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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역사
2007/08/24 20:52 |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시북(市北) 강항(姜沆 1567(선조 즉위년) ~ 1618(광해군10))의 기록을 엮은 기록이다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의 참상을 적고 그때 느낀 점을 한시로 적기도 했으며, 전란에 대비할 국내 정책까지도 기록하고 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자료다.
* 임진ㆍ정유에 침략해 왔던 모든 왜장의 수효
가강(家康)이라는 사람은 관동(關東)의 대수(大帥)이다. 지금 내부 등원(內府藤原)이라 칭하는데, 원의정(源義定)의 11대 손자다. 의정이 일찍이 관백(關白)의 직을 맡았으므로 그 자손들이 관동에 대대로 사는데, 그의 식읍(食邑)이 8주(州)에 걸쳐 있다. 그 사람됨이 날쌔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는 까닭에 온 나라 사람이 감히 그 서슬에 맞서지 못했다. 가강의 때에 와서 수길이 비로소 신장(信長)을 대신하였는데, 가강이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수길이 직접 가서 쳤다. 가강이 정병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상모(相模)에서 싸워 수길의 군사가 패하자, 드디어 더불어 화친을 맺었고, 가강 역시 원망을 풀고 복종하여 몸이 마치도록 신하의 예절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 맏아들 삼하수(三河守)는 지혜 있고 용맹스러워 가강보다 나은데도, 가강은 그 차자(次子)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을 사랑하여 자기 후계자를 만들려고 했다. 그 작은 아들은 일기수(壹岐守)인데, 나이가 겨우 10세라고 한다. 가강의 나이 현재 63세다. 토지의 소산은 2백 50만 석이라 하는데, 실지는 그 배나 된다.전적(田籍)을 수길에게 올린 것이 비록 2백 50만 석이라 했지만, 그 선대 조상으로부터 자신의 대에 이르는 동안 더 개간한 것이 수에 들어 있지 않으므로 배가 된다고 하는 것임.
심중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으며, 얼굴과 모양이 풍후하고, 마음속이 대단히 깊다. 수길이 살아 있을 적부터 자못 군중의 환심을 샀는데, 급기야 수길을 대신하면서부터는 왜인들의 소망에 차지 못하였다.수길은 성(城)을 공격하여 적을 쳐부수다가도 적이 이미 항복하고 나면 즉시 원한을 잊어버리고 성지(城池)와 민사(民社)를 일체 침탈하지 않고, 더러는 다른 고을을 가져다가 도와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강은 은연중에 은혜와 원한을 행사하여, 한번 서로 반목(反目)이 되는 날에는 반드시 사지(死地)에다 넣고서야 만다. 그러므로 모든 추장(酋長)들이 힘을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한 사람도 심복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휘원(輝元)이란 사람은 경서(京西)의 대수(大帥)로서 임진년 전역(戰役)에 원수가 되었던 자다. 안예 중납언(安藝中納言)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모리중납언(毛利中納言)이라 칭하기도 한다.안예는 주(州)의 이름이요, 모리는 그의 성임.당초에 백제(百濟)가 망하자 임정태자(臨政太子)가 배를 타고 왜국에 들어가 대내 좌경대부(大內左京大夫)가 되어,왜인들이 왕을 대내(大內)라 이름. 때문에 지금도 주방주(周防州)에는 대내전(大內殿)이라는 칭호가 있음.주방주(周防州)에 도읍을 정했다. 그 자손이 47대를 내려오며 대대로 왜의 관리가 되어 그 토지를 이어받았는데, 휘원의 선대는 바로 그 종자(從者)였다.
전전비전수(前田肥前守)라는 사람은 가하 대납언(加賀大納言)의 아들이다.전전은 그의 성임.대납언(大納言)이 본래부터 가강(家康)과 더불어 작위(爵位)와 세력이 동등하였다. 수길이 죽음에 임박하자 수뢰(秀賴)를 비전(肥前)에게 당부하며 이르기를, ‘네가 비전 중납언(備前中納言) 수가(秀家)와 더불어 수뢰를 받들고 대판(大坂)에 살면서 조호(調護)에 관한 모든 일을 네가 모두 맡아라.’ 하였다. 수길이 죽자, 대납언이란 사람도 역시 무술년 겨울에 죽으므로 비전수(肥前守)가 월중(越中)ㆍ가하(加賀)ㆍ능등(能登) 세 주(州)의 땅을 물려받아, 수가를 받들고 대판에 살았는데, 그 세력이 가강보다 못하지 아니하였다.
문루(門樓)를 높이 세워, 대판의 내성(內城)과 더불어 가지런하게 하고, 몰래 경승(景勝)ㆍ정종(政宗)ㆍ좌죽(佐竹)ㆍ수가(秀家)ㆍ청정(淸正)ㆍ월중수(越中守) 등과 더불어 가강(家康)을 죽이고 그 토지를 분배하기로 모의하여, 입에 피를 바르며 함께 맹세를 하고, 맹약이 이미 이루어지자 월중으로 물러갔다. 석전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라는 사람이 마침 가강에게 꾸지람을 당하고 그 사읍(私邑)인 근강주(近江州)에 물러가 있다가 그 모의를 알고서 가만히 편지로써 가강에게 알렸다. 가강이 기해년 9월 9일에 수뢰(秀賴)에게 조알(朝謁)한다 핑계하고 허(虛)를 틈타 들어가 대판성을 점거하고, 비전(肥前)의 휘하(麾下)를 불러 그 문루(門樓)를 헐게 하였다. 그러자 비전의 휘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주장이 밖에 계시니 감히 명령을 듣지 못하겠소. 죽을진대, 내부(內府)의 영을 어기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우리 주장의 명(命)을 어기고 죽으란 말이오.’라고 하니, 가강이 더욱 화를 내었다. 수가가 비전수(肥前守)의 처남인지라, 가서 비전의 휘하들을 달래어 철거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네 주장이 이것을 문제 삼는다면 내가 그 책임을 지겠다.’고 하였다. 가강이 드디어 관동에 있는 여러 장수로 하여금 비전이 왜경(倭京)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게 하고, 석전치부소보로 하여금 근강주의 요긴한 목을 지키게 하였다. 비전수도 역시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굳이 지킬 계획을 하고, 격일로 사냥을 칭탁하여 정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월중(越中)ㆍ월후(越後) 등지에 출몰하였다. 경승(景勝) 등은 암암리에 원조해 줄 것을 결탁하였고, 군왜(群倭)는 가강에게 화해할 것을 권하였는데, 가강은 그가 듣지 아니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개 그 사세가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해야 하고, 화친하지 아니하면 싸워야 했는데, 화친이 다행히 성립되지 아니하였다면, 왜놈들의 전국이 장차 하나의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니, 우리나라의 다행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었으랴?
경승(景勝)이라는 사람은, 지금 월후 납언(越後納言)이라 칭하며, 대대로 월전(越前)ㆍ월중(越中)ㆍ월후(越後) 세 주의 땅에 살았다. 적괴가 신장(信長)을 대신하자, 경승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수길(秀吉)이 출우(出羽)ㆍ좌도(佐渡)를 경승에게 옮겨 주고, 월후의 땅을 빼앗아 굴리 구태랑(掘里久太郞)에게 주었다. 이로 인하여 경승의 마음이 불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월후의 백성들도 역시 경승을 주인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가강이 수길을 대신하게 되자, 비전수가 가강과 더불어 틈이 벌어지므로 경승이 임의로 사읍(私邑)에 돌아가 비전수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월후의 땅을 공격하여 탈환하려고 하였다. 구태랑이 매우 두려워하여 자주 가강에게 통보하고, 가강도 역시 근본(根本)이 흔들릴까 두려워하여 자주 편지를 보내어 왜경으로 돌아오게 권했으나 경승이 따르지 아니하였다.왜인이 모두 말하기를, ‘경승이 참으로 비전수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곧장 가강의 근거지를 무찔렀다면, 가강이 돌아가 구원하려고 하더라도, 청정 등이 일시에 모두 일어나게 되어 양경(兩京)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 될 것이 무서웠을 것이요, 돌아가 구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근본이 먼저 부서지게 되어 앞 뒤로 적(敵)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경승 등이 움직이기만 하면 안 될 것이 없었는데, 애석하게도 그가 지둔하고 나약하여 필연적으로 능히 분발하지 못하고 말았다.’라고 한다.
정종(政宗)이라는 사람은 대대로 육오(陸奧)의 한 주를 차지하고 웅거하여 부귀가 왜국을 경도하였는데, 급기야 수길이 신장을 대신하게 되자, 정종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을 청했다. 금과 곡식이 다른 왜보다 배가 많으나 도로가 너무도 멀고, 북해는 바람이 높아 배들이 많이 엎어지고 부서지곤 하므로, 왜경에 있어서 인부(人夫)를 배치함이 휘원(輝元) 등에게 반도 미치지 못했다.
정종은 흉측하고 사나움이 여러 왜장보다 더욱 심하여, 그 친형과 친아들을 죽였다. 성질이 또한 기교(機巧)스러웠다. 복견성(伏見城)에 물이 없었는데, 정종이 마침내 계책을 마련하여, 성 밖의 강물을 솟구치게 하고 길다란 기구를 만들어 바로 수길의 내성(內城)으로 들어오게 하여, 성중의 남녀들이 지금까지 힘입고 있다는 것이다.
좌죽(佐竹)이라는 사람은 대대로 상륙(常陸) 등 두어 고을를 차지하여 웅거하였는데, 수길의 대에 와서도 여전하였다.
최상(最上)이라는 사람은 대대로 육오(陸奧)의 한 구석을 차지했는데, 수길의 대에 와서도 여전하였다.
축전 중납언 금오(筑前中納言金吾)라는 사람은 수길의 본처의 조카요, 휘원(輝元)의 사위다. 수길이 일찍이 자신의 성(姓)을 칭하여 목하(木下)라 하였는데, 금오가 그 성을 모칭(冒稱)하였으므로, 또한 목하라고도 한다. 금오는 약주소장 승준(若州小將勝俊) 및 시로성주 우위대부(始路城主右衛大夫) 및 궁내 소보(宮內少輔)와 더불어 4형제인데, 그중에 금오가 막내이다. 젊어서 수길에게 총애를 받았으므로 읍(邑)을 얻은 것이 여러 형들보다 배나 더했다. 경자년에 그 나이가 겨우 19세였는데, 정유 전란에 원수(元帥)가 되어 부산에 주둔했다. 적괴(賊魁)가 군율(軍律) 위반으로 자주 힐책하였다.
비전 중납언 풍수가(備前中納言豐秀家)라는 사람은, 수길의 양녀 사위다. 처음에는 적송파마수(赤松播摩守)의 휘하로 있다가 수길에게 붙어서 우뚝히 일어났는데, 그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이다. 비전(備前) 한 주와 비중(備中)의 반과 미작(美作)의 반을 차지하여, 비전의 강산(岡山)에다 도읍을 정했다. 무기가 예리하고 군사가 날쌔며, 토지가 비옥하고 재화가 풍족하다. 임진년 전란에 서울 남별궁(南別宮)에 들어갔는데, 자못 죽이고 약탈하는 것을 금지했고, 우리나라의 나이 젊은 남자를 많이 생포해 갔다
의홍(義弘)이라는 사람은 도진병고두(島津兵庫頭)라 칭하며도진은 성이요, 병고두는 무고(武庫)의 우두머리임.대대로 살마(薩摩)ㆍ대우(大隅)ㆍ일향(日向) 등의 주(州)를 차지하였다. 그 지역이 중국 및 유구(琉球)ㆍ여송(呂宋) 등의 나라와 가까워 중국 배와 오랑캐 배가 끊임없이 내왕하고, 왜들이 중국 지방이나 남만(南蠻) 지방을 오가는 사람도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 물건과 오랑캐 물건이 시장의 상점에 가득하고, 중국 사람과 오랑캐들의 상점과 집이 연달아 있다. 의홍의 무예와 용맹이 또한 여러 왜인을 압도하는데, 왜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홍으로 하여금 무예를 사용할 수 있는 땅을 차지하게 했다면, 비록 일본 전체를 병탄하는 것도 무난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 휘하들도 극히 정용(精勇)하였고 또 모두 다 세신(世臣)들이었다. 신장(信長)의 말기에 구주(九州)를 모두 병탄했었는데, 서해(西海)의 한 도(道)가 모두 9주(州)임. 일기(壹岐)ㆍ대마(對馬)는 세지 않음.수길이 신장을 대신하여 서서, 친히 가서 싸웠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의홍이 자진해서 6주를 수길에게 돌려주고, 전에 소유했던 3주만을 차지했다. 정유년 전란 때에 그 휘하가 사천(泗川)을 지켰는데, 왜적들이 떠들어대기를, ‘중국 군사가 무술년 봄에 사천(泗川)의 왜진을 포위하였다가 크게 패하였다.’ 하였으니, ‘굳은 것을 치려면 그것을 금가게 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기해년 봄에 가신(家臣)으로서 8만 석을 받아 먹는 땅을 가진 사람이 모반을 하므로, 의홍이 계책을 마련하여 죽음을 내렸었다. 그 아들이 그때 일향주(日向州)에 있는데, 나이는 17세였다. 성지(城池) 12개소를 수축하여 배반하므로 의홍이 직접 가 포위하고 공격하여 죽은 시체가 산과 같았으나, 겨우 3성(城)만을 함락시켰다. 금오(金吾)ㆍ청정(淸正) 등이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청했으나 의홍이 사절하고 말하기를, ‘내 부하 놈이 반기를 들었으니, 내 손으로 마땅히 베어 없애야지 어찌 남의 구원병을 번거롭게 해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배반한 사람이 또한 널리 가강 등에게 뇌물을 써 화친을 하여 죽음을 면하기를 바랐다고 하며, 의홍의 정예병과 건장한 사졸이 태반이나 1년 동안에 사상(死傷)을 당하였는데, 가강 등이 속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그 나머지 여러 왜장으로 이를테면 굴미(崛尾)씨ㆍ굴리(崛里)씨ㆍ통정(筒井)씨ㆍ진전(眞田)씨ㆍ증전위문위(增田衛門尉)ㆍ석전치부(石田治部)ㆍ복도대부(福島大夫)ㆍ전중병부(田中兵部)ㆍ궁부병부(宮部兵部)ㆍ대곡형부(大谷刑部)ㆍ용장사(龍藏寺)ㆍ생전삼좌위문(生田三左衛門)ㆍ주계 청정(主計淸正)ㆍ섭진수 행장(攝津守行長)ㆍ천야탄정(淺野彈正) 부자(父子)ㆍ기부중납언(岐阜中納言)ㆍ우시출우수(羽柴出羽守)ㆍ소장 승준(少將勝俊)ㆍ좌야수리(佐野修理)ㆍ아파수 가정(阿波守家政)ㆍ생구아악(生駒雅樂) 부자(父子)ㆍ토좌수 성친(土佐守盛親) 부자(父子)ㆍ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ㆍ등당좌도수(藤堂佐渡守)ㆍ가등좌마조(加藤左馬助)ㆍ장강월중수(長岡越中守) 등은, 받아 먹는 토지가 더러는 40~50만 석에 달하고, 적어도 10만 석을 내려가지 않으며, 10만 석에 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것이다.
적괴 수길은 미장주(尾張州) 중촌향(中村鄕) 사람이다.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 31)에 태어났는데, 얼굴이 못생기고 키도 작으며 형상은 원숭이와 같으므로, 드디어 원숭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낳자 오른손이 여섯 손가락이었다. 장성하여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손가락이 다섯인데, 여섯 손가락을 어디다 쓸 것인가.’ 하며, 스스로 칼로 잘라 버렸다.아비의 집이 본래 빈한하여 어떤 농가의 더부살이가 되어 꼴도 베고 나무도 베는 것으로 생활하였었는데, 장년기가 되자 스스로 분발하여 전 관백(關白) 신장(信長)의 종이 되었으나 별로 특이한 일이 없었다. 관동(關東)으로 도망해 달아나 수년 동안 있다가 다시 돌아와 자수(自首)하니, 신장이 그 죄를 용서하고 예전대로 하여 주었다.
수길이 작심하고 봉공(奉公)하여,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밤이나 낮이나 할 일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신장이 매번 뭇 종들을 시켜 시중의 물건을 사오게 하면, 반드시 중한 값을 달라 하며, 값이 조금만 맞지 않으면 사오지 못했는데, 수길을 시키게 되면서는, 매번 싼 값으로써 중한 물건을 사오면서도 곧 갔다 바로 돌아오므로 신장이 대단히 기특히 여겼다.
신장이 말년에 형벌하여 죽임과 시기(猜忌) 부리기를 자행하여, 여러 대신들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자, 대다수가 성곽을 수축하여 자신을 견고하게 하는 계책을 마련했다
마침 일향수 명지(日向守明知)가 신장을 시해(弑害)하자, 알리러 오는 사람이 주야로 폭주하였다. 수길이 편지를 펴 보고서, 소문 나는 것을 꺼려하여 손수 알리러 온 사람을 막하에서 베고서 성 공격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여 거짓으로 한가한 듯이 보이게 하였다.
안국사(安國寺)란 사람이 있는데, 휘원(輝元)의 모주(謀主)로서 중[僧]이었다. 수길이 편지를 보내어 만나보기를 청하니, 안국사란 사람이 명령을 듣고 곧바로 왔다. 수길이 군막 안으로 맞아들여 말하기를, ‘이 성의 함락이 조석간에 있소. 그러나 내가 수만 사람의 목숨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차마 못 보겠소. 만약 성주(城主)가 배를 갈라 스스로 죽는다면, 내가 마땅히 군사를 파하고 화친을 하겠소.’ 하였다. 안국사란 사람이 들어가 성주에게 고하니, 성주가 즉시 한 척의 배를 타고 나와 강에서 자결하였다.
바로 뒤에 휘원과 더불어 감정을 풀고 화친을 하고, 군사를 걷어 동으로 올라갔다. 일향수가 친히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섭진주(攝津州)의 산기(山崎) 대판과 복견의 사이로서 우치(宇治)의 강어귀에 있음.에서 맞아 싸우는데, 피로와 휴식이 현격하게 다르고, 많고 적음이 크게 차이가 나므로 수길이 기세가 더욱 왕성하고 싸움이 더욱 힘차, 친히 일향수의 머리를 수만 군중 속에서 베니, 그 군중들이 싸우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수길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신장의 시체가 있는 곳을 찾아내어 그 머리를 가지고 산사(山寺)로 올라가 스무 하루 동안을 재(齋)하였다. 이때 온 나라에 임금이 없어, 군중들의 마음이 의구(疑懼)로 가득 차 있는데, 수길이 태연하게 행동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는 듯이 하니, 여러 대신들이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수길이 자기에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쳐 죽여 거의 비는 날이 없었다 기이주(紀伊州)의 백성들이 군중을 모아 배반하여, 진영(陣營)이 수십 리를 연했는데, 수길이 친히 가서 쳐 없앴다. 도진병고두 의홍(島津兵庫頭義弘)이 대대로 살마(薩摩) 등 3주(州)를 차지했는데, 국내에 변란이 있음을 틈타 구주(九州) 전도(全島)를 병탄하므로, 수길이 또 가서 치니, 의홍이 단지 예전에 소유한 3주(州)만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바쳤다. 가강(家康)이 관동의 8주(州)를 점거하고서 성패(成敗)를 관망하자, 수길이 친히 가서 공격하였는데, 도리어 패하게 되어 드디어 가강과 더불어 화친을 맺었고, 가강도 역시 몸을 굽혀 섬기되, 한결같이 신첩(臣妾)의 예대로 하였다. 휘원도 듣고서 역시 비전(備前) 등 2주(州)를 바쳤다.
66주(州)가 이미 평정되자, 대마수 의지(對馬守義智)가 섭진수 행장(攝津守行長)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향도(嚮導)가 될 것을 청하니, 행장이 드디어 제 딸을 의지에게 아내로 주고서, 의지와 함께 들어가 수길을 만나 보았다. 수길이 매우 기뻐하고, 의지에게 자기의 성(姓)을 내려 주어 우시(羽柴)라 하였다. 우리나라 사신이 들어가자, 수길이 왜승(倭僧) 태장로(兌長老)ㆍ철장로(哲長老) 등으로 하여금 회답 서신을 만들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을 분명히 적게 하니, 그 부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선은 좋은 말로 회답 서신을 만들어 보내고서, 불시에 쳐들어가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수길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잠자는 사람의 머리를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솔직하게 써 보내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미리 준비를 하게 한 후에 가서 승부를 결단함이 옳다.’ 하였다. ○ 중국 사람 허의후(許宜後)가 살마주(薩摩州)로 표류되어, 약을 팔아 살아가며 왜놈들의 비밀에 관한 일을 자상히 적어 중국 조정에 보고하려던 차에, 이웃에 사는 중국 사람이 몰래 그 편지를 훔쳐다가 천야탄정(淺野彈正)에게 고하니, 탄정이 수길에게 고했다. 의후(宜後)를 왜경(倭京)으로 산 채 잡아가자, 좌우에서 모두 삶아 죽이자고 하였다. 수길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명 나라 사람이다. 명 나라를 위하여 일본의 일을 알려주는 것이 사리에 불가할 것이 없다. 더구나 남이 생각지 않고 있는 틈을 이용한다는 것은, 실로 나의 본심이 아니다. 명 나라로 하여금 미리 준비하게 하는 것이 불가할 것 없다. 더구나,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모두 초야(草野)에서 일어났으니, 명 나라로 하여금 나의 근본이 천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도 역시 해로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 하고서, 의후를 불문에 붙이고 도리어 밀고한 자에게 이르기를, ‘너도 역시 명 나라 사람이면서 감히 명 나라 사람을 밀고하였으니, 너야말로 흉한 놈이다.’ 하였다.
임진년에 뭇 왜인들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하였는데, 참람하게도 병탄(並呑)하게 될 것을 기일을 정해 놓고 성취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급기야 행장이 평양에서 무너지고 뭇 왜적이 영남의 변두리로 물러가 주둔하게 되자, 적괴가 크게 성내어 직접 뭇 왜들을 거느리고, 계사년 3월에 구주(九州)로 내려와 비전(肥前)의 명호옥(名護屋)에 신궁(新宮)을 세우고서, 오래 머무르며 싸움을 독려할 계획을 하였다.
그리고 호남과 영남이 모두 평정되면 친히 부산으로 가겠다고 떠들어 댔는데, 마침 그 어미가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동쪽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왜장(倭將)으로서 발호(跋扈)하는 자들이 이미 금량(金亮)을 죽이고 오록(烏祿)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불행히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그 모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한다.
유구(琉球)라는 나라가 가장 살마(薩摩)와 가까운데, 섬이 많아서 수로가 매우 편리하였다. 수길이 군사를 옮겨 유구를 치려고 하였는데, 살마수 의홍(義弘)이 몹시 두려워하여, 수길의 총애하는 신하 석전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라는 사람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그를 시켜 수길에게 말하기를, ‘유구라는 나라는 단지 두 개의 섬으로 되었는데, 총알 만하여 별로 값진 기물(器物)이나 보화가 없으니 민중을 수고롭게 동원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또 유구 사람으로 하여금 국서(國書)를 가지고 토산물을 실어다가 수길에게 사죄하게 하니, 수길이 마침내 그만두었다.
경서(京西)의 여러 왜(倭)가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지치게 되자, 수길은 또 경동(京東)의 여러 왜를 지치게 하고자 하여 동왜(東倭)의 병졸들을 산성주(山城州) 복견리(伏見里) 우치하(宇治河) 가에다가 모두 집합시키고, 왕경(王京)과의 10리쯤의 거리에 새로 성을 쌓고 고산(高山)의 마루턱을 무너뜨려서 궁실을 지었었다. 얼마 안 가서 지진이 크게 일어나 성과 집들이 다 무너지니, 또 신성(新城)을 구성(舊城)의 동쪽에다 정하여 한결같이 이전의 제도를 따랐다. 바깥성을 빙 둘러 집을 짓고는 총애하는 여러 신하들을 살게 하였다. 증전위문정(增田衛門正)은 그 남쪽에 살고, 석전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와 천야탄정(淺野彈正)은 그 서쪽에 살고, 장속대장두(長束大藏頭)와 덕선원현이(德善院玄以) 등은 그 북쪽에 살고, 대야수리대부(大野修理大夫)는 그 동쪽에 살게 하였으며, 가강(家康)ㆍ휘원(輝元) 이하의 여러 장왜(將倭)들의 집은 또 그 밖으로 둘러 있게 하였다.
강물을 끌어다가 성 동문에 쏟게 하였는데, 깊이가 20여 길이나 되었다. 사면(四面)의 빈 땅에는 소나무ㆍ회나무를 나란히 심어서 몇 달 안에 울창한 남산(南山)을 만들었다. 산을 옮겨서 바다를 메우며, 돌과 나무를 나르는 일이 한 번 꾸짖고 한 번 돌아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넓은 집 수천 칸을 번거롭게 헐지 않고 사람의 어깨에 그대로 실어서 동쪽의 것을 서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수길은 매일같이 항상 막대를 짚고 삽ㆍ가래를 메고, 친히 스스로 역사(役事)를 독려하여, 비록 모진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쉬지 아니하였다. 가강(家康) 등은 역사에 분주하여 소리를 치고 힘을 돋우는 것이 마치 노예와도 같았다.
수길이 죽은 뒤에 복견성(伏見城)이 비어 있어서 왜승(倭僧)을 따라 몰래 그 성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다섯 걸음에 절이 하나씩 있고, 열 걸음에 누각 하나씩이 있었는데 이리저리 연결되어 어느 길을 따라 나갈지 모를 정도였다. 비록 귀신이 재목을 운반해 준다 해도 한두 해에 공사를 끝낼 수가 없을 것 같은데, 1년이 못 되어 건축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니 왜노가 제 백성을 혹사한 것과 왜인들이 역사에 힘을 다하여 일했다는 것을 족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에 앞서 적괴가 자식이 없어서 그 누이의 아들을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았다. 그런데 급기야 적괴가 대합(大閤)이라 자칭하자, 그의 양자(養子)를 관백(關白)이라 칭하고 이세(伊勢)ㆍ미장(尾張) 등의 주(州)를 나누어 주어서 그의 채읍(采邑)으로 삼게 하였다. 임진년 겨울에 수길의 애첩이 사내 자식 수뢰(秀賴)를 낳았다.혹은 이르기를, 대야수리대부(大野修理大夫)란 자가 수길의 총애를 얻어 항상 수길의 침실에 드나들면서 수길의 애첩과 몰래 간통하여 낳은 것이라고 함.
수뢰가 태어나자 관백은 속으로 의구심을 일으켜 몰래 다른 의도를 품었었고, 석전치부(石田治部)란 자가 또 따라서 부채질을 하자, 수길이 관백으로 하여금 자결케 하였다. 이에 관백은 기이주(紀伊州)의 고야산(高野山)으로 달아나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수길은 또 그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사형을 내렸다. 왜의 법은, 죽을 죄를 지은 자가 토지를 잃고 중이 되면 으레 불문에 붙였는데, 수길은 기어이 관백을 죽이고야 말았음 그리고는 관백의 본집을 포위하여 그 시종관들을 다 죽여 버리고, 그 아우와 가하 대납언(加賀大納言)만은 속죄해 주었다. 내란이 겨우 평정되고, 우리나라를 침략한 군사가 또 아무런 공이 없자, 가강(家康) 등은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킨 것을 실책으로 여겼다.
석전치부(石田治部)란 자가 늘 말하기를,“66주를 가졌으면 충분한데, 다른 나라에 군사를 이토록 내보내어 어디에 쓸 것인가?”
하였는데, 유독 청정(淸正)만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편하게 여겼었다 수길은 말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조선의 인물을 모두 죽이고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후에 서로(西路)의 사람을 옮겨서 조선에 살게 하고, 동로(東路)의 사람은 서로에 살게 하면, 10년 뒤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다시 싸움을 일으키자는 의론이 마침내 결정되자, 우리나라를 침략해 들어갈 여러 왜노에게 영을 내려 이르기를,
“사람이 귀는 둘이 있지만 코는 하나이니, 마땅히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서 머리를 대신할 것이다.”
군사 하나 앞에 각각 한 되씩으로 하여 그 코의 수효가 채워진 연후에야 생포를 인정한다.
하니, 여러 왜(倭)가 명령에 의하여 각각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서 소금에다 절여 수길에게 보냈다. 수길은 이것을 살펴본 뒤에 모아서 북쪽 들판 10리쯤에 있는 대불사(大佛寺)의 곁에 묻었는데, 높이가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다 한다. 혈육의 참화는 이를 들어서 가히 알 수 있다.
무술년 5월에 여러 왜들이 영남의 바다로부터 다 철수해 돌아갔는데, 오직 청정ㆍ행장ㆍ의홍ㆍ의지(義智)ㆍ갑비수(甲斐守) 등 십여 진(陣)만이 우리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적괴는 여러 장수를 다 불러다 놓고 말하기를,
“조선의 일은 지금까지 끝을 맺지 못하고 있으니, 웬일이냐?”
하니, 가강(家康) 등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큰 나라인지라, 동쪽을 돌파하면 서쪽을 지키고, 왼쪽을 공격하면 오른쪽으로 모이니, 비록 10년을 기한으로 삼을지라도 일을 마무리할 기약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적괴가 울면서 말하기를,
“공 등은 나를 늙었다고 여길 것이다. 나의 초지(初志)는 천하에 있어서 어려운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늙어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선과 더불어 휴병하고 화친을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그 부하들이 모두 매우 다행한 일이라 말하였다. 그의 용모와 말 기운이 몹시 거만하고 방자했던 것은 생각해 볼수록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강화(講和)의 논의는 이미 그가 죽기 전에 나왔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성질이 몹시 간사하고 교활하여, 늘 해학과 우스개로써 뭇 부하들을 희롱하여 가강(家康)들을 놀려대기를 어린 아이 놀리듯이 하였다. 또 장(醬)을 팔고 떡을 파는 형상을 꾸며 가강 등으로 하여금 길가는 사람이 되어서 그것을 사는 모양을 하게 하되, 한 푼[一文] 한 솥을 계교하는 시늉을 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또 오로지 권모술수로써 여러 장수들을 제어하였으니, 일찍이 영을 내려 이르기를, ‘오늘 밤에는 동쪽에서 잔다.’ 하고 저물녘에 문득 서쪽에 있으니, 대개 조조(曹操)의 의총(疑塚)과 같은 찌꺼기 술책이었다. 일찍이 사냥을 나가서 한동안 거짓 죽은 체하니, 여러 수종(隨從)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그의 대신(大臣)만은 태연하여 동요하지 않았는데, 이미 사술(詐術)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뒤에 다시 깨어나는 모양을 보였다.
무술년 3월 그믐부터 병을 얻었는데,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고서 여러 장수를 불러들여 뒷일을 부탁하였다. 가강으로 하여금 수뢰(秀賴)의 어미(수길의 애첩)를 아내로 삼고서 정사를 섭행하고, 수뢰가 장성하기를 기다려서 정사를 돌려주라고 하였다. 또 가하 대납언(加賀大納言)의 아들 비전수(肥前守)로 하여금 수뢰의 유부(乳父 양부(養父))가 되게 하여 비전 중납언(備前中納言) 수가(秀家)와 더불어 종시(終始) 수뢰를 받들고 대판에 살게 하였다.또 다른 사람의 딸을 많이 길러서 제 딸로 삼고, 조금 권력이 있는 자에게는 모두 혼례로써 농락을 하였으며, 또 금은과 토지로 후한 상을 주어서 그들에게 뒷 은혜를 남겨 두고 그들의 뒷 소망은 끊어 버렸다. 가강의 아들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의 딸을 수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대판(大坂)은 서경(西京)인데 섭진주(攝津州)에 있고, 복견성은 동경인데 산성주(山城州)에 있다.
대판의 형세는 복견성에 비하여 더욱 승지(勝地)가 되기 때문에 가강으로 하여금 동쪽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대판에 살면서 서쪽 여러 장수의 모역(謀逆)을 막게 하고, 휘원(輝元)으로 하여금 서쪽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복견성에 살면서 동쪽 여러 장수가 일을 꾸미는 것을 방비케 하였다. 그리고 대판의 시장(市場)을 철훼하여 널리 성지(城池)를 수리하게 하였다
대개 왜노는 시끄럽게 일을 꾸며내기를 좋아하므로 한두 달만 편안하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생각을 낸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역사에 힘을 쓰게 하여 그 근력을 다 빼서 그 날래고 독한 기운을 녹여 버린다고 한다.
적괴가 죽자, 여러 왜들은 입술에 피를 바르고 함께 맹세하면서 모두 유자(幼子 수뢰를 말함)를 추대하기로 기약했다. 그래서 내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적괴의 유해를 대불사(大佛寺) 옆에 묻어 두고 금전(金殿)을 그 아래에다 지었는데,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했다. 기이주(紀伊州) 웅야(熊野)의 백성이 반역을 도모하자 가강 등이 장수를 보내어 무찔렀다. 대개 적괴의 남은 위엄이 아직도 국중에 진동하는 것은 권모술수로 농락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권모술수가 어찌 능히 끝내 사람의 수족을 제압할 수야 있겠는가. 그 권모술수 속에 숨은 화는 오래가면 반드시 불시에 나타난다고 한다
가강 등이 석전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를 보내어 의홍ㆍ청정ㆍ행장 등을 가서 불러오게 하였는데,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청정은 사자(使者)를 보내와 급박한 사정을 고하니, 치부(治部)란 자도 또한 비전(肥前)에 머무르고 감히 건너가지 못했다. 가강 등이 구원병을 보내고 싶지만 기꺼이 가고자 하는 자가 없고, 보내지 아니하자니 그들이 패몰(敗沒)할 것이 두려웠는데, 등당좌도수(藤堂佐渡守)란 자가 단독으로 가겠다고 청하므로, 기쁘게 허락하였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서 급보가 또 오기를, ‘중국 군사가 사천(泗川)의 왜장(倭將) 의홍의 진영을 포위하자 의홍은 거짓 패한 척하고 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닫지 아니하였다. 중국 군사가 성 안에 들어가니, 의홍은 군사를 풀어서 돌격하여, 성에 들어갔던 중국 군사를 몰살하였다.’고 하였다. 뭇 왜는 이 소식을 듣고 사뭇 생기가 있었으니, 왜노들이란 과장하기를 좋아하는지라, 수급(首級)에 대한 허실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신이 왜노들의 형세를 관찰하건대, 우리나라를 위한 계책을 마련함에 있어 우선 왜노들의 정상을 통촉하시와 조종(操縱)하고 신축(伸縮)하는 것을 알맞도록 해야 될 줄 아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있어서 왜노의 형세를 갖추 적어서 외람되이 세 가지 계책을 마련하고, 그 계책을 주어서 보낼 통역과 함께 꾀하여, 왕래하는 왜인의 배를 타고 가서 강역(疆域)의 밖에 도달하게 하였는데, 통역이 미처 떠나지 못하고, 뭇 왜노는 다 철수해 돌아갔던 것입니다.
무술년 섣달 보름 뒤에 청정은 갑비수(甲斐守)와 함께 먼저 왜경(倭京)에 당도하였고 행장 및 의홍은 섣달 말일경에 왜경에 당도했습니다.청정이 먼저 와서 행장이 나약하고 겁 많은 것을 비웃었는데, 행장이 와서는 또 선언(宣言)하기를, ‘청정이 조선의 왕자(王子)를 대우하지 아니하였고 진영을 불태우고 갑자기 물러나서 화친이 거의 이루어질 무렵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나는 도진(島津)과 함께 중국 질정관(質正官)을 영솔하고 조용히 뒤에 떨어져 왔으니, 내가 겁이 많다 하겠느냐, 청정이 겁이 많다 하겠느냐.’ 하였습니다. 휘원(輝元) 등은 화친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을 들어 허물을 청정에게 돌렸고, 청정을 옳다고 하는 자는 역시 행장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일정하지 못했던 것을 허물로 삼아서 의론이 분분하자, 틈은 더욱 벌어져만 갔습니다.
석전치부소보라는 자는 적괴의 대단한 총신(寵臣)으로 그의 식읍(食邑)이 근강주(近江州)에 있는데, 그 땅이 기름지기로는 왜국의 제일입니다. 그는 증전위문정(增田衛門正)ㆍ천야탄정(淺野彈正)ㆍ덕선원현이(德善院玄以)ㆍ장속대장두(長束大藏頭) 등과 더불어 오봉행(五奉行)이 되어 국론(國論)을 전적으로 쥐고 있습니다. 정유년 전란에서 돌아오니, 복원우마조(福原右馬助)란 자가, 치부(治部)가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전진하지 아니했다는 것으로써 여러 장수를 참소하여, 아파수(阿波守)ㆍ갑비수(甲斐守)ㆍ좌도수(佐渡守)ㆍ청정(淸正)ㆍ주마두 장정(主馬頭長政)ㆍ죽중원개(竹中源介) 등이 아울러 꾸지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적괴는 주마두 및 원개 등의 풍후(豐後)의 6만 석 거리 토지를 빼앗아 우마조에게 상으로 주었습니다.
급기야 청정 등이 다 철수해 돌아와서는, 적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기필코 우마조(右馬助)를 죽이겠다고 하였고, 치부(治部)의 당(黨)들은 역시 우마조를 구원하여 당여(黨與)가 더욱 갈라졌습니다.
가강이 청정 및 장강월중수(長岡越中守)ㆍ복도 대부(福島大夫)ㆍ갑비수(甲斐守)ㆍ아파수(阿波守)ㆍ좌도수(佐渡守)ㆍ천야탄정(淺野彈正) 부자(父子) 등과 함께 일당이 되었고, 여러 소장(小將)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휘원(輝元)은 비전 중납언(備前中納言)ㆍ축전 중납언(筑前 中納言)ㆍ석전치부(石田治部)ㆍ증전위문정(增田衛門正), 상주(常州)의 좌죽(佐竹), 오주(奧州)의 정종(政宗) 및 최상(最上)출우(出羽)의 경승(景勝)ㆍ장속대장(長束大藏)ㆍ도진의홍(島津義弘) 및 행장 등과 일당이 되었고, 붙은 자가 더욱 많았습니다. 이들은 새벽이나 밤에 모여 모략을 일삼는데, 귀신이나 물여우[鬼蜮]와 같았다 합니다.
기해년 정월 12일에 가강은 적괴의 유령(遺令)이라 칭하고서, 수뢰(秀賴)를 대판에 보내어 살게 하고, 자신은 복견성(伏見城)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변란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여서 인심(人心)이 하루에도 여러 번 놀라고, 시장의 상점은 반이나 철시하였습니다.
윤 3월 초 9일에 청정은 갑병(甲兵)을 거느리고 복견에 올라와 왜력(倭曆)에도 윤 3월이 있기 때문에 윤 3월이라 하였음.치부를 공격하려고 하니, 휘원(輝元)의 모주승(謀主僧) 안국사(安國寺)란 자가 휘원을 달래어 말하기를,
“관백의 섭정(攝政)은 단지 한 사람이 있을 뿐이며, 인신(人臣)의 부귀(富貴)로써 보더라도 공(公)을 넘어선 자가 없는데, 전쟁은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휘원의 마음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안국사로 하여금 가강에게 가서 달래게 하였고, 가강도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장속대장(長束大藏)이란 자는 치부의 사돈인데, 역시 치부를 달래어 가강에게 가서 사죄하게 하였습니다.
휘원 등은 드디어 가강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복견성에 들어가 살게 하였습니다. 치부는 권수(權首)라 해서 그 아들을 가강에게 볼모잡히니, 가강이 치부를 그 식읍(食邑)으로 내쫓고, 우마조(右馬助)는 화근이라 해서 그 토지를 빼앗아 도로 주마두(主馬頭) 등에게 주니, 우마조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녹운(綠雲)이라 고치고 산사(山寺)를 짓고 살았습니다. 대개 그 기상이 춘추 전국(春秋戰國)의 세상과 너무도 같았습니다. 치부란 것은 예부(禮部)요, 소보(小輔)는 원외랑(員外郞)과 같았습니다.
청정(淸正)이란 자는 성품이 본시 흉악하고 억셉니다. 그러므로 가강을 권하여 치부를 공격케 하고 인하여 난리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급기야 가강이 치부와 감정을 풀게 되자, 그는 화풀이를 할 수가 없게 되어서 분한 말을 많이 하였다 합니다. 그는 드디어 가강을 배반하고 전전비전수(前田肥前守) 비전 중납언(備前中納言)ㆍ중장 정종(中將政宗)ㆍ장강월중수(長岡越中守)ㆍ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ㆍ천야탄정(淺野彈正) 부자(父子)등과 더불어 살을 찔러 피를 뽑아 함께 맹세하며, 기어코 힘을 합해 가강을 없애고서 그 토지를 나누어 갖기로 했습니다. 그 모의에 참가하지 아니한 자는 오직 휘원ㆍ금오(金吾) 등 5~6명이었습니다. 맹약은 이미 정했으나 지위도 같고 덕망도 같아서 서로가 통솔하지 못하였고, 비전수ㆍ청정 등 태반은 사읍(私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기해년 9월 9일에 가강이 수뢰를 대판에서 조알(朝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전(肥前)의 당이 미리 알고서 길옆에다 복병(伏兵)을 하고 대기하려 했는데, 토견 감병(土肩勘兵)이란 자가 몸소 가강을 찌르겠다고 청하였습니다. 또 석전치부라는 자는 이미 청정 등과 틈이 있을 뿐 아니라 또 가강에게 곱게 보이고자 하여 몰래 서신으로 가강에게 고하였다 합니다. 가강은 탄정(彈正)에게 이 사실을 묻자, 탄정은 굳게 숨기었습니다.
처음 수길의 양자인 관백이 수길의 손에 죽게 되자, 탄정은 관백의 당(黨)으로 체포되어 죽게 되었는데, 가강이 힘써 구원하여 죽음을 면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강은 탄정을 심복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먼저 탄정에게 물었던 것인데, 탄정이 이미 비전(肥前)과 함께 맹세한 바가 있어서 숨기고 고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다음에 위문정(衛門正)에게 물으니, 자신도 역시 들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비전수(肥前守) 조의 아래에 있음.가강이 크게 노하여 탄정으로 하여금 자결하게 하자, 탄정은 말하기를,
“수뢰는 비록 소주(小州)이지만 수뢰가 나더러 죽으라고 한다면 내가 마땅히 명령을 듣겠거니와, 내부(內府)는 비록 대반(大班)이라 할지라도 내부가 나더러 죽으라고 한다면 나는 결단코 따를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강은 드디어 탄정을 쫓아내고 그의 식읍(食邑)을 갑비주(甲斐州)로 돌렸다 합니다.
가강은 또 수길의 유명(遺命)에 따라 수뢰의 모(母)를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는데, 수뢰의 모는 방금 대야수리(大野修理) 등과 더불어 상통하여 아이를 뱄기 때문에 사절하고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가강은 더욱 성내어 수리(修理)를 잡아서 관동(關東)으로 귀양 보내어 도중에서 죽게 하였고, 토견 감병(土肩勘兵)을 잡아서 또 관동에 귀양 보냈습니다. 관동에 있는 여러 장수로 하여금 갑병(甲兵)을 거느리고 비전(肥前)으로 올라오는 길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판에 살면서 위급한 형세와 의구(疑懼)하는 민심을 진정시켰습니다.
그의 장자 삼하수(三河守), 작은 아들 일기수(壹岐守)로 하여금 복견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가운데 아들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으로 관동의 근본지를 지키게 했습니다.급히 군(郡)으로 돌아간 여러 장수를 불러서 그 거취를 관망하니, 가강에게 귀부(歸附)한 자는 곱게 보이고자 하고, 가강을 거슬렸던 자는 자신을 해명하고자 하여, 일시에 길을 떠나 왔습니다. 오직 청정만은 명령을 듣고도 물러가 엎드려 있다가 석 달이 넘어서야 마침내 올라왔습니다.
월중수(越中守) 단후(丹後)의 자신의 성(城)을 수리하며 말하기를,
“이 땅만 지켜도 만족한데, 내부(內府)가 되어서 무얼하랴.”
하였으니, 이때에 휘원이 만약 발 하나를 움직였다면 승패가 당장에 결정 날 터인데, 두 추장이 이미 화목하고 있으니, 여러 왜가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가강은 비전 중납언(備前中納言)ㆍ축전 중납언(筑前中納言) 등으로 하여금 복견을 지키게 하니, 비전이라는 자가 사절하며 말하기를,
“대합(大閤)의 유명(遺命)은 비전수(肥前守)와 우리 두 사람에게 함께 수뢰를 추대하고 대판을 지키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감히 명령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가강이 굳이 거절하고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수가는 마지못해 복견성으로 이주하였다 합니다.
처음 수길이 여러 왜가 거처할 집을 왕경(王京)ㆍ복견ㆍ대판 세 곳에다 마련해 주고서 수시로 왕래하며 살게 하였는데, 가강이 대판에 살게 되자, 여러 왜가 일시에 내려가므로 복견은 한결같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가강의 사읍(私邑)은 관동에 있고 관동에서 왜경까지의 거리는 먼 곳은 20일 길이고 가까운 곳도 15일은 걸립니다.휘원(輝元)의 사읍(私邑)은 산양(山陽)ㆍ산음(山陰)에 있는데, 산양ㆍ산음에서 왜경까지의 거리는 먼 곳은 15일 길이 넉넉하고, 가까운 곳도 7~8일은 걸립니다.왜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하였습니다. 옛날의 이른바, 연(燕) 나라ㆍ조(趙) 나라의 수장(收藏)과 한(韓) 나라ㆍ위(魏) 나라의 경영(經營)으로도 능히 이보다 훨씬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여러 왜들은 이 두 왜에 견준다면 만에 하나도 대적하지 못하지만, 차차로 미루어 보면 대개는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천 석 거리의 토지를 가진 자는 정병(精兵) 50명을 기르고, 만석 거리의 토지를 가진 자는 정병 5백 명을 기릅니다. 갑병(甲兵)의 수효는 곡식 수효에 의거하면 알 수 있습니다.가강ㆍ휘원ㆍ경승(景勝)ㆍ좌죽(佐竹)ㆍ정종(政宗)이 최상이요, 의홍(義弘)ㆍ용장사(龍藏寺)ㆍ생전(生田)ㆍ굴미(崛尾)ㆍ굴리(崛里)ㆍ통정(筒井)ㆍ진전(眞田)ㆍ토좌(土佐)의 성친(盛親)ㆍ찬기(讚岐)의 아악(雅樂)으로 말하면 토지가 모두 세습(世襲)된 것이요, 부곡(部曲 사인(私人)의 군대)들도 다 세신(世臣)이어서, 주장(主將)이 싸움에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날이면, 그 아랫 사람들은 다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다 합니다. 5백 의사(義士)가 전횡(田橫)을 위해 죽은 것쯤은 하나의 하찮은 일일 따름입니다. 옛날의 이른바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의 절제(節制)와 제ㆍ초(齊楚)의 지격(枝擊)으로도 이를 넘어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그 나머지 여러 왜는 모두 노예와 하천(下賤)배로서 수길이 일어서는 것으로 인하여 완력과 용맹을 가지고서 스스로 부귀를 이루었으며, 토지도 모두 새로 얻은 것이요, 부곡(部曲)도 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비록 크기가 수가(秀家)ㆍ금오(金吾)와 같고 용력이 청정(淸正)ㆍ장강(長岡)과 같을 지라도 주장이 싸움에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아랫 사람은 혹은 흩어지고 혹은 항복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왜장ㆍ왜졸에게 물어보기를,
“살기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물(物)이나 마음이 똑같은 법인데, 일본 사람들은 유독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는 것은 어쩐 일이냐?”
고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일본에 있어서는 장관(將官)이 백성들의 이권(利權)을 장악하고 털끝 하나라도 백성에게 맡기지 아니하기 때문에, 장관의 집에 기식(寄食)하지 아니하면 의식(衣食)이 나올 길이 없으며, 이미 장관의 집에서 기식하는 이상에는 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한 번 담력이 부족하다고 소문나면 가는 곳마다 용납되지 못하고 패도(佩刀)가 정(精)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열에 끼워 주지 아니합니다. 칼에 찔린 흔적이 얼굴에 있으면 용맹한 사나이라 지칭되어 중한 녹(祿)을 얻고, 칼 자욱이 귀 뒤에 있으면 달아나기를 잘하는 자라 지칭이 되어 배척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의식(衣食)이 없어서 죽을 바에는 적의 진중에 달려가서 싸우다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힘껏 싸우는 것은 실로 자신을 위한 모책(謀策)이요, 주장을 위한 계책(計策)이 아닌 것입니다.
대개 그 사훼(蛇虺)의 독과 호랑(虎狼)의 탐욕이 무력을 믿고 잔인을 즐기며, 그 떠들썩하게 싸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오직 천성에서 얻어지고 이목에 익혀진 것뿐만이 아니라, 법령이 따라서 얽어매고 상벌(賞罰)이 또 따라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장수가 태반은 재질이 노둔한데도 다 능히 사람을 죽일 힘을 얻고, 그 군사가 태반은 연약한데도 다 능히 적(敵)과 맞서서 죽음을 다투게 되니, 만 명만 되면 능히 당적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왜노를 두고 이름인데, 하물며 수 십여만이겠습니까?
천하의 화는 으레 소홀하게 여기는 데에서 생기는데, 우리나라에서 야인(野人)을 방비함에 있어서는 남북에다 두 병사(兵使)를 두되 다 2품의 중직으로 하고, 서북에다 두 평사(評事)를 두되 다 명망 있는 문관(文官)으로 하면서, 호남ㆍ영남의 변장(邊將)에 있어서는 관례를 따를 따름이니, 2품의 중직과 명망 있는 문관이라고 하여 방어하는 데 큰 보탬이야 없겠지만, 남(南)을 경히 여기고 북을 중히 여김이 이를 들어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백만의 야인이 수십만의 왜병을 대적치 못할 터인데, 국가에서 남을 경히 알고 북을 중히 여기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음속으로 따져 보고 왜에게 물어본즉, 수백 년 전의 왜국 법령은 대개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다름이 없어서, 귀인의 집에 사노(私奴)를 두는 것이나, 범민(凡民)이 사전(私田)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수령들의 경질, 과거(科擧) 보여 인재 뽑는 것 등이 대략은 서로 같았으니, 대개 수 천 리의 한 낙국(樂國)이었습니다. 그런데 관동 장군(關東將軍) 뇌조(賴朝)가 전쟁을 일삼은 이래로는 마침내 하나의 전국(戰國)을 이루었습니다. 이른바 포수(砲手)라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고, 단지 창과 칼을 쓰는 것으로 장기(長技)를 삼았을 따름이었습니다. 추산해 보면 50년 전에 남만(南蠻)의 배 한 척이 표류되어 왜국에 도착했는데, 그 배에는 포탄(砲彈) 및 화약(火藥) 등이 가득 실려 있었으므로, 왜인이 이때부터 포 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왜인의 천성이 영리하여 배우기를 잘해서 4~50년 사이에 뛰어난 포수가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왜노는 옛날의 왜노가 아니요, 우리나라의 방어는 또 옛날의 방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강역(疆域)의 근심은 전일보다 백 배나 더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이제 이후로는 남쪽을 경히 여기고 북쪽을 중히 여기는 폐습을 철저히 개혁하여 인심을 단결케 하며, 변방을 튼튼히 하고 변장(邊將)을 선택하며, 성(城)과 호(壕)를 구축하고 선박을 손보며, 봉화(烽火)를 잘 관리하고 군졸을 훈련하고 기계(器械)를 수선하는 것 등을 한결같이 한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대개 오랑캐를 방어하는 것은 구황(救荒)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구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으니, 하나는 바로 화기(和氣)를 감동시키고 불러들여 풍년이 들게 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단지 저축하는 계책이 있는데, 만약 백성이 기근을 당해서야 알았다고 한다면 다시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 오랑캐를 방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 두 가지 설이 있으니, 한 가지는 바로 춘추(春秋)의 도(道)가 있는 세상에는 방수(防守)가 서이(西夷)에 있다는 것이요, 그 다음은 단지 변방을 튼튼히 하는 계책이 있을 뿐이니, 만약 침략을 받은 뒤에 알았다고 한다면 다시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소신(小臣)이 왜경에 온 뒤부터 왜국의 허실을 탐지하고자 하여, 간일(間日)하여 왜승(倭僧)과 접촉해 보니, 그중에는 문자를 해득하고 사리를 아는 자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의사(醫師) 의안리안(意安理安)이란 자가 있어 낭당(琅璫)의 안으로 소신을 만나러 자주 찾아왔었고, 또 묘수원(妙壽院)의 중 순수좌(舜首座)라는 자가 있는데, 경극황문정가(京極黃門定家)의 손자요, 단마수(但馬守) 적송좌병 광통(赤松左兵廣通)의 스승으로서 자못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이해하여 어느 글이라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성품이 굳세어 왜인에게 용납되지 못하였는데, 내부(內府) 가강(家康)이 그가 훌륭한 인재란 말을 듣고서 왜경(倭京)에다 집을 지어 주고 해마다 쌀을 2천 석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순수좌는 그 집을 버리고 살지 아니하였고 곡식도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면서, 유독 약주소장 승준(若州少將勝俊)과 좌병 광통(左兵廣通)만을 데리고 놀았습니다.
광통이란 자는 그 나라 환무천황(桓武天皇)의 구대(九代)손인데, 그는 육경(六經)을 독실히 좋아하여, 비록 비바람 치는 말 위에서도 늘 책을 놓지 아니하였는데, 그 성품이 노둔하여 그 나라 언역(諺譯)을 버리고서는 한 줄도 읽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순수좌가 일찍이 말하기를,
“일본의 생민(生民)이 지치고 시든 것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조선이 만약 중국 군사와 함께 일어나서 백성을 조문하고 죄 있는 자를 토벌하되, 먼저 항복한 왜인 및 통역으로 하여금 왜언(倭諺)으로 방을 내걸어, 백성의 수화(水火)의 급함을 구제한다는 뜻을 보이며, 군사가 지나가는 곳마다 추호도 백성을 침범하지 아니한다면, 비록 백하관(白河關)에까지라도 갈 수 있거니와, 만약 왜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던 그 수단을 이쪽에다 바꾸어 쓴다면 비록 대마도 하나도 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우리나라의 과거 보는 절차 및 춘추(春秋)의 석전(釋奠)ㆍ경연(經筵)ㆍ조정(朝廷) 등의 절목(節目)을 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여하여 듣지 못했다.’ 하였고, 단지 과거ㆍ석전(釋奠) 등의 대개를 알려 주었더니, 중은 매양 실심하여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도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 나는 신묘년 3월 살마주(薩摩州)로 내려가서 해박(海舶)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병이 나서 경(京)으로 돌아왔소. 병이 조금만 낫게 되면 조선으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뒤미처 전쟁이 벌어져서 서로 용납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이 때문에 마침내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했으니, 그 상국(上國)에 가서 관광(觀光)을 못하게 된 것도 역시 운명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일본의 장관(將官)은 모두 다 도적들인데, 오직 광통(廣通)만이 자못 사람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일본이 본시 상례(喪禮)가 없었는데 광통만이 홀로 삼년상을 실행하였고, 중국의 제도 및 조선의 예절을 독실히 좋아하며, 의복ㆍ음식의 세세한 절차에 있어서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의 것을 본받고자 하니, 비록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신의 일을 들어 광통에게 이야기했더니, 광통이 이따금 찾아와 안부를 물으며 자칭 청정ㆍ좌도 등과 더불어 틈이 나 있는 처지이니, 절대로 좌도의 집에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또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로서 포로가 되어 있는 자와 신 형제를 상종하여 육경(六經)의 대문(大文)을 적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가만히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에 보조하면서 돌아가는 길에 노자나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우리나라 《오례의(五禮儀)》ㆍ《군학석채 의목(郡學釋菜儀目)》을 얻어서 그의 사읍(私邑)인 단마(但馬)를 독려하여 공자의 묘(廟)를 세우고 또 우리나라 제복(祭服)ㆍ제관(祭冠)을 만들어 날을 걸러 그 부하를 거느리고 제의(祭儀)를 익혔습니다.
금년 2월 초 9일에 이르러 좌도란 자가 그의 사읍(私邑)에서 가강의 명에 응하여 복견성에 왔는데, 대구(大丘)에서 포로되어 온 사람 김경행(金景行)이란 자가 약간 왜언(倭諺)을 적을 줄 알기에, 신등이 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왜언으로 글을 만들어 좌도에게 주며 말하기를,
“열 식구를 공연히 기르고 있으니 너희들도 이익될 것이 없고, 4년 동안을 외로이 갇혀 있으니 나는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혹시 죽이고 싶지 않거든 문을 나가도록 허락해 줄 것을 바라며, 문을 나가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살아도 아무런 의욕이 없다.”
하였더니, 왜승(倭僧) 경안(慶安)이 힘써 좌도에게 권유하며 말하기를,
“어버이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는 것은 피차가 다 마찬가지다. 만약 문을 나가도록 허락해 준다면 혹시 돌아갈 편(便)도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좌도란 자가 곧 신에게, 한 집안을 거느리고 문 밖으로 나가라 하므로, 신이 우리나라 사인(士人)들 중에 일찍이 약속을 맺었던 자를 수합하고, 또 왜인 집에 있는 뱃사공을 끌어내어, 전후에 얻었던 은전을 거두어 몰래 배 한 척과 배 안에서 먹을 양식을 사들였습니다. 타국의 사람이 홀로 천 리나 되는 호랑이 굴을 지나가자면 뜻밖에 예측하지 못할 걱정이 있을까 두려워서, 드디어 순수좌 및 광통을 찾아가서 국경을 벗어나도록 힘을 빌려주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광통은 사택지마수(寺澤志摩守)의 편지를 구하여 관문의 기찰(譏察)에 대비하도록 해주었고, 순수좌는 또 뱃사공을 한 사람 내주어 수로를 일러 주게 하고는, 대마도에 당도하면 그 사공을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신은 드디어 신의 가속 열 사람과 포로된 사인(士人) 및 뱃사공과 그들의 아내와 딸, 모두 38명을 거느리고 배를 같이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월 초 2일에 왜경(倭京)을 떠났는데, 뱃사공의 솜씨가 서투르고 바람이 또 좋지 못하여 5월 19일에야 비로소 부산에 당도하였습니다. 포로된 사람 중에서 나오려고 하는 자는 으레 대마도로써 귀문(鬼門)의 한계로 삼기 때문에, 신은 격서(檄書) 한 장을 만들어서 귀정(歸正)의 의(義)를 들어 힘쓰게 함과 동시에 대마도를 의심하지 말도록 설유하였습니다.
오봉행(五奉行) : 일본 무가 시대(武家時代)의 직명. 혹은 한 국부(局部)의 사무의 장관. 겸창(鎌倉)ㆍ실정 시대(室町時代)에는 정소(政所)ㆍ평정중(評定衆)ㆍ문주소(問注所)ㆍ시소(侍所) 등에 속하였고, 풍신 시대(豐臣時代)에는 특히 오봉행(五奉行)을 두었고, 강호 시대(江戶時代)에는 노중(老中) 약년기(若年寄)에 소속되는 것 외에 사사봉행(社寺奉行) 등을 두었고, 막부(幕府)의 말기에는 육군ㆍ해군 등의 모든 봉행을 더 두는 등 그의 수가 꽤 많았다.
내부(內府) : 일본 내대신(內大臣)의 이명(異名). 태정관(太政官) 중에 설치하였던 한 관직. 처음에는 좌ㆍ우대신(左右大臣)의 위에 있다가 뒤에 그의 아랫줄로 내려왔다.
낭당(琅璫) : 철쇄(鐵鎖)인데, 죄인을 결박하는 도구이다.
왜국 백관도(倭國百官圖)
제왕((帝王) 천자(天子)
바로 왜의 황제인데, 머리를 자르지도 않고 당(堂)에 내려가지도 않으며, 보름 전에는 채소를 먹고 보름 후에는 생선을 먹으며, 전세(前世)에 있어서는 위복(威福)을 그 자신이 행사했고, 섭정(攝政)ㆍ관백(關白)ㆍ대납언(大納言) 등의 관을 두어 임금의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였습니다. 중세 이후로는 섭정이 국가의 명령을 독차지하고, 이른바 천황이란 것은 호령을 내리지 못하였으며, 왕성(王城)에 봉행(奉行)한 사람을 두어 왕성의 안팎을 경호하게 하였습니다. 수길(秀吉)의 세상에는 덕선원(德善院)의 현이(玄以)란 자가 왕경(王京)의 봉행이 되었으니, 봉행이란 것은 맡아 지킨다는 칭호입니다.
섭정(攝政) 전하(殿下)관백(關白) 전하(殿下)장군(將軍) 막부(幕府)대정대신(大政大臣) 대상국(大相國)대납언(大納言) 아상(亞相)중납언(中納言) 황문(黃門)소납언(小納言) 급사(給事)재상(宰相) 삼의(三議)이위(貳位) 특진(特進)삼위(三位) 삼품(三品)좌우대변(左右大弁) 상윤(尙尹)좌우중변(左右中弁) 낭중(郞中)좌우소변(左右小弁) 원외랑(員外郞)시종(侍從) 습유(拾遺)좌우대장(左右大將) 막하(幕下)중장(中將) 우림(羽林)소장(小將) 우림검비위생(檢非違栍) 대리(大理)중칙(中勅) 중윤(中尹)판관(判官) 정위(廷尉)외기(外記) 외사(外史)내기(內記) 주하내사(柱下內史)봉전(縫殿) 식부(式部) 이부(吏部)대학(大學) 좨주(祭酒)치부(治部) 예부(禮部)병부(兵部) 평부(平部)형부(刑部) 토부(討部)민부(民部) 호부(戶部)궁내(宮內) 사농(司農)소부(掃部) 쇄소(灑掃)아악(雅樂) 대악(大樂)현번(玄番) 홍려(鴻臚)대장(大藏) 대부(大府)직부(織部) 겸직염서(兼織染署)대선대부(大膳大夫) 광록(光祿)목공(木工) 장작(匠作)대취(大炊) 대창(大倉)주전(主殿) 상창(尙倉)전약(典藥) 대의(大醫)채녀(采女) 채녀(采女)탄정(彈正) 상대(霜臺)좌우경(左右京) 경조(京兆)주마(主馬) 구서(廐署)좌우(左右) 위부(衛府)장감(將監) 신위(新衛)좌우위문(左右衛門) 금오(金吾)좌우마(左右馬) 전작구(典作廐)병고(兵庫) 무고(武庫)좌우병위(左右兵衛) 무위(武衛)수리(修理) 장작(匠作)□해유(
解由) 향□(向
)
이란 글자는 무슨 글자인지 미상하므로 우선 왜의 본서(本書)대로 써서 메꾸었음수(帥) 도독(都督)대무(大武) 대경(大卿)대력(帶力) 월법(月法)도서(圖書) 지윤(祗尹)준인(準人) 포의반(布議反)주계(主計) 탁지(度支)주세대사(主稅大使) 이천석(二千石)권수(權守) 판관대(判官代)감물(監物) 성문랑(城門郞)주수(主水) 상림서(上林署)대사(大舍) 문복(門僕)
왜국 팔도 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용명천황(用明天皇) 시대에 오기(五畿)와 칠도(七道)를 정했고, 문무천황(文武天皇)이 육십육국(國)으로 나누었음. 왜승(倭僧)의 기록이 간혹 문리(文理)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가 있으나, 본문에 의하지 아니하면 그 실상을 잃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모두 구본(舊本)에 의해 등초하고, 제주(諸州)의 말미에 다시 새로 듣고 본 것을 부록하여 참고에 편리하게 하였음.
기내 5국(畿內五國)
산성(山城) 옹성(甕城), 심주(尋州)상(上)이다. 관할이 8개 군(郡) 을훈부(乙訓府)ㆍ갈야(葛野)ㆍ애탕(愛宕)ㆍ기이(紀伊)ㆍ우치(宇治)ㆍ구세(久世)ㆍ철희(綴喜)ㆍ습락(拾樂 습(拾)은 상(相)이라고도 한다)이다. 거리는 남북이 백여 리이다. 짐적(朕跡)에는 약방(藥房)이 많다. 심으면 백 배나 나며 맛이 달다. 크고, 상상(上上)에 드는 나라이다. 상관(上管)의 상(上)은 토품(土品)의 상을 이른 것이요, 대상(大上)의 대(大)는 지방(地方)이 큼을 이르고, 상상국(上上國)의 상은 역시 토품을 말한 것이다. 아래도 모두 이와 같음. ○ 왕경(王京) 및 적괴가 쌓은 복견(伏見)의 신경(新京)이 있음.
태화(太和) 화주(和州)대(大)이다. 관할이 15개 군 첨상(添上)ㆍ첨하(添下)ㆍ평부(平部)ㆍ광뢰(廣賴)ㆍ갈상(葛上)ㆍ갈하(葛下)ㆍ인해(忍海)ㆍ우지(宇智)ㆍ길야(吉野)ㆍ우타(宇陀)ㆍ성상(城上)ㆍ성하(城下)ㆍ고시(高市)ㆍ십시부(十市府)ㆍ산변(山邊)이다. 남북이 2백여 리이다. 산이 둘러섰으며, 토산(土産)이 다른 나라보다 10배가 되고, 명승지와 고적이 많다. 크고, 상상(上上)에 드는 나라이다. 왜의 남도(南都)이다. 왜왕(倭王)이 예전에 이곳에 도읍하고 이름을 화국(和國)이라 했다. 또한 야마대(野馬臺)라고도 하는데, 야마대란 양 무제(梁武帝)가 명명(命名)한 것이다. 왜인들의 행위가 경박하여 야마(野馬)와 같기 때문에 그 도읍을 이름한 것인데, 왜인들이 지금도 태화를 야마대라고 칭한다. 4백 80개의 사찰(寺刹)이 있는데, 매우 화려하다.증전위문정(增田衛門正)이란 자가 봉행(奉行)으로서 30만 석을 받아 먹고, 신장준하수(新庄駿河守)가 3만 석을 받아 먹고, 지전 손사랑(池田孫四郞)이 2만 석을 받아 먹는데, 토지가 기름지고 도미(稻米)가 대단히 희다.
하내(河內) 하주(河州)대(大)이다. 관할이 15개 군 금군(錦郡)ㆍ석천(石川)ㆍ고시(古市)ㆍ안복부(安福府)ㆍ대현(大縣)ㆍ고안(高安)ㆍ하내(河內)ㆍ찬량(讚良)ㆍ자전(茨田)ㆍ교야(交埜)ㆍ약강(若江)ㆍ삽하(澁河)ㆍ지기(志紀)ㆍ단북부(丹北府)ㆍ단남(丹南)이다. 사방이 이틀 길 남짓하다. 제방ㆍ소(沼)ㆍ못ㆍ우물이 많으며, 심으면 5배(倍)가 난다. 시전(市廛)이 허다하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 영귀(靈龜) 2년(716, 신라 성덕왕 15년)에 하내(河內) 대조군(大鳥郡)을 떼어내고, 신호(神護) 경운(慶雲) 4년(707, 신라 성덕왕 6)에 해내의 도국(島國)을 정지시켰다.수길의 여러 소장(小將)들이 갈라서 받아 먹는다.
화천(和泉) 천주(泉州)하(下)이다. 관할이 3개 군 대조(大鳥)ㆍ화천(和泉)ㆍ일근(日根)이다. 남북이 백여 리이다. 산을 지고 바다를 안고 있기 때문에 오곡(五穀)이 냉삽(冷澁)한 기운을 띠어 맛이 없다. 나라가 넓다. 장해(醬醢)ㆍ어별(魚鼈)이 많다. 크고, 하(下)에 드는 나라다.소출파마수(小出播摩守)와 석전목공두(石田木工頭)가 받아 먹는다.
섭진(攝津) 섭주(攝州)상(上)이다. 관할이 13개 군 주길(住吉)ㆍ백제(百濟)ㆍ동성(東城)ㆍ서성부(西成府)ㆍ팔부(八部)ㆍ도하(島下)ㆍ도상(島上)ㆍ풍도(豐島)ㆍ하변(河邊)ㆍ무고(武庫)ㆍ토원(兎原)ㆍ유마(有馬)ㆍ능세(能勢)이다. 이틀 반 길이다. 황성(皇城)을 끼고 서해(西海)를 안고 있다. 남쪽은 따스하고 북쪽은 차기 때문에 오곡(五穀)이 빨리 익고, 어염(魚鹽)이 풍부하다.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 왜의 서경(西京)인 대판(大坂)이 있는데다, 삼하(三河)를 띠고 큰 바다를 내려다 보아 형승(形勝)이 복견(伏見)보다 낫다. 토지는 모두 관백(關白)에게 속해 있다.
동해도 15국(東海道十五國)
이하(伊賀) 이주(伊州)하(下)이다. 관할이 4개 군 하배부(下拜府)ㆍ산전(山田)ㆍ이하(伊賀)ㆍ명장(名張)이다. 사방이 하룻길이다. 동남은 바다고 북에는 산이 많으므로 온화한 기운을 의지하고 생겨나 초목(草木)과 죽탕(竹蕩)이 많다. 작으나,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통정(筒井)씨가 받아 먹는데, 대화(大和)의 대성(大姓)이다. 순경(順慶)이란 자가 매우 용맹스러웠는데, 수길이 독살하였다. 그 아들이 이하(伊賀)로 이식(移食)하여 장속대장(長束大藏)의 아우 이하수(伊賀守)와 분식(分食)한다.
이세(伊勢) 세주(勢州)대(大)이다. 관할이 16개 군 상명(桑名)ㆍ조명(朝明)ㆍ영록(鈴鹿)ㆍ하곡(河曲)ㆍ일지(壹志)ㆍ암예(菴藝)ㆍ다도(多度)ㆍ금도(錦島)ㆍ어좌도(御坐島)ㆍ원변(員辨)ㆍ삼중(三重)ㆍ안농(安濃)ㆍ반고(飯高)ㆍ반야(飯野)ㆍ도회(渡會)ㆍ다기(多氣)이다. 남북이 사흘 길 남짓하다. 산과 바다가 반반씩으로 다른 고을보다 나으므로 국친(國親)의 것이 되어 원공(原貢)이 많다. 심으면 백 배의 수확을 한다. 매우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경극(京極)이 받아 먹는다. 그 땅에 이세대명신궁(伊勢大明神宮)이 있는데, 토인(土人)들이 부모처럼 섬긴다. 토산은 백금(白金)이다.
지마(志摩) 지주(志州)하(下)이다. 관할이 3개 군 답영(答英)ㆍ지우부(志虞府)ㆍ옹도(甕島)이다. 이 안의 1군(郡)은 이세(伊勢)에 속한다. 사방이 반 나절 길이다. 1군은 지주(志州)를 합쳐 일 국(國)이다. 해조(海藻)가 많이 난다. 하하(下下)에 드는 나라다.구귀대우수(九鬼大隅守) 부자(父子)가 받아 먹는다.
미장(尾張) 미주(尾州)하(下)이다. 관할이 9개 군 해부부(海部府)ㆍ중도(中島)ㆍ우율(羽栗)ㆍ단우(丹羽)ㆍ춘일부(春日府)ㆍ산전(山田)ㆍ애지(愛智)ㆍ지다(智多)ㆍ당자도(當資島)이다. 남북이 사흘 길이다. 토지가 비옥하여 심으면 천배가 나고, 마을에는 좋은 경치가 많아 일본국에서도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 복도 대부(福島大夫)가 받아 먹고, 군소 장수들이 역시 나누어 받아 먹는다.
참하(參河) 참주(參州)하(下)이다. 관할이 8개 군 벽해(碧海)ㆍ하무(賀茂)ㆍ액전(額田)ㆍ번두(旛頭)ㆍ보반부(寶飯府)ㆍ팔명(八名)ㆍ설악(設樂)ㆍ악미(渥美)이다. 동서가 반 나절 길이다. 산하(山河)가 많은데 한 자[尺] 가량 얕다. 그렇기 때문에 오곡(五穀)이 익지 아니한다. 나라로서는 하하(下下)에 드는 작은 나라다.생전삼좌위문(生田三左衛門)과 전중병부(田中兵部)가 받아 먹는다.
원강(遠江) 원주(遠州)상(上)이다. 관할이 13개 군 빈명(濱名)ㆍ부지(敷智)ㆍ인좌(引左)ㆍ추옥(麤玉)ㆍ장상(長上)ㆍ장하(長下)ㆍ반전부(盤田府)ㆍ주지(周知)ㆍ산명(山名)ㆍ좌야(左野)ㆍ성사(城飼)ㆍ진원(蓁原)ㆍ산향(山香)이다. 산하(山河)와 향리(鄕里)가 서로 어울린다. 땅이 칠척(七尺)이나 깊어, 심으면 천 배, 또는 만만 배나 난다. 크고 상상(上上)에 드는 나라다.굴미 대협(掘尾帶脇)이 받아 먹는다.
준하(駿河) 준심(駿尋)상(上)이다. 관할이 7개 군 지대(志大)ㆍ익두(益頭)ㆍ유도(有度)ㆍ안배부(安倍府)ㆍ노원(盧原)ㆍ부사(富士)ㆍ준하(駿河)이다. 상하(上下)는 인접국과 동등하다. 동서가 이틀 반 길이다. 산ㆍ원ㆍ야ㆍ리(山原野里)가 균등하며 바다를 안고 산을 띠어, 살찐 산물이 많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이다.중촌식부소보(中村式部少輔)가 받아 먹는다.이 땅에 부사산(富士山)이 있는데, 형상이 부부(覆瓿)와 같고 마루턱에 큰 구멍이 있어 그 깊이가 바닥이 없다. 따뜻한 기운이 아래로부터 곧장 올라와 운무(雲霧)와도 같으며, 6월에도 항상 눈이 있다. 명(明) 나라 태사(太史) 송경렴(宋景濂)의 시(詩)에 이르기를,
만 송이 연꽃인 양 저 부사산이 / 萬朶蓮花富士山
얽힌 뿌리 땅을 눌러 삼주 사이에 벋었네 / 蟠根壓地三州間
6월에도 눈꽃이 새털처럼 휘날리니 / 六月雪花飄素竁
어디메 깊은 숲에서 백한을 찾아볼꼬 / 何處深林求白鷴
라는 것이 바로 이를 이른 것이다. 왜놈 중에 복건(福建)ㆍ남만(南蠻) 여러 나라에서 무판(貿販)하는 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부사산의 절정(絶頂)을 바라본 연후에야 마침내 돛을 올린다. 왜승(倭僧)이 항상 이세(伊勢)의 열전(熱田)과 기이(紀伊)의 웅야(熊野)와 부사를 삼신산(三神山)이라 했다. 혹자는, 근강주(近江州)의 태호(太湖)가 하루만에 생겼고, 준하주의 부사산이 하루만에 저절로 호수의 모래흙에서 솟아올라 산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방의 구경꾼들이 부사산에 갈 적에는 반드시 미리 열흘 동안을 재계해야 마침내 재앙이 없으며, 근강(近江) 사람은 비록 하루 동안만 재계를 해도 절대로 발이 미끄러져 떨어져 죽을 염려가 없다 했다. 왜놈들의 괴이한 말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다.
이두(伊豆) 두주(豆州)하(下)이다. 관할이 3개 군 전방(田方)ㆍ나하(那賀)ㆍ하무(賀茂)이다. 이 밖에 대도(大島)ㆍ질도(蛭島)가 있다. 동서가 하루 남짓한 길이다. 산전(山田)이 많고 수전(水田)은 적으며 산이 높고 바다가 크다. 소금ㆍ생선의 유가 많아 판공(辨貢)이 많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이다. 내부 가강(內府家康)과 그 아들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이 받아 먹는다.
갑비(甲斐) 갑주(甲州)상(上)이다. 관할이 4개 군 산리(山梨)ㆍ산대부(山代府)ㆍ팔대성(八代城)ㆍ거마(巨麻)이다. 남북이 이틀 남짓한 길이다. 수전은 얕고 산전은 깊다. 사방이 차고 양기(陽氣)가 없다. 초목이 번식하고 우마(牛馬)가 많다. 중간 크기이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천야탄정(淺野彈正) 및 그 아들 좌경 대부(左京大夫)가 받아 먹는다.
상모(相模) 상주(相州)상(上)이다. 관할이 9개 군 족병상(足柄上)ㆍ족병하(足柄下)ㆍ대주(大柱)ㆍ도릉(淘綾)ㆍ애갑(愛甲)ㆍ고좌(高座)ㆍ겸창(鎌倉 왜 나라 중의 명부(名府))이다. 이 지역에 명검(名劍)을 만드는 사람이 많다)ㆍ삼포(三浦)ㆍ강도(江島)이다.사방이 사흘 길이다. 땅의 두께가 1길이나 되어 생산이 많고, 결(缺)산이 얕아 목재가 없으며, 단지 해조(海藻)와 어별(魚鱉)이 많다. 중간 크기이고, 하(下)에 드는 나라다. 내부 가강(內府家康)이 받아먹는다.
무장(武藏) 무주(武州)대(大)이다. 관할이 21개 군 구량기(久良岐)ㆍ도축(都築)ㆍ다마부(多麻府)ㆍ귤수(橘樹)ㆍ신창(新倉)ㆍ입간(入間)ㆍ고려(高麗)ㆍ비금(比金)ㆍ횡견(橫見)ㆍ기옥(崎玉)ㆍ아옥(兒玉)ㆍ남금(男衾)ㆍ번라(旛羅)ㆍ진택(榛澤)ㆍ나하(那賀)ㆍ하미(賀美)ㆍ족립(足立)ㆍ질부(秩父)ㆍ임원(荏原)ㆍ풍도(豐島)ㆍ대리(大里)이다. 사방으로 닷새 반 길이다. 들은 큰데 산이 없어서 좋은 목재가 부족하다. 전답은 풍부하여 야채(野菜)의 유가 많다. 크고, 상상(上上)에 드는 나라이다. 내부가강(內府家康)이 받아 먹는다.
안방(安房) 방주(房州)중(中)이다. 관할이 4개 군 주군부(周郡府)ㆍ안방(安房)ㆍ조이(朝夷)ㆍ장협(長俠)이다. 남북이 하루 반 길이다. 산하(山河)와 원야(原野)와 전리(田里)가 균평(均平)하다. 어패(魚貝)가 많기 때문에 논의 비료로 사용한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 내부 가강과 이견(里見)씨가 받아 먹는다.
상총(上總) 총주(總州)대(大)이다. 관할이 11개 군 주집(周集)ㆍ천우(天羽)ㆍ시원(市原)ㆍ해상부(海上府)ㆍ반산(畔蒜)ㆍ망타(望陁)ㆍ이우(夷隅)ㆍ식생(埴生)ㆍ장병(長柄)ㆍ산변(山邊)ㆍ무사(武射)이다. 남북이 사흘 길이다. 해안(海岸)이 넓고 벽조(碧藻)가 많으며, 견포(絹布)ㆍ등초(鐙鍬) 등이 유명하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이다. 내부 가강이 받아 먹는다.
하총(下總) 총주(總州)대(大)이다. 관할이 12개 군 갈식부(葛飾府)ㆍ천엽(千葉)ㆍ인번(印旛)ㆍ상마(相馬)ㆍ원도(猿島 원(猿)은 또한 협(狹)으로도 쓴다)ㆍ결성(結城)ㆍ풍전(豐田)ㆍ갑차(匣瑳)ㆍ해상(海上)ㆍ향취(香取)ㆍ식생(埴生)ㆍ강전(岡田)이다. 남북이 사흘 길이다. 산과 바다가 똑같이 많아 금수(禽獸)가 가득 찼지만, 그러나 먹을 만한 맛이 없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이다. 내부 가강이 받아 먹는다
상륙(常陸) 상심(常尋)대(大)이다. 관할이 11개 군 신치(新治)ㆍ진벽(眞壁)ㆍ축파(筑波)ㆍ하내(河內)ㆍ신태(信太)ㆍ자성부(茨城府)ㆍ행방(行房)ㆍ녹도(鹿島)ㆍ나가(那珂)ㆍ구하(久河)ㆍ다하(多河)이다. 우(右)는 먼 나라이다. 사방이 나흘 길이다. 전택(田宅)과 시전(市廛)이 날로 번성하고, 우마(牛馬)가 목장(牧場)에 가득하며 누에도 많이 치고 면화(綿花)도 풍요하다. 매우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좌죽(佐竹)이 받아 먹는다.
동산도 8국(東山道八國)
근강(近江) 강주(江州)대(大)이다. 관할이 13개 군 하자(賀滋 자(滋)는 지(志)로도 쓴다)ㆍ율본(栗本)ㆍ야주(野洲)ㆍ포생(蒲生)ㆍ신기(神崎)ㆍ견상(犬上)ㆍ판전(坂田)ㆍ수지상하(受智上下)ㆍ천정(淺井)ㆍ이향(伊香 향(香)은 갑(甲)으로도 쓴다)ㆍ고도(高島)ㆍ갑하(甲賀)ㆍ선적상하(善積上下)이다. 사방이 사흘 반 길이다. 산하(山河)와 전답이 보강(保疆)하고 윤택하여 심으면 천 배가 난다. 서울과 이웃이며 봄기운이 일찍 온다. 일본의 넷째번 가는 나라이다. 사번(四番)은 상사등(上四等) 안에 드는 것을 이른다. 경극 시종(京極侍從), 석전 치랑소보(石田治郞少輔), 장속대장두(長束大藏頭)가 나누어 받아 먹는다.
미농(美濃) 농주(濃州)상(上)이다. 관할이 18개 군 석진(石津)ㆍ불파부(不破府)ㆍ안팔(安八)ㆍ지전(池田)ㆍ대야(大野)ㆍ본소(本巢)ㆍ석전(席田)ㆍ방현(方縣)ㆍ후견(厚見)ㆍ각무(各務)ㆍ산현(山縣)ㆍ무의(武義)ㆍ군상(群上)ㆍ하무(賀茂)ㆍ가아(可兒)ㆍ토기(土岐)ㆍ혜내(惠奈)ㆍ다세(多勢)이다. 우(右)는 가까운 나라이다. 남북이 사흘 길이다. 산원(山原)과 전포(田圃)가 많으며 면화가 풍족하고 오곡(五穀)이 만 배가 난다.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기부중납언(岐阜中納言) 및 군소 장수들이 받아 먹는다. 토산물은 상품지(上品紙)이다.
비탄(飛彈) 비주(飛州)하(下)이다. 관할이 4개 군 대후(大厚)ㆍ익전(益田)ㆍ천야(天野 천(天)은 대(大)로도 쓴다)ㆍ황성(荒城)이다. 남북이 이틀 길이다. 산이 깊어 목재가 많으므로 공상(貢上)이 시신(柴薪)이 많다. 소금이 맛이 적고, 5곡이 잘 익지 아니한다. 나라로는 하하(下下)에 드는 나라다.금삼법인(金森法印)과 그 양자 출운수(出雲守)가 받아 먹는다. 법인이란 것은 승려의 관명(官名)이다. 토산물은 황금(黃金)이다.
신농(信濃) 신주(信州)상(上)이다. 관할이 10개 군 수내(水內)ㆍ고정(高井)ㆍ식과(埴科)ㆍ소현(小縣)ㆍ좌구(佐久)ㆍ이나(伊那)ㆍ취방(諏訪)ㆍ축마부(筑麻府)ㆍ안중(安重 일운(日雲)이라고도 한다)ㆍ경급(更級)이다. 우(右)는 중간에 있는 나라다. 남북이 닷새 길이다. 음기가 많아 풀이 자라지 않으며, 바다가 막고 있는데 염미(鹽味)가 적다. 땅 깊이가 1길이나 되어 상마(桑麻)가 잘 되고 백면(帛綿)이 많다. 매우 크고 하(下)에 드는 나라다.진전(眞田)씨가 받아 먹는다. 천각월전수(千刻越前守)가 그 이름이다. 토산은 명마(名馬)다.
상야(上野) 야주(野州)대(大)이다. 관할이 14개 군 대빙(碓氷)ㆍ오처(吾妻)ㆍ이근(利根)ㆍ세전(勢田 ‘勢多’로도 쓴다)ㆍ좌위(佐位)ㆍ신전(新田)ㆍ편강(片岡)ㆍ읍락(邑樂)ㆍ군마부(郡馬府)ㆍ감라(甘羅 ‘甘樂’으로도 쓴다)ㆍ다호(多胡)ㆍ녹야(綠野)ㆍ나파(那波)ㆍ산전(山田)이다. 동서가 나흘 길이다. 온기가 족하여 뽕나무가 많고 견ㆍ면(絹綿)이 풍부하다. 황(
)을 상공(上貢)한다. 매우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 내부 가강(內府家康)과 좌야수리대부(佐野修理大夫)가 받아 먹는다.
하야(下野) 야주(野州)상(上)이다. 관할이 9개 군 족리(足利)ㆍ양전(梁田)ㆍ안소(安蘇)ㆍ도하부(都賀府)ㆍ방하(芳賀)ㆍ한천(寒川)ㆍ염옥(鹽屋)ㆍ나수(那須)ㆍ직벽(直壁)이다. 동서가 사흘 반의 길이다. 산이 적고 들이 깊으며, 땅이 두텁고 초목(草木)이 많다. 심으면 백 배가 난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 내부 가강이 받아 먹는다.
육오(陸奧) 오주(奧州)대(大)이다. 관할이 49개 군 백천(白川 백하관(白河關)이 있는 곳인데, 관동(關東)이란 것은 백하의 동쪽이다)ㆍ흑하(黑河)ㆍ반뢰(盤瀨)ㆍ궁성부(宮城府)ㆍ회진(會津)ㆍ나마(那麻)ㆍ소전(小田)ㆍ안적(安積)ㆍ안달(安達)ㆍ시전(柴田)ㆍ애전(刈田)ㆍ원전(遠田)ㆍ명취(名取)ㆍ신부(信夫)ㆍ국다(菊多 ‘菊田’이라고도 쓴다)ㆍ표엽(標葉)ㆍ하회(河會)ㆍ행방(行方)ㆍ반수(磐手)ㆍ화하(和賀)ㆍ하내(河內)ㆍ패계(稗繼)ㆍ고야(高野)ㆍ일리(日理 ‘日利’라고도 쓴다)ㆍ강차(江差)ㆍ첨택(瞻澤)ㆍ장강(長岡)ㆍ등미(登米)ㆍ도생(桃生)ㆍ모록(牡鹿)ㆍ군재(郡載)ㆍ녹각(鹿角)ㆍ계상(階上)ㆍ진경(津輕)ㆍ우다(宇多)ㆍ이구(伊具)ㆍ본길(本吉)ㆍ석천(石川)ㆍ대치(大治)ㆍ색마(色摩)ㆍ도아(稻我)ㆍ사파(斯波)ㆍ반전(磐前)ㆍ금원(金原)ㆍ갈전(葛田 갈(葛)은 신(新)으로도 쓴다)ㆍ이달(伊達)ㆍ두록(杜鹿)ㆍ폐이(閉伊)ㆍ기선(氣仙)이다. 동서가 60일 길이다. 옛날에는 출우(出羽)의 한 나라로서 시성(市城)과 궁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선굴(仙窟)도 이미 마련되었으며, 새ㆍ짐승이 충족하다. 칠(漆)을 공상(貢上)한다. 매우 크고, 상상(上上)에 드는 나라다. 중장 정종(中將政宗)과 월후납언 경승(越後納言景勝)과 남부 송간(南部松間)이 받아 먹는다.바다 가운데 금산(金山)이 있어서, 지키는 장수가 목욕 재계하고 그 캐낼 숫자를 청한 연후에 배를 타고 가서 캐어 오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그 청한 숫자를 초과할 경우에는 그 배가 돌아오다 반드시 부서지게 된다고 한다. 땅이 하이(蝦蛦)와 연접하였는데, 한없이 광막하여 왜국을 다 쳐도 이 한 주의 장광(長廣)만 못하다. 그 도로가 통행된 곳이 54군이나 되는데, 산융(山戎)들이 스스로 부락을 이루어 호령하고 절제하는 사람이 없으며, 지방이 또 54군보다 넓다. 사람들은 장대하고 몸에 털이 있는데, 왜인들이 하이(蝦跠)라 칭한다. 오주(奧州)의 평화천(平和泉)에서 이해(夷海)까지가 겨우 30리다. 왜의 이수(里數)임혹자는 말하기를,
하니, 혹시 그럴는지도 모른다. 왜놈들이 항상 하는 말이,
라고 하는데, 말이 괴이하고 허황한 듯하나, 우선 모두 기록하여 전의(傳疑)의 예를 본뜬다.
출우(出羽) 우주(羽州)상(上)이다. 관할이 13개 군 포해(鮑海)ㆍ하변(河邊)ㆍ촌산(村山)ㆍ치사(置賜)ㆍ웅승(雄勝)ㆍ평록(平鹿)ㆍ전하(田河)ㆍ출우부(出雨府)ㆍ추전(秋田)ㆍ유리(由理)ㆍ산핍(山乏)ㆍ최상(最上)ㆍ산본(山本)이다. 동서가 50일 길이다. 일찍 따뜻해지므로 농사가 풍후하다. 크고, 상상(上上)에 드는 나라다. 월후납언 경승(越後納言景勝)과 최상우시 출우수(最上羽柴出羽守)와 추전 등태랑(秋田藤太郞)이 받아 먹는다.
북륙도 7국(北陸道七國)
이 땅은 심히 추워 매년 겨울이면 눈이 여러 길이나 쌓인다.
약협(若狹) 약주(若州)중(中)이다. 관할이 3개 군 원부(遠敷)ㆍ대반(大飯)ㆍ삼방(三方)이다. 남북이 하루 반 길이다. 바다가 가까워 습기가 있고, 어별(魚鱉)과 이철(利鐵)이 많다. 칠(漆)을 공상(貢上)한다. 작으나, 상(上)에 드는 나라다. 소장 승준(小將勝俊)과 그 아우 궁내 소보(宮內少輔)가 받아 먹는데, 축전 중납언 금오(築前中納言金吾)의 형이요, 적괴(賊魁) 수길(秀吉)의 본처의 조카이다.
가하(加賀) 하주(賀州)중(中)이다. 관할이 4개 군 결(缺)남북이 이틀 반 길이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 축전 대납언(筑前大納言)이 받아 먹는데, 무술년 섣달에 죽고 그 아들 재상 비전수(宰相肥前守)와 작은아들 손사랑(孫四郞)이 받아 먹는다.
월전(越前) 월주(越州)대(大)이다. 관할이 12개 군 돈하(敦賀)ㆍ단생부(丹生府)ㆍ금립(今立)ㆍ족우(足羽)ㆍ대야(大野)ㆍ판정(坂井)ㆍ흑전(黑田)ㆍ지상(池上)ㆍ신전(榊田)ㆍ길전(吉田)ㆍ판북(坂北)ㆍ남조(南條)이다. 남북이 사흘 반 길이다. 산이 남쪽에 있고 북해를 띠고 있으므로 오곡이 잘 익지 않는다. 상마(桑痲)가 많다. 어느 본(本)에는 오곡이 만 배라 하였음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 전 관백(前關白) 신장(信長)의 아들 신웅(信雄)과 대곡형부소보(大谷刑部少輔)가 받아 먹는다.
월중(越中) 월주(越州)상(上)이다. 관할이 4개 군 여파(礪波)ㆍ사수(射水)ㆍ부부(婦負)ㆍ신천(新川)이다. 우는 중앙에 있는 나라다. 사방이 사흘 길이다. 염(鹽)ㆍ조(藻)ㆍ어별(魚鱉)이 많으며, 곡물과 기계(器械)가 많이 난다. 칠(漆)을 공상(貢上)한다. 매우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전전비전수(前田肥前守)와 그 아우 손사랑(孫四郞)이 받아 먹는다.
월후(越後) 월주(越州)상(上)이다. 관할이 7개 군 경성(頸城 이보야(伊保野)라고도 한다)ㆍ고지(古志)ㆍ삼도(三島)ㆍ어치(魚治 소(沼)로도 쓴다)ㆍ포원(蒲原)ㆍ치수(治垂)ㆍ반선(磐船)이다. 사방이 엿새 길이다. 산이 남쪽에 있고 북해를 띠고 있으므로 오곡이 잘 익지 않는다. 상마(桑麻)가 많다. 매우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굴리씨 구태랑(掘里氏久太郞)이 받아 먹는다. ○ 토산은 백세포(白細布)인데 항상 눈 속에서 표백하고 말린다.
능등(能登) 능주(能州)중(中)이다. 관할이 4개 군 우색(羽咋)ㆍ능등부(能登府)ㆍ봉지(鳳至)ㆍ주주(珠洲)이다. 동서가 이틀 반 길이다. 토질이 냉하여 오곡의 발육이 더디다. 이철(利鐵)이 많아 큰 그릇을 주조한다. 뽕나무가 많아 옷이 풍족하다. 작으나, 상(上)에 드는 나라다.전전비전수(前田肥前守)가 받아 먹는다.
좌도(佐渡) 좌주(佐州)중(中)이다. 관할이 3개 군 우무(羽茂)ㆍ잡태부(雜太府)ㆍ하무(賀茂)이다. 또 견부도(見付島)와 상상도(上上島)가 있다. 우(右)는 먼 나라이다. 사방이 사흘 반 길이다. 초목(草木)의 승지(勝地)로서 우마(牛馬)가 귀한 줄을 모르며, 어별과 오곡이 많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 월후 납언 경승(越後納言景勝)이 받아 먹는다.
산음도 8국(山陰道八國)
단파(丹波) 단심(丹尋)상(上)이다. 관할이 6개 군 상전부(桑田府)ㆍ선정(船井)ㆍ다기(多紀)ㆍ천전(天田)ㆍ빙상(氷上)ㆍ하록(何鹿)이다. 사방이 이틀 길이다. 왕성(王城)의 부용(附庸)의 나라다. 곡미(穀米)ㆍ시신(柴薪)이 많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 덕선원현이(德善院玄以) 부자(父子)가 받아 먹는다.
단후(丹後) 단주(丹州)중(中)이다. 관할이 5개 군 가좌(伽佐)ㆍ여사(與謝)ㆍ단후(丹後)ㆍ편야(片野 편(片)은 죽(竹)으로도 쓴다)ㆍ웅야(熊野)이다. 남북이 하루 반 길이다. 어별(魚鱉)과 상마(桑麻)가 풍족한데, 정하고 좋은 것을 국산(國産)으로 삼는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유재 등효(幽齋藤孝)와 그 아들 장강월중수(長岡越中守)가 받아 먹는다. 토산은 후면주(厚綿紬)인데 대단히 딱딱하고 질겨 능히 10여 년을 지낸다고 함.
단마(但馬) 단주(但州)상(上)이다. 관할이 8개 군 조래(朝來)ㆍ양부(養父)ㆍ출석(出石)ㆍ기다부(氣多府)ㆍ성기(城崎)ㆍ이방(二方)ㆍ칠미(七美)ㆍ미함(美含 함(含)은 념(念)으로도 쓴다)이다. 동서가 이틀 길이다. 전(田)은 두텁고 크며, 속(粟)ㆍ피[稗]가 번성하고 시목(柴木)이 풍족하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소출태화수(小出太和守)와 신촌좌병위(新村左兵衛)와 별소풍후수(別所豐後守)가 받아 먹는다. 토산(土産)은 백금(白金)임.
인번(因幡) 인주(因州)상(上)이다. 관할이 7개 군 법미(法美)ㆍ팔상(八上)ㆍ지두(智頭)ㆍ읍미(邑美)ㆍ고초(高草)ㆍ기다(氣多)ㆍ거농(巨濃)이다. 남북이 이틀 반 길이다. 북으로는 바다가 많고 산이 깊고, 해조(海藻)와 견포(絹布)가 많다. 중간 크기이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 궁부 병부(宮部兵部)가 받아 먹는다. 시로성(始路城)은 우위대부(右衛大夫)가 받아 먹으니, 금오(金五)의 형임.
백기(伯耆) 백주(伯州)상(上)이다. 관할이 6개 군 하촌(河村)ㆍ구미(久米)ㆍ팔번(八幡)ㆍ한입(汗入)ㆍ회견(會見 미(美)라고도 쓴다)ㆍ일야(日野)이다. 남북이 이틀 길이다. 산이 깊고 땅이 두터우며, 오곡과 의백(衣帛)이 두 바퀴가 돈다. 중간 크기이고, 중(中)에 드는 나라이다. 안예 중납언 휘원(安藝中納言輝元)이 받아 먹는다.
출운(出雲) 운주(雲州)상(上)이다. 관할이 5개 군 의우부(意宇府)ㆍ능미(能美)ㆍ도근(島根)ㆍ추록(秋鹿)ㆍ순(楯)이다. 동서가 이틀 반 길이다. 수목(樹木)에 과가(瓜蓏)가 서로 얽혀 있다. 야채(野菜)가 토산이며, 철로 만든 농기구와 견포(絹布)가 많다.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 안예 중납언 휘원(安藝中納言輝元)이 받아 먹는다.
석견(石見) 석주(石州)중(中)이다. 관할이 6개 군 안농(安濃)ㆍ근마(近摩)ㆍ나하(那賀)ㆍ읍지(邑智)ㆍ미농(美濃)ㆍ녹족(鹿足)이다. 남북이 이틀 길이다. 조(藻)ㆍ포(布)ㆍ소금의 이익이 많아 세공(稅貢)이 다른 나라보다 배나 된다. 중간 크기이고, 하(下)에 드는 나라이다. 안예 중납언 휘원이 받아 먹는다.
은기(隱岐) 은주(隱州)하(下)이다. 관할이 4개 군 지천(知天)ㆍ해부(海部)ㆍ주길(周吉)ㆍ온지(穩地)이다. 사방이 이틀 길이다. 오곡이 부족하나 조(藻)ㆍ밀(蜜)이 많다. 포(鮑)로 유명하다. 작고, 하(下)에 드는 나라이다. 안예 중납언 휘원이 받아 먹는다. 석견(石見)ㆍ은기(隱岐) 등 일대가 우리나라 관동(關東)의 영동(嶺東) 등의 지방과 가깝다고 한다.
산양도 8도(山陽道八道)
우리나라로부터 출입하는 바다 길임.
파마(播摩) 파주(播州)대(大)이다. 관할이 14개 군 명석(明石)ㆍ하고동서(賀古東西)ㆍ하무(賀茂)ㆍ인남(印南)ㆍ식마(飾磨)ㆍ읍보동서(揖保東西)ㆍ적수(赤穗)ㆍ좌용(佐用)ㆍ완속(完粟)ㆍ신기동서(神崎東西)ㆍ다하(多河)ㆍ미호(美壺)ㆍ읍동(揖東)ㆍ읍서(揖西)이다. 사방이 사흘 반 길이다. 지대가 따뜻해 우박ㆍ눈을 보지 못한다. 견포(絹布)ㆍ종이ㆍ비단이 많이 생산되어 의식이 풍족하다.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 적괴의 군소 장수들이 나누어 받아 먹는다.
미작(美作) 작주(作州)상(上)이다. 관할이 7개 군 영전(英田)ㆍ승전(勝田)ㆍ점서(苫西)ㆍ점동부(苫東府)ㆍ구미(久米)ㆍ대정(大庭)ㆍ진도(眞島)이다. 동서가 사흘 남짓의 길이다. 사방이 에워싸여 찬 겨울에도 바람이 없다. 초목과 의식(衣食)이 번성하여 풍족하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 안예 중납언 휘원, 비전 중납언 수가(備前中納言秀家)가 나누어 받아 먹는다.
비전(備前) 비주(備州)상(上)이다. 관할이 11개 군 소도(小島)ㆍ화기(和氣)ㆍ반리(磐梨)ㆍ읍구(邑久)ㆍ적판(赤坂)ㆍ상도(上道)ㆍ어야(御野)ㆍ아도(兒島)ㆍ소족(小足)ㆍ진고(津高)ㆍ부도(釜島)이다. 사방이 사흘 남짓한 길이다. 남해의 따스한 기운을 띠고 있어, 초목ㆍ오곡이 일찍 익으므로 공상(貢上)도 이르다. 이도(利刀)ㆍ총극(銃戟)과 비단이 많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 비전 중납언 수가(秀家)가 받아 먹는데, 적괴의 수양딸 사위로서 한산도(閑山島)에서 싸움을 독려하던 자임.
비중(備中) 비주(備州)상(上)이다. 관할이 11개 군 도우(都宇)ㆍ와옥(窪屋)ㆍ하옥부(賀屋府)ㆍ하도(下道)ㆍ천구(淺口)ㆍ소전동서(小田東西)ㆍ후일(後日)ㆍ철다(喆多)ㆍ영하상하(英賀上下)ㆍ삼랑도(三郞島)ㆍ기도(寄島)이다. 동서가 사흘 반 길이다. 이도(利刀)ㆍ운리(耘犁)가 많고, 오곡ㆍ조(藻)ㆍ포(布)가 가득하여 날마다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다. 크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수가(秀家)와 휘원(輝元)이 나누어 먹는다.
비후(備後) 비주(備州)상(上)이다. 관할이 14개 군 안부(安部)ㆍ심진(深津)ㆍ신석(神石)ㆍ노가(奴可)ㆍ소우(沼隅 외(隈)라고도 쓴다)ㆍ품치(品治)ㆍ위전부(葦田府)ㆍ갑노(甲奴)ㆍ삼상(三上)ㆍ상계(上谿 상(上)은 삼(三)으로도 쓴다)ㆍ어조(御調)ㆍ혜소(惠蘇)ㆍ세라(世羅)ㆍ삼원(三原 자(茨)로도 쓴다)이다. 우(右)는 중앙에 있는 나라다. 동서가 이틀 남짓한 길이다. 밭두렁이 길고, 천맥(阡陌)이 얽혀 있다. 오곡이 일찍 익고, 주해(酒醯)가 오래된 것이 있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휘원의 아들 예주 재상 수원(藝州宰相秀元)이 받아 먹는데, 적괴의 수양딸 사위이다.
안예(安藝) 예주(藝州)상(上)이다. 관할이 8개 군 소전(沼田)ㆍ고전(高田)ㆍ풍전(豐田)ㆍ사전(沙田)ㆍ하무(賀茂)ㆍ좌백(佐伯)ㆍ안예부(安藝府)ㆍ고궁(高宮)이고, 엄도(嚴島)는 군 밖이다. 남북이 이틀 반 길이다. 산이 깊어 목재가 많으며, 바다가 가까워 소금ㆍ해태(海苔)가 풍족하다. 오곡이 패지 않는다. 크고, 하(下)에 드는 나라이다.휘원이 받아 먹는다. 지금의 광도(廣島)가 안예의 안에 있다.
주방(周防) 방주(防州)상(上)이다. 관할이 6개 군 대도(大島)ㆍ구하(玖賀)ㆍ웅수(熊手 모(毛)라고도 쓴다)ㆍ도농(都濃)ㆍ좌파부(佐波府)ㆍ길부(吉敷)이다. 동서가 사흘 길이다. 초밀(草藌)ㆍ인갑(鱗甲)의 유가 많다. 토산이 다른 나라보다 십 배나 된다. 청(鯖)으로 유명하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이다.휘원이 받아 먹는다.
장문(長門) 장주(長州)중(中)이다. 관할이 6개 군 후협(厚狹)ㆍ풍포부(豐浦府)ㆍ미칭(美稱)ㆍ대진(大津)ㆍ하무(河武)ㆍ견도(見島)이다. 동서가 이틀 반의 길이다. 남쪽은 바다에다 북쪽은 산인지라, 어별(魚鱉)이 충족하고 직곡(稷穀)이 다른 나라보다 배나 된다. 중간 크기이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휘원이 받아 먹는다.
남해도 6국(南海道六國)
기이(紀伊) 기주(紀州)상(上)이다. 관할은 7개 군 이도(伊都)ㆍ나하(那賀)ㆍ명초부(名草府)ㆍ해부(海部)ㆍ재전(在田)ㆍ일고(日高)ㆍ연루(年樓 ‘年婁’로도 쓴다)이다. 남북이 나흘 반의 길이다. 삼방(三方)이 바다이고 평지가 적다. 오곡이 잘 익지 않는다. 작고, 하(下)에 드는 나라다. 적괴(賊魁)의 군소 장수가 받아 먹는다.
담로(淡路) 담주(淡州)하(下)이다. 관할은 4개 군 진명(津名)ㆍ삼원(三原)ㆍ육도(六島)ㆍ회도(繪島)이다. 사방이 하룻길이다. 나라의 어미이니, 왜속(倭俗)에 유전하는 말이, 왜의 시조가 이 섬에 내려왔다 한다. 그러므로 나라의 어미라 한다.호칭이 이주의(二柱衣)다. 소금이나 생선이 부족하지 않고 좋은 목재가 또한 많다. 작으나, 상(上)에 드는 나라다.협판 중칙(脇坂中勅)이 받아 먹는다.
아파(阿波) 파주(波州)상(上)이다. 관할은 9개 군 삼호(三好)ㆍ마식(麻植)ㆍ명동(名東)ㆍ명서(名西)ㆍ승포(勝浦)ㆍ나하(那賀)ㆍ판야(板野)ㆍ아파(阿波)ㆍ미마(美馬)이다. 사방이 이틀 길이다. 토질이 후하여 직도(稷稻)가 풍성하게 여문다. 산이 깊어 어린(魚鱗)ㆍ금수(禽獸)의 유가 많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봉수하아파수 가정(蜂須賀阿波守家政)이 받아 먹는다.
찬기(讚岐) 찬주(讚州)상(上)이다. 관할은 11개 군 대내(大內)ㆍ한천(寒川)ㆍ삼목(三木)ㆍ삼야(三野)ㆍ산전(山田)ㆍ신전(神田 신(神)은 예(刈)로도 쓴다)ㆍ아야부(阿野府)ㆍ제족(鵜足)ㆍ나하(那賀)ㆍ다도(多度)ㆍ향아(香阿)이다. 동서가 사흘 길이다. 산과 내와 밭이 균등하다. 오곡이 풍성하고 어패(魚貝)의 유가 많다. 유명한 사람이 이 땅에서 많이 난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생구아악(生駒雅樂)과 그 아들 찬기수 일정(讚岐守一正)이 나누어 받아 먹는다.
이예(伊豫) 예주(豫州)상(上)이다. 관할은 14개 군 신거(新居)ㆍ주부(周敷)ㆍ상촌(桑村)ㆍ월지(越智)ㆍ풍한(風旱)ㆍ야간(野間)ㆍ지기(智器)ㆍ온천(溫泉)ㆍ구미(久米)ㆍ부혈(浮穴)ㆍ이예(伊豫)ㆍ희다(喜多)ㆍ우화(宇和)ㆍ우마(宇麻)이다. 사방이 이틀 길이다. 원야(原野)와 화전[畑田]이 많다. 화속전(火粟田)이 전(畑)이다.뽕나무, 삼[麻], 소금과 풀이 풍성하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등당좌도수(藤堂佐渡守)와 가등좌마조(加藤左馬助)와 소천좌마조(小川左馬助)가 받아 먹는다. 이예수 수웅(伊豫守秀雄)이 죽자 소천(小川)이 대신하였다.
토좌(土佐) 토주(土州)중(中)이다. 관할은 7개 군 토좌(土佐)ㆍ오천(吾川 오(吾)는 오(五)로도 쓴다)ㆍ고강(高岡)ㆍ번다(旛多)ㆍ장강(長岡)ㆍ전도(畑島)ㆍ향미(香美)이다. 동서가 이틀 길이다.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익으며 좋은 목재도 많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장증아부토좌수 성친(長曾我部土佐守盛親)이 받아 먹는다. 기해년 봄에 죽자 그 아들이 대신했다.
서해도 9국(西海道九國)
축전(筑前) 축주(筑州)상(上)이다. 관할이 20개 군 지마(志摩)ㆍ가마(嘉麻)ㆍ야수상하(夜須上下)ㆍ지하도(志賀島)ㆍ어립(御笠)ㆍ종상(宗像)ㆍ원하(遠賀)ㆍ석전(席田)ㆍ수파(穗波)ㆍ조량(早良)ㆍ나가(那珂)ㆍ석가(釋迦)ㆍ모도(牟島)ㆍ조옥(糟屋)ㆍ이토(怡土)ㆍ석내(席內)ㆍ안수(鞍手)ㆍ잔도(殘島)ㆍ하좌부(下座府)ㆍ상좌부(上座府 대재(大宰)와 합병했다)남북이 나흘 길이다. 쌀ㆍ조ㆍ진보(珍寶)ㆍ기기(器機)가 풍비하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 축전 중납언 목하금오(筑前中納言木下金吾)가 받아 먹는다. 적괴의 본처의 조카다. 지하도(志賀島)는 중천수리대부 수성(中川修理大夫秀成)이 받아 먹는다.
축후(筑後) 축주(筑州)상(上)이다. 관할이 10개 군 어원(御原)ㆍ어정부(御井府)ㆍ생상(生桑 엽(葉)으로도 쓴다)ㆍ삼저(三猪)ㆍ삼모(三毛)ㆍ상처(上妻)ㆍ하처(下妻)ㆍ산문(山門)ㆍ산하(山下)ㆍ죽야(竹野)이다. 남북이 닷새 길이다. 곡식과 어별(魚鱉)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진보(珍寶)와 기기(器機)도 많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금오(金吾)가 받아 먹는다.
풍전(豐前) 풍주(豐州)상(上)이다. 관할이 8개 군 전하(田河)ㆍ금구(金救)ㆍ경도부(京都府)ㆍ중진(仲津)ㆍ축성(筑城)ㆍ상모(上毛)ㆍ하모(下毛)ㆍ우좌(宇佐)이다. 남북이 나흘 길이다. 중국을 이웃하여 약종(藥種)과 기구(器具)가 충족하다. 금백(金帛)을 공(貢)으로 바친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와 모리일기수(毛利壹岐守)가 받아 먹는다.
풍후(豐後) 풍주(豐州)상(上)이다. 관할이 8개 군 일전(日田)ㆍ구주(球珠)ㆍ직입(直入)ㆍ대야(大野)ㆍ해부(海部)ㆍ대방(大方)ㆍ속견(速見)ㆍ국기(國崎)이다. 사방이 사흘 길이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 의복이 충족하다. 오곡과 중국 물건이 많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복원우마조(福原右馬助)ㆍ대전비탄수(大田飛彈守)ㆍ모리민부대보(毛利民部大輔)ㆍ중천수리대부 수성(中川修理大夫秀成)ㆍ조천주마두 장정(早川主馬頭長政)ㆍ죽중원개(竹中源介) 등이 받아 먹는다. 우마조(右馬助)는 뒤에 중이 되어 토지를 삭제했다.
비전(肥前) 비주(肥州)상(上)이다. 관할이 12개 군 기휘(基諱)ㆍ양부(養父)ㆍ삼근(三根)ㆍ소성부(小城府)ㆍ신기(神崎)ㆍ좌하(佐賀)ㆍ송포(松浦)ㆍ저도(杵島)ㆍ등진(藤津)ㆍ파저(波杵)ㆍ갈목(葛木)ㆍ고래(高來)이다. 남북이 닷새 길이다. 토질이 후하여 심으면 백 배가 난다. 상자(桑柘)ㆍ농산ㆍ의복이 풍성하고, 어조(魚鳥)를 갖추어 먹을 수 있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용장사(龍藏寺)가 대성(大姓)이 되어 그 토지를 받아 먹는다. 중국 배와 유구(琉球)ㆍ남만(南蠻)ㆍ여송(呂宋) 등의 상선(商船) 내왕이 끊어지지 않는다. 당진(唐津)ㆍ명호옥(名濩屋) 등지는 사택지마수 정성(寺澤志摩守政成)이 차지하고, 인하여 수로 봉행(水路奉行)이 되어 우리나라 사람의 왕래와 접대 등의 일을 주관한다. 평호도(平戶島)는 송포법인(松浦法印)이 받아 먹는다. 양천 입귤좌근(楊川立橘左根)이란 사람이 또한 비전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는데, 땅은 작아도 군사는 강하다고 한다.
비후(肥後) 비주(肥州)대(大)이다. 관할이 14개 군 옥명(玉名)ㆍ산록(山鹿)ㆍ산본(山本)ㆍ국지(菊池)ㆍ아소(阿蘇)ㆍ합지(合志)ㆍ탁마(託摩)ㆍ구마(球磨)ㆍ포전부(鮑田府)ㆍ익성(益城)ㆍ우토(宇土)ㆍ팔대(八代)ㆍ천초(天草)ㆍ위북(葦北)이다. 사방이 닷새 길이다. 목재ㆍ시신(柴薪)이 풍족하고, 오곡ㆍ어별ㆍ종이ㆍ면화가 많다. 크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가등주계 청정(加藤主計淸正) 및 소서섭진수 행장(小西攝津守行長)이 나누어 받아 먹는다.
일향(日向) 향주(向州)중(中)이다. 관할이 5개 군 구저(臼杵)ㆍ아탕부(兒湯府)ㆍ나가(那珂)ㆍ궁기(宮琦)ㆍ제현(諸縣)이다. 사방이 사흘 길이다. 상마(桑麻)ㆍ오곡이 평균하여 기한(飢寒)을 모른다. 중간 크기이고, 중(中)에 드는 나라다.도진병고 의홍(島津兵庫義弘)이 받아 먹는다.
대우(大隅) 우주(隅州)중(中)이다. 관할이 8개 군 대우(大隅)ㆍ능예(菱刈)ㆍ상원(桑原)ㆍ증어부(贈於府)ㆍ시라(始羅 시(始)는 고(姑)라고도 쓴다)ㆍ간속(肝屬 속은 부(附)로도 됨)ㆍ구로(駒路)ㆍ웅미(熊尾)ㆍ다미도(多彌島 군(郡)의 바깥으로 바다 가운데 있다)이다. 동서가 이틀 길이다. 비록 소국이지만 식류(食類)가 풍성하고 어별이 많으며, 종이ㆍ비단이 특히 풍족하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의홍
(義弘)이 받아 먹는다.
살마(薩摩) 살주(薩州)중(中)이다. 관할이 14개 군 출수(出水)ㆍ고성(高城)ㆍ살마(薩摩)ㆍ일치(日置)ㆍ이좌(伊佐)ㆍ아다(阿多)ㆍ아변(阿邊)ㆍ관와(款娃)ㆍ지숙(指宿)ㆍ결려(結黎)ㆍ계산(溪山)ㆍ흥소도(興小島)ㆍ녹아도(鹿兒島)ㆍ증도(甑島)이다. 사방이 이틀길이다. 비록 작은 나라이나, 중국과 이웃했기 때문에 기구(器具)를 갖추어 사용한다. 그러나 상마(桑麻)의 의복(衣服)은 없다. 중간 크기이고, 상(上)에 드는 나라다.의홍이 받아 먹는다. ○ 시사(市肆)는 태반이 중국 사람이다. 중국 배와 남만 배가 왕래하여 정박하지 않는 날이 없다.
일기(壹岐) 일주(壹州)하(下)이다. 관할이 2개 군 일기(壹岐)ㆍ석전(石田)이다. 사방이 하룻길이다. 이 주(州)와 대마도를 2도(島)라 이른다. 서융(西戎)이 와서 침범하므로 청수좌(淸守佐)를 권하여 공(貢)을 갖추게 하는데, 모두 기이한 보배다.송포법인(松浦法印)이 받아 먹는데, 아울러 비전(肥前)의 평호도(平戶島)까지 받아 먹는다.
대마(對馬) 대주(對州)하(下)이다. 관할이 2개 군 상현(上縣)ㆍ하현(下縣)이다. 사방이 하룻길이다. 일본의 땅과 격리되었으므로 도(島)라 부르며, 진기한 보배의 유가 있다. 청신(淸神)을 권유하여 중국에 따르게 했다. 그러므로 ‘탐제(探題)’라는 관직을 두게 된 것이다. 작고, 하(下)에 드는 나라다.우시대마수 의지(羽柴對馬守義智)가 받아 먹는다.
우시(羽柴)라는 것은 수길(秀吉)의 본성(本姓)이다. 수길이 의지(義智)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향도(鄕導)를 삼았기 때문에 자기 성을 주어 그 공을 상준 것이다. 평조신(平調信)은 의지의 가로(家老)로서 왜인들이 양천하야수(陽川下野守)라 칭하는데, 온 도(島)를 차지하여 지키는 일을 주관한다. 현소(玄蘇)란 사람은 의지의 모사(謀士)인 중[僧]으로서 왜인들이 안국사 서당(安國寺西堂) 중의 관명(官名)임.이라 칭하는데, 우리나라와의 서계(書啓) 등의 일을 주관하고 있다. 그 읍(邑)을 방진(芳津)이라 칭하는데, 지세가 비록 좋기는 하지만 왜의 성곽(城郭)과는 아주 다르다. 큰 산의 아래 큰 바다의 어구에 있어, 방어하고 수비할 만한 높은 성이나 깊은 못이 없고, 사면이 모두 울창한 산 언덕이라, 급한 일이 있을 적에는 단지 도망가 숨기에 족할 따름이다.
동쪽으로 일기도(壹岐島)와는 반드시 하루 종일 부는 바람을 만나야만 건널 수 있으며, 남쪽으로 평호도(平戶島)와는 일기도보다 약간 가까우나 풍랑이 더욱 사납고, 서쪽으로 풍기(豐崎)와는 육지로 가자면 이틀이 걸리고 배로 가면 순풍(順風)에는 하루가 걸리고 노질해 가면 이틀이 걸리며, 풍기에서 서쪽으로 우리나라 해면까지는 단지 한나절의 순풍이면 된다. 그 산세는 동서는 길고 남북은 짧으며, 그 토질은 척박하여 수전(水田)이라곤 한 이랑도 없으며, 소채(蔬菜)ㆍ모맥(牟麥)을 모두 다 사석(沙石) 위에 심으므로 길이가 두어 치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평시에 있어서는 오직 우리나라의 관시(關市)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한다. 흑각(黑角)ㆍ후추[胡椒] 등의 물건은 남만(南蠻)에서 나오고, 달피(獺皮)ㆍ호피(狐皮) 등의 물건은 왜국에 있어서는 소용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왜놈들에게서 싼 값으로 사 우리나라에 비싸게 판다. 사라(紗羅)ㆍ능단(綾緞)ㆍ계포(罽布)ㆍ금은(金銀) 같은 것은 그 나라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 내다 팔지 않는다. 그 여자들은 우리나라 의상을 많이 입고 그 남자들은 거의 우리나라 언어를 이해하며, 왜국을 말할 때는 반드시 일본이라 하고, 우리나라를 말할 때는 반드시 조선이라 하며 당초부터 아주 일본으로 자처하지 않는다.
평상시에 우리나라에서 이득을 입는 것이 많고, 일본에서는 적기 때문에, 장수로부터 졸병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추대할 마음이 일본에 부속하는 것보다 더하였다. 그래서 항상 도로가 멀고 파도가 험악하다는 것을 들어, 깊이 들어앉아 있는 왜에게 말해 오다가, 급기야 수길(秀吉)이 66주를 합병하게 되자, 의지가 죄를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우리나라를 수길에게 팔아 전봉(前鋒)이 되었다. 수길이 축전(筑前)ㆍ박다(博多)의 땅을 떼어 그 공로에 대한 상으로 주자, 대마도의 장왜(將倭)가 비로소 쌀밥을 먹게 된 것이니, 이전에는 오직 우리나라에서 내려준 쌀만을 먹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왜경(倭京)에 있을 적에 오히려 자기 집을 갖지 못하고 자기 장인인 행장(行長)의 집과 가까운 한 시루(市樓)를 택하여 잠시 세들어 살았으며, 여러 장왜(將倭)들과 같은 반열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대개 깊이 들어앉아 있는 왜들이 날쌔고 독하기는 하지만 심히 교활하지는 않았고, 우리나라와의 일에는 또한 동서(東西)를 알지 못하여, 전쟁한 지 8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우리나라 변장(邊將)들의 성명을 알지 못한다. 대마도의 왜들은 날쌔고 독하지는 못하지만 교활하기 그지없고, 우리나라 일에도 또한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평시부터 섬 안의 영리한 아이들을 선택하여 우리나라 언어를 가르치고, 또 우리나라 서계(書啓)와 간독(簡牘)의 낮추고 올리는 곡절(曲節)을 가르쳐, 비록 눈이 밝은 사람으로도 창졸간에 보면 선뜻 왜서(倭書)인 것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와 틈이 없으면 전적으로 내부(內附)할 생각을 갖고, 왜가 강성하면 우리나라를 팔아 향도(嚮導)가 되기를 자청하니, 그 흉악하고 간사한 음모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변장들의 무마와 제어가 만약 혹시라도 방법을 잃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다시 이놈들에게 기만 당하게 될 것이다. 기미(覊縻)하는 정책을 조만간 실시한다면, 북도(北道)의 야인(野人)을 연향(宴享)하는 예에 의거하여 감사(監司)ㆍ병사(兵使)가 미리 그 올 시일에 앞서 부산(釜山)ㆍ동래(東萊)에 집합하여 대응하는 것이 좋다. 굳이 서울로 끌어들이느라 번거로운 비용을 지출하면서까지 도성(都城)의 허실을 알게 할 필요는 없다. 북도의 야인을 상사(賞賜)하는 예에 의거하여 대략 토산품으로 그 예물(禮物)에 응하는 것이 좋고, 반드시 영남(嶺南)의 전세(田稅)를 수송해서 도적놈의 식량을 싸줄 필요는 없다. 그들이 가지고 온 흑각(黑角)ㆍ단목(丹木)ㆍ후추[胡椒]ㆍ유황(硫磺)ㆍ호피(狐皮)ㆍ달피(獺皮) 등의 물건은 감사ㆍ병사가 부산 태수에게 엄밀히 지시하여 그 상ㆍ중ㆍ하에 따라 값을 작정해서 부산에서 처분해 보내는 것이 좋고, 서울까지 인마(人馬)를 괴롭혀 가며 수송하여 도성 사람에게 억지로 사게 하여 분노와 원망의 기색이 맺히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와서 공납(貢納)하는 기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일정한 달을 정하여 때없이 왕래하는 폐단이 없게 하고, 공납하기 위해 오는 선박에 있어서도 반드시 미리 척수를 정하여 배가 연달아 와 의아스러운 점이 없게 하여야 한다. 그들이 머무는 곳을 철저히 지켜서 간교한 백성들이 변방수비에 관한 허와 실을 알려 주지 못하게 하고, 그놈들로 하여금 성지(城池)의 험악과 평이를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약속이 정해져 있는데다가 방금(防禁)을 분명하게 하면서, 예모(禮貌)로써 대해 주고 은신(恩信)으로써 무마하면 이놈들이 장차 위엄을 꺼려 덕을 갚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 서울로 불러들이지 아니하고 세미(歲米)를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원망을 할 것인가? 오직 깊이 들어앉아 있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할 음모가 있을 때에는, 수시로 내왕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공납하는 달에 구애받지 않도록 해준다면, 이놈들이 우리나라에 신임을 얻어 전일에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보상하려고 하여, 반드시 미리 와 말해 주며 예비하기를 청할 것이다. 왜들을 대비하는 데는 대마도보다 중요한 곳이 없고 대마도를 대비하는 데에도 이 계책보다 나은 것이 없다. 후일에 변방을 대비하는 장수 중에 이놈들의 정세를 잘 아는 사람이 국가를 위하여 이놈들에 대비할 적에는 반드시 선택할 바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밖에 또 영량부(永良部)ㆍ평호도(平戶島)ㆍ오도(五島)ㆍ칠도(七島)ㆍ다미도(多彌島)ㆍ일수도(一艘島)ㆍ증도(甑島)ㆍ팔장도(八丈島)가 있는데, 면적이 더러 일기도ㆍ대마도보다 큰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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