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쉬파리가 준마(駿馬)의 꼬리에 붙는 용기
「제목을 부르고 있다」라고 주장하더라도 그 제목이 「본문(本門)의 제목(題目)」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을 받들어 모시며 제목을 부르기 때문에 「본문(本門)의 제목(題目)」인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어법주 상인 예하님의 「올바른 어본존을 믿는다」라는 어지남은 어본존과 대성인의 가르침을 받드는 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 이렇게 확신하느냐 하면,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에 「나는 비록 소량(少量)일망정 황송하옵게도 대승(大乘)을 배우고 있노라. 쉬파리가 준마(駿馬)의 꼬리에 붙어 만 리(里)를 달리고」(신편어서 p.243)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의 이 어문(御文)을 범부인 우리에게 적용하여 배(拝)하면, 작은 그릇인 범부가, 성불은 요원(遙遠)한 경계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아집(我執)으로 제멋대로의 신심을 하고 있던 자가 어본존과 대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어법주 상인 예하의 어지남을 순수하게 실행하는 동안 작은 그릇의 사람이 성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이렇게 배독(拜讀)할 수 있습니다.
성불하기 위해 방법(謗法) 죄장(罪障)의 소멸을 진심으로 기원해도 방법을 절복하지 않으면 방법을 인정하고 있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의 가르침이 아닌 신앙은 외도(外道) 중심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해서는 성불은 어렵겠지요. 아니요, 어렵지 않습니다. 성불이 어렵도록 하고 있는 것은 부정직한 마음을 가진 자기 자신입니다. 범부의 좁은 마음입니다.
때로 「성불하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듣습니다만, 성불은 누군가가 하게 해주는 것일까요?
신심·근행·창제·절복, 이러한 신심에 대한 모든 것은 우리가 성불을 위해 실제로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성불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불은 불신(佛身)을 성취하는 일인데 자신이 스스로 어본존님을 정직하게 섬기는, 그 정직한 신력(信力)과 순수하게 실행하는 행력(行力)으로 인해 성불의 경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어본존을 섬기고 봉공(奉公)하는 몸이 된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일으켜서 방법을 절복하여 어본존을 정직하게 섬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