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하던 손에 스치는 턱이 꽤 까칠하다. 수염이 그새 많이 자랐다. 매일 먹는 영양소가 모두 머리카락과 배로만 가나 보다. 옛날과 다르게 깎기는 좀 쉬워졌지만, 늘 하는 일이니 퍽 귀찮다. 다행인 것은 바쁜 일이 없으니, 천천히 깎으면 될 일이다. 그래도 여자들은 참 편하겠다고 생각하다가 ‘아냐, 그래도 남자가 편하겠지’ 하며 웃는다.
예전에는 면도칼로 깎다 보니 얼굴에 상처도 종종 생겨 힘들었지만, 요즘은 전기면도기의 성능이 뛰어나니 참 편해졌다. 더욱이 나는 수염이 그리 많지 않아 오래 걸리지 않으니 다행이다. 이게 남성성의 상징물이라니 없으면 서운할 것이지만…. 링컨 파바로티 톨스토이나 관운장 호메이니 같은 이는 퍽 귀찮았을 것이다. 하긴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사위도, 내 친구 몇몇도 수염이 대단히 풍성하다. 차라리 멋지게 기르는 편이 나을 성싶다. 카이젤의 요란함은 과해 보이지만, 링컨의 덥수룩함은 괜찮다.
깎기가 어려워서인지 전통적 의식인지 동서를 막론하고, 예전에는 길렀지만, 현대의 동양인은 대체로 깎는다. 서양이나 회교국가 사람들은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길게 기른 사람이 많다. 터프한 남성미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흔하다. 운동선수 중에도 텁수룩하게 기른 사람이 많다. 몸싸움이 거친 축구선수 중에는 거의 없지만, 야구선수는 아주 많다.
미남이 아닌 링컨이 대선을 앞두고 어느 어린 소녀의 조언을 받고 수염을 기른 후, 지지가 크게 늘었다는 일화도 있다. 과연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인지, 게티즈버그 연설이 하도 유명해서인지 내가 보아도 과연 멋지다. 길러서 멋진 사람이 많다. 동양인 중에도 이처럼 멋진 수염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아마도 그 으뜸은 중국 삼국시대의 명장 관운장일 것이다. 그는 두 척이 넘을 듯한 긴 수염을 흩날리며 평생 전장을 누볐다. 관우의 수염은 당시에도 대단히 유명하여 한(漢)나라 황제가 한수정후란 관직에 덧붙여 미염공(美髥公)이란 벼슬까지 하사했다. 과연 관운장 하면 긴 수염과 청룡언월도와 적토마가 연상된다.
프로야구 선수 중에도 털북숭이가 많다. 미국에는 천지다. 그중에도 미국 출신 테임즈란 선수는 대단하다. 곱슬곱슬한 까만 수염이 얼굴을 거의 덮고 있어 눈과 이마만 겨우 보이지만, 그나마 검은 피부와 모자 때문에 뚜렷하지도 않다. 마치 톨스토이 같다. 거기에 성격이 쾌활하여 언제나 껄껄 웃는 모습은 참 여유롭고 호탕해 보였는데, 그의 수염이 한몫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덥수룩한 수염에 감춰진 이들의 얼굴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중견 야구선수라면 대체로 서른 안팎이고, 아주 많아야 마흔 이내다. 얼핏 보면 그들은 오십 살도 넘어 보인다. 그런 선수 중에는 스물서너 살짜리도 있다. 테임즈도 처음 보았을 때 한 오십은 되어 보였다. 가끔은 ‘저 늙은 사람이 웬 야구를? 서양인들은 힘도 좋아’하며 놀라기도 한다. 월드컵축구의 영웅 리오넬 메시도 좀체 그의 나이 35세를 가늠할 수 없다.
기르든 말든 그거야 본인 맘이지만, 털보들에게는 둘 다 쉬운 일이 아니다. 나야 밀도가 크지 않아도 곱슬머리인 게 문제일 뿐이지만, 털보들은 전기면도기도 쉽지 않으니 면도칼로 깎아야 하는데 아침마다 전쟁이라고 하소연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런 친구 중에 한두 사람은 퇴직 후 기르기 시작했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한 사람은 그래도 끝까지 코밑수염만 기르고 있는데 제법 멋지다. 바리톤 김동규 교수처럼. 그래도 마라톤선수의 턱밑의 점 같은 수염은 과히 멋지지 않다.
자고로 동양인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이라며 유교적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길렀던 같다. 갓과 함께 양반의 상징인 수염은 물론 상투까지 근대조선까지 전통을 이어왔으나, 일제의 단발령에 결국 꺾이고 말았다. 미국에서도 군인 학생 등을 상대로 수염에 대한 규제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유명무실한지 털보는 무수하다. 유럽에서도 중세 교회법에 사제를 중심으로 수염을 규제하였다 하나, 일반인은 기른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반반이고, 중동국가 특히 회교국가에서는 오히려 호메이니옹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도 기르는 듯하니 일반인 중에도 무수하다. 수염은 분명 남성의 위엄을 더하고, 멋 내는 수단이었나 보다. 카이젤수염의 한껏 꼬부린 콧수염처럼.
한데, 오늘날 우리의 인식을 보면, 이상하게도 수염을 기른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아니 어쩌면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전직 대통령 한 분도 최근 짧지만, 백발수염을 기르는데 어쩐지 낯설다. 종종 보이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는 사람도 낯설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면서도 수염에 관한 한 단발령이 시행되던 당시의 험악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오늘날 수염 깎기는 당연한 것이 됐다. 특히 상투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아이러니다. 나 자신도 수염 문제만은 깎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귀찮을 뿐인데, 얼핏 여성들은 수염이 없어 좋겠다는 생각을 또 하다가는 스치는 또 다른 생각, 적어도 생의 절반 사오십여 년을 출산과 양육 또 다른 준비라는 크나큰 어려움이 있지 않은가에 생각이 미치니 새삼 미안하다. 과연 신은 남녀에게 공평하시다. 하나가 편안하면 또 다른 무엇이 어렵고, 어려운가 하면 보상이 뒤따르기도 한다. 신의 섭리가 대체로 이러한가 보다.
첫댓글 ㅎㅎㅎ 조물주가 남녀를 구분하는데의 세심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웃어 봅니다^^
그저 한 번 스치는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
수염에 대해서 참 연구를 많이 하셨군요. 해박하게 이끌어가시는 유려한 문장 일품입니다. 저도 수염이 많지않아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연구라기 보다 스치는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르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지만, 아침마다 깎으려니 이 또한 번거로워요. 남성이라면 모두가 느끼겠지만, 동서양과 고금의 사고와 풍습이 많이 달라지는 듯 합니다.
'수염에 대하여'
보따리 챙겨 긴 동행에 따라나섭니다.
비 내리는 주말..., 건강한 휴식되시길 기원합니다.^^*~
천필(賤筆)에 긴 동행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비가 연 삼일이나 내립니다.
아직 한겨울이니 그치면 퍽 추워지겠죠. 건강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수염도 많으면 불편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유선생님 그리 많지 않아 그리 불편하지 않으셨을텐데 수염 기른 사람들을 꽤고 계시는군요 ㅎ
그저 대중적인 사람들과 일반적인 인식을 살펴보며 몇줄 적어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박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