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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비문을 놓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내용은 동일하나 비문이 쓰인 연대는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고고학보다도 문헌사학을 통한 고대사 해석시에는 이러한 명문, 즉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학문세계에 새로운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부족한 기록을 보태는 것은 물론 당시의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초 발견 당시 전후사정 볼 것 없이 쉽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교과목으로 채택한 경전이 돌에 새겨진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일본 어용사학자의 선두주자나 다름없었던 비중있는 학자가 발표했기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됐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임신서기석의 연대가 통일후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성덕왕대의 것이라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 강령을 보면 첫째가 임금,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며, 둘째가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셋째가 벗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며, 넷째가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진평왕때 원광(圓光)스님이 마련한 이 강령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관 련 기 사] ‘화랑 중의 화랑’ 문노
‘미스 신라’가 미실이라면 ‘미스터 신라’는 문노.
이종욱 서강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미실은 왕 3명(진흥·진지·진평왕)과 태자(동륜), 화랑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모두 8명을 성의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과 화랑도 조직을 쥐락펴락했던 신라 최고의 여인.
반면 AD 579년 8세 풍월주에 오른 문노(536~606년)는 화랑정신의 표상이었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은 ‘화랑중의 화랑’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로 추앙했을 정도다. 당대 화랑도는 7세 풍월주 설화랑부터 파가 나뉜다. 설화랑의 화랑도는 향가와 청유를 즐겨 ‘운상인(雲上人)’으로, 8세 풍월주가 된 문노의 화랑도는 무사와 호탕한 기질을 자랑했기에 ‘호국선(護國仙)’으로 각각 일컬어졌다.
삼한통합을 이룬 ‘화랑 정신의 전형’인 문노의 행적을 보자. 554~579년 문노가 백제·고구려·북가야를 잇달아 치고 큰 공을 세웠으나 상급을 받지 못했다. 이에 부하들 가운데 불평하는 자가 있자 크게 꾸짖었다. “상벌이란 소인의 일. 그대들이 날 우두머리로 삼았거늘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 문노는 진흥왕이 급찬의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의리’ 또한 끝내줬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왕의 딸. 사다함이 가야원정을 떠나며 동행을 요청했지만 문노는 “어찌 어미의 아들로 외가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하고 거절한 의인(義人)이었다.
부부관계도 타의 모범이 됐다. 어찌보면 ‘공처가’ 소리를 들을만 했다. 사소한 일까지 아내(윤궁)에게 물어보았다. 남들이 “초년의 기상이 없어진 게 아니냐”라고 힐난하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왕년엔 그런 사람들을 흉봤는데 지금 보니 아니야. 너희들도 장가 한번 가봐”. 보다못한 부인이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는데 낭군은 술도, 색(色)도 절제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첩 하나 두기를 권했다. 문노의 변. “색을 좋아하면 당신이 질투할 것이요, 술을 좋아하면 당신이 할 일이 많을 텐데…”
화랑세기는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했고, 청탁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졌다. 낭도들이 죽음으로 충성을 바쳤다. 이로써 사풍(士風)이 일어나 꽃피웠으니 통일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텄다”고 칭송했다.
〈이기환기자 >
[출처] : 조유전 / 한국사의 미스테리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