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옛날부터 인류와 함께한 과업이 하나 있다. 인류가 식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 뒤를 쫓았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지듯, 식사의 즐거움 뒤엔 반드시 이 그림자가 존재했다. 정말 귀찮지만 무시할 순 없기에, 우리는 이 과업을 달성해야 한다. 이 과업의 이름, 그것은 설거지다.
설거지.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인류는 오랜 기간 설거지와 싸워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신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기초적인 무기,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 싸워온 동반자가 존재한다. 수세미다.
안타깝게도 수세미가 항상 일을 해결해주진 않는다. 우리가 맨밥에 김치만 먹고 산다면 수세미만으로 능히 과업을 달성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란 자고로 끊임없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는 동물이 아닌가. 우리는 지구에서 하나뿐인, 복어와 개복치를 먹는 생물이 아닌가. 인간의 노력과 집념은 끝이 없었고, 그 결과 우리는 무수한 음식의 맛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맨밥에 김치만 먹고는 살 수 없다. 김치찌개도 먹고 싶고, 볶음밥도 먹고 싶고, 불고기도 먹고 싶고, 계란찜도 먹고 싶지 않은가? 문제가 있다면, 이 음식들은 다들 각자의 설거지를 남긴다는 거다. 이 설거지들의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다. 음식을 먹다보면 우리는 가끔 기름기 좔좔 흐르는 접시를 마주하기도 하고, 까맣게 탄 냄비와 프라이팬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것들을 수세미만으로 처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탄 냄비와 눌러 붙은 음식물은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이것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손톱으로 긁는다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비효율적이며 많이 하면 심적, 육체적 고통이 동반된다. 게다가 태운 범위가 넓다면 이 방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신적인 무기를 하나 발명했다. 까맣게 타며 내 속까지 태우는 어둠. 그 어둠을 몰아내는 광명. 그 광명은 바로 철수세미다.
철수세미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사용한 사람은 없다. 철수세미란 그런 존재다. 사용법은 아주 원시적이지만 그만큼 막강하다. 내가 처음으로 철수세미를 만난 건 2016년 5월 둘째 주다. 공정무역 캠페인이 열리는 덕수궁 돌담길, 그때 나는 땡볕 아래서 달고나를 팔고 있었다. 달고나. 맛있지만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그만큼 끔찍한 음식은 없다. 국자는 새까맣게 타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렸다. 잡일을 도맡아 하던 나는 탄 국자와 철수세미 하나를 들고 공중화장실로 갔다. 그때 시커먼 국자를 박박 벗겨내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한 20분 정도 밀어낸 결과, 나는 국자의 색을 90%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을 두 번 정도 반복했다.
그 이후로 철수세미만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 이후로 만난 까만 설거지는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벗겨낼 수 있다. 그때마다 난 마음속으로 철수세미에게 경의를 표한다. 철수세미가 없다면 어떻게 이 과업을 완수했을까 생각하며.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 생각을 누가 처음 했을까?’ 하는 의문. 생각해보면 철수세미는 아주 단순한 사고의 결과물이 아닌가? ‘냄비가 까맣게 타서 수세미로 닦아낼 수 없어 → 그렇다면 수세미가 약한 건 아닐까 생각해봅시다 → 단단한 철로 만들면 되겠네 → 철수세미 탄생’ 이렇게 말이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생각하기 어려울 아이디어다. 하지만 아주 효과적이라 어떻게 대체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구멍 뚫린 주전자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본의 한 남자가 어느 날 몸살이 나 집에서 쉬게 되었다. 그러나 부엌에서 물을 끓이는 주전자 뚜껑이 덜컹거리며 잠을 방해했고, 화가 난 남자는 송곳으로 주전자 뚜껑을 뚫어버렸다. 그러자 뚜껑은 덜컹거리길 멈췄고, 남자는 이를 특허로 신청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해 여러 회사와 계약을 맺었고,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분명 많은 사람이 불편함을 느꼈을 거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은 없었다. 이 아이디어는 아주 단순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생각하기 어려웠을 거다. 사람들은 문제를 여러 가지 고차원적 방식으로 해결하려 애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 기술의 정수를 총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가 수없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주 단순한 일차원적 방법이 세상을 바꿔놓을 때가 있다.
실생활에서 어려운 문제를 맞이할 때, 가끔은 단순한 눈으로 세상을 보자. 그제야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보일 수 있다. 단순함의 다른 이름은 참신함일 수 있다. 남들이 어렵게만 생각할 때 가장 새로운 생각은 단순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수세미를 만든 이름 모를 누군가. 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첫댓글 그 중-> 그중
고통이 동반한다-> ~ 동반된다
했을까?’하는 -> '~ 했을까?' 하는 (띄기)
설거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는데, 철수세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철수세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집요하게 팔 줄 알았는데 '불편함을 해결하는 건 의외로 단순한 곳에서 발견된다'는 주제로 다 아우르고 있따. '인류의 과업'이라는 표현을 쓴 건 약간의 익살을 가미하기 위한 방편이겠으나. 전체적으로 뭔가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설거지'와
'철수세미'에 대한 가지들이 금새 정리되고 그냥 훌쩍 전체 주제로 가버리는 느낌이다. 차라리
인류 과업 이런 이야기하지 말고, 그냥 바로 '철수세미에 대한 집요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거창하지 않게 아주 단순한 생각이 실생활의 큰 어려움을 용이하게 해결해준다는 정도로만
이야기되는 게 '철수세미'가 가진 의미로 충분할 것 같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과도하게 거창하게 이야기되는 느낌.
띄어쓰기 맞춤법은 이제 거의 잘 맞추는구나.
보조용언 띄어쓸지 붙여쓸지만 잘 통일해보자.
싸워'왔고'. 싸워 '온', 먹다'보면', 벗겨'내던', 바꿔'놓을'. 뚫어 '버렸다'. 생각해'봅시다', 닦아'낼', 생각해'보면', 해결해'주진'
=> 여기 뒤에 있는 작은 따옴표 안의 것들이 모두 보조용언인데. 이게 어떤 건 붙이고 어떤 건 띄었어. 붙이든지 띄어 쓰던지 자신의 한 글 안에서 통일시켜야 한다.
선생님은 원래 다 띄어 썼는데 지난 신문만들기 한 이후로 샘은 이제 붙여쓰고 있어. 보통 신문에서는 지면을 아끼기 위해 붙여 쓰지. 온라인상에는 지면을 아껴야 하는 건 없겠지만 최대한 글이 글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대부분 붙여 쓴단다.
철수세미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