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에서 열린 벚꽃축제에 몰린 인파. |
지난 8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네 번째 1800톤급(214급) 잠수함인
김좌진함이 진수하면서 일본의 독도 침탈을 가정한 한·일 간 무력충돌 시나리오도 등장하는 판이다.
대충 결론을 보면 ‘질적으로 무장한 일본, 양적으로 따라잡는 한국’이란 평가로 모아진다.
군병력은 적지만, 첨단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무력 수준이 결코 무시할게 아니라는 식이다.
한 나라의 힘은 잠수함이나 항공모함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21세기 파워의 정의는 이른바 하드파워로서의 군사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소프트파워로서의 국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하드파워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것이 반드시 하드파워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드파워만이 아니라 소프트파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여부가 21세기 파워의 잣대라 볼 수 있다.
소프트파워를 기준으로 한 한·일 간 격차는 ‘질과 양’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양과 양’으로 볼 때도 크게 벌어진다. 좋은 예로, 지난해 말 런던에서 발간되는
시사·문화잡지 모노클레(Monocle)가 발표한 ‘2012년 글로벌 소프트파워 랭킹’을 보자.
1위는 올림픽을 치른 영국이다. 2위는 미국, 3위는 독일이다.
10위권에 든 유일한 아시아 국가는 6위인 일본이다.
한국은 11위에 올라서 있다. 11위의 근거가 된 것은 싸이(Psy)의 강남스타일과 K팝(Pop)이다.
6위 일본은 음악 외에 패션, 음식, 장인(匠人), 만화 등이 근거이다.
한국은 싸이라는 인물 중심인 데 비해 일본은 인물을 받쳐주는
콘텐츠 자체가 소프트파워의 배경에 해당한다.
유행에 따라 피고지는 인물이 아니라 특별히 내세울 간판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두드러진 소프트파워 강국이 일본이라는 말이다.
지난 4월 9일, 워싱턴 국회의사당 내 케네디 코커서스 룸. 상원의원
패트릭 레이히(Patrick Leahy)를 비롯한 상하 양원 국회의원 수십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12월 숨진 아시아계 최초의 상원의원인
대니얼 이노우에의 명복을 빌기 위한 특별 이벤트이다.
하와이에서 출생한 일본계 2세인 이노우에를 기리는 행사의 주최자는
미·일협의회(www.usjapancouncil.org), 참가자는 100여명 정도이다.
미국 상원의원들의 인사말에 이어 일본대사도 참석해 고인을 기리는 말을 간단하게 건넸다.
이날 특별 이벤트의 하이라이트가 곧바로 이어졌다. 차도(茶道)였다.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이뤄진,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기념행사이다.
일본 다도의 최고봉에 선 우라센케(裏千家)의 15대 이에모토(家元·대표)
센겐시쓰(千玄室)가 직접 행한 차도가 이벤트의 꽃이었다.
90세의 센겐시쓰는 일본이 자랑하는 인간문화재라 보면 된다.
레이건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국왕 등 세계 정상이
일본을 방문할 때 차도의 달인(達人)으로 시범을 보인 인물이다.
이날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는 일본에서 전부 공수해온
다구(茶具)를 활용해 30여분간 다도가 이뤄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센겐시쓰의 손놀림 하나하나에 빠져들었다.
바닥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행해지는 개량형 다도지만, 참가자들의 호기심은 남달랐다.
센겐시쓰가 직접 만든 차가 작은 과자와 함께 미국 정치인들에게 나눠졌다.
미국인이 느끼는 일본차의 맛은 입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쓴 한약에 비견될 수 있다.
분말형 일본차의 맛을 아는 서방인은 극히 드물다.
놀랐던 것은 당시 이벤트에 참가한 미국 정치인들의 반응이었다.
다도의 예법과 의미를 아는 듯, 다기(茶器)를 천천히 살펴보면서 즐겁게 차를 마셨다.
거꾸로 젊은 의회 보좌진의 경우 차를 입에 대는 즉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행사가 끝난 뒤 일본인 보좌진에게 미국 정치인들이 일본차의 맛을 이해하는 듯하다고 물어봤다.
“워싱턴에서 이뤄지는 각종 다도행사를 통해 이미 수차례 일본차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일본차 특유의 쓴맛에도 익숙해 있다.
입에 대는 순간 얼굴을 찌푸리는 미국인은, 아직 한 번도 일본차를 경험하지 못한 초심자들이다.
” 미국 국회의사당 안에서 일본 다도 행사가 이뤄진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미국 정치인의 상당수가 다도를 경험한 사람들이란 것이 한층 흥미롭게 느껴졌다.
워싱턴은 21세기 로마이다.
총성 없는 전쟁, 외교전의 총본부가 워싱턴이다.
워싱턴은 미국, 나아가 세계를 상대로 한 소프트파워의 무대이기도 하다.
워싱턴은 해외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의 도시이다.
연방정부 공무원들이 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공무로 외국에 많이 나간다는 점에서 외국에 대한 관심이 높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미국인은 해외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아주 희박하다.
워싱턴은 예외이다. 소프트파워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워싱턴에서 만나는 일본은 소프트파워 강국으로서의 모습이다.
한국에서 연상되는 자위대나, 과거사로 점철된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에 관한 전시회나 이벤트가 열리면 다른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인파가 몰린다.
간단히 말해 일본 소프트파워에 대한 수요자가 ‘이상스러울만치’ 넘친다.
지난해 3월 30일부터 한 달간 워싱턴국립미술관(www.nga.gov)에서
이토 쟈쿠추(伊藤若冲) 특별전이 열렸다.
대형 화폭에 대담한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교토(京都)를 대표하는
화풍인 ‘림파(琳派)’의 최고봉에 속하는 화가이다.
필자도 당시 3일간 열린 전시회에 다녀왔지만,
갈 때마다 터져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밖에서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같은 시기에 열린, 피카소의 유년기 그림 특별전시관의 한산한 분위기와 크게 대조적이었다.
‘림파’라는 화풍을 미국인이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토 쟈쿠추는 18세기 초 교토에서 탄생한 일본의 수많은 화가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
유명하다고 해도, 일본인이거나 일본화 매니아 정도가 알 수 있는 인물이다.
관람객의 면면을 보면 그냥 놀러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데 익숙한 문화인들이 더 많은 듯 느껴졌다.
워싱턴에서 이뤄지는 일본 소프트파워의 최고봉은 매년 4월에 열리는 벚꽃축제이다.
지난해 100회를 맞은 미국 최고(最古)의 이벤트 중 하나이다.
미국의 봄은 수도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벚꽃축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축제 기간 동안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일본의 소프트파워를 체감한다.
음식·영화·패션·전통음악·노래 등 일본 소프트파워의
모든 것이 이 기간 워싱턴 전역을 무대로 펼쳐진다.
워싱턴의 일본 소프트파워의 특징 중 하나는 주최자의 성격에 있다.
관(官) 주도가 아니라 보통 일본인, 즉 민(民)이 소프트파워의 실행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주최자나 주최 단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사관이나 정부가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재 워싱턴을 대표하는 일본 소프트파워의 최고 전령사는
S&R재단(www.sandrfoundation.org)이다.
우에노 류지(上野隆司)와 구노 사치코(久能祐子) 부부가 운영하는 비영리 문화단체이다.
두 사람과 S&R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지난해 6월 22일자 워싱턴포스트지가 풀어준다.
“두 사람이 3300만달러에 달하는, 역사적으로 보존되는
건물을 구입한 뒤 각종 의문과 소문이 이어지고 있다.
… 그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엄청난 부자가 됐느냐?
그들은 엄청난 가격의 대저택을 통해 과연 무엇을 할 생각인가?”
워싱턴포스트는 58세의 남편 우에노와 57세의 부인 구노를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From Nowhere)’ 부부로 묘사한다.
워싱턴 사교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인이라는 것이다.
부인 구노가 말한다. “지난 15년간 우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파티나 얼굴을 내미는 분야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의 이름과,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세상에 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최근 들어서부터이다.”
두 사람은 의학자이자 바이오기업가이다.
남편인 우에노는 교토대학을 졸업한 뒤 게이오(慶應)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신약 개발에 들어간다.
자신이 설립한 바이오 벤처를 통해 녹내장과 변비에 관련된 신약을 개발한다.
특허권을 세계 시장에 팔아넘기는 과정에서 무려 30억달러를 벌어들인다.
일본 의학계에서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우에노는 21세기 들어 워싱턴에 정착한다.
의학 비즈니스가 아니라, 2000년 자신이 설립한 S&R재단을 통한 문화사업을 벌이기 위해서이다.
지난해 구입한 3300만달러 대저택은 자신의 문화사업을 벌이기 위한 공간이다.
두 사람의 취미를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이들 활동의 기반은 일본 문화나 일본인과 관련된 소프트파워이다.
젊은 일본인 음악가를 불러들여 고급스러운 연주회를 개최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문화행사가 이뤄진다. 현재 일본 소프트파워의 요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주회만이 아니라 다도 역시 S&R이 주력하는 부문이다.
원래 워싱턴에서 유행하던 일본 다도는 지난해 의회에서 선보인 우라센케이다.
그러나 우에노 부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올해부터 판도가 변한다.
우라센케에 이어 일본 다도 2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오모테센케(表千家)가 워싱턴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우에노 부부가 오모테센케 미국 동부지역 대표로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주류 다도가 워싱턴에서는 30억달러 거부가 퍼붓는 오모테센케의 위력에 맥없이 쓰러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도의 유파(流派)에 관계없이 일본 소프트파워가 워싱턴에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S&R은 자신의 행사를 아시아에 관련되거나 아시아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한국 대사관도 예외가 아니다.
백만장자 부부의 소프트파워 활동은 귀와 눈만이 아니라 혀와 입으로도 확대된다.
라면집이다.
워싱턴을 찾는 일본인, 나아가 일본에 대해 아는 미국인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푸념이 하나 있다.
“제대로 된 라면집 하나 없는 도시!” 한국에도 확산되고 있다고 들었지만,
일본 라면은 일본 소프트파워의 또 다른 카드로 받아들여진다.
라면 맛이 전부가 아니다.
특이한 서비스, 주방 분위기, 라면을 만드는 조리사의 모습, 세심하게 이뤄지는 조리 과정,
수백 가지가 넘는 각종 라면의 시식기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이 미국 청년들을 파고든다.
10달러 전후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뉴욕에 거주하는 미국 청년이라면 일본 라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교양의 필수일 정도로 일본 라면 문화는 미국을 파고들고 있다.
한국인이 프랑스산 와인이나 치즈를 대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필자도 직접 참가했지만, 매년 가을에 열리는 뉴욕 라면 페스티벌은
프랑스 보졸레누보 오픈 이벤트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베지(Veggie·야채) 유기농 슬로 푸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본 라면의 위상이다.
라면 전문집으로 워싱턴 차이나타운 한복판에 문을 열었다.
일본의 선술집인 이자카야(居酒屋) 스타일로 저녁에 가면 항상 만원이다.
일본인이 직접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본 본연의
라면 맛을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투자한 것이다.
우에노 부부가 주선하는 각종 문화행사의 뒤풀이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Hotel Hay Adams Washington D.C.
S&R재단과 더불어 일본 소프트파워의 워싱턴 대모(代母)로 군림한 여성도 빼놓을 수 없다.
에노키도 가시요(榎戸かし代)란 이름의 일본인으로 올해 초 경영 일선에서 정년 퇴직한 인물이다.
워싱턴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 호텔로 불리는 헤이애덤스호텔(www.hayadams.com)의
주인이자 경영자로 일한 인물이다.
1928년 설립된 헤이애덤스는 백악관 북쪽문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이다.
백악관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CNN 등 미국 방송국의 고정 카메라가 호텔 옥상에 설치돼 있다.
거리상 백악관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미국 역사의 중심에 선 클래식 호텔 중 하나이다.
미국과 세계의 지도자들이 머문 것은 물론, 각종 스캔들의 현장이기도 했다.
여자를 상징하는 비속어인 ‘치킨(닭)’이란 말도 헤이애덤스에서 탄생했다.
‘정치가 접대용 매춘부’를 의미하는 밀어(密語)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미국 실업가와 결혼한 에노키도는 2000년부터 호텔주인이자 경영자로 활동한다.
도쿄 데이코쿠(帝國)호텔을 본뜬 호텔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 호텔은 아무리 고급이라 해도 한계가 있다.
사람의 정성을 필요로 하는 서비스 분야로 들어가면 엉망이 된다.
데이코쿠호텔 직원들까지 워싱턴에 초대해 일본식 스타일의 호텔 경영에 들어간다.
낡은 헤이애덤스가 재기한다.
에노키도와 데이코쿠호텔 서비스가 경영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은 미디어를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진다.
에노키도는 워싱턴 일본 대사관이 가장 중시 여기는, 워싱턴의 최고 정보원으로도 활동한다.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면 보통 취임 2주일 전에 가족 전원이 워싱턴에 미리 들른다.
워싱턴에서 새로운 조각(組閣)도 하고, 지지자와 의회 지도자와의 만남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보통 헤이애덤스는 취임 직전 2주일 동안 대통령과 가족 모두가 거처하는 호텔로 활용된다.
2009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 대사관이 에노키도에게 매달린 것은 유명한 얘기다.
2주일 동안 오바마와 그 가족을 대하면서 유형무형의
각종 정보들을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얘기를 나눴는지는 비밀이지만, 오바마의 식성이나 습관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정보에서부터 누가 호텔에 들렀고 누구와 식사를 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일본 대사관에 흘러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필자도 파티 석상에서 가끔 만난 여성이지만,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에노키도에게 보통 90도 인사로 예를 갖춘다.
일본을 미국에 알리는 소프트파워 전도사 역할만이 아니라,
일본에 미국을 알리는 전령사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소프트파워는 양적인 면에서 끝이 없다.
봄에 열리는 분재(盆栽)대회를 시작으로, 일본식 꽃장식 이케바나(生花) 전시회,
오리가미(折り紙)로 표현되는 종이접기, 10대의 패션쇼에 해당하는 코스프레(コスプレ),
심지어 화지(和紙)로 장식된 아이폰용 커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롭다.
큰 부담 없이 싸고 간단하다는 특징이 있다.
F-35 전투기 한 대 값이 2억달러라고 한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드파워의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이라도 소프트파워에
투자할 경우 대한민국의 국력이 껑충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