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밥도 데워먹지도 말고 추어도 불을피우지말라는 것이군요 남극이나 북극에 사는 사람도 불을 피지말고 안식일에는 일체 불을 피우면 안되는군요 자손님은 고대 유대인들과 같은 정신이지요 그들은 님같이 그 한구절때문에 안식일에 하지말아야할 63가지 규례를 만들어 벌벌 떨면서 율법을 지킨 민족입니다 그런 상황을 치료하시려고 하늘에서 예수님이 1세기초반때에 내려오신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보같은 말씀을 하는군요 님이 올린 (출35;3)이 무엇인지 모르나요? 출애굽하는 행적기 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상황에서 하늘에서 희한한만나도 내려왔고 그렇게 다 주셨기 때문에 각처소에서 불을 피우는 노동하지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도 만나를 주신다면 개인들 일일히 밥할 이유가 없으니 불을 피우지 말라고 요즈음도 연장 했을것입니다 /무슨 라이터 불같은 것이 아니예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각집에서 성냥불도 피우면 안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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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꿈보다 해몽이 좋았다고 하더니, 박용진씨의 해석이 매우 그럴듯합니다. 불을 피우지 말라는 것이 다만 먹는 것에만 해당한다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불은 사막의 밤에 추위를 쫓고 빛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의 생활로 비유하면, 가스레인지를 켜는 것 외에도, 난방을 하기 위하여 가스보일러를 켜고, 집안을 밝히기 위하여 전등을 켜는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가스보일러는 자동온도조절기에 의해서 자동으로 작동한다 치더라도, 전등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성냥불이나 촛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말했지만, 한국의 음식과 그 당시 이스라엘의 사막에서의 음식이 매우 차이가 납니다. 지금 한국의 음식은 불이 없으면 거의 식사를 준비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사막에서의 음식은 미리 만들어 먹는 것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불이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나라는 것은 지금의 밀가루랩 같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미리 구워놓고 저장하여 먹기 편한 음식이며, 우리나라의 쌀밥과 같이 그들의 주식입니다. 여기에 다른 야채나 고기를 곁들여 싸먹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음식도 이제는 미리 만들어 보관하여 먹을 수 있을만큼 생활이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불을 켜지 않는
실행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전기밥솥도 보온기능을 안식일에 사용해선 안된다고 보겠고, 냉장고나, 전자레인지 모두 불에 속한 것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용진씨의 해석대로하자면, 이정도의 생활가전제품은 특히 부엌의 가전제품의 가동은 허용할 수 있다면, 적어도 먹기위하여 조리하는 행위(역시 노동에 속한다고 해석가능하지요?)를 줄이기 위하여 그 전날 음식물을 조리해두면 율법을 범하지 않고 안식일을 보내지 않을까요? 제게 상관없는 말이지만, 이정도라면 아마도 모두 긍정할 것으로 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교회를 가기 위하여 자동차를 타지요? 자동차는 어떤 기계인가요? 어떤 이동수단인가요? 그 힘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습니까? 지금의 자동차는 내연기관입니다. 가스상태의 휘발류를 엔진룸에서 전기 스파크로 불을 붙여서 그 터질때 발생하는 압력의 힘으로 엔진을 움직여서 우리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입니다. 여기에는 필수적을 /불/이 작용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자동차 역시 안식일에는 사용하여서는 안됩니다. //걸어가야지요// 그러니, 교회는 먼곳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까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거리의 교회를 가야지요.
그래서, 초기의 안식교 글을 보면, /local church/, 즉 /지방교회/, 혹은 /지역교회/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심지어 걸어가는 거리조차도 제한하였으므로, 안식교는 필수적으로 모든 지역에 그 교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에 기인한다 하겠지요. 박용진씨의 교회는 그 지역의 교인들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먼거리에서 차를 타고 오게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멀리 성도가 있다면, 그 지역의 교회로서 다시 모이게 해야합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므로, 처음에는 가정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역자를 보내는 일입니다. 교회가 안정되면 다른곳으로
가서 또 떠나면서 그 지역의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장로와 집사등을 임명하고 떠나야 할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자신의 교회가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와 사역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따르고 있습니까? 율법순종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참 교회/라면, 그 교회의 모습에 있어서도 성경적으로 보여야 할 것입니다. 보인다기 보다 그 내용을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방교회는 이런 교회의 성경적인 측면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셔야 합니다.
율법을 순종한다면서, 오직 /십계명/만을 율법으로 받아들이며, 여기의 네째 계명인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열심으로 지킨다하면서 안식일에 관한 그 수 많은 계명들을 무시한다면, 이는 교리를 위한 교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차라리 십계명만이 지킬 율법이란 말을 안하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면, 적어도 성경에서, 율법 안에서 말하는 생활의 기준의 범주는 벗어나지 않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철저한 무리들이, 몰몬교, 아미쉬, 여증회, 등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들은 차라리 매우 율법에 엄격히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결코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고, 허용하는 것을 합니다.
이에 비교하면 안식교는 매우 실용주의적인 율법순종 노선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할 수 있다. 율법순종은 /십계명/에만 국한하고, 나머지 법은 /의식에 관한 법/, /이스라엘의 국가법/ 혹은 /민법/이므로 지금의 안식교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폐지된 법이다라며 매우 편리하게 해석하여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다른 여러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율법주의자도 아니요, 더더우기 바리새인과 같은 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율법을 그것도 성경의 율법이라하는 십계명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게되어 순종한다고 한다면, 나머지 율법에 대해서도 그러한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용진씨의 주장대로, 안식교에서는 십계명 외의 다른 율법은 모두 폐지되었으므로 따를고 순종할 것이 없고, 오직 십계명만이 여러분들이 순종할 율법으로 남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매우 실용주의적인 믿음과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 모든 것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자신을 통하여 표현되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갈망하는 자들이며, 생활가운데에서 그러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실패하여 하락하고 타락하는 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하여 모든 나머지 그리스도인들, 즉 박용진씨의 표현을 빌어 개신교인들을 모두 그러한 부류에 넣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역으로 안식교인들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율법은,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여러차례 다룬 것처럼 고귀합니다. 결코 율법이 하찮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그 율법 위에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박용진씨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창시자라고까지 표현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따르고 순종할 목표, 즉 푯대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 자신 뿐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그 풍성을 모두 가지고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지게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가 아닌 하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들이며,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율법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첫댓글이것봐요! 율법(십계명)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이 명령을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은 하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고 구원받기 전의 우리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또 구원해 주실 분으로 믿는 순간부터는 이 명령에 반응할 이유가 있는 신분으로 그 입장이 바뀌어졌습니다. 아주 상식적인 얘기를 해 온건데, 무슨 고차원적인 수준인양 이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을 언제까지나 꾸역꾸역 쏟아 놓을겝니까? 마치 여기누가 그리스도를 제처두고 율법만 얘기하는 양 혼자서 그 날리를 처대냔
성경에서, 그것도 신약에서, 율법, 즉 십계명이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하든가요? 그런 구절은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은 여러곳에서 보았지만,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임을 보았지만, 율법/십계명이 주님의 지상명령인 것은 보질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로 받으셨습니다. 즉, 법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생명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었음은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자 노력하였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은 우리가 언제나 항상 하나님께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이상 우리의 노력과 순종으로 의롭게 될 그 이상의 수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얼마나 높고 확실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의는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이상의 의의 수준이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의/입니다. 그것을 깨닫기만 하면 우리가 노력하여 얻고자 하는 의가, 우리가 순종하여 더 높이고자 하는 의가 얼마나 낮은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다만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힘쓰십시요.
말입니다. 여기 누가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자신을 통하여 표현되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갈망"하지 않을자 누구이며, 그 "생활 가운데서 힘쓰지" 않을자 누구더냔 말입니다. 십계명은 이를 제정하신분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이 표현되기를 갈망하는 자들"에게서만이 십계명(주님의 명령)의 요구가 반영된다는 얘깁니다. 언제나 하는 소리지만 그리스께순종, 율법에 순종, 조금도 틀리지 않는 같은 소립니다. 이를 서로 상치하는 관계로 놓게되면 주의 명령에 불순종하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습니다.
십계명은 그 것을 제정하신 분이 성품이 반영되어 있지만, 그 십계명을 순종하려는 자들에게는 아직 그 성품이 주입되고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성품을 얻고자 그 십계명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은 자는 그 믿음 하나로 그 의의 주인의 성품을 그대로 받고 그 의의 성품,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고 있습니다.
첫댓글 이것봐요! 율법(십계명)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이 명령을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은 하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고 구원받기 전의 우리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또 구원해 주실 분으로 믿는 순간부터는 이 명령에 반응할 이유가 있는 신분으로 그 입장이 바뀌어졌습니다. 아주 상식적인 얘기를 해 온건데, 무슨 고차원적인 수준인양 이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을 언제까지나 꾸역꾸역 쏟아 놓을겝니까? 마치 여기누가 그리스도를 제처두고 율법만 얘기하는 양 혼자서 그 날리를 처대냔
성경에서, 그것도 신약에서, 율법, 즉 십계명이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하든가요? 그런 구절은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은 여러곳에서 보았지만,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임을 보았지만, 율법/십계명이 주님의 지상명령인 것은 보질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로 받으셨습니다. 즉, 법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생명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었음은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자 노력하였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은 우리가 언제나 항상 하나님께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이상 우리의 노력과 순종으로 의롭게 될 그 이상의 수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얼마나 높고 확실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의는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이상의 의의 수준이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의/입니다. 그것을 깨닫기만 하면 우리가 노력하여 얻고자 하는 의가, 우리가 순종하여 더 높이고자 하는 의가 얼마나 낮은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다만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힘쓰십시요.
정신 차리세요!! 뭘 착각하고 있습니까? 언제 어느 때를 두고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라고 정의하는거요? 우리가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자 노력하였던" 때가 언제였냔 말입니다. 믿고 구원받기 전인가요? 후인가요? 왜 갈팡지팡입니까?
you don't know when it was. You don't know who you were. That is your real being.
영어로 쓰면 뭐가 더 돋보인다 캅디요? 쉬운 말로 써요!! 갈팡지팡거리지 말고!
말입니다. 여기 누가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자신을 통하여 표현되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갈망"하지 않을자 누구이며, 그 "생활 가운데서 힘쓰지" 않을자 누구더냔 말입니다. 십계명은 이를 제정하신분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이 표현되기를 갈망하는 자들"에게서만이 십계명(주님의 명령)의 요구가 반영된다는 얘깁니다. 언제나 하는 소리지만 그리스께순종, 율법에 순종, 조금도 틀리지 않는 같은 소립니다. 이를 서로 상치하는 관계로 놓게되면 주의 명령에 불순종하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습니다.
십계명은 그 것을 제정하신 분이 성품이 반영되어 있지만, 그 십계명을 순종하려는 자들에게는 아직 그 성품이 주입되고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성품을 얻고자 그 십계명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은 자는 그 믿음 하나로 그 의의 주인의 성품을 그대로 받고 그 의의 성품,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고 있다"는 객관적 증거가 주의 명령(십계명)에 반응하는 행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고 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십계명은 서로 관련이 없습니다. 성경에 이 둘이 관련이 있다는 구절이 있는지요?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마치 고차원적인 논리인양 주입하려 애쓰지만 그건 최소한의 상식도 부정하는 꼴입니다.
최소한의 상식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주님께, 하나님께 있어서 최소한의 상식이 무엇인가요?
내가보기에 그 최소한의 상식은 당신의 행실에서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소이다.
저의 행실을 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