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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열왕 17,1-6
복 음 : 마태 5,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두 수도승이 길을 가다가 폭우로 개울의 물이 많아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울을 넘어갈 수 있도록 놓인 돌이 잠겨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개울 앞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 두 수도승 중의 한 명이 이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걸어 넘어갔습니다.
그 후 두 수도승은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계속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엽니다.
“왜 그 여인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는가?
우리 수도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자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넜던 수도자가 말합니다.
“나는 몇 시간 전에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녀를 업고 있는가?”
우리 역시 이 수도자처럼 상황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또 내려놓으려는 의지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마음속에 짊어지고 다니는 과거의 짐이 또 얼마나 무겁습니까?
과거는 현재를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쁜 기억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력은 하루가 지나면 64%를 잃어버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98%를 잃어버릴 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계속 되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되놰야 할까요?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금방 이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행복 선언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기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계속 되뇌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좇으며 세속에 대한 욕망으로 계속 되뇌고 있다면,
결국 하느님 나라는 보지 못하고 불행한 삶만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그리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공명’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어떠한 처지나 환경,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친절과 너그러움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사랑에서 나온 의로움이어야 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몽땅을 내어주는 베푸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 완전함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안전함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함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은 목숨을 바치면서도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박해나 모욕도 달게 받으면서
그 자체가 하느님을 증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사도들은 최고 의회에 끌려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의 고달픔과 시련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 노래하리라”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도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
또한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은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가치 기준을 가리키는데,
여기 '참 행복'에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국 ‘참 행복’은 ‘복음적 인간’, ‘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4,10) 하셨으니,
회개한 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부유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부유하게 된 이들입니다.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이들은 ‘온유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입니다.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인 까닭입니다.
이들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들’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입니다.
당신 손이 이끄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된 까닭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에,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질 줄을 알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질 줄을 알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을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주님 면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참 제자들입니다.
자신이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참 행복'을 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이들입니다.
참 제자들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문 배달하며 어렵게 살던 학생이 성공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간단한 말인데,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학생들도 강의를 들으면서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간단하면서도, 쉬운 성공의 방정식 같았습니다.
학생이 예습과 복습을 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오락실과 컴퓨터 게임을 가까이하고, 놀기에 여념이 없으면
학생의 앞날에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수도자가 기도하고, 정결을 지키며,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수도자의 앞날에는 악의 유혹이 기다릴 것입니다.
1997년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구조조정을 겪었습니다.
국가의 신용도는 떨어졌고, 외환위기를 겪었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해야 할 일을 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국민소득이 30,000불이 넘었다고 축배를 들었습니다.
무리하게 해외에 투자하였고, 해외 여행하면서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였습니다.
OECD에 가입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빨간불이 들어왔는데도 외면했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헐값에 외국 기업에 넘겨야 했습니다.
20%가 넘는 이자를 감수하면서 대출받아야 했습니다.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아껴 쓰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대출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지낼 수 있도록 전세를 마련했습니다. 27년 전의 일입니다.
교회에 위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역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자도 줄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가오는 도전과 위기를 외면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따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낡은 것이 있다면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과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면 안 되듯이
교회가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가치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예배, 나눔과 희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가정에서는 기도와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참된 행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참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재물에 대한 ‘탐욕’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교회가 부와 권력에 취했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나눔과 비움을 실천할 때는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받는 박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행복은 이 법칙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리차드’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입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노숙자로 거리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지만,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정비소를 차려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몹시 슬퍼 보이는 한 여성이 리차드의 정비소 앞을 지나갔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는 그녀가 길거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리차드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누네’라는 이 여성은 감정에 북받쳐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리차드와 가까운 곳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차가 없었기에 걸어서 출퇴근했고, 매일 리차드의 정비소를 지나친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군인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에 참전했다가 얼마 전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의 끔찍한 고통 끝에 1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하지만 누네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린 두 자녀를 위해 일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저도 곧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어요….”
리차드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누네를 매일 초대하여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한 대 선물하고 사비로 등록까지 해 주었습니다.
“나는 감옥에도 갇히고, 노숙자로도 지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난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내 딸도 언젠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한 사장이 매울 울면서 가게 앞을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인생을 바꿔 놓는데’, 포크포크, 유튜브]
리차드는 세상의 작은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빛이 되려면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일이고 타인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일이며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또한 의로움 때문에 평화를 이루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리차드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잃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때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은 때입니다.
여기에는 딸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말씀 안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게 가장 핵심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늘나라를 차지해서 행복해지고,
자비로워지면 자비를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것은 반드시 되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이 우주적인 법칙으로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면 됩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법칙을 믿음이, 행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해지면 반드시 채워주실 것임을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가 그 상징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당신을 만나려면 받았으면 내어놓아야 하는,
아니 내어놓기 때문에 또 물을 받게 되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아담과 하와는 이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도 바치지 않아 행복을 잃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서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가뭄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부족하지 않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1열왕 17,3-4)
믿고 안 믿고는 우리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이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들이 아닌 행복을 약속하는 영원한 약속을 믿고
우리도 가난해지고 자비로워지기로 모험 해 봅시다.
참 행복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를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더 높은 곳, 하느님께로,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면 누구든지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참 행복”에 대한 이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의 헌장”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복된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 준다.
창세 1,26-27의 거룩한 계획은 창세 2,7의 거룩한 숨으로 확인되었고,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참 행복의 말씀은
인간적 논리로는 역설적이고,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참 행복론은 단지 재수 없는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약자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익과 성공 위주의 딱딱한 사회는 이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모든 벽을 허물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 아무도 이들이 공적으로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그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참 행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렇다.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 대부분이 두 가지 의미로 다루어진다.
은총을 받아들여서 이미 “행복한 사람”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참 행복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를 조금 먹게 되니 슬슬 지난 세월을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감지덕지하게도 주님께서는 제게 수도자요 사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같이 부족하고 비천한 사람에게 너무나 과분한 은총입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언제나 말단이요 바닥이었는데,
수도자요 사제란 신분만으로 급격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능력도 경험도 일천한데, 관리자요 책임자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지속적인 겸손의 덕을 유지했으면 좋았을 텐데,
젊은 혈기에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보잘 것도 없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은연중에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며 부끄럽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위로부터 신호가 오더군요.
주님께서는 강력한 철퇴 같은 충격 요법으로 저를 바닥으로 내려치셨습니다.
그 바닥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도록 혹독한 고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요즘은 조금 나이도 들었겠다, 쓰라린 체험도 했겠다,
철저하게 제 자신을 낮추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다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형제를 바라봅니다.
신기하게도 자세를 낮추니 세상만사가 은총 꺼리들입니다.
밑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감사거리들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들, 행복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하루’라는 은총의 선물을 지속적으로 주고 계시다는 것,
죄인임에도, 나약함에도,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홀로 고독에 밥 말아먹으며 외롭게 살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따지고 보니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얼굴을 활짝 펴야되겠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행복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라는 얼굴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끝도 없이 올라가기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올라가서는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번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또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습니까?
반면에 폭풍 속 같은 고통의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도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밑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니 추락할 위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서 있으니, 심신이 편안해서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살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 맡기고 나니 그렇게 행복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희망이기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