 만큼이나 커다란 염원이다. 헤레로족은 베를린의 독일 기업들을 과거 나미비아에 수천만 달러의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미국 국제재판소에 소송 중이다. 독일의 피셔 외무부 장관은 10월, 나미비아 방문 중, 독일에 배상금을 물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거절하였다. 그 대신 배상금이 아닌 경제적 원조라는 명목 하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나미비아 공화국(Republic of Namibia )
나미비아라는 이름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으며, 이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간주된다. 1990년 독립 전에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로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 남서아프리카로서 변경되었고, 독일과 영국의 식민지배에 영향을 받았다.
나미비아의 건조한 땅은 초기에 부시먼족, 다마라족, 나마족이 거주했으며 대략 14세기 부터 반투족 확장과 함께 이주해 온 반투족이 정착을 했다. 당시 지역에 상륙하여 탐험을 한 최초의 유럽인은 1485년에 디오고 캉 (Diogo Cão), 1486년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등의 포르투갈 항해가였으며, 아직 그 지역은 포르투갈령 영토로 점유되지 않은 상태였다.
1884년 나미비아는 영국의 잠식에 앞서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왈비스베이를 빼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알려졌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헤레로인과 나마쿠아인은 독일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그 후 헤레로나마쿠아 학살 속에, 10,000 명의 나마인 (부족의 절반 인구)과 대략 65,000 명의 헤레로인 (대략 부족의 80% 인구)이 죽었다.
구금으로부터 풀려났던 생존자들은 수많은 방식의 아파르헤이트 시스템 속에서 강탈, 추방, 강제노동, 인종 격리와 차별 정책을 당하였다. 실제로, 몇몇 역사가들은 나미비아에 자행한 독일의 학살이 홀로코스트에서 나치 독일이 사용한 모델이었다고 추론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에 작은 아이에 불과했던 나치당에게 그 사건은 특별히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당시 학살의 기억은 독립한 나미비아에서 민족 정체성과 독일과의 관계에 상응한 채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1883년부터 1915년까지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으며, 199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당시 유엔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빈트후크 사람들은 높은 생활 수준을 자랑한다.
현재 야당인 남서아프리카인민기구(SWAPO, 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sation)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으나 현재는 다당제 민주주의와 혼합자본주의경제를 따르고 있다.
첫댓글 독일의과거사 해결방법을 우리는 배워야합니다.일본과 한국은 과거사미해결국가의 모범국입니다.부끄러운줄 모르고 세게평화운운하고다니는 아베와 우리나라지도자들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입니다. 국가는 경제를 가르키기전에 정의를 가르켜야합니다.
동족이 동족을 학살하고도 모른채 하는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아니 모른척하는게 아니라 숨기고 조작하는 나라입니다.
세월호조사연장을 세금이 드는문제라 연장할수없다고 하는나라가 이나라입니다. 돈이 없어서 과거사문제를 해결할수없다고 하는 나라가 이나라입니다.일본과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에게 과거사청산하라고 떠드는나라가 이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