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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1일 화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제1독서 : 사도 11,21ㄴ-26; 13,1-3
복 음 : 마태 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나라는 세계사 안에서도 유례없는 대단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좁은 국토에 천연자원도 그리 풍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가,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놀라운 변화의 속도와 규모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듭니다.
1970년대만 해도 전화나 텔레비전 없는 집도 꽤 많았는데,
이제는 전화는 개인 필수품이 되었고 텔레비전은 극장을 방불케 할 만큼 큼지막합니다.
이런 빠른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만져서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 없었던 저 역시
빠른 변화에 혼란을 느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개인의 행복도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OECD 국가 중에 가장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도 뚝뚝 떨어지고 있음 역시
개인의 행복도의 하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정신적 빈곤은 지금의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외적 풍요로움이 실제 행복과는 전혀 다름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외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내적 성장을 위해 더 힘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요?
물론 ‘이런 정신적 성장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들 수 있지만,
외적 성장을 멋지게 이룬 우리의 모습은 내적 성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또 다른 나의 성장을 위해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또 부패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빛은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바로 우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또한 등불을 함지 속에 놓아서 비추지 못하는 것 역시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소금과 빛은 이렇게 짠맛과 밝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부족한 존재이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실수로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의 전능함을 우리를 통해서 높이 드러내십니다.
이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 풍요로움을 넘어서 내적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거저 주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매이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을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존중할 때 물질도 가치를 얻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0-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가 가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언론사와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부탁을 자주 했었습니다.
인터뷰는 ‘약속 대련’처럼 미리 질문지를 보내기 마련입니다.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서인지 질문지를 미처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이 메일로 보냈는데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1시간 남짓 인터뷰는 잘 끝냈습니다.
기자는 익숙하게 핸드폰을 녹음으로 해놓고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인터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는 먼저 제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저의 호적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가브리엘의 방문과 마리아의 응답으로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뉴욕에서는 신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다면,
이곳 댈러스에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자는 ‘성당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일부 개신교회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비방과 비난을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가톨릭은 큰 집, 개신교회는 작은 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교회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톨릭교회에서 작은 집인 개신교회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
큰 집과 작은 집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개신교회의 장점은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은 교계제도를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그 조직이 자유롭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고, 간단한 쇼핑도 할 수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도 있고, 샤워 시설도 있고, 주유소의 기름값이 저렴한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서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음식도 맛이 없고,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물건값이 비싼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입소문이 나서 파리만 날릴 것입니다.
휴게소가 아무리 좋아도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가지면 미련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합니다.
종교는 깨달음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휴게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찾을까요?
종교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때입니다.
종교가 지친 삶에 위로와 용기를 줄 때입니다.
종교가 불의한 세상에 희망을 줄 때입니다.
종교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외면할까요?
종교가 속 빈 강정일 때입니다.
종교가 권력에 야합할 때입니다.
종교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갈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외면할 때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자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청하였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놓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제가 이곳 댈러스에서 해야 할 소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사도 11,24)
신약의 인물 중에서 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베드로와 바르나바 사도라고 답합니다.
사실 저는 착한 사람은 못되지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약한 사람이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늘 희생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아무튼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11,24)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성품을 지닌 바르나바이었기에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때,
그를 받아들인 사람이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방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식 관습(=할례)을 강요하던 몇몇 유다계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한 사람도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인 베드로 사도를 비판했을 때도,
베드로 사도를 감싼 이가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첫 전도 여행에서 중도에 전도를 포기한 요한 마르코를 비겁한 사람이라 여겨
그를 두 번 째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마르코를 자신의 여정에 동행시킨 인물도 바르나바입니다.
이처럼 착하면서도 열린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인 바르나바와 같은 선교사가 필요하고,
바르나바와 같은 사람과 동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총일까, 싶습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 시대가 필요한 아름다운 동행의 모델이라고 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선교 여정 가운데서 어쩌면 자신과 늘 함께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았기에 가진 것, 아는 것 그리고 깨달은 것,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기에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의 여정에서 비우면 비울수록 더 충만해지는 하느님 전대의 무게를 체험했기에
아낌없이 받은 것을 거저 나눠주었으리라 상상합니다.
빈 가방을 가지고 떠나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마음 자세라고 믿습니다.
저의 짧은 베트남 선교 경험에 비춰볼 때 말입니다.
곧 선교사의 마음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10,8) 라는 말씀에 대한
동의와 동감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착한 마음입니까?
바르나바 사도 축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선교사의 자세는 바로 이것입니다.
선교사란 단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외지나 외국으로 파견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선교사입니다.
인생의 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베푸는 삶(=사랑의 나눔과 실천)을 사는 사람이 곧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는 늘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식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일상을 살면서 늘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며,
은총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체험하며 이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선교사는 자신의 삶을 비우고 나누어 주려고 할 때,
결코 전대가 비워지는 일이 없음을 체험하기에
더욱더 은총의 통로, 사랑의 통로로 불림을 감사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선교사가 받은 은총이 아주 특별하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나의 동행을 필요로 할 때 바르나바와 같은 마음으로 동행할 때
참된 하느님의 사람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1, 24:10, 8)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조욱현 토마 신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사도의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1,24)으로 사도로 인정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본명이 요셉이었던(사도 4,26 참조)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오로 사도가 개종한 후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였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바오로의 선교여행에도 함께 하였고,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이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복음 선포이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들의 임무를 꺼리지 않고,
장차 자신들이 겪을 위험과 싸움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선포자가 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주님의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이 되었다.
세속적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보상을 바라지 말고,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여행 보따리나, 여벌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씀이며,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참조: 탈출 3,5)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 위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힘이 아닌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팡이는 아니다.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보면,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복음의 원칙을 따라 이렇게 하시오.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 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11,3-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바르나바 사도의 삶이 바로 그러하였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고 바오로 사도와 함께 여행하였고,
결국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신 분이다.
주님의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 생명의 말씀으로 바르나바 사도에게 생명을 주었으며
그리고 우리에게도 생명을 줄 것이다.
저는 정말이지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주말마다 저희 피정 센터에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오십니다.
한두 분이 아니라 70명, 80명입니다. 식사도 하시고 주무시고 가시니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도착하신 지가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작별 인사를 할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떠나실 때는 대절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피정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다음에 꼭 오세요!” 하고 인사드립니다.
별것 아닌 노력이지만 형제자매들이 받은 감동이 큰 것 같습니다.
다들 하시는 말씀,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환대받고 배웅까지 받은 적은 없습니다.
촌각의 순간이었지만 작은 천국 체험을 하고 갑니다. 신부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는게 없습니다.
저희 훌륭한 형제들이 각자 자리에서 잘 도와주셔서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어떤 형제는 침구 세탁소에서,
어떤 형제는 강의로, 다들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피정이 잘 되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 형제들 덕분입니다.”
큰 족 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 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 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북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 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이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 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 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마당발 봉사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요즘 개인과 인권이 중시되면서 말의 사용도 바뀝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많이 쓰던 ‘불구자’니 ‘운전사’니 ‘간호원’ 같은 말을 요즘은 쓰지 않지요.
같은 맥락에서 ‘가용인원’ 같은 말도 논란입니다.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런 면에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썼다가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허투루마투루 쓰이는 것을 싫어하고,
여기저기 자기를 내어 주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 좋아하는 일 한 가지만 하려고 합니다.
어제도 모 형제회 평의원들과 평의회를 하는데
공석이 된 평의원을 대신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걱정의 마음이 있었는데 식당 봉사자들이
또 몇 분 못 오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제도 손님이 많아 바빴는데 봉사자가 없어서
연세 드신 봉사자 한 분이 너무 고생 많이 하셨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지금 교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제일 큰 이유는 웬만큼 젊은 분들은 다 직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봉사하시는데 너무 힘들어 못 하시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유지만 그러나 앞에서 얘기한 대로
자기를 내어 주려는 자세가 부족한 것도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내어 주는 분들은 이미 바쁜데도 여기저기 뽑혀 더 바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는 그 반대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준 분입니다.
초기 공동체 모습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을 보면 이렇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부터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었고,
타르수스로 가서는 바오로 사도를 데리고 와 같이 열심히 선교하여
안티오키아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바르나바를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먼저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순종 잘하는 사람,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서 후뚜루 마뚜루 쓰이는 가용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해서는 교회 안에서 이렇게 가용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착하기만 해도 교회 밖에서는 마당발로 불리며 왕성히 활동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필수적이고 성령 충만은 마당발 봉사의 완성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소임이라고 믿는 사람,
더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만이 그 소임이 맡겨졌을 때
거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치지 않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교회 봉사자가 점점 줄어들어서 걱정하는 오늘 저이고,
바르나바와 같이 자기를 내어 주는 마당발 봉사자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