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의 「눈먼 사람」 평설 / 송승환 눈먼 사람 김기택 똑똑 눈이 땅바닥을 두드린다 팔에서 길게 뻗어 나온 눈이 땅을 두드린다 땅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 듯이 곧 문을 활짝 열고 누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는 듯이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이 걷는다 한 걸음 나아가기 전까지는 거대한 어둠덩어리이고 높은 벽이고 아득한 낭떠러지다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더듬이처럼 돋아난 눈은 멀리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을 허공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나아갈 방향 말고는 어느 곳도 곁눈질하지 않는다 눈에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본다 어쩌다 지나가는 다리를 건드리거나 벽이나 전봇대와 닿으면 가늘고 말랑말랑한 더듬이 눈은 급히 움츠려든다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된다 허리가 잔뜩 줄어들었다가 쭉 펴지며 늘어난다 몸 안으로 들어온 길만큼 한 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간다 시집 『낫이라는 칼』 2022. 9 ................................................................................................................................................................................ 「눈먼 사람」은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이 건축한 틈의 시학이다. 틈 나마의 세계가 구석의 모서리와 시각의 바깥에만 있지 않다는 예지의 눈빛이 서려 있다. 틈 너머의 세계는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고 일상의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의 틈에서 펼쳐진다. 사물주의자는 도시의 거리에서 ‘눈먼 사람’과 그의 지팡이를 마주친다. 라이너 쿤체는 “사물을 짚어”보고 “인식하기 위하여” 시를 “시인의 맹인 지팡이”(「시학POETIK」)로 바라보는데 김기택은 땅바닥에 닿는 순간에만 확보되는 지팡이의 작은 한 점 시야를 ‘눈’으로 바라본다. 지팡이에 대한 판단 중지 속에서 지팡이를 눈먼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투시의 혜안을 얻는다. 지팡이가 눈먼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순간은 일상의 흐름 사이에 틈이 발생한 시간이다. 틈의 시간은 도시의 벽들 “경계와 틈”(「벽2」) 사이에 다른 시간이 틈입한 순간이며 죽음도 “가끔 찰나의 틈을 통해 기웃거리”(「부음」)는 순간이다. 퇴근길 “저녁 7시 거리”에서 “몸 없는 숨이 혼자 걷는 순간”(「겨를」)이다. 사물주의자가 “안 보이는 구석이나 틈(「깜빡했어요」)의 순간을 일상에서 목격할 때 시집 『낫이라는 칼』의 사물들은 모두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사물주의자는 사물이 존재 양태를 드러내는 소리를 듣는다. “굴러가는 둥근 면에서/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나오”(「연필」)는 순간을 목격하고 “연필 속에서 광물성 내장 터지는 소리”를 듣는다. “똑똑”, 지팡이의 눈이 짚어낸 소리의 질감과 촉감의 깊이를 지각한다.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으로 세계의 “거대한 어둠덩어리”와 “높은 벽”과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늠한다.
「눈먼 사람」에서 주목할 점은 사람과 지팡이가 삶의 실천으로서 보여주는 앎의 윤리적 태도와 공손한 주체이다. 소포클레스의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단번에 완전한 인식에 도달하고 미래를 예언하지만 거리의 눈먼 사람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눈먼 사람은 지팡이의 “눈이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바라본다. 지팡이의 작은 한 점 시야가 밝히고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공손한 기다림. 몸가짐과 언행을 삼가고 맡은바 직분을 다하는 삶의 윤리. 지팡이의 “눈이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가 밝힌 “한 걸음”의 앎만을 인지하고 “한 걸음”을 정확히 실천하는 겸손함. 나는 무엇을 아는가, 항상 되묻는 성찰적 주체의 눈. 한 걸음 나아간 지팡이가 뒤이어 따라오는 눈먼 사람의 한 걸음을 기다리는 공손함과 예의. 이것은 이성적 주체의 앎이 소수자에게 자행한 일상적이며 역사적인 사건들을 우리에게 다시 환기한다. 눈뜬 사람으로서 사물의 이면과 눈먼 사람의 현존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눈먼 사람임을 알레고리로 암시한다.
—시집 『낫이라는 칼』의 해설, 「사물주의자의 틈」에서 ----------------------- 송승환 / 1971년 광주 출생. 2003년 《문학동네》에 「나사」 외 4편으로 시 등단. 2005년 《현대문학》에 평론 등단.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계간 《문학들》의 편집위원. 시집 『드라이아이스』 『클로르포름』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평론집 『측위의 감각』 『전체의 바깥』. |
첫댓글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이 걷는다
한 걸음 나아가기 전까지는
거대한 어둠덩어리이고 높은 벽이고 아득한 낭떠러지다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된다
허리가 잔뜩 줄어들었다가 쭉 펴지며 늘어난다
몸 안으로 들어온 길만큼
한 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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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과 그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표현능력이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