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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Scene 17. The Lack /결여/
"이제 어쩔 셈이지? 손안에 들어온 표적을 놓쳐버렸으니 말야."
지크힐트는 굳은 얼굴로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 카르나스를 바라보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지크힐트의 속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장로단 중 일부가 살아 나가는 것은 그의 계획중에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주가 끼어있는 것은 분명히 있어
서는 안되는 착오였다.
"바깥쪽에 대기하고 있는 섀도우 블레이드는 그들을 공격할 수 없다.
그들의 최종 제어권은 어디까지나 가주에게 있으니까. 모르지 이 시점
에선 그 제어권이 장로급들에게도 넘어갔는지도……"
"그래서, 자네의 의견은 뭔가?"
지크힐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보통때의 카르나스라면 작전상황중
에 누군가의 의견을 묻는 것 따윈 하지 않았다. 렌의 의견을 채택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렌이 먼저 제안을 했을 경우의 일이었다.
역시, 흔들리고 있는건가? 카르나스.
"자리바꿈이란 거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있는 카르나스를 향해 지크힐트는 말을
이었다.
"지금 동굴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섀도우 블레이드와 이곳 독립 기사
단의 자리바꿈. 독립 기사단은 장로단의 추적을 유적 바깥까지 계속하
고 섀도우 블레이드는 전부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거야."
카르나스는 지크힐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섀도우 블레이드를 본가에 도로 빼앗기기는 싫다는 건가?"
지크힐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쉽게 됐지. 장로단만 제대로 처리되었다면……"
그 섀도우 블레이드가 독립기사단과 너의 목숨까지 해치웠을텐데 말
야.
뒷말은 삼켰다. 어차피 가주가 처리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단지
섀도우 블레이드의 전력 보존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바
깥에 대기중인 섀도우 블레이드는 최종제어권을 가진 가주에게 전부
넘어가 버릴 형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나?"
카르나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조금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질질 끄는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하지만……"
카르나스는 몸을 홱 돌렸다.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겠지."
유적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가는 카르나스를 보며 지크힐트는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옆에 있는 퍼스트 섀도우에게 고개를 끄덕였
다.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던듯, 섀도우 블레이드는 지크힐트의 손짓
하나로 즉시 사라졌다. 가주가 이곳을 빠져 나가기 전에 바깥에 있는
섀도우 블레이드를 전부 이곳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자, 어쨌든 거래를 계속할 밑천은 챙겨둔 건가……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의 악다문 입술엔 어느새 피가 배어나왔고 그의 눈동자는 살기로 번들
거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눈은
검은 로브의 가주가 사라졌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는 건가? 아직은!
꽉 틀어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젠장!"
타앙-
텅빈 넓은 복도에 둔탁한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지크힐트는 벽
을 향해 내려친 손을 거두며 고개를 홱 돌려 카르나스가 사라져 간 쪽
을 노려보았다.
"카르나스! 다음번엔 날 실망시키지 마라. 절대로!"
지크힐트의 입에서 '으드득'하는 소리가 울려나왔지만 아무도 듣는 사
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크힐트에게는 자기 자신이 듣고 있다는 것으로
족했다.
"이런 밤에 숲속을 말로 달린다는 건 무리요!"
아이리스는 어두운 숲속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말 대로였
다. 이런 길도 제대로 없는 숲 속을 말로 달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무
엇보다도 옆에 매어져 있는 지호의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더구나 지
금은 한치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거기다 이 부근이라는 것만 알뿐, 우리는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있잖
아요. 지금으로선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수 밖엔 없어요."
일레인이 거들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아가씨를 말릴 생각일랑 접어두라고. 그 정도 가지고 순순히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니까."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휘슬이 다가왔다. 그의 말은 일레인의 심기
를 다시 거스렸다.
"그럼 이 밤에 숲속을 헤메고 다니자는 거야? 너도 말려야 할 거 아냐
! 너 솜씨좋은 용병 맞아?"
"당연하지. 하지만 나는 댁들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 뿐이야."
일레인의 날카로운 말에도 휘슬은 여유로왔다.
"헉, 헉. 그, 그게 뭔데?"
뒤에서 덩치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끼어들었다. 급하게 말을 달려 쫓
아오느라 헐떡이면서도 휘슬의 말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결국 엘런에
게 옆구리를 찍히고 말았지만. 휘슬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로 저 아가씨를 막을 순 없다는 거. 알고보면 무서운 여자거
든. 이 천하의 휘슬님에게 칼자국을 낸 여자니까."
휘슬은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아이리스에 대한 그의 단어가 '
이 아가씨'에서 '저 아가씨'로 바뀐 것을 감지한 일레인이 급히 고개
를 돌렸을 때, 아이리스는 이미 말에서 내려 숲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쳇. 엘마이러님, 같이 가요!"
일레인이 아이리스의 뒤를 따라 급히 말에서 내리더니 거침없이 걸음
을 옮겼다. 이런 어두운 숲에서 시야를 벗어나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자네들도 빨리 따라오게. 이런 밤에 숲에서 서로 흩어졌다간 낭패니
까."
말에서 급히 짐을 내린 에드워드가 다른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러나 휘슬은 준비해 온 횃불에 벌써 불을 붙이고 있었다.
"최소한 이정도라면 서로 잃어버릴 염려는 없는 것 같군. 그나저나 이
걸 님에게 어서 전해줘야 하는 거 아뇨?"
에드워드는 휘슬의 말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그가 내민 횃불을 들고
일레인에게 달려갔다.
"자, 이제 우리도 일행을 놓칠 염려는 없게됐군. 그럼 천천히 짐이라
도 챙겨들고 가 봅시다."
어둠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횃불의 불빛을 바라보며 휘슬은 슬쩍 휘
파람을 불었다. 덩치와 엘런은 불빛과 휘슬을 번갈아 몇번 쳐다보다간
휘슬의 말대로 급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전투를 위한
준비였다.
"낭패군."
가주의 목소리는 내용과는 반대로 전혀 낭패스럽지 않았다. 마치 자신
과는 상관없는 어떤 일을 평하듯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사실 상황은 조
금 심각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군. 포위된 것 같네. 어쩐지 너무 쉬운
듯 했네만……"
지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가주의 목소리가 마치 자신을 일부러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보다 확실히
어른인 사람에게 뭐라고 하기도 그랬기에 그저 얼굴을 찡그리는 것 밖
엔 할 수 없었다.
"어떡해야 되겠나?"
결국 지호는 가주를 쏘아보았다. 그걸 자신에게 물어보면 어쩌란 말인
가? 어차피 유적 입구를 통과할 때 예상했던 것이 동굴 입구로 늦추어
진 것뿐이다. 유적 입구를 봉쇄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동굴을 다 나와서 자신들을 포위한 독립 기사단을 발견했다. 그
것도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기사들과 궁사들이 석궁과 검을 겨누고 있
었다.
"예상하셨습니까?"
"대충은. 섀도우 블레이더로 날 공격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럼 왜……"
지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렇다면 왜 말을 미리 하지
않았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호는 뒷말을 삼켜버렸다.
하긴, 미리 말을 한들……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이 선택할 길은 동굴을 나가
는 것뿐이니까. 지호는 렌을 돌아보았다. 렌의 상태는 아까와 마찬가
지였다. 지금은 다행히 의식을 잃고 있진 않았지만 그녀가 도움이 되
기엔 아무래도 힘들었다.
이젠, 끝인가……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렌과 다른 장로들을 가리며 석궁이 미치
지 않는 동굴 바위 뒤로 조금씩 이동했다. 검으로 맞서는 적이라면 어
느 정도라도 버틸수 있다. 그러나 화살이라면 피하는 것만으로는 이들
을 지킬 수 없다.
"호오. 그래도 해보려고 그러나?"
지호가 다시 한번 가주를 쏘아보았다. 왠지 아까부터 가주는 지호를
놀리는 것처럼 말을 걸고 있었다. 지호가 결국 무언가 쏘아주려고 할
바로 그때, 탁한 하늘색 로브를 입고있던 장로가 검을 빼어들고 지호
옆으로 나섰다.
"내가 돕지."
지호는 앞으로 나선 장로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호를 향해 미소지었
다.
"이래봬도 예전에는 전쟁터에서 살던 몸이니까."
한쪽 어깨에 피가 굳은 자국이 선명했지만 장로는 호기롭게 검을 들어
보였다.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뒤에서 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시작은, 내가 하도록 하지.
"
또인가 싶어 지호가 얼굴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자 가주는 품 안에
서 자그마한 통 몇 개를 꺼내들었다.
"사실 지크힐트 놈에게 던져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가주. 그건……"
가주 옆에 있던 검붉은 색 로브를 입은 장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
다.
"로드릭의 말이 맞지 않기를 바랬네. 그러나 늙으면서 늘은 건 그저
조심성 뿐이라서 말일세."
"그건…… 화통(火筒)입니까?"
이번에는 가주가 놀랐다.
"자넨 정말 모르는게 없군. 그렇네. 자네 말대로 화통(火筒)이네. 살
상력은 없지만 그래도 상대를 혼란하게 하는 정도라면 충분하지. 불꽃
과 소리, 그리고 자욱한 연기로 아마 우리가 몸을 뺄 기회 정도는 만
들어 주리라 생각하네."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주는 무언가 믿는 것이 있었다. 가주
의 말대로 이 정도라면 포위를 벗어날 가능성을 꽤 컸다.
"자, 그럼……"
"으아악!"
갑자기 귀를 찢는 비명이 어둠속에 메아리 쳤다. 그와 동시에 숲속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독립 기사단의 일부가 급속히 허물어지기 시
작했다. 간간히 알 수 없는 외침이 들려오며 포위망 전체가 술렁이고
있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뭔가? 저건……"
가주의 눈빛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지호는 가주를 바라보며 단
호하게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입니다!"
어쩌면 자신들을 끌어내려는 함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지금
이 기회라는 것은 분명했다. 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통을 지호에게
건네주었다. 몇 개의 화통이 어둠속을 날았고, 곧이어 동굴 입구는 요
란한 폭음과 불꽃, 그리고 자욱한 연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렌을 안
아드는 지호의 얼굴에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렌, 당신만은…… 반드시!
"타핫!"
기합과 함께 지호는 폭음과 불꽃, 그리고 연기 가득한 어둠 사이로 튀
어나갔다.
휘리릭-
"커헉"
푸르게 빛나는 아이리스의 연검이 어둠을 가르며 누군가의 탁한 비명
과 함께 피가 솟구쳤다. 뜨거운 피가 튀었지만 아이리스는 피하지 않
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피는 그저 검은색의 뜨거운 액체였다. 그러
나 그 생명에의 집착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금방 끈적하게 들러붙어 아
이리스의 금발을 더럽혔다.
쉬익-
챙
"헉"
또 한번 푸른 빛이 번쩍하자 맞대었던 검이 잘려나갔다. 상대편의 놀
란 음성이 들려왔지만 아이리스의 이어진 손짓에 휘어들어간 그녀의
검이 상대에게 여지없이 꽂혀 들어갔다.
"엘마이러님!"
뒤에서 일행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으랴아앗!"
채앵, 챙-
"엔피블(Enfeeble)!"
아마도 덩치의 것인듯 한 커다란 기합소리와 엘런의 마법 시동어가 언
뜻 들려왔다. 뒤쪽에서도 일행이 적과 접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이리스로 인해 적들은 상당히 혼란상
태에 빠진 데다가 가끔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기를 내뿜는 무엇인가
가 적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너무 깊숙히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다른 일행은 그다지 위험에 처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지금 아이리스의 마음에 가득한 것은 단하나, 이들을 뚫고 들
어가 지호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먼 땅에서 그렇게 지호를
떠나보내고 그의 안위에 가슴졸이며 지내왔던 시간을 한 풀이하듯, 그
동안 참아왔던 그녀의 분노와 초조가 지금 이곳에 쏟아지고 있었다.
퍼펑-
푸하악-
또다시 무엇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이리스의 조금 앞쪽에서 터져
나갔다. 불꽃과 연기가 시야를 가렸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시야 확
보에 어려움이 생길수록 곤란한 것은 적들 뿐이다. 눈을 어지럽히는
불꽃과 연기를 피하며 아이리스는 처음 목적했던 곳, 즉 포위망을 중
심부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쉬익-
그때,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아이리스에게 접근해왔다. 갑작스런 기습
을 경계한 아이리스의 연검이 반사적으로 상대를 향해 마주 찔러 들어
갔다. 시야가 가린 틈을 탄 기습이라면 목숨을 잃는 것은 오히려 상대
편이 될 것이다. 그만큼 아이리스의 연검을 빨랐고, 또한 예리했다.
핫!
순간적으로 떠오른 어떤 생각에 아이리스는 급히 뻗어나가던 연검을
되돌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녀의 연검은 여지없이 상대를 갈라 놓
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아이리스의 연검은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뜻대로 회수되었다.
놀랍게도 상대는 아이리스의 연검이 간신히 닿을만한 지척에 정지해
있었다. 그리고 어둠과 자욱한 연기 속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
가 그녀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 아이리스?"
"지호!"
아이리스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보고싶었던 사람이, 그래서 이렇게
초조하고 가슴 조였던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요 몇 년간, 언제
나 자신의 의지가 되어주었던 그에게 안기기라도 할 듯 아이리스는 지
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호의 바로 눈 앞에서, 아이리스는 멈
칫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지호의 가슴에는 이미 누군가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긴 검은 머릿결을 폭포수처럼 늘어뜨리고 있는 창백
한 얼굴의 여인, 독립 기사단장 레이디 렌 남작이.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긴장으로~~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