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마지막 여행중이었다.
천천히 가시면서 가르치신 비유(比喩)들은 교훈으로 가득하였다.
그분의 마지막 봉사를 하시는 여러 달 동안에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바리새파 사람과 세무원의 비유로 참회하는 기도 모습을 보여주셨다.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와 큰 잔치의 비유로써
회개하지 않는 민족에게 이르게 될 운명을 예언하셨다.
잃어버린 양의 아름다운 비유과 잃어버린 은전과
탕자의 비유를 반복하여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8, 13, 15장).
그분의 유명한 설교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베다니 회당에서 교활한 질문으로써
예수님의 설교를 방해하려고 하던 때에 말씀하신 극적인 비유이다.
방랑자 예수께서는 그 때 세 사람의
친밀한 친구가 살고 있는 집에 묵고 계셨다.
그들은 미혼인 마르다와 여동생 마리아였고,
그녀들의 오빠인 나사로였다.
이 날 아침 베다니(Bethany)는 회당으로 한꺼번에 몰려드는
군중들로 인하여 대단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회당은 여리고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도적이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바위로 된 고지(해발 792 미터)에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저지대인 사해(死海, 해저 400 미터)에 이르는 험한 비탈길이었다.
베다니 주변은 황량한 광야로 세례(침례) 요한이 자랐고,
예수께서 금식을 하시던 곳이 가까이 있다.
이 근처 사람들은 꼬치꼬치 묻기를 좋아하였다.
번거로운 신학 문제로 논쟁하고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를 갖고 따지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 목수가 말 잘하고 교리에 밝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분의 말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에 찾아왔다.
그들은 박식한 율법학자 한 명을 대표로
내세워서 예수님의 설교를 논박하기로 결정하였다.
공개적인 언사에 언제든지 신중을 기하시던
예수님도 요즈음에는 꽤 대담한 태도로 나가셨다.
그러므로 보수파들의 입장에서도 트집을 잡아
그분의 언동에 반격을 가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아 방약무인(傍若無人)한 듯한 태도로
그분께서는 군중들에게 너희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언자들이나 모든 임금들이 보고 싶었어도 보지 못하였던
사실을 지금 눈으로 보고 있으니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엄숙한 말씀을 잠시 중단하시자, 대표로 뽑힌 학자가 일어섰다.
그는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 방법대로 이렇게 반문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으며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질문하던 사람이 질문으로 대꾸하였다.
“모든 계명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어느 계명입니까?”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어라.
우리 주 하나님은 단 한 분밖에 없는 주(主)이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것은 극히 간단해 보이는 질문과 응답 같았다.
그러나 지적으로 간교한 학자에게는 깊은 기술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율법학자가 제기한 것은 법리적 문제였다.
게다가 위험한 함정이 숨겨진 질문이었다.
그가 노린 것은 금제조항(禁制條項)들이
다 같이 평등한 가치와 중요성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어 당국과의
마찰을 일으키려는 간교한 질문이었다.
그분께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변하셨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셨다.
모세의 책인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인용한 말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설명하셨다.
이렇게 밝힘으로써 그분은 기본적인 율법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민중을 괴롭히는
일거리로 삼는 인위적인 계율과의 구분을 명확하게 선을 그어준 것이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마 22:40).
예수께서는 질문자에게 단언하셨다.
그러나 질문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율법학자는 수그러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생님, 옳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짐승을 불에 태워 바치는 모든 제물과
그 밖의 여러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상대편의 표정을 눈 여겨 보셨다.
“네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네 말이 옳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말에 율법학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는 날카롭게 추궁하였다.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뜨리려고 미리 생각했다가 한 말이었다.
이웃이란 같은 동포인 유대인을 말함인가?
설마 이방인들을 이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더욱이 저 타락하여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아니겠지?
말하기에도 더러운 사마리아 사람들은 더욱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생님,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예수께서 앉으신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앉은 사이로 열린 현관문이 보였다.
문 밖에는 도적들이 출몰하는 큰길이 보였다.
그분의 이야기는 그 길에서 상연되는 연극의 줄거리를 말하는 듯하였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이런 이야기는 청중들이 사실과 같이 느끼는 일이었기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이야기의 매력이 그들을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갔다.
그들은 여행할 행장을 꾸린 “어떤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아내가 불안한 빛을 띠고 거들면서 좋은 길동무가 있을 때까지 출발을
연기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한다.
아니 그럴 순 없어. 급한 용무가 있으니까.
내일 아침 밝기까지 여리고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돼.
그 때 열 살 먹은 아들의 앳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애의 말에 의하면 그 밤에 같은 길을 갈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애의 친구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누구야? 뭐라고? 얘야.
네 동무의 아버지가
나블루스(Nablus·세겜)에서 온 사람이라 했지?
여보 마누라! 그래 내 아들이 사마리아
사람의 아들과 노는 것을 내버려 뒀단 말이오?”
“사마리아 사람의 애들과 놀면 왜 나빠요?”
아들이 반문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여보 마누라 잘 설명해 줘요.
사마리아 사람은 죄다 더럽고 믿음성이 없는 놈들이란 말이야.
몇 백 년 전 옛날에 그들은 앗시리아 침략자들과 서로 화해를 했단 말이야.…”
“그러나 아버지, 내 친구가 몇 백 년 전 일 때문에
지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요?”
“사마리아 애들과 친구가 돼서는 안 돼.
사마리아 애들과 사귀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야. 또 내 장사에도 방해가 되는 거야.”
아버지는 아들이 일러주는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여장을 꾸려 가지고 회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는 캄캄한 길을 혼자서 떠났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도적의 습격을 받았다.
옷을 벗기우고 매를 죽도록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데다가 반 주검이 되어 알몸으로 길에 쓰러졌다.
청중들은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를 그저 흘끗 보고 지나가 버렸다.
마찬가지로 한 레위인이 그 곳 가까이 와서
호기심에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걷다가
그에게로 가까이 와서 그를 발견하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붕대로 싸매주고
자기 말에 태워서 객주집으로 데려다가 간호해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였다.
“이 사람을 잘 보살펴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여기까지 얘기한 예수께서는 잠깐 말을 멈추고
넋을 잃고 듣는 청중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트집쟁이 율법학자를 똑바로 보셨다.
“그러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선생님의 미소 짓는 얼굴을 쳐다보며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긴 사람입니다.”
이런 말로 둘러댄 것은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담질문은 영원한 해답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단순히 소속된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아님을 보이셨다.
이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상처받고 고난당하여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뭔말이여
생명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개독글에 대해 대응할 글이 많은데 무공지 강등되어 자유게시판에 올리지 못할세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펌글]
개독집안이랑 결혼할 뻔 사연]
장모될사람이 권사?인가 집사 말고 그위에 레벨 장인될사람이 권사. 장인될사람의 동생이 목사(여친 큰아빠) 인
기독교집안이었죠.
당시 여친은 교회 그냥 가고 싶으면 가고 어디 여행 가거나 할때는 안 가고
반주 해줄 겸 해서 교회 다니는 그냥 일반 기독교신자였구요
결혼식 교회에서 하자는거 저희 부모님이 안 된다고 했더니 불편한 내색하고 식사만 하시고 바로 가셨습니다.
2주 뒤 설득하고 설득해서 다시 자리만들어서 결혼식은 그냥 애들 하고 싶은데서 하게하고
주례 만큼은 목사님이 하자. 길래 이것도 저희 부모님이 반대하셨습니다.
손님들 많이 오는데 기독교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은데 무슨 목사가 나와서 주레를 보느냐며...
제가 사업하면서 진짜 도움 많이 받고 존경하는 교수님 게셔서 꼭 그분이 해야된다고 했더니
양보라는걸 할줄 모르는 집안이라며 저희부모님 욕하고 저 욕하고 해서...결혼 쫑 났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행인듯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께 영광...
할렐루야!!!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실천해야 참 사랑이겠죠?
네 이웃은 멀어보입니다.
내 자식 사랑하는 정도만 하면 어떨까요?
유대인들이 그토록 무시하고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구하는 내용을 담은 60년대 중학교 영어책 『스탠다드 』가 생각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주의 근본 윤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