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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절 재반격 속개와 서울 탈환작전
1. 제천지역 적 섬멸작전(킬러작전)
제천부근 전투
홍천
하진부
중42군 창동리 국9사
창봉리 국7사
양평 지평리 중39군 중 40군 횡성
미1기병 미23연
미24사 섬강 북2군단
곡수 ' 북5군단 평창
주암 영27여 국6사 미187연 원주 국3-18연 도돈 국7사 국9사
후포 판대리
주천
여주 국3 미31연
국5 영월
주포 국8 제천
[아군 상황]
'51. 1월 25일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한 국구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는 한강선을 확보하고 중동부에서는 양평-횡성-강릉으로 진출한 다음 홍천을 목표로 공격 도중 중공군 제4차공세(2월공세)를 맞아 대돌파를 허용하였으나, 2월 18일경 양평-원주-제찬-영월을 연하는 선에서 이를 저지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2월공세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은 서부전선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은 김포반도와 영등포 일대, 미 제3사단은 한강선을 따라 경안리 일대, 미 제25사단은 중공군의한강교두보 서쪽의 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 일대를 각각 방어하고 있었다.
중부전선의 미제9군단은 미 제24사단이 중공군의 한강교두보 남쪽과 남동쪽을 방어하고, 남한강 동쪽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하진일대, 영 제27여단이 주암리, 국군 제6사단이 판대리 부근으로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이 원주서쪽 섬강, 제187공정단(국군 제3-18연대 배속)은 원주, 국군 제3사단(18연대 결)은 상남리, 국군 제5사단이 입석리 일대에서 차단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이 마차리, 제9사단이 정선, 수도사단은 삽당령에서 강릉에서 강릉에 이르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적군 상황]
이 무렵 공산군은 8개 군을 전개하여, 서쪽 한강하구로부터 양평, 중원산, 횡성, 봉화산, 주봉, 방림리, 하진부리에 이르는 제1선을 담당하게 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은 한강 입구에서 뚝섬, 중공군 제50군은 둑섬에서 상팔당, 중공 제38군은 상팔당에서 조좌리, 중공 제42군은 조좌리에서 매봉, 중공 제66군은 매봉에서 정금산, 북한군 제5군단은 정금산에서 하대곡, 북한군 제3군단은 하대곡에서 아지동, 북한군 제2군단은 하진부 서쪽에서 기동방어를 실시하였다. 제1제대의 방어중심이 25~30km로 각 군은 이 지역에서 1개월 동안 방어할 계획이었다.
['51. 2. 21~3.6일, 킬러작전(아리조나선) : 제천돌파구에 유입된 적 섬멸]
※그 결과 14일 동안(2.21-3.6) 추격작전에서 미 제9, 미 제10군단은 아리조나 선인 횡성-평창의 목표선에 도달하였다. 유엔군은 적 사살 7,918명, 부상 1,469명, 포로 208명의 전과를 올렸지만 목표선인 아라조나 선 이남의 모든 적을 섬멸한다는 목표에는 완전하게 도달하지는 못했다.
미 제8군사령관은 공산군 2월 공세가 불과 수일 만에 격퇴되고, 유엔군이 다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적에게 새로운 공격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박탈하고, 제천 북쪽 부근에 돌파구를 형성한 적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격멸 작전을 계획한다.
이번 작전의 목적이 적 병력 말살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격멸작전(킬러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남한강 동쪽의 양평-횡성-평창을 연하는 아리조나선 남쪽에서 철수하는 적을 격멸하기 위하여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홍천 도로를 따라, 미 제10군단은 제천-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안동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완료한 미 제1해병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하고, 제187공정단을 대구로 내려보내 유사시 공수낙하를 위한 훈련을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51.2. 21일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 미 제10군단은 영월-평창도로를 따라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가. 횡성 점령
미 제9군단은 2월 21일 10:00시에 좌전방 미 제24사단의 엄호하에 미 제1기병사단(영27여단 배속), 국군 제6사단, 그리고 군단의 주공인 미제1해병사단으로 4개 사단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기상의 천재지변 ]
※'51, 2월 21일부터 몇일간 기온이 10도 이상, 밤에도 0도로 비가 내려 하천 및 도로의 붕괴, 산사태 등으로 진격지연
※ '51.2.24일 미 제9군단장 무어 중장 한강에 헬기 추락으로 전사
※ 기상이변으로 지연되던 공격이 3월 1일 재개되어 제1해병사단이 3월 4일 횡성을 점령하였다.
'51.2. 21일 공산군은 2월 공세에 실패한 이후 3일간 계속 철수하고 있었고, 유앤군은 적 병력을 격멸하려면 진격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 기상이 천재지변 상황이었다. 21일 기온이 10도까지 상승하고 야간에도 0도를 웃도는 고온현상이 나타났고, 3일간은 간헐적으로 비까지 내려 하천이 유빙으로 가득찬 급류천으로 변하여 교량이 떠내려 가고 도섭이 불가능하고 , 곳곳에 산사태로 터널과 도로 및 철로가 두절되는 사태로 진출이 지연되었다.
2.24일 특히 군단의 좌전방 미 제1기병사단은 하상에 설치한 지휘소나 보급소를 미처 이동하기 전에 하천이 범람하여 유선망이 두절되고 보급품도 유실되었다. 사단은 어려움 속에서 24일 양평-홍천 도로 북쪽 469고지를 점령하였다.
2.24일 제9군단장 무어 중장 전사, 한편 군단의 주공으로 횡성을 공격중인 미 제1해병사단은 눈과 비로 도로 통광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2월 24일 전선을 헬기로 정찰하던 미 제9군단장 무어 중장이 헬기가 한강 탁류에 추락하며 전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임시 제9군단장으로 가고, 부사단장이 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51.2.25일~3월 4일 미 제8군사령관은 미 해병사단이 횡성을 집중적을로 공격할 수 있도록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였다. 우전방 미 제5해병연대 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하고, 좌인접 국군 제6사단 지역을 미 제7해병연대가 인수하여 사단의 좌전방으로 투입되었다. 기상이변으로 지연되던 공격이 3월 1일 재개되어 3월 4일 횡성을 점령하였다.
나. 강림-안흥-봉화산 진출(국군 제3사, 2.23~3.7)
※26일에는 횡성-안흥리-평창 선으로 진출하여 좌전방 제18연대는 음달말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연결하고, 우전방 제23연대는 안흥지구를 점령하여 군단의 주공인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단의 중앙으로 투입된 미 제2사단과 연결하였다.
※3.7일 원주-방림리 도로의 북쪽의 감제고지들을 점령 목표선인 아리조나선으로 진출, 이후에 사단은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국군 제3군단으로 복귀하여 마차리-정선 일대로 철수하였다.
강림-인흥 전투
홍천 유동리 장평
계천 마옥 포동리
미1해병=국3사 둔방내리
횡성 두곡리
479 봉화산 국3=미2사
정암리 덕어산
국3-23연 음담말
풍치산
안흥리 방림리
매화산
미1해병=국3사 율목동
치악산 강림
원주 갈곡리
남대봉 주천강
제천 영월
미 제10군단은 2월21일 10:00시에 우전방 미 제7사단이 주공으로 영월-평창 도로를 다라 공격하고, 국군 제3사단은 조공으로 좌인접에서 원주-횡성으로 공격하여, 미 제9군단의 주공인 미 제1해병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면서 원주-방림리 도로북쪽의 강림-안흥-봉화산에 배치된 적을 공격하였다.
국군 제3사단의 공격목표인 강림리-아흥리-봉화산은 서쪽으로는 매화산-치악산-남대봉으로 연결되는 치악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동쪽으로는 주천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지형으로 도로망이 결핍되고 적설이 1m나 되어 기동이 불리했다.
'51. 2, 23~26일 당시 국군 제3사단은 중공군 2월공세시 29번도로 우측 삼배리로 진출하여 많은 피해를 입어 신병을 2,000명 보충받아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좌인접 미 제9군단의 주공인 미 해병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사단은 23일에야 공격을 개시하여 26일에는 횡성-안흥리-평창 선으로 30km이상 진출하여 좌전방 제18연대는 음달말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연결하고, 우전방 제23연대는 안흥지구를 점령하여 군단의 주공인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단의 중앙으로 투입된 미 제2사단과 연결하였다.
'51.2.28 미 제8군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전투지경선이 좌측으로 횡성 동쪽 두곡리로 확장되면서, 미 제9군단의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 의 우전방인 제5해병연대 지역을 제23연대가 원주로 이동하여 정암리 부근에서 인수하였다.
이당시 적군은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6, 제12사단의 5,000여 명으로 안흥리 북쪽의 봉화산과 덕어선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51. 3, 1~7일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수류탄과 총검이 난무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하며 5일밤 적이 갑작스레 도로 북쪽으로 철수함으로서 7일 원주-방림리 도로의 북쪽의 감제고지들을 점령 목표선인 아리조나선으로 진출하였다,
이후에 사단은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게하고 국군 제3군단으로 복귀하여 마차리-정선 일대로 철수하였다.
다. 속사리 설한지 전투
※ '51.3.2~4일 수도사 제1기갑연대는 철수 과정에 적 300여 명을 사살했지만 전사 59명, 부상 119명에 실종 802명이었다. 실종된 인원은 대부분 그 다음날 복귀한다. 이때 연대는 폭설로 경강국도가 차단되고 보급이 두절되어 식량 및 탄약이 절대 부족하엿고 혹한으로 동상환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국군 제3군단은 태백산맥의 서쪽 산악지대를 공격하게 되는데 오대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수도사단이, 서쪽은 국군 제7사단이 공격을 하고 제9사단은 송계리 부근에서 집결하고 있었다.
군단은 킬러작전이 개시되자 우전방 수도사단의 제26연대를 횡계리에, 제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 위하여 2월25일에 자전방 제7사단으로서 평창-창도리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하였다. 군단장은 좌측의 미 제7사단의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횡계리에서 대기 중인 제1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됨으로써 공격이 지연되어 3월 1일에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 무렵 영월부근에서 철수하는 북한군은 발왕산. 속사리. 월정사. 부근에 종심진지를 편성하고 군단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해안을 연한 양호한 기동로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계방산-오대산-황병산을 연하는 산악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기도하였다.
제1기갑연대가 속사리로 향하고 있을 무렵 국군 제7사단 제5연대와 거문리에서 격전 중인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신속히 진출을 독촉하게 된다. 그러나 2일에야 제설작업이 완료되어 하진부리로 진출하여 접적이 개시되었다.
속사리 상황도
오대산 황병산
계방산 월정사
차항리 대관령 황계리
속사리 상진부리 유천리 칼산
발왕리
진부리
태기산 창동리 봉평 도사리 이목정리 오 병두산
하진부리
형제봉
백적산 거문리 대 발왕산
천
[속사리에 기갑연대 고립]
'51.3.2~4일 속사리와 하진부 중간의 발왕리로 진출 중 야음으로 야간방어에 전환한다. 그러나 22:00시경 제1기갑연대의 후방을 엄호하고 있던 제26연대 3대대가 3월 4일 04:00시까지 백병전을 펼쳤으나 수적인 열세로 차항리로 철수하면서 제1기갑연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고, 야음을 이용하여 적이 포위하여 버렸다.
이에 사단장은 기갑연대장에게는 철수를, 제26연대장에게는 유천리 돌파를 하여 제1기갑연대와 연결토록 명령하였다. 결국 제1기갑연대는 방호와 적진 돌파를 반복하면서 4일 자정엥야 적진을 벗어나 대관령 서쪽에 집결하였다.
연대는 철수 과정에 적 300여 명을 사살했지만 전사 59명, 부상 119명에 실종 802명이었다. 실종된 인원은 대부분 그 다음날 복귀한다. 이때 연대는 폭설로 경강국도가 차단되고 보급이 두절되어 식량 및 탄약이 절대 부족하엿고 혹한으로 동상환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이번 킬러작전에서 미 제8군은 기동성이 우수한 미군 위주로 작전을 펼쳤지만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으로 적을 추격하기 보다는 악천후와 싸워 나가는 힘겨운 진격이 되었다.
그 결과 14일 동안(2.21-3.6) 추격작전에서 미 제9, 미 제10군단은 아리조나 선인 횡성-평창의 목표선에 도달하였다. 유엔군은 적 사살 7,918명, 부상 1,469명, 포로 208명의 전과를 올렸지만 목표선인 아라조나 선 이남의 모든 적을 섬멸한다는 목표에는 완전하게 도달하지는 못했다.
2. 중부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 : 아이다호선 진출: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북방-한계리를 연하는 선))
※'51. 3월 7일 국군 제1군단사령부와 국군 제3사단이 미 제10군단으로부터 원대복귀
가. 유엔군의 작전 방침
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분쇄하고, 격멸작전으로 '51년 3월 초에는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아리조나선으로 진출하여 일직선의 연결된 방어선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이때 서울 재수복 작전에 괸하여, 그것이 정치, 심리적 등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유엔군의 증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서둘러 무리한 희생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군사적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제8군 사령부는 현 전선의 중앙지역에 돌파구를 형성, 일단 적의 전선을 양단하여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으로 분리시킨 다음,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서울을 양익포위한다는 작전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이 작전을 전선 절단과 분리라는 작전 목적을 고려 "전선 절단작전"이라 명명 하였다
[중공군 팽덕회의 전술 지침]
이 무렵 중공군은 방어에 유리한 산악과 하천을 이용하여 바어종심을 유지하면서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유엔군의 우세한 기동과 화력을 고려하여 병력배치는 "전경후중"의 원칙을 관철할 것이며, 적극 방어를 위해서는 주요거점과 도로의 통제, 은폐, 분산 및 종심배치를 지켜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아울러 화력구성은 반드시 적 전차와 보벼의 살싱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이를 위해 중화기를 전방제대에 배속하여 배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화력과 기동으로, 병력과 야전축성에 의존한 지여전은 한게에 달해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식량과 탄약마저 제한되어 병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된 상황이었다.
[쌍방의 부대 운용]
● 공산 지원군 : 서부 지역에는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 50군, 중앙에는 중공 제38, 제42, 제66군이, 동부지역에는 북한군 제2, 제5군단과 제69여단을 배치한다.
● 국군과 유엔군 : 아군은 양평-횡성-강릉 선(아리조나선)으로 진출하여,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구군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25사단(배속:터키여)이 한강을 따라 강 남쪽의 김포반도-노량진-잠살-수청리를 점령 중이며,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 미 제24사단, 미 제1기병사단(배속 영27여), 미 제1해병사단이 양평-용두리-풍수원-횡성 선을 점령하였다.
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사단, 미 제2사단, 미 제7사다느로 추동리-아흥리-하송빈을 점령하였다.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배속 군군해병 제1연대),이 형제봉-박지산-용산리를 점령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제9사단, 수도사단으로 간평리-차항리-강릉 선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제8군은 전 군단이 참여하되 중부의 제 제9군단이 주축을 이루어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북방-한계를 연하는 아이다호 선까지 진출하여 적을 양담함은 물론 적의 병력과 장비가 비축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홍천과 춘천을 점령함으로써 동쪽으로부터 수도권 지역에 압력을 가할계획이었다.
[아이다호선에 이르는 3개의 통제선 : 알바니선, 버팔로선, 카이로선]
첫 번째선(알바니선) : 미 제1, 미 제9, 미 제10군단 정면의 8~20km 북쪽의 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 속사리를 연하는 선
두 번째선(버팔로선) : 미금리-진벌리-홍천 북쪽-한계리를 연하는 선으로, 이 선은 미 제1, 미 제9군단지역에만 설정
세 번째선(카이로선) : 미 제9군단 지역에 국한하여 설정, 가평-춘천 남쪽- 한계 북쪽을 연하는 선, 아이다호선과 거의 일치
리퍼작전 작전 통제선
철원 김화 김화 양구
화천 화천저수지
사창리 인제
전곡 영평 내평리
일동
포천 춘천
가평 한계
문산 의정부 홍천
서울 덕소 진벌리 양덕원리 오음산
국1사 미1기병 국6사
미3사 미25사 양평 미1해병 횡성
미24사
광주
제8군사령관은 춘천과 홍천을 점령하여 적의 전선을 차단하고, 서울을 양익포위 하기 위하여 주공인 제9군단 호지 소장의 지휘하에 홍천-춘천을 공겨하고, 조공인 미 제10군단은 풍암리-태기산-운두령을 공격하여 주공의 우측방을 방호하였다. 미 제1군단은 한강선에서 적을 고착 겭제하고 예봉산-천마산을 고역하여 주공의 좌측방을 엄호하게 된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인접 국군 제3군단은 산악지역인 운두령-황병산을 공격하고, 이미 연곡천을 따라 설정된 최종 목표인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은 점령 중인 방어진지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제8군사령관은 킬러작전시 기상이변으로 물자보급이 극도로 곤란했던 점을 고려하여 5일분의 복브물자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진남포와 원산 지역에서 상륙 양동작전]
제8군사령관은 상륙 양동작전을 곟획하여 미 해군 제95기동함대의 소해정이 서해안을 따라 기뢰를 제거하는 행동을 취하면서 진남포 외곾의 대동강 입구로 진입하고, 수송선들이 인천항에서 출발항여 북쪽으로 항해 중에 방향을 바꾸었다. 2월부터 원산지역에도 함포사격과 국군 해병 제41중대는 원산 근해 도서를 점령하여 긴박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51.3월 7일, 미 제8군사령부는 그동안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었던 국군 제1군단사령부와 국군 제3사단을육본으로 원대 복귀시켰다.
이에 따라 육본은 국군 제3군단의 우전방 제9사단을 국군 제1군단으로, 국군 제3사단은 국군 제3군단으로, 그리고 홍천 공격실패 후 재편성 중인 국군 제5사단을미 제10군단으로 배속시켜 전선을 재정비 하였다.
나. 홍천-춘천 진격전 : 3.7~24까지 카이로선 진출
※중공군 2월 공세로 횡성계곡에서 피해를 입은 미 제10군단의 제21지원부대원들을 수색하여 시체 250구 이상과 155mm화포 5문, M-5 견인차 6대, 분실된 전차 6대 중 4대 등을 회수하게 된다.
※ 당시 국군제6사단 제2연대 제2대대는 홍천강 북쪽 그은동 계곡에서 중공군 1개 대대를 발견하여 적 231명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며 75MM야포 7문, 60MM 박격포 6문, 82MM 박격포 4문 등을 노획하였다.,
적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의 주 목표는 미 제9군단이 목동리-춘천북쪽-내평리-한계를 연하는 아이다호선으로 진격하여 춘천과 홍천을 탈취하는 것이다. 이 작전의 주공인 미 제9군단은 4개 사단 병진으로 좌전방 미 제24사단(배속 : 국군제6-19연)이 용문산으로,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영 27여 배속)과 국군 제6사단(19연대 결)은 29번 도로 서쪽의 홍천강 남쪽 산악지대로, 우전방 미제1해병사단은 홍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51.3.7~9일 주공인 미 해병 제1해병사단이 3월 7일 오음산 북쪽의 알바니선으로 공격을 개시한다. 9일 1단계 알바니아선을 점령했으나, 미 제10군단의 미 제2사단과 좌인접 미 제1기병사단의 지출이 지연되어 잠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13일 두 사단이 알바니아선으로 진출하고 1단계작전 종료한다.
'51.3.7~ 이 당시에 국군 제6사단은 제2연대 수색대가 횡성 서북 초원리에서 지난 중공군 2월 공세시 국군 제8사단이 유기한 대전차포 7문과 105밀리 곡사포 5문을 회수하였다. 사단은 11일 풍수원 북쪽 갈기산-성지벙으로 진출 중 군단의 부대 재배치 계획으로 12일 작전지역을 좌인접 영 제27여단과 우인접 미 제7해병연대에 인계하고, 제1기병사단의 좌인접 제8기병연대의 장락산-용수리 지역을 인수하였다. 13일에는 3월 4일부터 미 제24산단에 배속되었던 제19연대가 복귀하여 14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였다.
횡성을 지나 홍천을 공격 중인 미 해병 제1사단에는 미 제2사단에서 지원나온 전장 정리조가 지난 2월 홍천 포위작전(라운드업작전) 중 중공군 2월 공세로 횡성계곡에서 피해를 입은 미 제10군단의 제21지원부대원들을 수색하여 시체 250구 이상과 155mm화포 5문, M-5 견인차 6대, 분실된 전차 6대 중 4대 등을 회수하게 된다.
미 제8군은 13일 제2통제선인 버팔로선으로 진출을 명령한다. 이에 미 제9군단장은 좌측에 미 제1기병사를, 우측에 제1해병사단으로 양익포위를 계획하고, 좌측의 미제24사단과 국군 제6사단은 북한강 계곡의 청평호에서 홍천강 남쪽까지 진출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14~15일 공격을 개시한 군단은 15일에 미 제24사단은 청평호에, 국군 제6사단은 홍천강 남쪽 고지군을 확보하였고, 제1기병사단도 홍천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미 해병 제1사단의 진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제1기병사단의 진출로인 제29번 도로변에는 적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3월 16일 미 제9군단장은 16일 홍천일대에 중점을 두고 적을 분산시켜 미 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홍천강을 연하는 중간통제선인 버스터선을 설정하고 홍천 북방의 버팔로선과 연결하였다. 그리고 모든 부대들이 이 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적은 유일하게 홍천 동쪽에서 미 해병사단의 진출로상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전진을 저지하였으나, 제7해병연대의 정찰대가 적진을 돌파 홍천에 진입하여 결국 홍천 동북방 고지를 점령하였다.
3월 17~19일 17일 아군 4개 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적은 18일부터 철수하게된다. 아군은 19일 일제히 목표지역을 점령하였다.
당시 국군제6사단 제2연대 제2대대는 홍천강 북쪽 그은동 계곡에서 중공군 1개 대대를 발견하여 적 231명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며 75MM야포 7문, 60MM 박격포 6문, 82MM 박격포 4문 등을 노획하였다.,
3월21~22일, 21일 미 제1기병사단이 카리로선에 도착하고 특수임무부대가 춘천시내로 진입하게 되며 22일 제7기병연대가 춘천시내엥 진입히면서 절단작전의 목표는 달성된다.
한편 군단의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도 18일 동부전선 여량리에서 사단으로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가 도착하여 작전지역 중앙으로 투입되었다. 국군 제1해병연대는 24일 홍천 북방 가리산을 확보한다.
[절단작전 통제선]
첫 번째선(알바니선) : 미 제1, 미 제9, 미 제10군단 정면의 8~20km 북쪽의 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 속사리를 연하는 선
두 번째선(버팔로선) : 미금리-진벌리-홍천 북쪽-한계리를 연하는 선으로, 이 선은 미 제1, 미 제9군단지역에만 설정
●중간 통제선 버스터선 설정 : 홍천강선에 연하여 설정하여 버팔로선과 연결
세 번째선(카이로선) : 미 제9군단 지역에 국한하여 설정, 가평-춘천 남쪽- 한계 북쪽을 연하는 선, 아이다호선과 거의 일치
리퍼작전 작전 통제선
철원 김화 김화 양구
화천 화천저수지
사창리 인제
전곡 영평 내평리
일동
포천 춘천
가평 한계
문산 의정부 홍천
북한산
용마산
서울 덕소 진벌리 양덕원리 오음산
국1사 미1기병 국6사
미3사 미25사 양평 미1해병 횡성
미24사
광주
3. 서울탈환작전
※ '51.3.14 국군 제1사단의 5개 정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강북지역을 정찰하였으나 적과 조우하지 않았으며,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 '51.3.15일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3월 15일 한강을 도하하여 16일 서울 시내로 진출하였다.
적 전선 절단작전의 주 목적의 하나는 서울을 적이 강력하 방어할 것으로 판단하고 중부전선의 종심 깊은 돌파구를형성하혀 동측방으로부터 서울을 포위할 지형을 확보하거나 이를 통해 서울 방어부대의 철수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 자전의 주공인 미 제9군단이 돌파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미 제1군단은 한강 남쪽의 저지진지를 졈령하고 있었다.
이때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은 인천지역 경계와 한강 남쪽의 진지를 계속 방어토록 하고, 우전방 미 제25사단(배속:터키여단)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지점을 도하, 한강 이북으로 지툴하여 북한군을 끼고 있늕 고지군을 점령하도록 하여 우인접 미 제9군단의좌측방을 엄호함과 동시에 서울에 배치된 적을 포위할 계획이었다.
3월 27일, 미 제25사단은 도하작전을 개시하여 별 저항업시 진출하였으나 4일 째인 10일부터는 적의 저항이 현저하게 저하되어 15일 저녁 무렵 재24연대와 제27연대가 서울-춘천 도로까지 진격하고, 터키여단은 경춘국도 보다 2마일 더 북상하여 우인접 미 제9군단의 미 제24사단과 연결되었다. 이로써 미 제25사단이 예봉산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동측방에서 적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9군단이 홍천을 탈환할 무렵 적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 제3사단 정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적 진지를 정찰하였으나 적이 없었다. 한강변의 매봉과 용마봉을 정찰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어서 서울 남쪽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의 5개 정찰대가 14일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강북지역을 정찰하였으나 적과 조우하지 않았으며,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제8군사령관은 서울에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3월 15일 미 제1군단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의 주요 고지군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 북서쪽 한강변에서 북한산을 거쳐 용마봉을 경유하여 버팔로선과 연결하는 통제선인 "링컨선"을 설정하고 이 선 북쪽으로는 정찰대만 운용하여 적과 접촉을 유지하도록 한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이 북한산을, 미 제3사단이 용마산을 목표로 진출하도록 하여,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3월 15일 한강을 도하하여 16일 서울 시내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서울을경유하여 외곾지대로 진출하고, 미 제3사단 제65연대 제2대대도 용마봉을 점령하였다.
서울은 그동안 4번씩이나 점령군이 바뀌며 150만 인구가 20만이 남아 있었으며 시량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서울 수복시 맥아더는 안전을 고려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로 서울환도를 미루어 줄것을 요청하였다.
4. 동부산악 작전
가. 태기산 전투(3.7~17)
※제5-27연대 정찰대는 아이다호선 전방의 검산리 부근에서 매복 중에 17일 후퇴하면서 은익한 무기와 탄약을 화수해 가려고 침투한 적 600여 명을 포착하여 425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생포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한다.
※ 3월 17일 국군 제5사단이 운무산-흥정산 서늬 아이다호선으로 진출, 좌측의 미제2사, 우측의 미 제7사도 아이다호선 지출
미 제10군단은 전선 절단작전간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되었다.
미 제10군단은 3월 7일 발교산-태기산-속사라를 목표로 좌전방에 미 제2사단을, 중앙에 국군 제5사단을, 우전방에 미 제7사단으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당시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를 받은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 간의 도로 경게임무를 하다. 3월3일에 다시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운교리-안흥리 지역에 진출하였다.
국군 제5사단 지역은 대부분이 900-1,000m의 고지군으로 연결되어 잇으면서 , 이곳은 지난 2월에 철수하면서 작전을 펼쳣던 곳이고 현재 사단 정면의 적도 당시의 북한군 제6사단으로 재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국군 제5사단은 3월 7일 좌전방 제36연대는 봉복산(1028)을, 우전방 제35연대는 태기산(1261)을 목표로 공격으 개시한다.
태기산 전투(3.7~17)
홍천 풍암리 검산리
미2=국5
27연 흥정산 35연
발교산 운무산980
봉복산1028
백운동 창동리
태기산
미2=국5
신대리
방림리
국5=미7
갑산리 27연
횡성 포동리 685
자주봉 35연
둔방내리 대미산 미7-17연
국5=미7
원주 지구리 36연 35연 월암동
안흥리 운교리 말다리
3.7~12일 하지만 적의 강력한 저지진지가 구축되어 있어 사단의 진출은 계속 돈좌되면서 12일에는 야간 항공지원지원까지 받으며 집중 공격을 하였다.
3.13~17일 적은 13일에 전선에서 물러나 철수하기 시작한다. 생포된 포로들의 진술ㅇ이 38고선 이북으로 철수하여 재정비 후에 새로운 공격을 준비 중이라 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제35연대 우측의 미 제7사단의 제17연대가 곶전 중인 대미산을 인수하여 공격하게 되며, 추격전을 전개한 사다는 14일 적의 최후 거점인 태기산을 점령하고, 신대리 백운동선으로 진출한 후 15일 북쪽의 운무산-흥정산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였다.
제5-27연대 정찰대는 아이다호선 전방의 검산리 부근에서 매복 중에 17일 후퇴하면서 은익한 무기와 탄약을 화수해 가려고 침투한 적 600여 명을 포착하여 425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생포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한다.
사단의 좌우 인접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도 17일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여 절단작전을 종료하였다.
나. 하진부리 부근 전투
절단작전의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 공격목표인 계방산-황병산으로 연하는 이이다호선까지는 16km남아 진격거리는 짧지만 산악지대라 진격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제3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군단 후방지역에서 북상하는 북한군 패잔병들의 출몰이 빈번함을고려하여 제7사단과 배속된 해병제1연대를 공격제대로 투입하고 ,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제3사단을 에비로하여,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이 전환ㄷ되는 제9사단의 정선지역을 인수하도록 조치하였다.
'51.3월 6일 이에 제7사단은 좌전방 제3연대를 상대화에서 백적산(1141)-잠두산(1241)을 경유 속사리로, 우전방 제5연대를 대기에서 백석산(1364)-박지산(1391), 형제봉을 경유하여 하진부리로 3월 6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한다.
하진부리 상황도
오대산 황병산
계방산 월정사
차항리 대관령 황계리
속사리 상진부리 유천리 칼산
발왕리
진부리
도사리 오 병두산
하진부리
형제봉
백적산 거문리 대 발왕산 화란봉
천
두타산 봉산리
잠두산 1244 박지산1391
상원산1421
백석산1364 막동계곡
여량
대화
중왕산 1375 가리왕산1560 북평
청옥산 화동계곡
이 당시에 북한군은 적 제9사단이 백적산 일대로, 적 제27사단이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하여 사단의 우측방 공격을 기도할 것으로 판단되어, 제3군단장은 국국 해병 제1연대를 이 지역에 긴급히 투입하였다.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적이 진출하기 전에 바어 거점인 봉산리와 발왕산(1458)을 점령하기 위해 5일 08:00시에 기동을 개시하여 제2대대가 오장산(735)를 경유하여 발완산을 , 좌전방 제3대대도 상원산(1421)을 경유 봉산리로 진출하였다.
'51.3월 7~9일 제7사단은 7일 공격을 개시, 좌전방 제3연대가 백적산에서 3시간의 공방전을 펼쳐 탈취하였다. 그러자 적이 하진부리-마평리를 연하는 계곡 통로에 증원병력을 집중하여 사단 후방의 백석산 진츨을 기도한다.
'51. 3월 10~12일 제3군단은 조속히 하진부리를 점령하기 위해 군단 예비인 제3사단 제18연대를 증원하게 되고, 적은 2개 연대규모로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사단은 보포공 협동작전으로 적을 백적산-거문리-형제봉 선으로 격퇴한다. 11일 아군이 백적산을 점령하게 되자 적의 공격기세는 현저히 둔화되면서 사단은 12일 속사리-하진부리를 점령하여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된다.
한편 제7사단의 우전방에 투입된 제1해병연대는 3월 7일 봉산리를 방어하던 제7-5연대가 철수하여 적중에 고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9일 제3-18연대가 군단의 우전방으로 투입될 때까지 공중투하보급을 받으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격퇴하였다. 제18연대가 투입되면서 적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해병연대는 반격을 개시하여 13일 최종 목표인 외차래지까지 진출하고, 15일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2연대에 인계히고, 16일에는 미 제9군단에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다. 북한군 침투부대 섬멸작전
※ 적 제10사단은 퇴로가 차단되었음을 인식하고 제23연대가 배치된 차항리-노인봉 축선으로 철수하기 시작하다 노인봉 일대에서 아군의 항공폭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 북한군 패잔병 제2제대 인 제25연대와 사단 직할부대 및 포병부대가 북상하기 시작한다. 이에 제23연대는 이들과 또 한차례 격전을 치르게 되는데, 동대산 동쪽의 식당동-황병산 선을 돌파하여 인제지구로 퇴각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절단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에 미 제10군단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3월 5일에 강릉으로 복귀하여 제3군단으로부터 수도사단을 배속받아 대관령-강릉(연곡천)을 방어하게 된다. 이때 제9사단과 제1, 제10경비대대도 함께 군단에 편입되었다.
군단이 제3군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할 무렵, 서부전선에서는 서울을 탈환하고 중ㅂ무전선에서도 아군이 38도선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단은 황병산-하평도응로 진출하여 이미 절단작전 목표인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해 있었다.
이 당시에 북한군 제10사단이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를 규합하여 2,000여 명으로 재편성한 후 인동 동북방 일월산으로 북상하였다. 이들은 신정공세 때 제천 남쪽으로 침투했다가 안동-영덕선에서 퇴로가 차단되어 미 해병제1사단과 국군 제1해병연대의 집중 공격을 받아 결정적인 피해를 입고 국군 제2사단의 소탕작전에 붕괴되었던 부대였다.
이에 제1군단장(김백일 소장)은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전방 방어진지를 강하하면서 좌방 연대는 좌인접 국군 제3군단의 공격을 지원하고, 제9사단(배속 수도사-26-1개 대대)은 연대 단의로 군 후방지역으로 붃항 중인 북한군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제9사단장(이성가 준장)은 북상 중인 북한군 패잔ㅂ병이 2,000~3,000며이 두타산 북쪽의 삼화리를 경유하여 북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에 따라 석이암산(9720-자병산(872)에 차단진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러한 아군의 기도를 간파하고 일부 병력은 차단진지 돌파를 시도하고, 주력은 청옥산 부근의 고적대로 이동하여, 결국 포위망을 돌파하여 산계로 집결하였다.
'51.3.17~18 이에 국군 제9사단은 17일 석병산 서쪽 기수문동에 적 600여 명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에 예비인 제28연대를 투입하여 남쪽과 동남쪽에서 공격하고 제29연대는 북쪽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적은 18일 다시 목계리로 도주하였다. 이후 적은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여 제각기 산악을 이용하여 탈출을 기도하였다.
'51.3. 17 국군 제1군단 지역을 탈출한 북한군 패잔병은 17일경 국군 제3군단 지역의 화난봉(1069)-석두산)1001) 부근으로 이동하여 이때부터 패잔병 소탕작전은 제3군단이 펼치게 되었다
국군 제3군단장은 우전방 제3사단에 황병산-노인봉-오대산 일대의 주저항선을 방어하면서 북상하는 적을 격멸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사단의 좌전방 제18연대는 오대산 남쪽 1301고지와 경강국도 남쪽의 병두산(988), 동대산(1433)우측 능선, 백일동, 발왕산 부근에 병력을 배치한다. 우전방 제23연대는 황병산 남쪽진지와 여랑ㄹ리, 유전동에 배치한다. 그리고 사단에 배속된 제7사단 제5연대를 광천리에 집결 중에 있었다.
제3사단은 이 과정에 사단장 최석 준장이 전방지휘소 소장으로 전임되고, 김종오 준장이 부임하였다.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들은 18일 새벽에 북상 중 광천리에 제7사단 제5연대 제2대대를 기습하고장군암으로 진출하였으나 제3-22연대 제2대대에 격퇴되었다.
이때 적은 제10사단 본부와 제27연대로 구성된 제1제대가 봉산리-발완산-용산-백일평-노인봉 축선을 따라 제3-22연대 지역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제3사단은 제1차단선인 봉산리 일대에 제5-1대대를, 제2차단선인 용산지역에는 제22-3대대를 배치하여 적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적 제10사단은 퇴로가 차단되었음을 인식하고 제23연대가 배치된 차항리-노인봉 축선으로 철수하기 시작하다 노인봉 일대에서 아군의 항공폭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3월 21일, 상황이 호전되자 국군 제7-5연대는 복귀하고, 제3사단은 잔적을 소탕하면서 주저항선 진지를 강화하였던 중에 21일, 북한군 패잔병 제2제대 인 제25연대와 사단 직할부대 및 포병부대가 북상하기 시작한다. 이에 제23연대는 이들과 또 한차례 격전을 치르게 되는데, 동대산 동쪽의 식당동-황병산 선을 돌파하여 인제지구로 퇴각하였다.
5. 임진강 진출 작전
가. 문산 공수투하 작전
※ 제1단계는 187공정단이 문산에 낙하여 1번도로를 차단하고 밑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북한군 제1군단을 섬멸하고, 임진강하구-문산 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아스펜선으로 진출한다. 그후 제2단계에서는 임진강에 연하여 벤톤 선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 '51.3월 27일 07:00시에 대구비행장을 이륙하여 공정작전이 개시, 15:00시경 봉서산 일대의 적을 섬멸하면서 제187공장단은 부여된 모든 목표를 점령하였다. 낙하간에 65명이 부상을 입고, 반면 적을 136명 사살하고 149명ㅇ을 생포한다.
미 제8군 사령관은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과 춘천을 탈환하자 또 다른 공격 지역을 물색하던 중에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26군이 의정부를 연하는 선과 그 북쪽지여게 전개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제8군사령관은 의정부 서쪽지역에 임진강을 등지고 있는 북한군 제1군단은 반드시 임진강 다리를 건너 북으로 철수가 가능함으로 임진강 다리를 차단하고, 남에서 공격해 올라가면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절단작전을 확대하여 제187공정단을이들의 후방에 공중 투하하여 격멸한다는 개념의 "용진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은 제1단계에서는 중부전선의 카이로선을 미 제1군단의 전방 행주-의정부 부근까지 연장한 후 미 제1군단이 이 선에 진출하여 공격준비를 하고, 미 제187공정단이 문산일대에 투하하여 1번도로를 봉쇄하면 미 제1군단이 즉시 공격을 개시하여 양 부대가 24시긴 이내에 연결하여 임진강하구-문산 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이스펜선으로 진출한다. 그후 제2단계에서는 임진강에 연하여 벤톤 선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의거 미 제1군단이 3월 22일 10~16km, 전방의 카이로 선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좌전방 국군 제1사단, 중앙에 3번도로를 따라 미 제3사단이, 우전방에 미 제25사단이 경미한 저항을 받으며 카이로 선에 도달하였다.
이에 미 제1군단자은 강력한 기갑부대로 진출하여 제187공정단과 연결하기 위해, 지원된 제9군단 에하 제24사단의 제6전차대대와 미 제3-7-2대대, 제999 야전포병대대, 제14전투공병 대대 A중대로 "그로우먼(전차대대장)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다.
'51.3월 23일 07:00시에 대구비행장을 이륙하여 공정작전이 개시되고 먼저 낙하지역을 엄호할 제4유격중대가 투하되면서 용진작전이 개시 되었다. 15:00시경 봉서산 일대의 적을 섬멸하면서 제187공장단은 부여된 모든 목표를 점령하였다. 낙하간에 65명이 부상을 입고, 반면 적을 136명 사살하고 149명을 생포한다.
그러나 생포된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적은 북한군 제19사단 제36연대로서, 이미 공수 낙하되기 전에 임진강 북방으로 주력은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미제1군단은 그루우면특수임무부대로 국도 1번도로를 따라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진출, 낙하부대와 연결토록 하고, 국군 제1사단이 문산을 , 미 제3사단이 동두천을 , 미 제25사단이 포천을 목표로 공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전차특수임무부대는 1번 도로변에 매설된 150여 개의 대전차 지뢰 제거로 진출이 지연되어 23일 18:30분에 문산에 도착하여 연결작전을 종결하였다.
나. 문산-동두천-포천 진출전
미 제1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은 별 저항없이 24일 저녁 문산-법원리가지 진출하여 미 제187공정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다.
반면 중앙의 미 제3사단은 호킨스 특수임무부대(미 제3-15연대, 제64전차대대, 제65연대 전차 소대)를 선두로 의정부로 진출간 , 의정부 북서쪽 468고지 일대에서 북동쪽 천보산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중공군의 저항으로 468고지 점령에 실패한다.
이에 군단은 미 제187공전단으로 덕정리 북쪽의 228고지를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도로의 협소와 궂은 기상악화(비)로 25일 아침에야 228고지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중공군이 자동화기,박격포 등으로 저항하여 27일 오전에야 고지를 점령하고 오후에 미 제3사단과 연결된다.
한편 미 제1군단의 우전방 미 제25사단은 좌전방 미 제24연대가 소리봉-해룡산을, 중앙의 제27연대는 죽엽산-왕방산을 , 배속된 터키여단이 주금산-국사봉을 목표로 경춘국도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이 소리봉-죽엽산-주금산 일대에서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하여 공방전이 계속 되면서 28일레 포천을 점령하고 차기 작전에 준비를 하게 된다.
중공군 제26군은 의정부-죽엽산을 탈환하기 위하여 최후의 반격을 실시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고 포천 북방 종현산 일대로 철수하고, 낙오딘 일부 적은 국사봉(764)과 소요산 일대에서 방황하게 된다.
6. 양양 진격작전
※ 이 무렵 '51.3. 27일,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제9사단의 작전을 시찰하고 L-5기로 하진부리를 이륙항여 강릉의 군단지휘소로 복귀 중 대관령에서 난기류에 휘말려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하게 된다.
※ 수도사단이 '51.3. 30일 양양을, 제3사단이 현리-서림선을 점령하여 카이로 선으로 진출
미 제8군은 적 전선 절단작전으로 중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제9군단이 아이다호선을 점령하게 되자,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이 춘천을 중심으로 반월혀이 되었다. 이에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한강 남쪽에서 임진강변으로, 동부전선의 국군 제3, 제1군단을 경강국도에서 현리-양양을 연하는 카이로선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태백산맥을 따라 북상한 북한군 패잔병들이 양 군단의 후방으로 접근하여 이를 3월 18일부터 소탕하게 된다. 이후 양 군단은 카이로선에 대한 강력한 정찰을 실시하기 위해 18일부터 연곡천 북쪽에서 수색정찰을 실시하엿다.
이 당시에 군단의 정면에는 북한군 제69여단이 북으로 철수한 북한군 제10사단의 일부를 증원받아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거점을 확보하고 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수도사단 제1연대가 동해안의 미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어성전리 -명지리 선으로 진출헤 되자, 수도사단장은 제26연대가 방어 중이던 유천리-차항리 선을 국군 제9사단에 인계하고, 양양 남쪽 인구리로, 사단 에비인 제1기갑연대넌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국군의 진출이 더디자, 미 제8군은 육군에게 빨리 카이로선상으로 진출을 요구하여, 수도사단(송요찬 준장)은 3월 26일 공격을 개시하여, 남대천 남쪽의 우암리-노고봉선의 적으이 강력한 저지진지를 돌파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남대천을 도하하여 양양 북쪽의 고지군과 한계리-인제로 통하는 설악산 입구로 철수하엿고, 사단은 27일 남대천을 도하하여 양양으로 진출, 양양-인제, 양양-서림리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이 당시에 적은 동해안 도로를 따라 철수도 해상에서 함포사격으로 인해 철수가 불가능하게 되어 결국 인제-설악산 내륙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거점을 확보하여 저항하게 된다.
이 무렵 27일,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제9사단의 작전을 시찰하고 L-5기로 하진부리를 이륙하여 강릉의 군단지휘소로 복귀 중 대관령에서 난기류에 휘말려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하게 된다.
'51.3.29~30일, 양양에서 철수한 북한군은 설악산 입구의 3287고지 일대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하였으며, 수도사단 제1연대가 29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30일 재공격을 실시한다. 이에 적은 1개 중대 규모를 남기고 내설악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국군 제1군단이 동해안 축선을 따라 공격작전을 벌이는 동안, 좌인접의 국군 제3군단도 3월 25일 후방지역 패잔병 소탕작전을 제7사단에 전담시키고 제3사단으로 하여금 경강국도에서 카이로선인 현리-하서림 도로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게 한다.
'51. 3월26~30일, 국군 제3사단은 26일 공격을개시하여 오대산에서 설악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라 공격하여 27일 하서림을 확보하고, 30일 조개동으로 진출하였다.
이로서 국군 제1, 제3군단도 카이로선상의 현리-서림과, 동해안의 요추인 양양을 확보하였다.
제 5 절 38도선 확보 작전
전선 절단 작전으로 중부의 제9군단이 춘천을 확보하고 서부의 미 제1군단이 문산을 점령하는가 하면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이 양양가지 진출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서부의 진출 통제선인 벤튼선과 중부의 카이로선을 연결하도록 하였다.
이 선은 서부의 문산에서 임진강 상류자역을 거쳐 동두천-춘천-현리-양양 북쪽의 조산리에 이르는 선으로 , 서부에서는 38도선에 연하고, 중부는 이에 조금 못 미치지만 동부는 이 선보다 북쪽으로 그어져 사실상38도선을 통제할 수 있는 지형을 연하는 선이다.
이 무렵 적도 38도선 북쪽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정비 중이었으므로 별 저항없이 3월 말까지 이선에 도달하였다.
1. 유엔군의 군사전략
※ 미 행정부와 합참은 3월 15일에 "한국 문제를 정치와 군사 두 가지 노선에 따라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정치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고 형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결국 군사적으로 전쟁전의 현상을 확보한 후 휴전에 의거 전쟁을 해결하며 통일 국가 수립은 그후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미 대통령 트루먼의 성명이 발표되기 전에 맥아더 원수는 중공을 공격할 수 있으며, 군사적 방법으로 해결행야 한다는 성명을 먼저 발표하여 미 행정부와 마찰을 빚게 되고 미 대통령의 성명 발표는 지연되게 된다
※ 이때 선정한 방어선이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로 연결한 후 동해안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서능로 , 이를 캔사스선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 선으로 진출하는 작전을 "러기드 작전":이라 하였다.
유엔군측은 '51. 1월 하순 반격을 개시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격작전을 펼치자, 지난 12월에 심각하였던 철군 문제 논의는 일단락되고, 지난해 10월 38도선을 돌파하기 직전처럼 다시 38도선에 관한 전쟁 지도 전략을 다각도로 요구하게 되었다. 그결과 미 행정부와 합참은 3월 15일에 "한국 문제를 정치와 군사 두 가지 노선에 따라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정치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이를 위해 지상군의 작전은 38도선 북쪽의 16~32KM 내에서는 공세적 방어작잔을 허용하되, 전면적인 진격을 하여 북한 영토의 확보를 시도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결국 군사적으로 전쟁전의 현상을 확보한 후 휴전에 의거 전쟁을 해결하며 통일 국가 수립은 그후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미 합참본부는 3월 20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통령이 휴전을 기꺼이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유엔군을 파견한 모든 국가의 동의를 얻어 발표할 주비를 하고 있으며, 유엔군이 38도선 니북으로 진격하면 안된다는 유엔의 일반적인 견해를 전달하면서 차후 적과 협상이 개시될 때 유엔군의 안전과 협사응ㄹ 지속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하여 조언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해결에 대해 외교적 수단보다는 군사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맥아더 원수는 3월 24일, 미 행정부에 아므런 통보도 없이 중공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고 지적하는 등 중공의 군사력을 경시하고, 교전이 계속될 경우 중공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미 대통령 트룸번의 계획된 성명에 진실성을 의문시하는 국제적 혼란을 두려워할까 두려워 미 행벙부는 공개적인 선을 유보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3월 24일)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유엔군이 38도선에서 정지해서는 안되며 북짖하여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때 미 제8군은 개성지역 확보를 위해 임진강을 도하하여 철수 중인 북한군 제1군단을 공격하여 예성강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이 예성강 북쪽으로 철수하였고, 잘못하면 동측 중공군으로부터 포위될 우려가 있어 수색과 전투정찰대의 할동으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그대신 미 제8군사령관은 그 대안으로 중부전선의 평강-철원-김화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기자들이 좀더 극적인 표현을 하고자 "철의 삼각지대"란 표현을 붙혔다.
이때 선정한 방어선이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로 연결한 후 동해안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서능로 , 이를 캔사스선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 선으로 진출하는 작전을 "러기드 작전":이라 하였다.
그후 군은 다음 단계로 미 제1, 제9군단이 철의 삼각지대를 위협할 수 있도록 우타선과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철원-김화까지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만일 공격 중에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 양개 군단은 캐나스선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작전을 "불굴작전"이라 명명하였다.
2. 공산군의 전력 증강
북한군은 '51년 초에 유엔군이 재반격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하면서 만주에서 재편성한 북한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방으로 추진되는가 하면, 중공군이 추가로 압록강을 도하하여 전력이 증강된다.
북한군 제6군단(제18.19.36사단)이 '51년 1월 초에 입북하여 해주지역 방어 임무를, 제7군단(제13.32.37사단)이 입북하여 원산지역으로, 제8군단 (제42.45.46사단)이 만포진으로 들어와 흥남지역으로 들어오고, 제45사단은 인제로 남하하여 제3군단에 합류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군은 원산-흥남 간의 예비전력이 2개 군단 8개 사단 1개 여단이었으나, 당시 미 제8군은 이 지역에 적 병력을 2개 사단, 1개 연대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만주에서 복귀한 제6군단과 지난 연말 동북부에서 평양지역으로 이동하여 진남포-신안주의 서해안 방어임무를 수행 중인 제4군단(제4.5.104기갑사단. 제26여)도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 제8군은 3월 중순까지도 이들의 위치와 병력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3월 초순까지 북한군은 총 8개 군단 27개 사단 4개 여단 규모였으나, 그 수만큼이나 강력한 전투력은 보유하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군 지휘부도 총참모장에는 전사한 강건 중장의 뒤를 이어 제2차 세계대전시 소련 육군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남일 중장이 부임하였고, 전선사령부도 김책의 전사로 중공군의 팔로군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제1군단을 이끌던 김웅 중장이 임명되었다.
중공군은 '51.1~2월에 새로 중공군 제19병단이 신의주로 들어와 3월 초에는 에성강과 임진강 사이의 곡산-신계-이천 지역으로 들어왔다. 긔리고 원산지역에서 재편성 중이던 제9병단도 3월 초에 중부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제19병단에 대해서는 3월 중순까지 일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에 비전투부대로 순안, 순천, 남양리의 비행장 건설에 투입된 제47군이 제13병단에 배속되었고, 노새로 장비를 운반항여 노새 사단이라 호칭된 제5포병사단도 입한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공군은 총 병력이 3개 병단 14개군 42개 사단, 4개 포병사단과 2개 독립포병연대였다.
중공군 지원군사령부는 이미 3월 14일 반격개시선을 장연-신원리-백천리-주천리-삭령-화천-양구-인제-양양 선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공격개시선을 통제하고, 새로 투입되는 부대들의 작전 준비를 위해 전선의 각 부대들은 의정부-주금산-청우산-홍천강 북쪽-풍암리를 연하는 제2방어선과 38도선 사이에서 4월 초까지 , 또 38도선과 공격개시선 사이에서 20~30일 동안 국군 과 유엔군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3. 캔사스선 진출
국군과 유앤군은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러기드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군단간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주요 전투부대도 대폭적으로 이동 또는 교체하여 '51. 4월 3일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요철작전을 개시한다.
서부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미 제3사단(영29여 배속), 미 제24사단, 및 미 제25사단을 전선에 배치
중부의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 및 영 제27여단
중동부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 국군 제5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3군단은 제2사단, 제3사단을 공격제대로, 제7사단을 예비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을 전방에, 제9사단을 예비
가. 중서부전선 진출전
러지드작전에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임진강과 화천저수지 사이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미 제1군단장은 이미 캔스스선에 도달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은 임진강을 따라 방어에 전념하고, 우전방 미 제24사단과 제25사단은 3번도로(의정부-포천-김화)를 따라서 북쪽으로 공격하도록 했다.
'51. 4월 3일 미 제1군단은 도로 서쪽의 미 제25사단은 영평천과 한탄강 사이의 계곡으로, 동쪽의 미 제24사단은 관음산-국망봉으로 진격하여 6일 율우리-운산리-야미리-장암리를 연하는 캔사스선에 진출한다.
그리고 미 제9군단도 좌전방에 영 제27여단, 중앙에 국군 제6사단, 우전방에 미 제1기병사단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6일 영 제27여단과 국군 제6사단은 캔사스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우전방 미 제1기병사단은 중공군 제39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캔사스선 남쪽 화천저수지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당시 미 제8군사령관은 아군이 춘천으로 진출하면서 화천댐미 작전에 미칠 영향알 고려하였다. 적이 화천댐을 잉요한 수공작전을 봉쇄하기 위해 댐믜 파괴를 고려했다. 하지만 수문이 18개인 화천댐은 당시에 저수량이 절반정도이고, 재래식 포탄으로는 댐을 폭파하기란 어려운 문제엿다. 이에 적도 댐을 폭파하기란 어려운 것이므로 작전에미치는 영향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반면 미 제9군단 공병부대장은 이에 대해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비가 내려 수위가 오르고 적이 수문을 개방하면 수위가 3~4m 상승항하여 캐캔사스선 주변이 물바다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적이 계속 댐을 장악하게 되면 그 위험은 반복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제8군사령관은 화천댐을 러기드 작전간 목표에 포함하고, 미 제9군단에 춘천-화천 도로와 댐을 제9군단 작전지역에 포함되도록 전투지경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이 에 미 제9군단장은 특수 훈련을 받은 미 제4유격중대가 7일 군단에 배속되자, 이를 미 제1기병사단에 재배속하여 화천댐을 확보하도록 항엿다. 그러나 제1기병사단장은 군단장의 의도와는 다르게 유격중대에 의한 기습공격을 준비하지 않고 댐 바로 남쪽의 캔사스선 점령에만 주력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공군 제39군은 '51.4월 8일 자정경 4개의 수문을 완전 개방하고, 6개는 부분적으로 개방하였다. 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대피하여 별 피해는 없었으나, 북한강 수위가 2m 상승하여 춘천부근의 가교들이 떠내려가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당시에 중공군 제39군의 주력도 댐의 범람으로 인한 고립을 피하기 위해 사전 철수하여 미 제7, 제8기병연대들이 용이하게 캔사스선에 진출하여, 미 제해병사단과 교대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제9군단장은 미 제1기병사단장에게 기필코 댐을 확보하도록 명령하여 미 제7기벼연대가 '51. 4. 9일부터 11일까지 1개 대대를 투입하여 공격했으나 화전댐 탈환에 실패하였다.
미 제9군단장은 12일 곧 있을 예정인 "불굴작전(돈틀라스작전)"으로 탈취하기로 하고 제7기병연대와 미 제1해병사단에배속되어 이곳으로 투입된 국군 제1해병연대와 교대를 승인하였다.
이로서 미 제9군단은 석룡산--화악산-지암리-신포리-용화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점령하고 차기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나. 중동부전선 진출전
※ 제5- 제36연대 제2대대가 생포한 포로를 통해 당일 암구호(밤나무-소나무)를 알아내어 540고지군일대에서 기습공격으로 100여 명을 사살
※ 국5, 미2, 미7사등 대부분의 부대가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구-양양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하여, 유엔군은 휴전을 모색하기 위하여 전략적 일환으로 이 캔사스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
이 38도선 확보작전을 통해 유앤군은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중공군과의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전쟁 해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미 제10군단은 도로가 제한되고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중서부 부대들보다 진출이 자소 지연되어 4월 7일, 부대 재배치로 조공인 좌전방 미 제2사단은 화천저수지 남쪽을, 중앙 미 제7사단은 양구를 , 주공인 우전방 국군 제5사단은 인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당시 국군 제5사단은 태기산 전투를 종료하고 부대정비와 위력수색에 주력하던 중에 4월 7일 소양강 남쪽 남전리-원대리로 진출하여 인제공격을 준비한다. 당시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12사단이었고, 이 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제15사단 및 제45사단의 1개 연대가 소양강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국군 제5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사단의 목표인 인제 북쪽 장평-봉화봉을 여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하기 위해, 먼저 좌전방 제35연대가 먼저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면, 우전방 제36연대도 도하시켜 인제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51.4. 9~12일, 사단은 9일 제35연대가 청구리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관대리 부근에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자, 제36연대도 10일 은밀 기동으로 가로리에서 도하하여 490고지를 공격하였으나 돈좌된다. 이에 연대장 황엽 대령은 490고지와 인제를 감제할 수 있는 539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12일 총공세로 인제와 서쪽 고지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좌전방 제35연대는 개운리 서쪽 542-637-711-742고지군의 종격실 능선에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한 적의 저하으로 공격이 부진하였다.
'51.4.14일, 우저방 제36연대가 원통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자, 합강리 서쪽의 548고지와 664고지에서 적의 강력한 방어거점이 구축되어 진출을 저지한다. 계속적인 공격에도 적은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저항하게 되어 3일간의 혈전으로 적의 진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51.4.15~17일 종격실 능선을 이용한 적의 고지 선점에 의한 강력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이 더딘 가운데, 제36연대 제2대대가 생포한 포로를 통해 당일 암구호(밤나무-소나무)를 알아내어 540고지군일대에서 기습공격으로 100여 명을 사살하며, 16일 여명과 동시에 제35연대는 공격을 재개하여 지대내 최고봉인 940고지를 탈취하고 양구-인제 간 산간도로를 통제하는 586-567고지로 진출하고, 우전방 제36연대도 3일동안 쟁탈전을 벌인 548-664고지를 확보하여 인제 북쪽의 서호리를 진출하고 17일 드디어 원통북쪽의 481고지와 봉화봉을 탈환하여 캔사스선으로 진출하고, 제35연대도 월하리로 진출하여 목표선을 확보하였다.
한편 미 제2사단은 화천저수지로, 미 제7사단은 양구를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북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대부분의 부대가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구-양양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하여, 유엔군은 휴전을 모색하기 위하여 전략적 일환으로 이 캔사스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로 한다.
이 38도선 확보작전을 통해 유앤군은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중공군과의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전쟁 해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4. 철의 삼각지대 공격
※ '51. 4, 11일, 미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원수 해임,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이 연합군 사령관에, 제8군사령관에는 벤플리트 중장이 임명 4월 14일 부임
※ 국군과 유엔군은 제1단계 불굴작전(돈틀라스 작전)을 개시하여 철의 삼각지대로 진출하며, 4월 20일을 전후 하여 미 제3사단이 연천을 , 미 제25사단이 금학산을 , 미 제24사단이 문혜리를 , 영 제27여단이 사창리로 진출하여 우타선을 점령하였다.
이에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4월 21일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불굴작전 제2단계 작전 개시를 명한다.
따라서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와 미 제25사가 철원-김화를, 우전방 미 제9군단이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으로 김회-화천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21일)부터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어, 미 제1군단은 우전방에서 광덕산으로 미 제24사단이 진출하지만, 좌전방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이 보개산에서 철원을 공격 중에 적의 포격으로 돈좌된다.
중서부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자, 미 제8군은 항공정찰과 포로심문 등을 통하여 공산군의 공격징후가 전 전선에서 현저히 감지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에 미 제8군은 캔사스선의 방어종심을 확보하고 공산군의 공격준비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 그들의 전략적 장비와 보급물자가 집중되고 있는 철의 삼각지대를 점령하기 위하여,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한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선제공격으로 이 선을 확보하기로 한다.
이 목표선에 이르는 제1단게선은 "우타선"으로 이 선은 캔사스선 전방 임진강-금학산-광덕산-백운산으로 연결되며 활처럼 굽은 선이다. 이 선은 미 제1군단의 미 제3, 미 제24, 미 제25사단과 제9군단의 좌전방 영 27여단도 단거리 진격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51. 4, 11일, 미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원수 해임,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이 연합군 사령관에, 제8군사령관에는 벤플리트 중장이 임명 4월 14일 부임]
그동안 맥아더 원수는 전쟁지도상 미 행정부와 여러차례 트러블을 발생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수행 무제, 38도선 돌파 문제, 중공군의 개입에 따른 만주공격문제, 휴전협상 문제 등에 얽혀 현장 지휘관의 고뇌와 행정관료의 정치적 술수가 맞물려 항상 대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군인으로서 또한 전략가로서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만약이란 단어가 어색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이 선택에 따라 결정되었다.
만약, 중공군의 개입과 그 규모에 대한 판단 착오는 인정하더라도 그가 주장한 대로 당시에 만주를 공격한다던가, 아니면 대만 군대를 이용하여 중공 본토를 공격했다면 분명 한반도 통일은 가능했으리라 본다. 여기에 그가 요구한 증원군을 조기에 보내줬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에 신속히 압록강-두만강변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노병은 죽지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51.4.14일 한국에서 마지막 군단장 회의를 소집하여, 적의 공격징후와 아군이 철수시 우발계획을 토의하였다.
이 계획에서 적의 선제공격으로 아군이 철수시 3개의 통제선을 설정하였다. 이 선들은 유엔군이 중공군 제3차공세(신정공제)시 점령했던 B선(문산-화천-양양), C선(서울 남쪽-홍천-원포리), 서울 교두보선과 비슷하였다.
첫 번째 선(델타선) : 춘천을 중심으로 동서해안에 이르는 선
두 번째 선(네바다선) : 서울 남쪽의 강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뻗어 양양에 이르는 선
세 번째 선(골든선) : 서울 방어를 위한 선으로 서울 서북쪽 10,KM의 행주에서 네바다선상의 양평을 반원형으로 연결하는 선
하지만 이날 주요 지휘관들은 조만간 중공군의 공격은 없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새로 부임한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제2차 세계대전시 1944년 65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연대장으로 참전하였고, 이후 에 9개월 동안 사단장을 거쳐 일약 중장으로 발탁된 유능ㅎ란 장군으로 1948년 중장 승진과 더불어 그리스의 미 합동군사고문단장을 역임하면서 당시 그리스 정부를 도와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활동을 잠재우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결국 우여곡절을 격으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제1단계 불굴작전(돈틀라스 작전)을 개시하여 철의 삼각지대로 진출하며, 4월 20일을 전후 하여 미 제3사단이 연천을 , 미 제25사단이 금학산을 , 미 제24사단이 문혜리를 , 영 제27여단이 사창리로 진출하여 우타선을 점령하였다.
이에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4월 21일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불굴작전 제2단계 작전 개시를 명한다.
따라서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와 미 제25사가 철원-김화를, 우전방 미 제9군단이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으로 김회-화천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21일)부터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어, 미 제1군단은 우전방에서 광덕산으로 미 제24사단이 진출하지만, 좌전방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이 보개산에서 철원을 공격 중에 적의 포격으로 돈좌된다.
제 6 절 전략도서 확보 작전
'51년 초, 국군 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전선이 38도선 이남에 형성ㄷ되어 해상에서는 적의 항만을 봉쇄하고 해상로를 차단하여 재해권의 계속적인 확보가 요구된다. 특히 적의 병력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적의 후방지역 연안 도서를 점령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여기에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한 이후 적 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이 증가되고 피난민이 해안에 집결하여 월남을 기다리는 인원이 많았다. 이에 해군은 이들을 지우너하기 위한 해상 수송작전을 안전하게 지원하기 위해 38도선 이북 지역에 있는 전략도서를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임무를 맡은 국군 해병대는 진해에서 독립 제41, 42중대를 편성한 후 제41중대는 서해안에, 제42중대는 동해안에 투입되어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1. 동해도서 상륙
신편되 제42중대(중대장 심희택 소위)는'51.2월 7일 진해에서 LST 801함에 승선하여 영흥만으로 출항, 원상하의 출입을 통제할수 있는 여도, 신도, 소도, 대도, 황토도 순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한다.
'51. 2월 14일 여도를 상륙한데 이어 2월 24일부터는 신도, 대도, 소도를 순차적으로 공격하였다. 소도에서는 적 3명을 사살하고 76MM 4문, 탄약고에서 화약 500상자 등을 노획하였다.
중대는 '51. 2. 25일에 대도로 이동 중에 처음으로 갈마반도에서 적의 포격을 받았지만, 함포지원사격으로 무력화시키고, 3월 4일에는 황토도 상륙명령에 이곳에서 작전 중인 미해군의 도움으로 LCVP 2척을 이용하여 점령함으로써 1개월여 동안 영흥만 일대의 전략도서를 확보하여 적정을 탐지하게 된다.
2. 서해도서 상륙
제41중대(중대장 이동호 중위)는 1개월 동안 부대정비와 특수교육훈련을 받고 3월 28일 801함편으로 서해로 출동하였다. 이 무렵2 서해 도서에는 적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의용청년들로 편성된 유격대와 으를 통제하는 육해군 첩보기관이 활동하고 있었다. 중대는 교동도-백령도-석도 순으로 거의 행정적 수준의 상륙을 하게 된다.
4월 2일 상륙한 교동도는 3일 적이 포격하여 5시간의 포격전을 펼쳤다. 당시 섬에는 700여 명의 피난민이 있었고, 이들 중 지방청년 100명을 훈련시켜 유격대로 편성하였다. 이 유격대는 주로 해주 부근으로 침투하여 정보수집과 적후방 교란작전을 계속하였다.
중대는 20일간의 교동도 방어임무를 마치고 4월 23일 백령도에 상륙하여 이 섬의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 당시에 백령도는 서해안 해상작전과 정부활동의 중심지였으며, 육군과 해군정보대, 미 육군항공대도 주둔하고 있었다. 피난민은 8,000명 정도 거주하고 , 이중 청년 300명ㅇ을 무장시켜 섬을 자체방어하도록 한다.
다시 중대는 5월 7일 백령도 북쪽의 석도에 상륙하여, 지역 청년ㄴ 100명을 선발하여 유격대를 편성한다.
해병 독립중대는 1951년 8월에 다시 독립 제43중ㄷ대를 신편하여 동해안에 투입하게 되며, 이 부대들은 다시 대대급으로 개편되어 후일 해병 도서부대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제 7 절 공비토벌과 유격작전
1. 공비토벌적전
※국군 제11사단은 '51.1월 부터 4월 6일에 국군 제8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대구로 이동할 때까지 180일 동안 공비 1,950명 사살, 생포 및 귀순 2,178명 이었고, 피해는 전사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이었다.
※세칭 "거창사건"이라 칭하는 사건이, 작전기간 중에 '51.2.10~11일 거창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공비토벌작전 중에 공비들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남녀노소 나이불문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의킨다.
※ 제8사단은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1개월 동안 공비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이었으며 피해는 전사 12명, 부상 21명 이었다. 사단은 육본 명에 따라 5월19일 전선으로 투입하기 위해 제천을 거쳐 전선에 투입된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ㄷ된 패잔병들이 지방공비와 합세하여 호남지녁과 경북 내륙에서 아군의 병참선 차단, 식량약탈,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등 온갖 만해을 자행하였다. 이에 아군은 '50년 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ㅇ여 일부 공비만 지리산으로 도주하고 대부분ㄴ 소탕되어 공비토벌작전을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1951년 1월 말 중공군 신정공세시 제천 남쪽으로 진출한 북한군, 특히 안동지역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이 주변 산악으로 도주하여 지방공비들과 합류하면서 이들이 후방교란활동을 재연하기 시작하였다.
가. 호남지역 소탕전
호남지역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일대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51년 1월 말부터 대대적인 유격활동을 기도한다.
이에 따라 소탕작전을 전개해온 국군 제11사단(최덕신 준장)은 제9연대를 전남지역에, 제13연대를 전북에, 제20연대를 지리산지구에 배치하였다.
제9연대가 '51. 1월 초순 지리산 남동부 내외공리와 덕산 일대에서 700여 명을 포착하여 35명 사살, 70여 명을 생포한다 . 지리산으로 도주한 공비들이 2월 초에 지리산 북돋ㅇ부에서 출몰하여 함양 마천 가흥리와 산천군 냉천면 사동, 함양 유리면 일대에서 12명 사살하고, 180명 생포한다.
제20연대는 담양. 순창, 화순, 장성, 나주군 일대에서 작전 중에, 전북 회문산에 1,350명의 공비가 거점을 확보하고 있다는 첩보에 2월 9일 제1. 제2대대를 투입한다. 연대는 2월 13일부터 본격적인 자건에 돌입하여 소탕하게 되ㅐ고, 2월 20일에는 전남 영광 불갑산에 공비 350명을 포착하여 섬멸하게 된다.
제13연대는 전북 정읍 칠보, 운암발전소를 위협하는 공비들을 경찰과 합동으로 섬멸하고 , 대전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잠시 뜸하던 공비들이 '51. 3월 중순부터 활동이 증가되면서 당시에 출몰하는 공비는 23,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러한 공비들의 활동은 3월 13일 제9연대가 작전 중인,전남 화순 백아산지역에 160여 명이 출몰하여 74명 사살, 21명 생포하고, 화학산 지역에 3월 17일에 250여 명이 출몰하여 86명 사살, 16명을 생포하고 순천지역에 3월 22일 500여 명이 출몰하여 시가전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다.
국군 제11사단은 '51. 4월 6일에 국군 제8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대구로 이동할 때까지 180일 동안 공비 1,950명 사살, 생포 및 귀순 2,178명 이었고, 피해는 전사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이었다.
그러나 세칭 "거창사건"이라 칭하는 사건이, 작전기간 중에 '51.2.10~11일 거창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공비토벌작전 중에 공비들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남녀노소 나이불문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의킨다.
이에 육본은 거창사건으로 사기가 저하된 국군 제11사단을, '51. 2월 횡성전투에서 중공군에 무력화된 제8사단이 대구에서 재편성을 완료하여 '51. 4월 3일 전주로 이동시켜 임무교대한다.
제8사단(최영희 준장)은 제1경비대대, 제18전투경찰대대, 충남 경찰토벌대, 청년방윋대 제153지대를 배속받아 주력은 금산, 정읍, 부안지구에, 제16연대는 진주로 이동하여 제2경비대대를 배속받아 백운삱과 중산리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51. 4월 16~19, 금산 대둔산지역에 1,380여 명의 공비 토버릉ㄹ 위해 제21연대 제1대대, 공병대대, 제18전투경찰대대, 충남 경찰토벌대로 토벌작전을 대둔산, 운암산, 원등산 지역에서 실시하였다.
'51. 5월에는 제10연대가 주축이 되어, 정읍 동쪽 국사봉과 회문산을 완전포위하여 토벌하게 되고 탈출한 공비들이 백양산, 내장산, 변산반도로 도주하게 된다.
한편 진주로 이동한 제16연대는 덕유산, 지리산, 백운산 일대에서 작전을 거행하였다.
제8사단은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1개월 동안 공비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이었으며 피해는 전사 12명, 부상 21명 이었다. 사단은 육본 명에 따라 5월19일 전선으로 투입하기 위해 제천을 거쳐 전선에 투입된다.
나. 태백산지구 소탕전
태백산지역 공비들은 주로 동부 산악지역을 따라 남하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들이 주축이었다. 이들ㅇ느 '51. 1월 중순 태백산맥으 ㄹ연한 안동. 의성까지 침투하였으나 아군의 재반격으로 후방 퇴로가 차단되ㅏ어 철수헤 된다.
이들은 남한 후방지역에서 활동 중인 남뭅군과, 경북도당의 유격대들과 합세하여 태백산, 일월산, 속리산, 형제봉, 보현산, 동대산 일원의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51.2.13일, 이에 대해 육본은 중공군 신정공세시 피해를 입고 풍기에서 재정비 중인 국군 제2사단을 '51. 2월 13일 안동으로 이동시켰다.
사단(함병선 준장)은 전방지휘소로부터 제5.6.7경비대대, 국민방위군 제1사단 제1.3연대, 전투경찰 2개 대대를 배속받아, 제31연대는 안동-영주-단양 간의 주 보급로를 경비하고, 제17, 제32연대는 보현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도록 하였다.
'51. 3월 1일, 제31연대가 일원산 남쪽 장갈령을 차단하여 공비 11,500여 명을 기습하고, 제17연대와 제32연대는 보현산 일대에서 일월산 방향으로 진출한다. 이에 공비들은 800명과 400명으로 각각 구분하여 차단선을 돌파하려 하지만 5일간 통고산-일월산 일대에서 사살 460명, 40명을 생포하였다. 이 작전에서 아군은 4명 전사에 25명이 부상하게 되며 일월산 소탕작전시 제31연대장 박노규 대령과 제3대대장 이오렬 중령이 전사한다.
다시 3월 초에 북상하던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들 1,700여 명이 이 일대로 남파되어 대구 팔공산으로 진출을 꾀하였다. 이들은 제1. 제3지대로 구분하여, 북한 중앙당의 직접 통제하에 팔공산에 거점을 확보할 목적으로 침투 중이었다.
공비들이 3월 14~29일, 봉화군 소천면 일대로 남하하자, 육군은 북한군 제10사단으 패잔병들은 제1군단에 배속 중인 국군 제9사단에 인게하고, 국군 제2사단이 이들 제1,제3지대를 섬멸하도록 하여, 사단은 20일에 제17연대는 통고산지역에서 적 제1지대를 , 제32연대는 양구동에서 제3지대를 격멸하게 하고 , 국민방위군 제3연대와 제7경비대는 26일 주산일대에서 백병전을 벌이며 공비들을 섬멸하고, 제31연대는 안동-영주-풍기-단양간 도로를 경비하도록 하였다.
이후 다시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제2단계 작전을 전개하여 통고산 북쪽 평전 지궁에서 공비 120명을 사살하고 , 36명을 생포하면서 작전을 종료한다.
2. 유격대 활동
적의 게릴라 및 공비 준동으로 아군의 후방이 교란되고 전투병력이 전방에서 후방으로 전환되어 전방지역 전투력의 약화를 초래한 것처럼,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적의 전투력 분산을 강요함으로서 전선으로 집중되는 적의 전투력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중공군의공세로 맞이한 위기상황을 극복하는데 목적을 두고 유격대의 활용이 요구되었다.
또한 적의 부대와 보급 및 병참시설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여 이를 파괴하고 교란하여 적의 적전에 혼란을 초래하게 할 수도 잇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 육군 통제 유격부대
국군이 유격대를 편성한 시기는 중공군의 침략으로 새로운 국면이 진행된 싯점인 '50년 12월 중순부터다. 이 무렵 육군 정참부 공작과가 중심이 되어 극비리에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청년단체의 협조를 얻어 주로 황해도, 평안도의 피난 청년 주에서 선발하여 대대규모의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시켜 적의 복장과 장비를 지급한 다음 12월 말경 적지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문산에서 임진강을 건너 적지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으나 곧 적의 신정공세로 1.4후퇴를 맞아 전선이 남하함으로서 통신소통의 결여로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하여 작전에 크게 깅여할 수 없었다.
(1) 육본본부 결사유격대
※'51.3.18일 필레약수터 일대에서 빨치산 사령관 길원팔 중장 생포/ 이후 후퇴과정에 사살해 버림
대구로 이동한 육본은 정참부공작과와 작참부 편제과가 협조하여 본격적인 유격대 조직에 참여한다.
이 무렵 국민방위군 설치법과 국민 총동원령 선포에 따라 대구의 육본 보충대에는 많은 애국청년, 학생, 의용경찰, 철도경비경찰, 현역병 낙오자가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 신원이 확실하고 신체건강한 700여 명을 선발하여 '51.1.4일 육본 정보학교에 입교시켜 2차에 걸쳐 3주간의 유격 특수교육을 실시하였다. 육군은 이들에게 정규군과는 다른 별도의 임시계급과 군번을 부여한 후 결사 유격대 제11연대, 제12연대, 제13연대 순으로 편성한다.
결사유격대가 교육훈련을 받을 무렵인 '51년 1월 하순 중동부 전선은 제1, 제3군단이 영월-삼척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엇으나, 안동일대는 퇴로가 차단된 채 후방지역을 교란하는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 소탕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951년 1월 30일 먼저 교육을 마친 결사유격 제11연대가 연대장 채명신 중령의 지휘하에 363명이 영월로 이동하여 하진부리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어 2월 6일에는 연대장 이두병 임시솔령이 지휘하는 제12연대, 330명이 묵호에서 양구 사명산-신고산-회양을 경유 통천을 목표로 침투하였다. 그리고 결사 제13연대는 2월 15일 횡계리에서 중부내륙을 목표로 연대장 김한철 임시대위의 지휘하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이때 제11연대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고 주문진 서쪽의 퇴곡리로 진출하였으나, 제12연대는 하진부리 북쪽 두일리에서 적 주저항선을ㄹ 돌파 중 적에게 노출되어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받아 월정사로 이동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연대는 아군 공군기로부터 오인 폭격을 받아 다수의 피해를 입고 2월 18일 퇴곡리로 이동하여 제11연대와 합류한다. 이로 인해 적의 경계가 강화되고 대관령 일대의 폭설로기동이 제한되자 제13연대는 중부내륙진출을 포기하고 월정사부근으로 이동하여 20일 퇴곡링에서 제11연대와 합류하여, 3대 연대가 집결한 가운데 채명신 중령의 지휘하에 통합하여 "백골병단을 창설"하였다.
이 무렵 중동부전선은 중공군의 제4차공세인 2월 공세로 일시 후퇴하였던 구군제1군단과 제3군단이 제천 북쪽-정선-묵호선에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 시기에 재편성된 백골병단 660명이 2월 23일 제13연대를 선두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대산을 넘어 노두봉 북쪽의 조개동으로 진출한다. 이곳에서 휴식 중에 24일 오전에 아군 공군의 오폭으로 제12연대가 일부 분산되었으나, 주력은 구룡령으로 이동하여 이곳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곳에서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한 병단은 이 고개를 통행하는 적을 검문하던 중에 2월 28일 북한군 제69여단의 전투상보를 입수하여 해공군 작전으로 북한군 제69여단을 격멸하는데 기여한다.
['51.3.18일 필레약수터 일대에서 빨치산 사령관 길원팔 중장 생포]
백골병단은 구룡령 우측 약수산 일대에서 재정비를 한 후 3월 14일 인제 귀둔리로 이동하고 16일에는 군량전에 도착하여 수색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때 필레마을을 수색하던 제13연대가 3월 18일 빨치산 사령관겸 제5지대장 길원팔 중장과 참모장 강칠성을 포함한 지휘부 요원 13명을 생포한다.
그러나 이날 저녁부터 적의 공격으로 망대암산으로 철수하면서부터 추격을 받아 백골병단은 장수대-안산-매봉-용대리를 경유하여 백담사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 추위와 배고품으로 다수의 인원이 전사 또는 낙오된다. 병단은 다시 대청봉으로 철수하면서 소청봉과 박달령 부근에서 적의 기습공격을로 다수의 피해를 입고 철수를 계속하여 3월 30일에 현리부근에서 국구 ㄴ제7사단 제3연대 수색대를 만나 복귀하엿으나 이대 복귀한 인원이 266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백골병단은 강릉의 육군 전방사령부로 이동한 후 동해안의육군 을지제1병단에 흡수되었다.
(2) 육군 을지병단
육군본부는 결사유격대 편성과ㅑ는 별도로 작참부 심리전과 주관으로 후퇴하면서 이북으로부터 서해안과 동해안에 탈출하여 자생적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무장치안대, 반공청년대의 조직을 체계적화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형태로 을집병단이라는 이름의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을지제1병단]
먼저 육군은 동부전선의 국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동해안 지역에 을지1병단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동해안에늕 피난민들이 피신할 도서가 없어서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남하한 인원들이 대부분 1.4후퇴 당시에 대구, 부산 방면으로 월남하여 인적자원이 부족하였다.
이에 육본 작전국 심리전과 박창암 소령이 적지에서 복귀한 백병병단을 통합하여 동해안 유격사령부로 발전시키려 했으나 작전 통제권이 미 제8군으로 전환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을지제2병단]
이어서 육본은 을지1병단에 이어 1951년 3월 27일에 강화도에서 서해안 도서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자생유격대 조직과 청년들을 규힙하여 을지제2병단을 편성하였다.
[국군 을지제2병단은 미군의 "표부대 작전통제"를 받다]
그러나 읊지제2병단이 창설된 그 다음날, 3월 28일에 앞서 백령도에서 창설되어 화동 중인 미 제8군의 "표부대"의 작전통제를 받게 된다.이때 제2병단은 차동준 소령의 지휘하에 을지 제21.제22.제23. 제25. 제26. 특별연대로 편성되었다.
병단은 기초흔련을 마친 다음 연백군 및 개풍군 일대를 작전지역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당황한 북한군은 마침내 2개 사단을 황해도 해안지역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동해안 지역은 미군의 커클랜드 기지로, 서해안은 을프팩기지로 흡수]
하지만 지휘 및 보급문제로 미군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결국 연대는 3개 연대로 축소되고, 미 제8군과 유격대의 지휘통젱와 군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미 제8군에 인계하게 된다. 이 조치에 따라 을지제1병단은 커클랜드기지로 흡수되며, 서해안의 을지제2병단은 1951년 8월 10일 중반에 옹진반도 동남부 지역ㄷ의 적저는ㅇㄹ 통제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창설된 "울프팩기지" 예하로 전환되었다.
그 밖에도 같은 시기에 국군 제1사단은 사단 직속의 제5816부대를 강화도에서 잠정 편성하여 운영하기도했다. 이들은 한강 북쪽의 개성까지 정찰 및 기습작전을 펼쳐 사단의 임무수행에 일조하였다.
나. 유엔군 통제 유격부대
※부산 동래에 '51.2.15일에 베이커기지 창설, 공수교육과 특수전 교육으로 1기생 배출
※서해안 백령도에 '51.2.15일에 윌리엄 에이블기지(표부대)창설, 이후 동키부대로 칭함, 6월 말에는 15개 연대로 증편
※동해안 주문진에 '51.4.15일에 커클랜드기지 창설
미 제8군은 유격대가 적 후방지역에서 전투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통제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1951년 1우러 15일 미제8군 작전참모부 예하 기타 업무처에 유격대 업무를 관장하는 "지구전과"를 신설하고, 유격대 조직에 착수하였다.
[부산 동래에 베이커기지 창설]
우선, 미 제8군은 1951년 2월 15일에 부산 동래에서 "베이커기지"를 창설하여 , 당시 대구에 집결해 있던 방위 사관후보생 중에서 대원들을 선발하여 공수 및 특수전훈련을 시킨 후 제1기생을 배출하였다.
[서해안 백령도에 '51.2.15일에 윌리엄 에이블기지(표부대)창설, 이후 동키부대로 칭함]
다음으로 서해안에 활동 중인 자생유격대를 통제하기 위해 1951년 2월 15일에 백령도에 "윌리엄 에이블기지"를 창설하였다. 이 기지는 3월에 "표부대"공식 명명 되며, 4월까지 무장치안대를 유격연대로 개편하고 "동키부대"라는 명칭이 부여된다ㅣ
동키부대는 6월 말에는 15개 연대로 증편되어 평안북도에서 황해도까지 전 서해안 지역의 도서를 중심으로 해안과 내륙으로 침투하여 작전을 전개하였다.;
[동해안에 '51.4.15일에 커클랜드기지 창설]
그리고 1951년 4월 15일에는 국군으로부터 을지제1병단을 인수하여 주문진에서 "커클랜드기지"를 창설하여 이 부대는 주로 고성 앞바다 난도와 솔섬을 중심으로 해안과 내륙으로 침투준비를 하였다.
중공군 춘계 1차공세('51.4)
제 1 절 중공군 4월 공세
1. 쌍방의 전략
가. 아군상황
유엔군은 3월 중순 1.4후퇴로 상실한 서울을 재수복하고 4월 초에 주력부대들이 38도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다. 이로써 전쟁전으 영토를 회복하고 방어에 유리란 지형을 롹보하여, 유엔군은 휴전을 ㅁ보색하기 ㅇ뒤한 전략에 따라 이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 방침에 의거 미 제1군단은(국군 제1사, 미 제3, 미제24, 미제25, 영제29여. 터키 여)은 임진강-한탄강 선에,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 미 제1해병사, 영 제27여단)은 석룡산-유촌리)선에,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사, 미 제2사. 미제7사)소양강 북쪽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제3군단(배속 제3. 제7)이 내륙산ㅇ악지역에, 국군 제1군단(배속 수도사단. 제9사)이 동행란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당시 미 제8군의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은 수도권지역으로 투입이 가능한 금곡 부근에, 제187공정단이 대구에 집결하고 있었다. 육본 직할부대인 국군 제8사단은 대전, 광주, 전주 부근에서, 제2사단은 춘양, 제천, 안동 부근에서 연대별로 후방지역 공비 토벌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유엔군이 방어선 보강에 주력하는 동인 공산군도 38도선 북쪽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중부전선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라 불리는 평강-철둰-김화 일대에 병력과 복브품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종심이 얕고 후방지녁에 진지를 구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어보다는 공격을 실시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판단 되었다.
이에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중부전선에 캔사스선의 방어종심을 깊게하고 적의 공세준비를 차단할 목적으로 철원-김화를 통제할 수 있는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새로운 통제선인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이 선을 점령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에 배치된 적을 고착견제하여 중부전선으로 증원함을 차단하는 동시에 인제-간성 도로를 첨령하여 군수지원에 어려움을 격고 있는 국군 제3군단의 주보급로를 개선할 목적으로 화천저수지 동쪽에 배치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및 제1군단이 4월 24일부터 양구-가전리-송도진리를 연하는 알라바마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1단계작전으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의 영 제27여단이 4월 11일 캔사스선 북쪽 약 20km에 위치한 금학산-광덕산-백운산을 연하는 우타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간에 적의 포격과 강우로 전차의 기도이 제한되기도 했으나 20일 을 전후하여 우타선을 점령한다.
제1단계작전이 성공하자,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은 4월 21일 최종목표인 와이오밍서능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층 강화된 저항으로 진출이 부진해졌읅 뿐만 아니라 , 정오가 지나면서 적의 대공세가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미 제1군단의 수색대들이 적이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생포된 중공군들이 이구동성으로 22일 야간에 중공군의 데공세가 개시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공격 중인 부대들에게 4월 22일 일몰전에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나. 적 상황
유엔군이 38도선 북쪽으로 반격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공군은 2월 공세의 실패로 실추된 위신을 만회하고 다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지휘체계를 정비하면서 새로운 대규모 공세작전을 준비하였다.
중공군은 '51년 초에 증원부대로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온 제19병단(제63. 64. 65군)을 임진강 북쪽의 구하리-덕사리 선에, 제3병단(제12.15.60군)을 삭령-신탄리 선에, 그리고 지난해 장진호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함흥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제9병단(제20.26.27군)을 중서부 전선의 철원-김화선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북한군은 사망한 김책으이 뒤를 이어 제1군단장 김뭉이 전선사령관이 되어 제3, 제5군단을 양구-원통 선에 배치하였다.
적은 아울러 열세한 화력과 기동력을 보강하기 위핵 야포, 박격포, 장갑차, 차량 등을 대폭증강하였고, 특히 산악지대에서는 기동력이 제한되자 말을 수송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51. 4월 초순에 김일성이 참석한 가운데 제5차전역(춘계공세)의 개시를 결정하였다. 당시에 팽덕회는 유엔군이 계속된 반격작전으로 지쳐있고, 그동안의 전투손실과 전투물자의 보충이 충분하지 못하며, 예비병력도 증원도지 않아 전력이 약화 되었으므로 공격준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하였다. 특히 팽덕회는 노동절(5월 1일)을 기하여 서울을 다시 탈환하여 모택동에게 선물로 바칠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번 공세에 공군을 투입하기 위하여 신의주, 의주, 신안주, 평양, 원산, 연포 등에 비행장을 건설했으나 유엔군의 폭격으로 이들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항공기를 춘계공세에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이 와이오밍선 공격으로, 중부전선이 돌출되자, 유엔군의 종심이 얕고 이로 인해 상호지원이 횡적ㅇ로만 가능한 상황임을 간파하였다. 그들은 공격준비를 갖춘 4월 22일 아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전선분할과 우회 포위공격으로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격퇴시킨다는 작전개념하에 주공인 제19병단 3개군(제63.64.65군)은 임진강 부근, 제3병단 3개군(제12. 15, 60군0은 연천 북쪽, 제9병단 5개군(제20.26.27.39. 40군)은 김화 부근에서 미 제1군단을 목표로 좌우 측방과 정면공격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조공인 북한군 제3군단과 제5군단은 양구 남쪽의 미 제10군단과 인제 부근의 국군 제3군단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같이 중공군의 4월 공세는 이번에도 여전히 30만 5천명 수준(중공군 27만, 북한군 3만 오천)으로 인해전술에 기초하여 주공방향에 있던 미 제1, 제9단은 어느 정도 적의 공세를 에측하고 대비하였으나 초전부터 고전하게 되었다.
2. 서울 북방의 결전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은 좌전방 김포반도에 국군 해병 제5독립대대(국군 제1사단 배속), 임진강 남쪽의 오금리-마지리선에 국군제1사단, 마지리-도감포에 영 제29여단(미 제3사단 배속), 도감포-군자산에 미 제3사단을 배치하였다.
이때 군단 중앙과 우전방의 터키여단(미 제25사단 배속), 미 제25사단, 미 제24사단은 와이오밍선으로 진격 중 공격이 돈좌되어 급편 방어로 전환하였다. 터키여단은 연천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미 제25사단은ㄴ 금학산-장흥리 일대의 분지에, 미 제24사단은 신술리-문혜리에 각각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우인접으로 방화동-백적산에 진출한 미 제9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6사단과 연결하였다.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중공군 주력인 제19병단이 개성-문산 축선의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을, 제3병단은 연천-전곡-동두천 축선의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제9병단은 김회-포천-의정부 축선의 미 제25사단과 미 제24사단을 목표로 야간공격을 개시하여 4월 공세의 막이 올랐다.
여기에 미 제1군단은 우세한 항공 및 포병화력과 기동력을 앞세워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면서 축차적으로 계획된 캔사스, 델타, 골든 선의 통제선을 따라 철수작전을 펼치게 된다. 특히 영 제29여단(벨기에 대대 배속)은 설마리, 감악산, 금굴산에서, 국군 제1사단은 파평산에서 최대의 결전을 펼쳤다.
가. 금굴산 전투
금굴산 전투('51.4.22~23)
유촌리 삭령 임진강 연천
중188사 무등리 진상리 138
백학 마전리 금굴산 임진강
벨대대 =천연단애
임진강 = 남계리 전곡 벨대대
= 158 한탄강
=
=
임진교 도감포
111 마포리
257 화봉촌
182 구암리 동두천
영 제29여단은 1개 대대를 감악산 좌전방 적성 부근에, 1개 대대를 감악산 북쪽에, 그리고 배속받은 벨게에 대대를 금굴산에 배치하여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중 벨기에 대대가 배치된 금굴산(194)은 동쪽과 남쪽이 임진강으로 둘러싸여도감포에 설치된 2개의 교량이 유일한 남쪽으로의 통로이며, 이로인해 중공군의 공격에 고립될 윟럼이 높았다. 그러나 이 고지가 중공군에 탈취되면 미 제3사단의 주보급로인 연천-의정부 도로가 측방 위협으로 차단될 우려가 있어 이를 확보해야 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금굴산 일대에 철조망과 지뢰를 매설하는 등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곳 전투는 '51.4월 22일 자정 무렵 중공군 제188사단 정찰대의 침투를 시작으로 개시된다. 23일 01:30분 경에 교량을 점령한 후 영 제29여단의 우전방 푸실리어 대대 Z중대가 방어 중인 임진강 남쪽의 257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히여 철수로가 차단되자, 대대장크라헤이 중려은 영 제29여단에 철수로 확보를 요청했으나 당시 영 제29여단이 나 미 제3사단도 정면에 중공군 공격을 받고 있어 증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이에 미 제3사단장 소울 소장은 사단 에비인 제7연대의 1개 보병중대와 2개 전차소대를 지원토록 조치하였다. 하지만 이미 257고지를 중공군이 먼저 점령하여 전차 1개소대만이 벨기에 대대 진지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대대는 미 전차소대의 증원으로 사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보전협동으로 피탈된 전방진지를 재탈환하고, 중공군의 공격이 주츰한 시간에 헬기를 이용한 부상병을 후송하였다.
대대는 미 제7연대 제1대대가 257고지를 공격하는 가운데 23일 17:00시에 항공 및 전차의 엄호하에 차량제대가 교량지역을 강력 돌파하고, 병력은 동쪽의 임진강을 도섭하여 15M 높이의 천연 단애를 기어올라 전곡으로 철수를 감행했다. 80대의 차량제대는 단 4대만이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되며, 보병 본대는 미 제3사단 제65연대의 진지로 18:30분에 복귀하여 차량으로 동두천을 경유하여 여단 예비로 봉암리로 재배치된다.
나. 파평산 전투
※마지리에 살상지대 계획하여 중공군 유인 격멸 , 제12연대는 예비인 제2대대와 배속된 미 제73전차대대 C중대로 저녁무렵까지 보전 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날 항공 포격과 포병의 지원사격, 보전조 공격으로 중공군 3,000여 명 사살하여 중공군의 기세를 꺽었다.
파평산 전투('51.4.22~23)
백학 백학
대덕산 고랑포 가여울
자지포
개성 장좌리 중성산 적성
판문점 방축동 덕현리 마지리 국1사=영29여
백학산 장파리
장단
청운동
일월봉 두포리 파평산 북암리
국11연-국12연
북8사 마산리 금곡리
영평산
문산 법원리 덕정
강정리 국1-15연
임진강
오금리 대전차대대-11연 봉서산
금촌 광탄
국군 제1사단(사단장 강문봉 준장)은 미 제1군단 주력부대들이 철원 남쪽 와이오밍선을 공격하는 동안 임진강 북쪽 대덕산-백학산-강정리를 연하는 선에서 정찰활동에 주력하면서 오금리-마지리간 주저항선의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사단은 좌전방 문산 북쪽의 고지군에 제11연대를, 우전방 파평산(496) 일대에 제12연대, 그리고 제15연대를 예비로 대고령 일대에 배치하였다. 단의 우인접에는 영 제29여단애ㅣ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었다.
'51.4.22일 20:00시부터 중공군 제192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어 적은 제12연대 전방에 고랑포를 중심으로 석포, 자지포, 석교일대의 도하지점을 학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에 임진강 넘어로 들어간 수색대 요원들은 단정이나 수영으로 살얼음이 언 강을 건너 본대에 복귀하였다. 결국 적은 좡좌리 일대에 교도보를 확보하엿ㄷ다.
이 무렵 우인접 제29여단을 공격하여 중성산을 장악한 중공군이 제12연대 우측방을 돌파시도하엿으나 연대는 이들을 마지리 개활지로 유인하여 살상지대에 화력을 집중하여 격퇴하였다.그러나 일부 적이 파평산으로 침투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강 남쪽의 피탈된 지역을 재탈환 하기 위해서 제12연대는 예비인 제2대대와 배속된 미 제73전차대대 C중대로 저녁무렵까지 보전 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날 항공 포격과 포병의 지원사격, 보전조 공격으로 중공군 3,000여 명 사살하여 중공군의 기세를 꺽었다.
'51.4.23일, 중공군은 한판 승부를 결정하려는 듯 병력을 집중하여 , 중공군 제192사단은 결국 우전방 자지포와 구야 일대에서 후속부대를 도하시켜 공격제대를 증원하고, 잠시후 장단에 대기하던 제190사단이 임진강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 제64군은 이틀째 공격에도 제1사단의 저항으로 정면돌파가 불가능해지자, 고랑포에서 도하한 제192사단은 파평산 정면에서, 새로 투입된 제190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 전투지경선인 두포리-마산리-법원리 축선으로 진출하여 사단의 전선을 절단하고 연결작전으로 파평산을 방어 중인 제12연대를 포위격멸하고자 하였다. 적의 기도를 간파한 사단도 봉일천 남쪽의 죽원리에 대기 중인 제15연대를 법원리로 이동시켰다. 국군 제1사단의 정면은 적의 파상공격으로 시간이 경과할수록 정상부근으로 축소되기 시작햇다.
반면 중공군은 연대간 전투지경선을 돌파하여 4KM를 진출한 상황에서 아군의 항공폭격과 폽졍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영평산과 주변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전차 1개 중대와 제15연대 2개 대대로 역습개시 , 돌파구 회복]
제1사단은 제15연대 2개 대대와 전차 1개 중대로 돌파구 회복을 위한 역습을 개시하여 17:00시경 회복하였다. 그러나 제12연대는 적의 집요한 파상공격에 파평산과 , 그 동쪽의 주저항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로서 사단의 주저항선에 일부 돌파구가 다시 형성되었다.
국군제1사단은 우전방 제12연대 지역이 적에게 피탈되자, 25일 사단 공격으로 주저항선을 회복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북한군 제1군단을 임진강변으로 진출시켰다.
'51.4월24일, 24일 저녁 무렵 인진강 철교를 중심으로 북한군의 도하 징후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자정에는 북한군 제1군단(제8.19.47사단)의 선두인 제8사단이 철교로 도하하여 제11연대의 좌전방을. 제47사단의 1대 연대는 청운동에서 임진강을 도하 우전방으로 공격하였다. 이날 따라 임진강변은 짙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정도였으며, 적은 이틈을 이용하여 주저항선에 접근하여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정오를 전후하여 안개가 사리지고 항공지원과 포병지원으로 적의 공격기세는 둔화되고, 사단의 중앙지대로 진출한 제15연대와 제12연대의 돌파구 회복을 위한 공격은 중공군의 저항으로 진전이 없었다.
이 무렵 제12연대 제3대대가 파평산 동쪽 북암로로 진출하여 적과 대치 중에 있었는데, 우인접의 영 제29여단 병력이 중공군의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왔다. 이에 즉각 전차중대와 보전 협동으로 구출작전을 전개하여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D중대원 40명을 구출하였다.그러나 중공군이 이 틈에 우측방으로 기동하여 연대의 퇴로차단을 기도함으로서 연대는 부득이 공격을 중지하고 금곡리로 철수한다.
'51.4월 25일, 사단은 상실된 방어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반격작전을 실시하엿으나 북한군 제1군단마저 가세하여 공격이 돈좌된 상황에서 군단의 철수 명령에 금촌과 문산 사이의 월롱산-부곡리-삼방리를 연하는 델타선으로 철수하였다.
다. 설마리 전투
※ 중공군에 투항하던지, 아니면 포위망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라!
※ 글로스터 대대는 D중대(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지역으로 탈출항여 성공)를 제외하고 전 대대가 포로가 된 것을 포함하여 여단 전체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설마리 전투('51.4.22~25)
중188사
백학 마전리 금굴산 전곡
벨대대
중187사 도감포
중187사 149
테일 257퓨대대
163
적암리
국1사=영 29여 영29여=미3사
중성산 A중 260
적성 탄광촌 퓨대대 398
182 144 얼대대
D중 B중 송산리
마지리 퓨대대
235 314
글대대 에처로 철수한 밒리핀 마차산
감악산
367
414 사기막 황방리 안홍리 동두천
212
북암리 구암리 영 여단지휘소
신산리
필리핀 대대
덕정
국군 제1사단의 우인접 영 제29여단은 당시 마지리-도감포 간 11KM의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여단은 적성-신산리, 도감포-봉암리 도로를 중심으로 감악산(675) 전방에 대대단위 거점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대대와 대대 간은 물론 좌우 인접 부대간에도 공백지대가 형성되어 적의 침투나 돌파에 취약한 상황이었다.
'51.4월 22일, 임진강 주변에서 정찰대와 중공군 간에 접촉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4월 22일은 영국인이 신성하게 여기는 "성 조지의 날"전야로 주진지의 일부 부대들가지 전통적인 관례대로 칠면조 만찬과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22:00시경 좌전방 글로스터 대대의 정면 가여울 일대에서 중공군의 도하가 시작 되었다. 초기에는 매복조의 집중사격과 포병화력으로 일시 격퇴되엇으나 탄약이 소진되어 매복족가 철수하자 1개 연대 규모가 도하를 감행하였다.
23일, 글로스터 대대는 방어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식 파상공격에 중성선을 방어 중인 A 중대 중대장 안기어 소령이 전사하게 되고, 우전방 푸실리어 대대도 Z중대가 257고지에서 중공군 제188사단에 피탈당하면서 23일 임진강 남쪽에 교두보를 허용하고 말았다.
24일, 그러나 먼동이 트면서 유엔군의 항공폭격시 개싣되면서 적은 접적을 단절하고 전방댇대는 감악산으로 철수하엿다. 글로스터 대대는 314고지 부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중공군 야간공격에 대비하고, 우전방 퓨실리어 대대는 257탈환을 위해 보전협동으로 역습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중공군의 저항으로 역습은 실패하였다. 여단장은 적의 후방진출을 저지하기위해 얼스터 대대를 398고지에 배치하여 도감포-봉암리 도로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미 제3사단장은 퓨대대가 역습에 실패하자, 사단 에비인 미 제7연대 제1대대를 투입항여 재역습을 시도햇으나 이 마저도 실패하였다. 사단장은 영 제29여단을 증원하기 위해 22일 대광리 남쪽 율동 부근에서 격정을 펼친 후 안흥리로 철수한 필리핀 제10대대를 여단에 배속ㅎ여 22:00시겨에 신산리에 집결하였다.
한편 중공군 제63군은 임진강 남쪽에 일부 교두보를 확보했으나 영 제29여단의 저항으로 감악산 점령이 지연되자 예비사단을 투입하여 23일 자정부터 좌전방 글로스터 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대대는 235고지에 사주방어를 실시하게 된다. 우전방 퓨대대도 얼스터 대대 후방 송산리로 철수하면서 감악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24일 새벽에 글로스너 대대는 중공군 제63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적중에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위해필리핀 제10대대와 영 제8전차대대 C중대가 보전협동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적이 이미 235고지 남쪽 4.8KM까지 진출하였고, 도롶촉이 협소하여 전차가 통과하기 곤란하게 되어 구출작전은 실패하였다.이에 여단장은 대대장에게 자력으로 포위망 돌파를 요구하였으나 그간의 전투로 전투력이 약화되고 탄약도 고갈상태로 현위칭에서 연결작전을 희망하였다.
오전 공격에 이어 오후에도 필리핀 제10대대와 전차중대는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전차의 파괴로 실패하게 된다. 필리핀 대대가 구출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고지일대의 글로스터 대대는 항공지원과 포병화력에 의존하며 연결작전만을 기대하는 상황에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영 제29여단장은 글로스터 대대에 미 제3사단제65연대가 구출작전을 실시할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한편 중공군 제63군은 이 지역 돌파가 지연되어 그들의 공격작전이 차질을 빚게되자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하여 총공세를 펼쳤다.
25일 05:00시, 이 무렵 미 제1군단장 밀번 중장은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으로주저항선 일ㅇ부가 돌파되자, 캔사스선 후방 6~18KM에 설정된 델타선으로 철수하도록 명ㄹ형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은 글로스터 대대가 구출될 때까지 현진지를 고수하도록 하였다.특히 미 제3사단장에게는 반드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도록 병령하였다.
그러나 임진강을 도하한 중공군 제63군의 1개 사단이 미 제3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곡 -동두천 축선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게된 사단장은 구출작전 부대인 제65연대와 필리핀 대대를 이곳에 투입하였다. 이로인해 글로스터 대대의 구출작전은 항공지원과 포병화력에 제64전차대대 와 제65연대 전차중대만 투입하게 되었다.
[중공군에 투항하던지, 아니면 포위망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라!]
이렇게 되다보니 구출작전ㅇ느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여단장은 대대장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여 중공군에 투항하던지, 아니면 포위망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25일, 결국 대대장은 부상자 50여 명과 잔류할 것을 결정하고 이에 군묵, 군의관 및 의무요원이 잔류할 것을 희망하였다. 결과적으로 여단은, 글로스터 대대는 D중대(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지역으로 탈출하여 성공)를 제외하고 전 대대가 포로가 된 것을 포함하여 전체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으로 적성-설마리-동두천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3일간이나 고착 견제하여 미 제1군단의 주력 부대들이 안전하개 델타선으로 철수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글로스터 대대의 설마리 전투는 한국전쟁사상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례로서 전사에 기록되고 있다.
라. 연천-동두천 축선 지연전
※미 제1군단은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을 연하는 델타선으로 철수하여 좌로부터 국군 제1사-미3사-미25사-미24사 순으로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연천-동두천 지연전('51.4.22~4.25)
철원
와이오밍선
신탄리 중60군
중12군
대광리 금학산
미25-24연 장흥 미25-27연 신술리 국6-19연
중15군 터어키여단 문혜리 미24-5연
율동 필리핀 대대 지장봉
장승천
나미현 광덕산
군자산 연천 운천
미25-65연 미3=미25 미25=미24
전곡 금곡 구정동 1군단=미9군단
- 캔 사 스 선 - 장암
영평 국망봉
초성리
만세교 일동
마차산
동두천
왕방산 포천
칠봉산 운악산
- 델 타 선 -
덕정 수원산 신팔리
가납리
연천 동쪽에서 철원-김화를 목표로 공격하던 미 제1군단의 미 제25사단(배속 터키여단)과 미 제24사단이 4월 22일 중공군의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되자, 좌전방 터키여단은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중앙의 미 제25사단은 철원 남쪽 금학산(947)일대에ㅣ, 우전방 미 제24사단은 문혜리-신술리에 급편방어 진지를 편성하였다. 터키여단의 좌인접에는 미 제3사단의 제65연대에 배속된 필리핀 제10대대가 우타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장승천 일대와 나미현에서 터키군 큰 피해]
중공군은 22일 19:00시에 터키여단이 배치된 댁광리 남쪽 장승천 일대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179사단의 공격을 저지하며 주저항선을 터키군이 유지하였다. 중공군은 정면공격과 병행하여, 좌인접 율동의 필리핀 제10대대와 우인접 미 제25사단 제24연대 전투지경선으로 1개 연대규모를 침투시켜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자정무렵 터키여단이 철수를 하는 과정에 철수로상의 주요 거점인 나미현을 중공군이 차단하여 터키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율동의 필리핀 제10대대도 중공군 제12군 제34사단의 공격으로 진내전투가 벌어지면서 미 제3-65연대와 통신마저 두절되어 화력지원도 받지 못하는상황에서 새벽까지 진지를고수하여 미 제3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51.4.23일, 필리핀 대대와 터키여단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23일 오전 미 제9군단의 사창리지역에 이어 미 제1구난의 감악산지역에도 부분적인 적의 돌파구가 형성되어, 미 제8군사령관은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를 잇는 캔사스선으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에 미 제1군단 우전방방의 3개 사단(제3.제25. 제24사)은 진지 전방으로 중공군의 집결을 유인하여 항공과 포병으로 최대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우세한 기동력으로 축차지연전을 실시하며 캔사스선을 점령한다.
['51.4.23일, 미 제5곤군은 당일 무려 430회의 출격으로 미 제1군단 철수엄호]
당시에 미 제5공군은 4월 23일 3개 비행단과 미 제1해병비행단, 다수의 함재기를 이용하여 무려 하루에 전례없는 340회를 출격하여 미 제1군단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서울 북방에서 중공군의 4월 공세 주공과 격동ㄹ한 미 제1군단은 임진강변에서 국군 제1사단과영 제29여단이 3일 동안 적의 진출을 지연시킨 결과로 와잉오밍선을 공격하던 미 제3, 미 제24, 미 제25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나 돌파를 당하지 않고 캔사스선으로 철수하였다.
적의추격이 계속되자 군단은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을 연하는 델타선으로 철수하여 좌로부터 국군 제1사-미3사-미25사-미24사 순으로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3. 사창리-가평 축선의 위기
사창리-가평 전투('51.4.22~25)
김화
와이오밍선
중39군
와수리 육단리 와이오밍선
대성산
복주산 사방거리 재안산
중20군 중40군 와이오밍선
1190
신술리 방화동 실내리 486 609
국19연 국1해병
상해봉 국6-2연 미5해병 와이오밍선
광덕산 명월리 백적산 미7해병 화천 화천저수지
두류산 국6=미1해 구만리
국6-7연
미1=미9 사창리 원천리 용화산 국1해병
신포리 북
수밀리 미9=미10
국망봉 캔사스선 한 미5해병
석룡산
국19연
화악산 매봉
강 미1해병
북 국1해병
춘천
미7해병
캐나다대대 한
677 죽둔리 504 영27=미1해병
내촌 호주대대
강
가평 미5해병
중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9군단도 4월 21일 좌인접 미 제1군단과 병진하여 좌전방 국군 제6사단이 김화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배속 국군 제1해병연대)가 화천저수지 북쪽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반면에 중공군 4월 공세의 조공인 중공 제19병단은 화천-기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유엔군의 동서간 증원을 차단하고 주공부대의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주공부댜에 앞서 미 제9군단지역으로, 그것도 화력과 기동력이 높은 미 제1해병사단 지역보다 국군 제6사단 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가. 사창리 전투
※사단 전체가 와해된 국군 제6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로켓포 66문, 바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게 되며, 25일 낙오된 병력 6,313명이 집결을 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4월 21일 석룡산-화악산에서 와이오밍선의 육단리와 복주산(1057)을 목표로 공격으 ㄹ개시하여 좌전방 제19연대가 상해봉(1019), 우전방 제2연대가 백적산(883)을 점령하여 중간목표를 확보하였다. 사단이 공격제대를 정비하고 있을 때에 22일 오후 항공관측자로부터 대규모 중공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장도영 ㅅ단장은 전방부대에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로 전환하여, 좌인접 부대인 미 제24사단과 우인접의 미 제1해병사단과 연결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에 좌전방의 제19연대는 방화동 일대에 , 우전방의 제2연대는 백적산 일대 예비인 제7연대는 두류산(993) 부근에 전진배치하여 대비하였다. 그리고 제27포병대대와 뉴질ㄹ랜드 포병대대, 미 제2박격포 대대 C중대가 배속되어 사창리에 배치되었다.
'51. 4. 22일 4.22일 17:00시에 중공군이 방화동, 실내리 일대에 포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20군 제60사단과 제40군 제120사단이 부대간으 공간을 이용하여 상해봉 두류산으로 진출하였다.
전방연대들은 사단의 진지고수 명령에도 지난해 '50년 10월말 온정리 전투에서 당한 "중공군에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이 되살아나 후방으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땐 이미 중공구닝 후방까지 진출하여 퇴로가 차단되어 사창리-신포리간 도로에는 보병과 화력지원부대들이 대혼잡을 이루며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철수한다.
한편 사단의 우인접 미 해병 제1사단도 4월 21일 제5.제7해병연대와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로 화천저수지 북쪽의 와이오밍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도 화천을 점령 하던 중에 중공군 제40군 주력부대의 정면공격과 구국 ㄵ제6사단의 철수로 노출된 좌측방을 통한 중공군의 포위공격에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화력으로 저지하면서 북한강 동쪽으로 철수하여 춘천을 중심으로 캔사스선을 점령하였다.
23일~24일, 미 제9군단장은 국군 제6사단에게 부대를 신속히 재정비하여 캔사스선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제19연대를 국망봉(1168)-석룡산에, 제2연대를 화악산-매봉에 배치하였으나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중공군의 파상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된다. 사단은 영 제27여단의 엄호하에 가평 계곡을 향해 철수하여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 불기산(601)일대로 철수하였다. 이 당시에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로켓포 66문, 바격포 42문ㄴ,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게 되며, 25일 낙오된 병력 6,313명이 집결을 하였다.
나. 가평 전투
※ 영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으로 가평을 고수하였으며, 25일 밤에 미 제8군 예비에서 군단에 배속된 미 제1기병사단의 제5기병연댕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양평으로 이동, 군단의 에예가 되었다. 이후 신임 여단장 테일러 준장이 취임하면서 영 제28여단으로 개칭된다.
가평에서는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영 제27여단과 국군 제6사단이 추격하는 중공군 제118사단간에 혈전이 계속되었다.
영 제27여단은 작전이 개시되기 전인 4월 19일에 사창리 서쪽에서 방어지역을 국군 제19연대에 인계하고 군단 에비로 가평에 집결하였다. 당시에 여단은 한국 파견 근무가 만료된 상황에서 아질 대대의 홍콩 원대복귀 문제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51.4월 23일, 미 제9군단장은 철수하는 국군 제6사단이 석룡산-화악산 점령이 불투병하자, 뉴질랜드 제16포병 대대와 군단의 제213포병대대는 계속하여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고, 여단 주력은 가평천 계곡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춘천-가평도로를 목표로 진출하는 중공군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에 영 제27여단은 캐나다 대대를 좌전방 내촌 부근의 677고지에, 호주 대대를 가평 계곡을 통제할 수 있는 죽둔리의 504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아질 대대를 가평에 집결보유하였다.
상창리를 돌파한 중공군 제118사단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고, 제6사단은 캔사스선을 점령하지 못하고 계속 철수하여 가평 서쪽 불기산지역으로 급편방어를 하게 된다. 사창리에서 철수시 사단을 지우너한 제16포병 대대와 경계부대인 미들섹스 대대도 함게 철수하여 가평 북족 가평천변에 배칟되엇다.ㅣ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하는 중공군 제118사단은 호주 대대의 배치상황을 모르는 채, 갚령을 함라ㅑㄱ하기 위해 도로와 계곡을 따라 종대 대형으로 내려오다 전차 및 포병화력의 기습을 받고 격퇴된다.
24일~25일, 새벽에 전차소대가 재보급을 위해 일시 철수하자, 이 틈을 이용하여 야간에 포위 공격을 기도했으나 호주 대대의 저항으로 실패하게 되면서 날이 밝게되고, 항공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다수의 시체를 남기고 철수하게 되며 죽둔리 일대에서 중공군 40여 명이 생포된다.
이에 영 제27여단장은 캐나다 대대와 호주 대대 사이의 공백지대로 중공군이 다시 공격할 것을 판단하여, 호주 대대를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시켰다.
야간에 중공군이 캐나다 대대 지역인 677고지일대로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제16포병대대가 가평천을 도하하는 적을 집중 포격하고, 대대도 전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공격은 현저히 둔화되었다. 적은 다시 25일 재공격하였으나 유인작전에 말려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영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으로 가평을 고수하였으며, 25일 밤에 미 제8군 예비에서 군단에 배속된 미 제1기병사단의 제5기병연댕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양평으로 이동, 군단의 에예가 되었다. 이후 신임 여단장 테일러 준장이 취임하면서 영 제28여단으로 개칭된다.
4. 소양강 부근 전투
소양강 부근전투('51.4.22~26)
펀치볼 서화리 간성
북45사 대암산 북12사 북6사 매봉산
873 소양강
국5-35연
가야리 명당산
봉화산 한계리 안산
국5-35연 국7-5연 국3-22연
양구 미5해병연 양촌리 원통 장수대
915 940 송정리 국5-36연 양양
국5-27연 539 한양동 1226 가리봉 국3-23연 미1해병=국5사 미10군=국3군 국3-18연
인제 덕산리
국5-27연 국5-36연 남목리 한석산
개운리 국3-22연
점발리 매봉
관대리 733
남전리 국3-23연 검우석
국7-8연
내린천
신남리 현리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3군단은 3월 초부터 재반격작전을 개시하였으나, 공격축선상의 지형이 험하고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중서부전선 부대들이 캔사스선에서 철의 삼각지대로 공격할 무렵 화천저수지-남전리-한계령을 연하는 캔사스선에서 전선을 정비하고 있었다.
제8군사령관은 4월 20일 중부전선의 미 제1, 제9군단의 와이오밍선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서로 배치된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의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 도로의 북쪽 10~22KM에 위치한 양구-대암산-가전리-사천리-고성 남쪽을 잇는 "알라바마선"을 목표로 24일부터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과 제3군단에 배속된 제3, 제7사단이 공격준비에 주력하는 동안 공교롭게도 공산군이 4월 공세에 조공인 북한군 제5군단이 양구-원통 선에서 22일 선제 공격을 개시하여 중동부전선에서도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이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가. 인제 쟁탈전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은 4월 19일 소양강을 도하, 좌전방에 제35연가 가아리, 우전방 제36연대가 원통 북방의 봉화산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무렵 알라바마선 공격계획에 의거미 제10군단과 국 제3군단의 전투지역선이 일부 조정되어 사단은 인제 북쪽의 제36연대 지역을 제3군단의 좌전방으로 투입된 제7사단 제5연대에 인계하고 , 양구 동쪽의 좌인접 미 제7사단 제32연대 지역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군 제5군단은 4월 22일 아군이 진지교대하는 취약한 시기에 제45사단이 양구, 제12사단이 인제, 제6사단이 한석산(1119)를 목표로 23:00시ㅐ경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5사단 제35연대는 화력전과 백병전으로 진지를 사수하였으나, 일부 적이 우인접 국군 제7-5연대 전투지경선 지역으로 침투하여 연대의 퇴로차단을 기도하자, 우전방 제3대대가 먼저 원통리 철수함녀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주저항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51.4.23일, 새벽 중.서부전선에 이어 중동부전선에서도 상황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미제 8군사령관은 24일로 계획된 알라바마선 공격명령을 취소하고 군단간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제7사단 제3연대와 제5연대가 제5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지역이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인제를 사수하기 위하여 제27연대를 인제 북서쪽 고지군에, 중앙 36연대를 인제 북쪽의고지군에, 우전방 제5엱대를 원통리에 배치하였다. 제3연대는 예비로 소양강 남쪽 한양동에, 제35연대는 이제 남쪽에서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24일, 그러나 우전방 제7-5연대지역 좌우측방을 돌파한 적이 후방으로 진출을 기도하자, 포위를 우려한 연대가 철수를 시작하면서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어 24일 사단은 인제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소양강변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25일, 인제를 탈취한 적이 방어로 전환핮자, 미 제10군단장은 인제를 탈환하도록 명령하여, 국군 제5사단은ㅁ 제36연대 제2대대와 및ㄱ에서 배속된 전차 5대로 보전협동작전으로 정오에 인제를 재탈환하였다. 그러나 야간 22:00시경 다시 적의 역습을 받아 이제 남쪽 소양강변으로 철수하였다.
나. 한석산 쟁탈전
※인제-원통 도로와 주변 저지대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을 확보하기 위해 국군 제3사단ㄱ돠 북한군 제6사단은 4일 동안 고지쟁탈전을 펼쳤지만 결국 국군 제3사단이 고지 주인이 되어 검웍-한석산-가리봉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차후 작전에 대비하였다.
※국군 제3사단과 국군 제5사단은 부대교대와 알라바마선 공격준비로 방어가 소흘한 상황에서 4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으로 인제를 피탈당했지만 소양강에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이 선에서 저지하였다.
국군 제3군단의 제3사단은 태백산맥으이 준령을 따라 진출하여 원통-양양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가리봉으로 진출하여 좌전방 한계리에 제22연대를, 우전방 가리봉에 제23연대를 , 그리고 제18연대를 에비로 덕산리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7사단은 군단 에비로 후방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펼치다가 알라바마선 공겨계획에 의거 4월 22일 오훙에 제5사단의원통지역을 인수하고 좌전방 사단으로 투입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이 국군 제7사단 제5연대와 제3사단 22연대 전투지경선으로 집중공격하여 결국 좌인접 제5연대가 돌파되면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한석산을 피탈당하고 매봉 일대로 후퇴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24일, 제3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22연대 제2대대와 제18연대 제2대대로 한석산 탈환전을 감행하여 탈환하게 된다. 이때 일부 적이 인제-현리 도로를 따라 침투를 하자 에비인 제18연대가 검우석 일대의 저지진지를 점ㅂ령하여 적의후방 진출을 저지하였다.
25~26일, 한석산에서 물러난 적은 25일 연대 규모로 다시 공격하여 결국 다시 피탈되고 제22-2대대는 매봉(1064)으로 철수하였다. 적이 다시 26일 새벽부터 2차에 걸쳐 매봉을 공격하였으나 백병전 긑에 매봉을 사수하며, 사기가 오른 제22연대는 다시 한석산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쌍방은 인제-원통 도로와 주변 저지대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을 확보하기 위해 4일 동안 고지쟁탈전을 펼쳤지만 결국 국군 제3사단이 고지 주인이 되어 검웍-한석산-가리봉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차후 작전에 대비하였다.
국군 제3사단과 국군 제5사단은 부대교대와 알라바마선 공격준비로 방어가 소흘한 상황에서 4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으로 인제를 피탈당했지만 소양강에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이 선에서 저지하였다.
5. 서울 고수 방어 작전
※유엔군의 항공과 포병화력을 이용한 조직적인 철수작전에 유엔군의 격멸은 커녕 오히려 서울 북방에서 7만 5천~8만 명이 사살되고 5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그들의 1주일 이라는 병참지원능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하게 된다.
※반면 유엔군은 중서부지역은 60,km 중동부지역은 35km의지역을 상실하였으나, 서을 골든선-마석우리-대포리를 연한 노네임선에서 서울을 방어하였다.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맞아, 5일 만인 26일 조공부대들은 중부전선의 가평-춘천과 중동부 전선의 소양강변에서 저지되어 소강상태가 지속된다.
그러나 주공이 지향된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은 임진강변에서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강력한 저항과 항공 및 포병사격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않고 밀어붙혔다. 그들은 이제 주간작전으로 과감하게 전환하여 5월 1일 노동절을 기하여 모주석에게 서울 탈환이란 선물을 주려 파상공격을 계속하였다.
가. 미 제8군의 작전 방침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미 제8군의 작전개념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철수를 강요받게 되면,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가평을 연하는 델타선과 서울 외곾의 수색-북한산-덕소를 연하는 골든선, 그리고 한강-양평-횡성-양양을 연하는 네바다선으로 축차 철수하면서 공산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다시 캔사스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이 골든선을 점령하면 다른 군단들도 네바다선으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이럴경우 서울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26일 이 작전개념을 수정하여 골든선 동쪽에서 연결되는 네바다선보다 30~40KM 북쪽의 용문산-홍천-한계령-속초를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인 "노네임선"을 설정하고 골든-노네임선을 방어할 것을 명령하였다.
노네임선 확보는 전략, 전술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전술적으로는 미 제1군단의 골든선 방어를 우측방에서 지원함은 물론 부득이 철수하더라도 동측방에서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는 공격발판을 확보하겟다는 의도였다. 전략적으로는 중동부 전선의 부대가네바다선 점령을 위해 북한강 이남으로 자발적인 철수로 인한 영토포기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ㄹ, 서울의 세번째 포기로 한국 국민이 받을 심리적 불안감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방침에 의거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이 서울 방엉에 주력할 수 있도록 우측방을 엄호하는 미 제24사단을 미 제9군단에배속 전환하여 미 제1군단의 방어정면을 축소 조정하고, 또한 군 에비인 미 제1기병사단을 제1군단에 배속하여 강력한 에비대를 보유하게 하였다.
나. 미 제1군단의 골든선 점령
서울 방어 배치('51.4.29)
문산 송추 의정부 일동
관산리 도봉산 수락산
노고산
국사봉 창릉천 북한산 쌍문동 불암산
구파발 남장대 퇴계원
국1-15연 미5기병 미8기병 태능 가평
미25-35연
망월산 돈암동 미1기병사=미25사 미25-27연
대덕산 국1사=미1기병 미7기병 덕소
국1-12연 홍은동 미25-24연
용마산 필리핀10대
창천동 능동
아현동 국1-15연 미3-7연 광진교
미3-65연 터키여단 미1군단=미9군단
한남동
한강교
미 제1군단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한 파상공격에 밀려 4월 25일 성동리-덕정-포천을 있는 델타선을 접ㅁ령했으나, 이 선은 캔사스선과 가은 영구적인 방어선도 이나고 도한 방어시설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군단이 서울 외곾의 골든선으로 철수하는 과정에 단계적으로 철수를 통제하고, 방어준비를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최대한 획득하기 위하여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고 전진을 지연하기 위한 통제선이었다.
중공군은 주저항선과 캔사스선에서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화력장벽에 부딪쳐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음에도 무모하게 델타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들은 일부 부대를 경춘국도로 진출시켜 서울 방면에 대한 압력을 한층 강화하여, 급기야 미 제1군단은 델타선을 점령하지 못하고 서울 방어의 마지막 보루인 골든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전방사단들은 가용한 모든 화력수단으로 적의 추격을 차단하고 아군의 전투력 손실을 최소화하며 골든선으로 철수하였다.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은 한강하구-구파발에,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은 구파발-쌍문동에, 우전방 미 제25사단은 쌍문동-덕소간의 골든선을 점령하였다.
이때 연천-전곡-동두천-의정부 축선에서 중공군 제19병단과 격전을 벌였던 미 제3사단은 군단예비로 전방사단ㄴ 후방지역에 1개 연대식 배치하였다.
골든선에 배치한 미 제1군단은 중공군이 춘계공세를 개시한 이후 앞서 점령하였던 어떠한 방어선보다 훨신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고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다. 화전리 전투
※ 국군 제1사단이 방어중인 골든 선에 북한군 제8사단은 무모하게 10여 차례 돌격을 감행하다 무려 90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철수한다.
※이 무렵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은 도로망이 결핍된 북한산, 도봉산 일대로 중대규모 이하의 소부대로 무려 39회에 걸쳐 침투공격을 기도한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우전방 미 제25사단도 퇴계원 부근에서주저항선 돌파를 기도하는 중공군 제65을읅 포병과 항공 폭격으로 1,000여 명을 살상하여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8사단과 금촌, 동걸 일대에서 치열한 지연작전을 전개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나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울 외곾으로 철수하였다.
4월 29일,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늕 화전리 일대에, 제15연대는 불광동 일대에 골든선을 점령하였다. 이 골든선은 4월 초순부터 은밀하게 사단 작전요원들의 감독하에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유개호 진지와 교통호를 구축해 놓았다.
문산-서울 축선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8사단은 일산부근에서 재편성을 한 후 28일 새벽 행주나루터로 1개 연대 규모를 은밀 침투시켜 김포비행장 방면으로 도하를 기도하려다 사단 수색대에 발견되어 2시간 동안 인천 외항에 대기 중인 순양함 톨레도 호의 8인치 함포사격을 받고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북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다시 증강된 1개 연대규모로 자정무렵 경의선 철로와 국도를 다라 종대대형으로 좌전방 제11연대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접의 철조망 지대에 봉착하여 조명지뢰가 폭발하여 전화력이 집중되었다. 북한군은 화전역 부근 철로 사이의 골짜기로 피신한다. 그곳에는 사단 공병 지뢰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방 중대는 탄막지대에 들어온 북한군에 엄청난 화력공격을 가하고 적은 무모하게 10여 차례 돌격을 감행하다 무려 90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철수한다.
'51.4.30일,북한군 제1군단의 제8사단이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지역을 공격할 당시에 중공군 제64군의 일부가 우전방 제15연대 지역으로 양공작전을 개시하여 앵봉을 피탈당하게 된다. 이에 30일 사단 에비인 제12연대 제1대대와 미 전차중대가 역습으로 재탈환하게 된다.
이 무렵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은 도로망이 결핍된 북한산, 도봉산 일대로 중대규모 이하의 소부대로 무려 39회에 걸쳐 침투공격을 기도한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우전방 미 제25사단도 퇴계원 부근에서주저항선 돌파를 기도하는 중공군 제65군읅 포병과 항공ㅇ 폭격으로 1,000여 명을 살살하여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이로서 중공군 제19병단의 마지막 승부수로 무모하게 골든선을 공격해 보았지만 참패하고 철수하게 되어 중공군 4월 공세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서울을 목표로 개성-서울 축선과 연천-서울, 포천-서울 축선으로 양익포위를 기도한 중공군 4월 공세는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임진강 방어진지 돌파에 지체되고, 조공은 가평과 인제에서 차단돠어 유엔군의 퇴로차단에 실패하였다. 또한 유엔군의 항공과 포병화력을 이용한 조직적인 철수작전에 유엔군의 격멸은 커녕 오히려 서울 북방에서 7만 5천~8만 명이 사살되고 5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그들의 1주일 이라는 병참지원능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하게 된다.
반면 유엔군은 중서부지역은 60,km 중동부지역은 35km의지역을 상실하였으나, 서을 골든선-마석우리-대포리를 연한 노네임선에서 서울을 방어하였다.
6. 정찰기지 확보 작전
※7일 ~10일, 7일 06:00시에 미 제3사단의 엄호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좌전방 제11연대는 일산 북쪽 고봉산(209)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일시 돈좌되었다. 이에 항공폭격과 보전협동 작전으로 5시간 동안 혈전을 벌여 고봉산을 탈환하였다. 8일에는 최종목표인 봉일천 동쪽의 명봉산(248)과 188고지를 확보한다. 5월 9~10일 그러나 군단의 계속공격 명령에 문산천 주변의 개활지를 통제할 수 있는 고지군을 확보할 목적으로 내화리-등거리를 확보하고 계속공격 중에 제15연대가 163고지 및 박달산 부근에서 공격이 돈좌되었다
※ 국군 제1사단은 10일 오후에 제15연대로 문산-서울 도로변의 명봉산-대자동-관산동 일대의 정찰기지에 배치하고, 주력은 다시 미제3사단으로부터 주저항선을 인수한 후 공들선 방어에 주력한다.
봉일천 부근 전투('51.5.6~10)
문산 법원리
내화산
등거리
금촌 등원리 277
11연=15연 박달산 앵무봉
봉일천 명봉산
죽원리 곡릉천 비호봉 일영
벽제
고양 국15연
138 관산리 대자동 188
고봉산
일산 원당리
신원리
지축
삼송리
국사봉 창릉천 구파발
능곡 용두동 국1-12연 불광동
덕은리 미3-15연
중공군 4월 공세를 격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골든-노네임선에서 부대 재배치와 방어진지 보강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인 5월 1일 포로들의 진술과 정보판단에 의하면, 적은 4월 공세에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었음에도 병력이 63만 9천 명(중공군 54만 2천, 북한군 19만 7천)이고, 만주에 증원병력이 75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반면 유엔군은 50만 3천(유엔군 26만 9천, 국군 23만 4천)을로 숫적 열세를 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황에 공산군이 비록 후퇴했지만 재정비하여 공격을 재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에 미 제8군은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전선 북쪽 5~10km 까지 정찰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따라서 사단별로 한강하구-횡게에 이르는 주저항선 북쪽에 연대규모의 정찰기지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대해 공산군은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도 유일하게 국군 제1사단이 방어 중인 문산-서울 축선에 북한군 제8사단을 투입하여 정찰기지 설치를 저지하였다. 이에 제1사단은 적 제8사단과 한 차례 전투를 실시한다.
'51.5.6~8일 미 제1군단장은 이번 기회에 북 제8사단을 격멸할 목적으로, 5월 6일에 군단 예비인 미 제3사단으로 하여금 서울 북서쪽 덕은리-용두리-불광동 간 제1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도록 하고, 국군 제1사단은 사단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제1사단은 제11연대를 능곡 일대로, 제15연대를 국사봉(109)일대로 진출시켜 7일 06:00시에 미 제3사단의 엄호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니 좌전방 제11연대는 일산 북쪽 고봉산(209)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일시 돈좌되었다. 이에 항공폭격과 보전협동 작전으로 5시간 동안 혈전을 벌여 고봉산을 탈환하였다. 8일에는 최종목표인 봉일천 동쪽의 명봉산(248)과 188고지를 확보한다.
5월 9~10일 그러나 군단의 계속공격 명령에 문산천 주변의 개활지를 통제할 수 있는 고지군을 확보할 목적으로 내화리-등거리를 확보하고 계속공격 중에 제15연대가 163고지 및 박달산 부근에서 공격이 돈좌되었다. 이에 미 제1군단장은 1개 연대로 정찰기지를 확보한 뒤 사단 주력은 주저항선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10일 오후에 제15연대로 문산-서울 도로변의 명봉산-대자동-관산동 일대의 정찰기지에 배치하고, 주력은 다시 미제3사단으로부터 주저항선을 인수한 후 공들선 방어에 주력한다.
7. 주보급로 확보작전
미 제8군사령관언 중서부의 골든-노네임선 방어진지가 강화되고 정찰기지 설치가 완료되자, 전선 조정에 따라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여 적에게 넘겨준 중동부 전선의 중요 전술 도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를 탈환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국군 제1군단 및 제3군단은 속사리-현리-인제 도로에 의존하여 작전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과 , 국군 1, 3군단을 홍천-인제-간성 도로(알라바마선)의 10~25km 북쪽 가리산-신월리-915고지-1037고지-대진리를 연하는 미조리 선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이 게획에 의거 국군 6개 사단(제3.5.7.9.11.수도사단)은 5월 7일 이 미조리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 이때 한석산 좌측에서 소양강 남쪽의 부평리-청구리 일대를 공격한 제5, 제7사단은 용이하게 진출하였으나. 한석산을 공격한 제9사단과 설악산을 공격하는 수도사단은 북한군과 격전을 치르게 된다.
가. 인제-한석산 전투
※ '51.5.7~10일사이에 한석산 -매봉을 점령하고, 제9사단제30연대 제3대대는 390명의 전사상자를 낸 반면 적 895명을, 대대 전사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지잔 4월 25일 국군 제3사단이 적에게 피탈)
중공군 4월 공세시 국군 제9사단은 제1군단의 예비로 강릉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후 4월 25일 제3군단에 배속되었고, 27일에늕 사단장 이성가 준장의 후임으로 최석 준장이 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사단은 5월 2일 제7사단 제8연대 지역을 인수하여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현리 북족 7km 산악지대를 방어하던 주에 7일 인제 북쪽 미조리선을 공격하에 되었다.
사단의 공격 목표인 한석산(1119)과 그 남쪽의 매봉(1066)은 지난 4월 25일 제3사단의 제22연대가 피탕당한 고지로서 주변 현리, 인제, 원통을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후 공격의 발판이 되는 중요한 감제고지다. 이곳에는 북한군 제6사단이 배수의 진을 치고 강력한 거점방어 중이었다.
'51.5.7~10일 7일 제9사단 30연대 제3대대가 07:00시에 매봉 공격의 발판이 되는 910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한다.이에 대대장은 9일 매봉 우측방 856고지로 우회기동하여 공격을 재개하여 항공지원과 포병화력 지우너속에 3일 만에 매봉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10일에는 한석산 마저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제9사단제30연대 제3대대는 390명의 전사상자를 낸 반면 적 895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탄약과 장비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려 대대 전사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나. 설악산 부근 전투
※'51.5.10~11일 적 2개 중대규모가 가리봉을 기습하여 일시 피탈된다. 제1연대 예비인 제1대대가 제2대대로부터 가리봉을 인수하는 과정에 피탈되지만 3창에 걸친 역습으로 재탈환하고, 11일에는 좌전방 제1연대가 안산(1430)을, 우전방 제1기갑연대가 노동을 점령하였다.
※ 한편 수도사단의 우인접 국군 제11사단의 제20연대는 설악산 준령을 따라 적을 추격하여 협소한 기동공간과 산악지대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5월 11일 저항령 부근에서 무려 31시간의 결전을 치르며 저항령 전방 989고지로 진출한다.
설악산 부근 전투('51.5.7~13)
간성
용대리 미시령
827 속초
국11-20-2대대
882 저항령 설악동
마등령 국11-20연
원통 백담사 노동 수도=11사
원통 안산 대승령 972
우화리 국수-1연=기갑연 1456 기갑=20연
설악산
가리봉 한계령
약수리
국3군단=국1군단
양양
동해안으로 재반격작전을 개시한 국군 제1군단은 4월 15일 한계령-오색리-관모봉을 연하는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군단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맞았으나 다른 전선과는 대조적으로 군던 정면에서는 접적이 경미하여 공세작전으로 전환하는데 용이하였다.
수도사단은 군단의 주공으로 적의 보급 및 병력의 집결지로 판단되는 설악산을 점령하고 가리봉-용대리로 진출하기 위해 약수리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제6사단이 가리봉-대승령-노동을 연하는 선에 거점방어를 하고 있었다.
'51.5.8일, 제1연대가 가리봉(1519)을, 제1기갑연대가 백담사 부근의 노동을 공격하게 되었다. 가리봉은 용대리-양양, 인제-가리산리-현리 도로를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좌인접에서 공격 중인 국군 제3사단과 우인접의 제1기갑연대의 진출을 지원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국군은 적의 기관총사격으로 일시 돈좌도 되었지만 가리봉과 노동을 감제하는 972고지를 점령하였다.
가리봉에서 철수한 북한군 제6사단은 대성폭포-백담사-노동을 연하는 선에서 강력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사단은 전과확대를 위해 적을 추격하였으나 산악지대와 식량 및 탄약의 재보급이 지연되며 공격이 돈좌되기 일쑤였다;.
'51.5.10~11일 적 2개 중대규모가 가리봉을 기습하여 일시 피탈된다. 제1연대 예비인 제1대대가 제2대대로부터 가리봉을 인수하는 과정에 피탈되지만 3창에 걸친 역습으로 재탈환하고, 11일에는 좌전방 제1연대가 안산(1430)을, 우전방 제1기갑연대가 노동을 점령하였다.
한편 수도사단의 우인접 국군 제11사단의 제20연대는 설악산 준령을 따라 적을 추격하여 협소한 기동공간과 산악지대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5월 11일 저항령 부근에서 무려 31시간의 결전을 치르며 저항령 전방 989고지로 진출한다.
이렇게 동부전선의 국군이 미조리선 공격작전에서 38도선을 연하는 캔사스선 점령을 목전에 두게 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서부 및 중서부지역 부대들도 캔사스선으로 재진출하도록, 문산-춘천 간과 인제를 공격을 게획하였다. 그러나 5월 11일 적군이 수일내 공격을 재개한다는 정보가 입수됨에 따라 모든 공격계획을 취소하고 13일 인제-가리봉-설악산-대포리를 잇는 노네임선 전방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