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Scene 17. The Lack /결여/
부드러운 바람이 밤을 감싸고 휘돌아갔다. 마치 태고의 정적처럼 깊이
잠들어 있는 대륙 북부 산맥의 깊은 숲 사이로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들이 숨쉬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태양의 세계를 대신하여 숲
을 가득 노래하고 있는 달의 세계. 그 달의 세계를 내려다 보듯 산봉
우리 위에 서 있는 세 명이 달아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운명을 만났나?"
긴 은발을 달빛아래 물결처럼 빛내고 있던 이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흘
러나왔다.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린 그의 은발이 발치까지 닿아 있었다.
"운명이란……"
짙은 검은색 머릿결이 달빛아래 반짝이는 단발머리를 한 청년이 말을
받았다. 그가 손을 살짝 뒤집자 반딧불 같은 작은 불꽃들이 그의 손에
서 한가득 피어올랐다.
"우리가 만나는 매일의 시간들, 그 많은 시간들이 모두 각자의 운명인
게지."
작은 불티들이 천천히 공기중을 떠돌았다. 어떤것은 씨앗만큼 크고,
어떤것은 먼지처럼 작았다. 그것들은 서로 엇갈리며 혹은 서로 함께하
며 단발머리 청년의 눈 앞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 불꽃들을 검은 단
발머리의 청년은 조용히 뒷짐을 지고 바라보았다.
"쯧쯧. 그렇게 나이를 먹어도 저 어린애 같은 심성은 변하질 않는군."
또 다른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울려나왔다. 깔끔하게 뒤로 넘겨빗은 희
끗희끗한 갈색 머리와 마치 전사 같은 강건한 몸이 어울리는 중년이었
다. 검은 단발머리의 청년은 조용히 대답했다.
"누가 내게 나이를 먹었다고 말하겠나?"
"그럼 자네가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애란 말인가? 그 모습으로 오
래 살더니만 이젠 정신까지 희미해지는 모양이군."
짙은 검은색 단발머리를 한 청년이 지긋이 갈색 머리를 한 중년을 쳐
다보았다.
"태양 아래 사는 이, 그 뉘라서 태양보다 많은 날을 지냈다고 할 수
있으랴. 달 아래 사는 이, 그 뉘라서 달보다 많은 밤을 지냈다 말할
수 있으랴. 대지를 딛고 사는 이, 그 뉘라서 대지보다 많은 낮과 밤을
지냈다 말할 수 있으랴. 나는 아직도 대지의 어린아이, 태양과 달의
젖먹이일 뿐이네."
말을 마친 검은색 단발머리의 청년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 가득한 별을
올려다보았다. 갈색 중년인의 눈매가 살짝 찌푸러지는데 옆에서 긴 은
발머리를 한 이가 중년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졌네."
갈색 머리 중년인의 눈매가 더 일그러졌다.
"자네는 옆에서 그런 판정 같은 것 좀 하지 말게. 누가 검을 쓴다고
아니 할까봐 그렇게 승부를 꼭 가려야만 속이 시원하겠나?"
긴 은발머리를 한 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데, 갈색 중년인이 검은
단발머리 청년을 향해 말했다.
"그건 됐으니까 아까 말에나 대답해보게. 그 아이가, 자신의 운명을
만났나?"
검은 단발머리 청년이 한 손을 내밀자 그의 앞에서 떠돌던 불꽃들이
작은 폭발이라도 일으키듯 공중으로 비산했다. 그가 내민 손 위에 남
아있는 것은 자그마한 세개의 불꽃뿐이었다.
"우리와……"
그가 가만히 손을 옆으로 움직였지만 세개의 불꽃은 그 자리에서 돌고
있었다.
"엘윈."
살짝 튀기듯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 끝에서 새로운 불꽃 하나가 빛났
다.
"그 둘을 잇는 운명의 끈."
새로 생겨난 하나의 불꽃에서 세개의 불꽃으로 움직여가는 손가락을
따라 거미줄처럼 가늘게 빛나는 선이 그어졌다. 조금씩 흔들리는 듯
보이는 약하지만 아름다운 선.
"그리고 그 아이……"
검은 단발머리 청년의 말과 함께 공중으로 비산했던 작은 불꽃 하나가
엘윈이라고 일컬은 불꽃에 끌려 다가왔다. 먼지처럼 작은 그 불꽃은
엘윈의 불꽃 주위를 조용히 돌며 조금씩 안정된 궤도를 찾아가고 있었
다.
"엘윈이 그 수명을 다하고 그 아이가 나타났을 때, 나는 그 아이들이
엘윈의 사명을 이어갈 것으로 믿었네."
엘윈의 불꽃이 사그러들며 거미줄 같은 끈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주위를 돌던 작은 불꽃은 이제 세개의 불꽃에 끌려 오고 있었다.
"실제로 그 아이는 언제나 엘윈의 제자였으니까 말일세."
작은 불꽃은 세개의 불꽃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정된 궤도
를 찾지도 못했고 더 가까워지지도 못했다. 사그라든 엘윈의 불꽃으로
부터 이어진 가느다란 빛나는 실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작은 불꽃은 두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엘윈도, 우리도 보다 큰 운명의 일부……"
세개의 불꽃 주위를 돌던 작은 불꽃 둘이 떨어져 나왔다. 가느다란 빛
의 실은 어느새 점점 밝아지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강한 빛의
실은 엘윈을 지나 세개의 불꽃에, 그리고 세개의 불꽃을 지나 밤하늘
어디론가 뻗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를 위한 운명의 끈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
마치 먼지처럼 작던 두개의 불꽃은 이제 엘윈의 불꽃보다, 그리고 세
개의 불꽃보다 더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개의 불꽃은 서로를 돌며
춤추듯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엘윈도 우리도, 그 강대한 운명의 실에 이끌린 이들에 불과할 뿐…
…"
어느순간 그들 앞에서 빛나던 불꽃들이 마치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방금 눈 앞에서 빛나던 신비한 빛의 축제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고고한 달빛만이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을 뿐, 검은 단발머리의 청년은 다시금 뒷짐을 지고 밤하늘을 올려
다 보고 있었다.
"말을 돌리는 건가?"
갈색 중년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검은 단
발머리 청년을 칠 듯 했다.
"이번엔 자네가 이겼군."
긴 은발머리를 한 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년인에게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갈색머리 중년인의 눈총뿐이었다.
"하나의 깨달음에는……"
파악-
검은 단발머리 청년의 목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 하나가 손가락 끝에서
피어났다.
"또 하나의 시련, 혹은 또 하나의 도전이 항상 존재하네."
다른 손 끝에서는 어둠보다 더 어두운 일렁임이 생겨났다. 마치 어둠
의 불꽃처럼 그것은 암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 청년은
조용히 두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불꽃과 암흑은 서로를 향해 끌리며
더욱 그 기세를 강렬히 했다. 두개의 상반된 기운 사이에서는 번개와
같은 번쩍임이 수없이 일어났다.
"그 여아(女兒)는 자신의 길을 선택했고, 자신의 긍지로써 자신의 시
련과 도전을 극복해냈네. 그러기에 기회는 새로운 가능성과 힘이 되어
주었지. 그러나……"
검은 단발머리의 청년은 순간 내밀고 있던 두 손을 '탁' 소리가 나게
마주잡았다.
파악
번쩍이며 강렬하게 다투던 두개의 기운이 순식간에 합쳐지며 그의 손
에서 엄청난 불기운이 쏟아져 나와 세 사람을 덮쳤다.
화르륵
세 사람을 삼킨 붉은 불길이 산 정상을 가득 메우며 혀를 날름거렸지
만 그 열기에 상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세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의
풀잎들 조차도.
"정(情)에 약한 그 아이에게 이 시련은 너무나 가혹해서……"
불꽃 가운데 들려오는 검은 단발머리의 청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
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이 운명을 맡긴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자신이 없네."
마치 세상을 집어 삼킬 듯 피어 오르던 불길이 사그라들며 침묵이 그
들을 감싸안았다. 긴 은발머리를 한 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검은
단발머리 청년을 바라보는 그의 미소에는 따뜻함이 넘쳐 흘렀다. 그리
고 그는 가만히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흥(興)과 망(亡)"
쉬르르릉
허공을 내젓는 손 끝에는 달빛에 빛나는 검이 걸려 있었다. 허공을 움
직이는 검의 결을 따라 마치 폭포수처럼 빛의 꽃들이 쏟아져 나왔다.
파파팟
돌연 부드럽게 움직이던 검이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허공을 가르기 시
작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우던 빛의 꽃들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것은
장엄한 낙화(洛花)였다.
"성(盛)과 쇠(衰)."
검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긴 은발머리를 한 이는 조용히 뒷짐을 졌
다. 눈처럼 희날리던 꽃잎들은 하나둘씩 대지에 닿으며 사라져 갔다.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어지고, 그 여럿이 다시 나뉘어 소멸해 가는 것
이 대자연의 법칙. 그럼에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이를 거슬러 하나
가 되고, 찬란하게 빛을 낸다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또한
자연(自然)이라 하지. 자연은 스스로를 거역하는 존재. 흐르는 대로
흐르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거스르는 것 또한 운명."
긴 은발머리를 한 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역사(歷史)를 떠난 우리에게 옳고 그름(是非)은 무용(無用)이 아닌
가."
검은 단발머리의 청년은 눈을 들어 은발머리를 한 이의 시선을 마주보
았다. 은발머리를 한 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가르친 여아(女兒)가 좀 더 낳은 것 같지 않은가? 아무
래도 그 아이에겐 과분하다네."
검은 단발머리 청년의 눈매가 꿈틀했다. 그 기회를 놓칠새라 갈색머리
중년인이 청년을 보며 한마디 했다.
"그 아이가 좀 부족하긴 하지. 어느모로 보나……"
단발머리 청년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동안, 갈색머리 중년인
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청년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둘의 모습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바라보던 은발의 이가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졌네. 자, 그럼 말해보게. 그 아이가 자신의 운명을 만났나?"
검은 단발머리의 청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의 운명은……"
청년의 목소리가 다시금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아까처럼 침
울하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시련과 함께 있다네."
다시금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갈색머리 중년
인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려나왔다.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도록 하지. 그 아이가 이곳을 찾아오기 전에…
… 그리움도 이만하면 됐네."
갈색머리 중년인이 발길을 돌리자 긴 은발머리가 뒤를 따랐다. 검은
단발머리의 청년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빛
나는 달빛과 융단처럼 뿌려진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