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막 (외 2편)
홍일표
별은 하늘에 고용된 일용직 악사
새벽까지 탬버린을 치며 반짝인다
밤마다 별을 주식으로 하던 시절은 갔지만
여전히 인기 있는 기호식품
크고 작은 별들을 식성대로 구입하여 먹는다
우물에 빠진 달을 두레박으로 건져 올리던 옛날
오리온좌, 큰곰자리, 북두좌 등은 자리를 세습하였다
언제 하늘에서 해고될지 모르는 별들은
수시로 자리이동을 한다
하늘에서 별이 실직하고
금빛 무대의상을 입고 밤새워 뛰고 흔드는
모든 반짝임의 배후에는
별들의 눈물로 연명하는 검은 사막이 있다
정전
어디에 놓고 온 우산처럼 내가 보이지 않을 때
깜박 잊은 어제가 반짝
지하로 들어간 노래에 불을 붙인다 불붙은 노래가 가끔 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어둠도 빛도 아닌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저녁은 금방 늙어버린다
불 꺼진 그 곳에 누군가 있다 한때 내 입을 거쳐 간 노래이거나
귓불 고운 여자일지도 모르는
빈 깡통이 증명하지 못하는 시간이 기다랗게 휘어지는 곳
입술을 적시던 노래가 차가운 물질이 되는 곳
빛이 죽어 다시 빛으로 돌아갈 때까지
당신의 머리카락은 불타고 있다 검은 화염을 삼키는 것은 결국 당신이고
바람이 떼어놓고 간 심장은 붉은 모란으로 부풀다가 다시 풍선으로 날아오른다
나를 조문하러 오는 저녁이 슬그머니 몸밖에 당도하고
새들이 벗어놓고 날아간 발자국은 바닥을 놓지 않는다
불이 켜지고
나무에 앉아 졸던 밤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사라진 입술처럼 선명해지는
어둠도 빛도 아닌
당신에게 가는 길
모란 날다
누가 저 꽃에 자물쇠를 채워 놓았나
모란의 내일과 모레를 잠시 접어놓고
모란 밖에서만 서성이던 바람은 손과 발을 버린 지 오래다
나는 허공의 껍질 같은 흰 비닐봉지로 날며
어두운 몸속에서 두근거리는 단단한 꽃망울을 본다
피지 않은 꽃의 내부가 온갖 궁리로 뜨거워지는 시간
봉오리 벌겋게 달아올라
푸드득 동박새 한 마리 뛰쳐나올 듯
한때 밀입국을 꿈꾸었던 꽃의 먼 안쪽을 기웃거리며
안과 밖이 없는 바람이 웅얼웅얼 흘리는 소리
저 내부에는 색지로 포장된 봄볕이 있거나 아직도 내 안에서 뜨거운
서쪽 여자의 분홍빛 입술이 숨어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한 순간
동그란 봉오리를 깨고 머리 붉은 새가 날아오를 거라고
—시집 『매혹의 지도』
달리의 그림 속에서 사라진 시간의 행방은?
푸른 그리움의 하물(荷物)을 짊어진 늙은 낙타와 함께
가고 있다. 흰 모래알들이 종알종알 잠결 사이로 흘러들고
길가의 풀잎들은 귀를 쫑긋거리며
쓸쓸하게 무너지는 발굽 소리를 엿듣고 있다.
노을은 빨간 꽁지를 흔들며 날아가고
세상은 시간의 밑 빠진 독으로 서둘러 몸을 감춘다.
후욱 불면 날아가 버릴 가건물로 우리의 시간은 위태위태 버티고 있고,
석고상의 얼굴은 언제나 시간 밖에서 의연하다.
무념무상, 정지된 호흡의 기나긴
협곡
그러나 바람은 불고
예고 없이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시계 바늘을 쫓아 뛰어가고,
점선으로 이어지는 발걸음 사이사이
기쁨 • 슬픔 • 노여움 • 쓸쓸함이 디딤돌로 놓인다.
달리의 그림 속에서
수증기로 날아간 시간의 흰 옷자락이 얼핏 보이고,
망연자실 나는 여기 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조간과 석간 사이를 오가며
가끔은 북한산이나 수락산에 올라
사라진 시간의 행방을 좇는다.
관망(觀望)의 핀셋에 잡히는
가늘고 긴 분침 하나를 들여다보며
또다시 시간은 어디 있는가? 달리의 긴 손가락 끝으로
환각의 시계 바늘이 흘러가고,
나는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흔적 없이 날아가던 발자국이
빙긋이 나를 내려다보고,
기원전, 무시간의 숲으로, 달리는 총총히 걸어간다.
—1992년 1월 4일〈경향신문〉신춘문예
-----------------
홍일표 / 1958년 충남 입장 출생. 1988년 《심상》신인상과 1992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안개, 그 사랑법』『혼자 가는 길』『살바도르 달리 風의 낮달』『매혹의 지도』,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