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사주명리학의 시조를 郭璞(276~ ?)으로 주장하는 학설이 있다.
郭璞은 五胡十六國시대(304~439) 東晉사람으로 玉照神應眞經을 저술하였다.
그 후 400 여 년이 지난 唐의 袁天綱은 遠天綱五星指南을 편찬하였다. 袁天綱은 成都출신으로 당태종때 벼슬을 하였고
관상학과 풍수지리학에 능통한 사람이다.
唐대에서 年柱를 중심으로 사주명리학이 전개되었다
중국 명리학의 宗師로 일컷는 李虛中(762~813)은 郭璞의 이론을 기준으로 李虛中命書를 저술하여 명리학을 명료화하였는데
흔히 이 시대의 학문을 唐四柱라 부른다..
그 후 200 여년이 지난 北宋의 徐子平(922~?)은 郭璞의 저서를 해설한 玉照神應眞經註, 격국을 정리한 明通賦를 저술하였다.
徐子平은 東海출신으로 日干을 중심으로 사주명리학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徐子平의 후손 徐升(1200~1274)은 자평명리학의 일간중심이론을 계승히여 淵海子平平柱, 定眞論을 저술하였다.
適天髓, 子平眞诠, 窮通寶鑑 등을 중국 명리학의 3대 필독서라 부른다.
適天髓는 京圓이 저술하고 明나라 태조의 책사인 劉伯溫(1311~1375)이 註를 달았다
子平眞诠은 淸나라 관료인 沈孝聸(1716~?)이 저술하였다
窮通寶鑑은 淸나라 余春台가 난강망이라는 책을 궁통보감으로 출간하였다.
이 필독서 모두 徐子平 死後 300년이 지난 시기이다.
이와 같이 徐子平은 중국명리학의 歷史와 學文의 중심에 서 있다.
서자평의 고향 東海를 찾아 가든 날 나는 제법 상기되어 있었다
蓮云港을 출발한 기차는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東海에 도착했다
물어 물어 里中心所에 도착하니 人民服 차림의 里長은 신기한 듯 우리를 맞이했다.
오래 전 부터 나같은 사람이 더러 방문한 듯 싶었다.
그의 설명은 오래 전 부터 이 곳은 中國命理學子들이 찾는 明所인데, 淸日戰爭 때 부터 일본사람들이 이 곳을 방문하기 시작하였고 大東亞戰爭 때는 조선인들도 다녀갔다 하였다. 30여년 전 까지 徐子平의 후손이 모여사는 부락이 있었지만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문화가 붕괴되었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어, 그로 인하여 서씨가 살든 부락은 불태워지고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나의 간청에 그는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 때부터 나는 3년 간 중국전역과 대만, 동남아를 찾아 다니는 역학기행이 시작하였다.
글쓴이 이동현
<나는 역학이다>대표원장
<서울좋은이름연구원>원장
3월6일~7일 이동현교수의 무료공개강의가 있읍니다. 역학장터 공지 61407을 참조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