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남도 창녕읍에서 태어났다
6 25전쟁이 끝난 다음해에 지지리도 못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형편이 어려워 소년시절에는 외가에서 자랐다
외조부는 찾아오는 손님들로 늘 바쁘게 사셨다
외가 선대에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높은 벼슬을 하신 분이 계셨다
그 때문인지 외조부의 위세는 늘 당당하셨다
손님들은 선생님이라 호칭하였지만 길거리에서는 점쟁이로 불렀다.
외조부는 내가 중 1때에 하직하셨다.
아버지는 문상 온 전국의 점쟁이들과 제자들에게 유품과 고서적을 나눠주었다
문상객 중에는 박도사(재산 박제현)도 있었다.
그 때 남겨져 지금껏 내려오는 책들은 대부분이 중국 일본고서이며, 반 정도는 외조부가 늘려 쓴 명리학책이다.
나는 나이 30이 넘어서 역학의 길로 들어섰다
여러 해 공부 끝에 철학관을 차렸지만 2년이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외조부가 남겨주신 책들로는 체계가 잡히지 않았고
손님들과의 문답을 올바로 맞히지를 못했다.
아버지는 그 정도면 외조부님을 능가하겟다고 하셨지만
학문의 혀결함은 늘 목마르게 하였다.
그래서 서자평선생의 뿌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두 번째로 롄윈강을 방문했을때 가이드는 시 중심에서 약 30분쯤 떨어잔 원자력발전소 뒷산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그 산 정상에는 동상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통일신라시대의 해장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어린 시절 당나라로 넘어가 그곳에서 벼슬을 하고 고향인 신라로 돌아와 군인이 되었으며 훗날 청해진 대사가 되어 당시 한중일 사이의 바다를 장악하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었던 인물이다
한국에도 없는 장보고의 동상을 이억만리 중국땅에서 맞이한 순간은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자기나라 사람도 아닌 외국인의 동상을 세워 기린다면
동양역학의 중심학문인 사주명리학을 창시한 사람의 유적은 얼마나 잘 해 놓았을까?
나는 부푼마음으로
다음날 서자평선생의 고향 둥하이를 방문하는 기대에 밤잠을 설쳤다.
글쓴이 이동현
<나는 역학이다>대표원장
<서울좋은이름연구원>원장
첫댓글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로 가야할 글들 아닌가요. 명리마당에 올리시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