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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성(無償性)/무상성(無常性), Aug 05, 2023.
(신을 믿지 않는 우리 무신론자들은 나의 생이 그냥 공짜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상성(無償性, gratuité)이다.
흔히 우리는 얼굴에 주름진 늙은 노파의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 시절 사진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상성(無償性)은 이처럼 인생사의 덧없음을 뜻하는 무상(無常)이 아니다.
문제는 존중받는다는 것이 아무나/누구냐인가, 존중받을 만해야 존중을 받느냐에 달렸다.
존중과 배려를 어떻게? 무조건이냐 하는 걸 보고냐 이것만 정하면 되겠다.)
-. 사르트르의 소설 제목 『구토』는 인간의 이러한 무상성과 우연성을 자각한 청년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의 생리적 반응이다. 청년의 이름은 로캉탱이다.
-. 결국 우리의 존재는 공짜로 주어져 아무런 가치가 없고, 꼭 태어나야할 필연성이 없이 그저 우연히 던져진 우연성이라는 뜻이다.
-. 나는 어떤 자리에 꼭 필요한 존재라느니, 또는 나의 생존에는 이러 저러한 원인이 있다느니 하는 구실들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주로 권력 있고 돈 많은 그랑 부르주아(grand bourgeois, 大 부르주아) 들이다.
-. 사르트르는 2차 대전 이후에야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격렬한 마르크시스트 투사가 되었지만 부르주아지에 대한 강한 증오심은 이미 이차대전 전, 그가 아직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던 시절, 철학 소설 『구토』를 쓴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자신의 무상성을 은폐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자신의 대자적 존재, 무, 자유를 굳이 부정하고 자기를 사물의 존재 양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랑 부르주아들은 권리의 개념을 가지고 자기기만을 시도한다.
-. 그 누구도 사람에게는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가 없는데,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는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인데,
부르주아들은, 마치 자기들에게만은 살 권리가 당당하게 주어져 있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 사르트르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사망했으므로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얹혀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마치 미혼모가 아이 하나 낳아 데리고 들어온 것처럼 어머니는 다시 미성년자로 돌아가, 엄격한 아버지와 신경질적인 어머니 밑에서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가끔 어린 사르트르가 집안을 어지르면 어머니는 아이의 귀에 대고 “조심해! 이건 우리 집이 아니야!”라고 귀띰해 주었다.
-. 결국 권리 개념은 소유의 개념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재산을 가진 명문가의 상속자들은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데, 아무런 재산도 없고 가정이라는 확고한 뿌리가 없는 사람들은 권리의 의식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것이 그를 바람이 불면 날아갈듯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재산이란 이처럼 존재 그 자체를 나타내 주는 물건이다.
-. 한편 생각하면 모든 인간은 본래 어떤 자리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든 인간 존재는 무상적이고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면 그 누구도 정당화된 존재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양식은 무(無)이고, 그것은 자유이니까. 그리고 이 존재는 결코 사물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즉자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물렁물렁하여 아무런 고정된 형태가 없는 대자존재이니까. 그런데 대 부르주아들은 권리 개념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권리 개념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여 자기들의 존재가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오만함은 가소로운 자기기만일 뿐이라고 사르트르는 주장한다.
-. 자신이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기본 속성을 무시하고, 어떤 허구의 가건물을 세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를 은폐하려 하므로 그들은 자기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의 당당한 표정이나 행동은 영락없이 석고상이나 돌기둥을 닮았다. 다시 말하면 대자 존재가 아니라 사물의 존재양식인 즉자존재를 닮은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인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존재론적 근거이다.
-. 처음에는 자신의 잉여적 삶에 한없는 슬픔을 느꼈지만 그러나 사르트르는 곧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신의 존재만 잉여적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이 다 그런 것이다. 자기는 그것을 깨달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다. 자기의 명철성은,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고, 물려준 재산이 없었고, 외가에서 얹혀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재산과, 이름 있는 가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을 한없이 쓸쓸하게 했던 그 박탈감의 조건들은 오히려 차원 높은 축복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것이 그지없는 행복이었다고 사르트르가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푸코의 독특한 권력 개념이 태동하는 것을 본다.
이상, 박정자의 <실존주의 시리즈 12>에서.
(https://www.facebook.com/chungja.park/posts/6255728634518881)
=> 서구 천재 철학자들의 생각을 확장해간 공부방법이 이렇다.
2개의 무상론을 비교한 이 말이 결국은 무신론과 유신론자들의 주장과 같고, 또 오늘날 인간 사회의 기본이 된 인권이니, 자유의 개념도
다 포함된, 어쩌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것이 종교가 있는 자기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기 공부방식의 출발점이었다.
-. 서구는 철학적 개념으로 점차 변화해간 것이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고, 종교도 이미 이판사판이 되었다.
-. 동양의 명상/묵상/참선의 구도적 각종 종교의 맥도 썩을 대로 썩어서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
-. 이게 어렵기는 어려운가 보다.
-. 이런 공부의 기본은 개인적 자각에 의해 이웃을 포함한 정치적 홍익까지 완성해야 다 이룬 것이 된다.
어려울 것 같지만, '수신재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다. 문제는 수신도 안된 자들이 재가도 못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지구촌과 우주를 경영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다 생긴 오늘의 문제다.
-. 사회/국가/지구/우주를 수신도 안된 친구들이 다스린다고 다스려지겠는가?
-. 사회도 결국 못한 '수신'처럼 빈 냄비 두드리다가 끈떨어지면 사라진다.
그런 인간들이 국가도 그렇고, 지구/우주까지 대를 이어 영원할 것처럼 연대하여 폼을 잡는다.
-. 그래서 지구라는 곳이 우주의 감옥이라고 말했나 보다.
감옥도 함께 하면 천국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혼자라도 깨달아 자기 할 바를 하고 죽으면 그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 아니냐? 그러면 또 뭐하자는 것일까?
-. 그러다 다 부질없다고 할 것이면, 생명이나 삶이란 것도 결국 필연(유신론)이 아니고 우연(무신론)이라고?
신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또 어떻겠냐? 사는 꼬라지가 꼬라지같아야 하는데, 인간이란 미물들이 그걸 그토록 하기 어렵다는 것이 미물스럽기만 하다. #
박정자
5월 25일 ·
실존주의 시리즈 12
그랑 부르주아들의 권리 개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또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이 있었던 말은 아마도 부조리(absurdité)와 정당화될 수 없음(injustifiabilité)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이 두 말은 거의 같은 뜻으로, 인간은 존재이유나 존재의 필연성이 없는 우연한 존재라는 의미다.
길가에 구르는 저 돌멩이는 세상에 생겨나 저렇게 존재하고 있을 하등의 이유도 없고, 실현시켜야할 어떤 목적도 없다. 저 자리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그저 단지 우연하게 생겨나 우연하게 그 위치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잉여물이다. 그 돌멩이의 존재는 도저히 이치에 닿지 않아 부조리하고 그 무슨 말로도 정당화 시킬 수 없다.
물건은 그렇다 치고, 그럼 사람은 어떠한가? 신이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사람도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할 필연적인 이유나 목표가 없다 어떤 임무를 띠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괜히 우연하게 태어나, 왜 사는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표류하다가, 출생만큼이나 우연하게 또 갑자기 죽는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신이 나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고, 그 임무를 수행하라는 대가로 나를 이 세상에 내보냈다면 나의 생은 공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얼마큼의 값을 치른 것이고 따라서 나의 인생은 그 만큼의 값이 나가는 당당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우리 무신론자들은 나의 생이 그냥 공짜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상성(無償性, gratuité)이다.
무상성(無償性)은 무상성(無常性)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얼굴에 주름진 늙은 노파의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 시절 사진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상성(無償性)은 이처럼 인생사의 덧없음을 뜻하는 무상(無常)이 아니다. 6·25때 미국이 대가없이 우리에게 준 무상원조, 의무교육 대상 아동들에게 실시하는 무상 교육, 초중등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공짜로 식사를 제공하는 무상급식 등, 아무 대가 없이 공짜로 주어졌다는 의미의 무상성이다. 공짜로 생긴 물건을 우리는 별로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싸게 돈 주고 산 물건은 애지중지 하지만 공짜로 받아온 물건은 잠시 두었다가 내다 버리기 일쑤다.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런 무상성이다. 자기원인(cause de soi)도 없고, 임의적이고, 정당화될 수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결국 무상성은 우연성과 같은 뜻이다. 어느 상점에서 공짜로 준 서비스 상품이 우리에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값없는 물건이듯이, 우리 인생도 무상성, 즉 잉여물(too much, de trop)이다. 사르트르의 소설 제목 『구토』는 인간의 이러한 무상성과 우연성을 자각한 청년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의 생리적 반응이다. 청년의 이름은 로캉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조차 거추장스럽고 귀찮게 느껴지는 한 더미의 실존자들이다.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있을 손톱만큼의 이유도 없다. 우리들 모든 실존자들은 혼란스럽고 막연하게 불안감을 느끼며 다른 실존자들에 대해 자신이 잉여물임을 느낀다. 저 나무들, 철책문, 조약돌들 사이에 성립되는 유일한 관계는 ‘잉여적’ 관계이다. 저기 내 앞에, 약간 왼쪽에 있는 마로니에도 잉여물이다. 나른하게, 축 늘어져, 하릴 없이 음식물이나 소화시키고 있고, 머릿속에는 우울한 생각만 가득 차 있는 나, 나 역시 잉여물이었다.”
로캉탱의 까닭모를 구역질은 이 엄청난 사실에 대한 반응이다. 사람들은 모두 마치 자신의 삶에 필연성이 있는 듯이, 자신에게는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 듯이 살아가고 있지만 실상 우리 인간은 이처럼 존재근거가 없고 유동적이고 어처구니없다. 우리가 ‘부조리’로 번역한 프랑스어 원어는 absurde, 영어로는 absurd 이다. 철학 용어와는 거리가 먼 ‘터무니 없다’, ‘어처구니 없다’, ‘말도 안 된다’라는 뜻의 일상적 표현이다.
뭐가 터무니 없다는 얘기인가? 위에서 한 얘기를 다시 한 번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존재는 그것이 생겨난 원인도 없고, 제멋대로이고, 왜 살아야 하는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우리의 존재는 공짜로 주어져 아무런 가치가 없고, 꼭 태어나야할 필연성이 없이 그저 우연히 던져진 우연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연성과 무상성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근본적인 존재양식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이다. 그저 외관에 불과해서 우리가 문질러 닦으면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로캉탱의 심장은 빙빙 돌고, 모든 것이 허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구토’라는 제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실존의 이러한 근본적인 존재 양식을 모든 사람들이 다 느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살고 있고, 또 그것을 느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우연성을 은폐하고, 눌러 없애려 한다. 나는 어떤 자리에 꼭 필요한 존재라느니, 또는 나의 생존에는 이러 저러한 원인이 있다느니 하는 구실들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주로 권력 있고 돈 많은 그랑 부르주아(grand bourgeois, 大 부르주아) 들이다.
사르트르는 2차 대전 이후에야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격렬한 마르크시스트 투사가 되었지만 부르주아지에 대한 강한 증오심은 이미 이차대전 전, 그가 아직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던 시절, 철학 소설 『구토』를 쓴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토』의 다음 구절을 보자.
“그게 구토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권리 개념으로 이것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 무슨 불쌍한 거짓말이란 말인가. 아무에게도 권리는 없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무상적(無償的)이다. 그들도 자신을 잉여물로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도 속으로는 은밀하게 자신이 잉여적이라는것, 다시 말해서 무기력하고, 희미하고, 슬픈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무상성을 은폐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자신의 대자적 존재, 무, 자유를 굳이 부정하고 자기를 사물의 존재 양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랑 부르주아들은 권리의 개념을 가지고 자기기만을 시도한다. 그 누구도 사람에게는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가 없는데,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는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인데, 부르주아들은, 마치 자기들에게만은 살 권리가 당당하게 주어져 있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당당한 권리의 화신 앞에서 로캉탱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더욱 더 자신은 존재할 권리가 없는 듯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훌륭한 가문, 아름다운 아내, 공부 잘하는 자식, 그리고 우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자신에게는 직업도, 가족도, 친구도 없고, 현실에 뿌리박을 만한 아무런 구체적인 삶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권리의 개념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이 가정, 직장, 사회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반해 자신은 마치 돌멩이나 풀, 또는 한갓 미생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찮은 풀이나 돌멩이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나와 제멋대로 나딩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도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나와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권리 개념은 소유의 개념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사르트르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사망했으므로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얹혀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마치 미혼모가 아이 하나 낳아 데리고 들어온 것처럼 어머니는 다시 미성년자로 돌아가, 엄격한 아버지와 신경질적인 어머니 밑에서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가끔 어린 사르트르가 집안을 어지르면 어머니는 아이의 귀에 대고 “조심해! 이건 우리 집이 아니야!”라고 귀띰해 주었다.
자서전인 『말들』(Les mots, The Words)에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한 번도 누구의 윗사람인 적이 없었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 적도 없었다. 명령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똑같은 일이다. […] 내 평생, 그저 재미로 하는 것 말고는, 한 번도 남에게 명령을 내려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권력이라는 종양에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복종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재산을 가진 명문가의 상속자들은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데, 아무런 재산도 없고 가정이라는 확고한 뿌리가 없는 사람들은 권리의 의식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것이 그를 바람이 불면 날아갈듯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재산이란 이처럼 존재 그 자체를 나타내 주는 물건이다. 재산이 없으므로 사르트르는 자신의 존재가 견고하지도, 한결같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말들』에서 자신을 기차표 없는 무임 승차객에 비유하며 당당한 권리 없이 허공중에 떠있는 자신의 존재를 애수어린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의자에서 잠이 들었는데 여객 전무가 흔들어 깨운다. 표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는 표도 없고, 즉석에서 표를 살 돈도 없다. 신분증도 집에 두고 왔다. 객찰원을 어떻게 속이고 들어 왔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불법으로 객차에 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황하여,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초라한 무임 승차객,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라고 했다. 이 세상에 자기 몫으로 남겨진, 자기만의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모든 인간은 본래 어떤 자리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든 인간 존재는 무상적이고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면 그 누구도 정당화된 존재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양식은 무(無)이고, 그것은 자유이니까. 그리고 이 존재는 결코 사물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즉자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물렁물렁하여 아무런 고정된 형태가 없는 대자존재이니까. 그런데 대 부르주아들은 권리 개념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권리 개념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여 자기들의 존재가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오만함은 가소로운 자기기만일 뿐이라고 사르트르는 주장한다.
자신이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기본 속성을 무시하고, 어떤 허구의 가건물을 세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를 은폐하려 하므로 그들은 자기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의 당당한 표정이나 행동은 영락없이 석고상이나 돌기둥을 닮았다. 다시 말하면 대자 존재가 아니라 사물의 존재양식인 즉자존재를 닮은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인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존재론적 근거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잉여적 삶에 한없는 슬픔을 느꼈지만 그러나 사르트르는 곧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신의 존재만 잉여적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이 다 그런 것이다. 자기는 그것을 깨달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다. 자기의 명철성은,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고, 물려준 재산이 없었고, 외가에서 얹혀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재산과, 이름 있는 가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을 한없이 쓸쓸하게 했던 그 박탈감의 조건들은 오히려 차원 높은 축복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것이 그지없는 행복이었다고 사르트르가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푸코의 독특한 권력 개념이 태동하는 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