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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네. 아
오늘 전신 보교 보겠습니다.
만약에 마음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만 경계만 제거할 것 같으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분잡히 시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구름 만법이 오직 마음이고 마음 역시 찾을 수 없으니 다시 어디서 구할 것인가?
이랬어요. 어 이제 우리들이 어 이런 이제 그 잘못된 공부들을 하고 있죠.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음 경기만 보고 살아요. 대상만 보고 살아요? 내 바깥에 있는 것들 경기만 보고 살다 보니까 음 끊임없이 경계를 쫓아다니면서 살죠. 바깥 경계에 대해서 그것이 실제인 줄 알고 또 이걸 찾고 있는 나도 실제인 줄 알고 그래서 내 바깥에 있는 수많은 것들 술 수많은 삶의 상황들 수많은 내가 갖고 싶은 것들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 뭐 이런 것들을 어 대상으로 바깥에 둔 다음에 요거 요거는 좋다. 요거 요거는 싫다. 그럼 평생을 내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그 경계를 쫓아다녀요. 예를 들어 돈 돈을 향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한테 쫓아다니죠.
이 세상에 가만히 보면 그 세계에서 이쯤 일어나는 수많은 전쟁들도 가만히 보면 그 돈 쫓아다니는 거 아닐까요? 돈이라는 거대한 어떤 것을 모두 다 실체화시킨 다음에 모두 다 그쪽으로 우르르 어 다니고 있다 보니까 이게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가 중요한지 사회 정의니 뭐 인권이니 여쭤보고 이런 거는 별 중요하지 않아요? 과거 같으면 그래도 속으로는 뒤로는 자기 나라 이익 자기 나라 돈 이익을 챙기지만 겉으로는 적어도 그래도 그렇게 그게 더 나쁠지도 모르지만 겉으로는 적어도 이렇게 정의로운 척하고 뭔가 이게 대의명부가 명분이 있는 척하고 뭔가 세계 평화를 위하는 척하는 명분이라도 세우면서 뒤로 이제 지내던 챙겼단 말이죠. 근데 지금 시대는 그 이제 앞뒤가 똑같으셨어. 대놓고 대놓고 나쁜 짓을 하면서 그래요? 근데 이 이것들 가만히 보면 뭐 온갖 이유가 있다 있다. 하지만 그 근원에서는 그 경계 그 돈이라는 경계를 쫓아서 우루룩 근데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마찬가지로 돈이라는 경계 뭐 명예나 권력이나 지위나 어떤 독재자 같은 그러겠죠. 자기가 그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면 죽으니까 어떻게 안 끌려내려오지? 방법이 없는 거예요. 전쟁이라도 벌리면 내가 일단 유지가 되니까. 심지어 그런 사람조차 있겠죠. 그러니까 너무 쉽게 어떤 한 사람의 망상이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버리기도 하죠. 근데 그렇게 거대한 세계적인 모든 현상에서부터 뭐 그런 것까지 저희가 신경 쓸 필요는 없고요. 그러나 그런 이 세상에 거대한 움직임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개개인의 개개인의 삶의 내용물조차도 전부 다 이렇게 바깥 경계의 의미를 부여하고 경계를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산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으면 내가 행복한 것 같고 내가 뭔가 대단해진 것 같고 그런 느낌을 획득할 수 있거든요. 그 Google 향해서 쫓아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바깥 경계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조건으로 바꾸기 위해서 먼 짓이라도 하고 그리고 누구나 저마다 뇌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 이거 이거를 가지면 내 인생은 필 거야. 그걸 위해서 열심히 세상을 바꾸려고 경계를 바꾸려고 쫓아다니죠. 내가 노후 자금 얼마 안 만들고 나면 나는 행복할 거야라는 그 생각 때문에 그 경계를 쫓아다니는 거예요. 바꾸려고. 그만큼을 만들기 위해서 바깥에 향이 쫓아다녀요. 그리고 때로는 저 사람 주머니 있는 걸 빼오기도 하고 왜 그러냐면 경계가 바뀌면 내 바깥에 있는 경계가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뭔가를 가질 수 있으면 나는 행복할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야 근데 여기서 한 말은 뭐냐 하면 이 경계에 끌려가는 돈이 있으면 내 노후는 편안할 거야. 그 생각 그 생각 그 망상 그 망상 때문에 경계를 취하거나 버리려고 하잖아요? 근데 이 경계에 끌려다니는 경계를 실제화해서 경기 휘둘리는 이 마음을 제거하지 못한 채 분별을 끌려다니면서 분별의 의미부여하고 대상 경계에 의미부여해서 그걸 취하거나 버디고자 하는 이 마음의 분별의 작용 이 분별 망상의 문재인의 제일 원인임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가 문제인 줄 자기가 문제인 줄 모른 채 바깥 경계를 바꾸어서 행복하겠다. 그건 망상이라는 거죠. 세상을 바꾸어서 내가 행복하겠다? 바깥 경계를 바꿔서 내가 행복하겠다. 뭔가를 얻고 나면 나는 행복하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 경제력이 되면 우리나라는 행복할 거야. 우리나라가 뭔가 이렇게 불국토처럼 바뀌면 우리는 행복할 거야. 언젠가 그랬다 그러죠. 부산을 전부 다 특정 종교로 바꿔 놓겠다. 이렇게 했던 분이 인기가 있었다고 그래요? 크크크 종교에만 인기가 있었겠죠. 그런 그런 생각이죠. 불국토를 만들려면 예상 모든 사람들을 다 불교로 믿게 만든 개종을 시켜야 돼. 그 경계를 뜯어 고치면 세상은 행복해질 거야. 나도 행복해질 거야. 그런 망상을 믿는 거잖아요?
이게 근본적으로 바깥 경계를 뜯어고쳐서 내 인생이 바뀐다?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바깥 경계는 내 마음의 투사여서 어. 바깥 경계는 이 몸뚱아리에는요. 음 2년법이잖아요. 인과연이 화합해서 만들어진 어떤 결과의 봄이란 말이에요. 얘는 내가 아니라 얘는 아 얘 나름의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얘 인생은 흘러갈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를 들어 이 마음을 깨더라도 어 현상 세계는 그대로 또 이어지거든요.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부자는 여전히 부자고 여러 사람이 깨달았다. 했을 때 이 육신이 복 있는 사람이 깨달으면 그 사람에게 계속 그 복을 누릴 거예요. 회사 사업도 잘 되고 뭐 하는 것마다 잘 되고 그럴 수도 있죠. 근데 마음은 깨달았으나. 이 인연이 복이 없을 수 있어요. 그러면 그냥 복 없이 살 거예요. 그러면서도 문제가 없지. 우린 누구나? 바깥 경계를 되바꾸면 경계를 제거하면 경계를 내가 원하는 건 취하고? 원하지 않는 건 버리는 거에 성공하면 나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나와 경기가 둘이 아닌 줄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조건을 뜯어고치겠다. 세상을 뜯어고치겠다. 내 상황을 뜯어고치겠다. 바깥 대상에서 요거 요거는 취하고 말겠다. 요거 요거는 내 인생에 없애버리고 말겠다. 그런 의도는 그런 의도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게 성공적 인생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경기에 달린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말하듯이 이 마음 경계에 끌려다니는 경기를 실제인 줄 아는 나와 경계를 둘로 나누는 이 분별하는 마음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고 이 마음을 통달하지 않고 깨닫지 못하고 그러고서는 경계만을 제거하거나 없애거나 취하거나 버지도고 하다가는 그 경계를 없애지는 못하고 경계를 내 뜻대로 통제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분잡히 시끄러움만 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분잡하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고통스럽고 스트레스를 받는 거죠. 이 세상이 지금 정상적으로 가고 있나요? 정상적으로 가지 못하고 있나요? 요즘 보면은 세상이 시끄럽잖아요. 막 온갖 곳곳에서 전쟁도 일어나고 그 참 러시아가 그럴 때 미국까지 그럴 줄 몰랐는데 이게 시작일지도 몰라요. 요 때를 기회로 러시아랑 미국이었지 못 하겠구나 해서 중국이 또 뭐 대만을 친다. 그러고 그럼 일본도 또 참전한다. 그러고 막 이러 이러 막 3개가 시끄러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럼 미란이 미국 이란을 때렸는데 이란이 주변에 있는 미군 부대 주변 나라들 막 다 공습하듯이 한국에 있는 미군 부대를 때린다고 해서 또 중국이랑 어디서 또 우리나라를 막 포탄을 던질지도 모르겠죠. 망상을 부린 건데 제가. 이렇게 세상이 시끄럽잖아요. 복잡하고 시끄럽죠.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럽잖아요. 세상이 시끄러울까요? 지금 조금 전에 제가 그 전쟁 얘기하니까 전쟁 얘기에 마음이 확 따라가 가지고와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막 스트레스 받잖아요. 그 이야기에 끌려가니까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지죠. 그 이야기에 끌려가 가지고 마음이 복잡해진 거예요. 경계는 문제가 없어요. 자기가 그 경기에 대해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별했기 때문에 끌려간단 말이죠. 제가 경계에는 힘이 없다는 얘기를 하려고 경계에 끌려가는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법회 끝나고 그 경계에 끌려가 가지고 막 스트레스 받아 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제가 가끔 그 얘기를 종종 그 얘기를 했나 봐요. 그 뭐 옛날에 누가 그 인터뷰 장면을 보고서 야 인생이 저런 거구나. 이런 걸 느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보니까 그 얘기를 몇 번 했던 거 같아요. 강남 살던 사람이 분당으로 이사 갈까? 일산으로 이사 갈까 하다가 일산 간 사람은 괴로워 죽겠고. 분당 간 사람은 잘했고 거 있는 사람은 더 잘했고 뭐 이런 얘기를 몇 번 했잖아요. 그랬더니 어떤 분이 그 대상인 일산에 사는 분이 선생님 그 얘기 좀 해주시면 안 돼요? 그게 바로 저예요.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막 분노가 올라오고 막 욱하고 인생이 막 마음가 갖고 힘들었죠. 죽겠는데 그 얘기 자꾸 하시니까 이제 그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럼 예를 들어 그 이야기에 끌려가는 걸로 따지면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어요. 갑자기 이게 갑자기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잖아요 생각지 못하게. 갑자기 남북통일이 되면은 일산 일산이 또 갑자기 이상이 뜰 수도 있죠. 부산은 어쩌고 하지만 부산도 여기도 저 무슨 러시아? 무슨 뭐 무슨 뭐 북북해인가? 뭐 그게 해 뜨고 나면 여기 부산이 엄청난 곳으로 바뀐다면서요. 이러면 이제 부산 사람들 일산 사람들 이런 분들도 좋아하겠죠. 그 이야기를 제가 꺼낸 이유들이 뭐겠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에 빨려들어가서. 내 인생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길래나 내 인생에 뭔가 괴로운 일이 생길래나. 이러고 그 이야기 내용 속에 들어가서 사로잡히고 휘휘돌린단 말이죠. 그거를 바로 보라는 거죠. 이게 센 얘기를 해야 아 내가 이렇게 휘둘리고 있구나. 회청거리고 있구나. 경계에 따라서 경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이야기에 따라서 내가 막 휘둘리고 있구나. 정확히 그러고 있잖아요 우리는 그거를 보라는 거거든요. 글쎄가 그런 말을 했죠. 경계가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는 게 아 저 사람은 운이 좋아서 저렇게 했더니 부자가 되고 나는 운이 나빠서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된 게 아니란 말이죠. 운하고 상관이 없어요. 내가 운만 좋았으면 저렇게 됐을 건데 그런 일이 아니란 말이죠. 교운이 아니라 그건 자기 인연 따라 법따라. 저절로 되는 거여서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내가 선 쓸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죠? 내가 뭐 어디 그때 이사를 절로 가고 저로 가고 잘못해서. 그것이 결과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에요. 내 실수가 아니에요. 내 판단 미스가 아니에요. 보통 그런 경우에 이제 내 판단 미스라고 생각 안 하고 남편 저는 왜 잘못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당신 때문에 우리가 평생 이렇게 망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어 그 얼마나 지옥이에요? 당신이 옛날에 저쪽으로 이사가자라는 바람에 우리가 완전 망했어. 그때 우리 옆집 사는 사람은 저쪽으로 이사가서 저렇게 성공했잖아. 당신이 그런 어리석은 생각만 하지 않았어. 우리는 지금 완전히 떵떵거리며 살았을 거야. 그 생각을 평생 안고 그 남편과 함께 살아간다. 얼마나 많은 지옥이에요? 그 사람 원망하면서 살아간다. 그 남편의 판단 리스가 아니고 남편과 아내 그 한 가족 공업 공동의 업 공동의 업이 가진 인연의 복이 코인 거예요. 근데 그건 좋은 거라거나 나쁜 거라고 말할 수 없어요. 케인 역이 다른 거지. 터키와 사자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듯이 사자는 매일 육식을 즐기고 토끼는 채식만 한다고 해서 좋다. 나쁘다 할 수 없잖아요. 그냥 다른 삶인 거지. 그렇듯이 해석불가능해요. 판단 불가능해요. 그 누구도 죽을 때까지 이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나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옛날에 살면서 한 번 두 번씩 이렇게 실수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그게 자기 인연이죠.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어요.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생각 따라가는 거에 경계 따라가는 거예요? 너가 이걸 잘못했으니까 넌 나빠 하고. 그 생각을 믿으면서 잘못된 경계를 선택한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더 좋은 선택 하기를 꽉 지르면서. 더 좋은 선택을 하면 아 당신은 훌륭한 사람 이런 사람 못 봤어요. 남편이 주식을 하다가 완전 돈을 날렸어요. 이러면서 막 분노하고 저한테 와서 고민을 얘기하는 분은 계세요? 이는 막 이런 이혼을 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이런 고민을 얘기하는 분은 계세요. 근데 내 남편이 자꾸 출식에 손을 대요. 많이 날렸나 보죠? 아니요. 주식을 해서 엄청나게 벌었어요. 근데 주식을 하는 게 싫어? 이런 사람 한 번도 못 봤어요. 주식을 해서 엄청나게 벌면 그건 유능한 사람이죠. 유능한 사람 내가 결혼 잘한 사람이 되죠? 그니까 주식을 한다 안 한다. 그것 자체가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경기에 내가 끌려다니는 거거든요. 그저 경계를 바꾸면 나도 행복해진다. 그게 진실한 줄 확실히 알 수 있을까요? 경제는 이는 따라 펼쳐집니다. 이 육신이라는 것은 내가 아니어서 얘는 얘의 이연 따라서 저절로 가고요. 또 얘의 인연을 우리 마음이 통제하는 것 같잖아요. 사실은 우리 마음 느낌 생각 의지의식이라고 하는 분별의 마음 아상 아상 얘의 주인인 나라는 마음 나라는 생각 그 생각이 얘를 알아서 끌고 가잖아요. 내가 하는 게 아니거든요. 얘가 지가 알아서 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내가 생각해. 내가 느껴. 내가 의지를 일으켜.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게 내가 하는 게 정말 맞아요. 이해가 안 왔어요. 가만히 지켜보면 얘가 인연이 예를 들어 얘가 2년이 좀 똑똑할 것 같아요? 여러분 이제 자식을 낳았어요.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이 공부를 잘할 것 같은 싹수가 보여요. 그러면 정말 열심히 막 공부시킬 거 아니에요. 근데 아무리 봐도 얘는 아 공부 쪽으로는 2년이 없고 나가 확연하게 보이면 어 안 되네. 이렇게 해서 그 의지를 그 그닥 많이 쓰지 않을 거 아니에요. 공부 쪽으로 막 푸시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게 내 의지예요? 2년 따라 그렇게 하는 거죠. 이는 따라 그렇게 해요? 또 그 인연을 펼칠 때도 내가 살아오면서 배워왔던 인연따라. 이렇게 또 반응을 일으켜요. 그러니까 즉 내가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 저렇게 살았어 한다고 느끼잖아. 내 의지로 나는 그때 열심히 했어. 그땐 열심히 안 했어. 그땐 그 사람을 위워했어. 그때 그 사람을 좋아했어. 이렇게 내 의지로 한 거 같잖아요. 근데 그게 내 의지가 맞았단 말이죠. 2년이 만들어낸 의지 아니었나요? 인연이 그렇게 시킨 것을 얘가. 그 2년 딸의 역할을 한 거 아닌가요? 얘가 어떻게 할지는 몰라요. 얘 2년 따라 알아서 해요. 얘는 자동으로 인연법을 펼쳐내어 깨달아도 마찬가지예요. 깨달아도 얘는 얘 인연 따라 알아서 인연을 펼쳐내요. 근데 뭐가 다르냐? 깨닫고 깨닫지 않건 뭐가 다르냐? 이 인연은 그대로 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깨달았는데 저 사람은 음 그냥 에고가 사는 거 같은 어디서건 사람이 사는 것과 똑같이 사하네 이렇게 느낄 수도 있단 말이죠. 이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부는 그대로 펼쳐지니까. 근데 정생과 부처의 차이는 중생은 이걸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거예요. 생각이 일어나면 내 생각이다. 내 느낌이다. 내 감정이다. 그래서 그 오은이라는 망상에 끌려다니는 거예요. 근데 깨달았다라는 것은 그게 사라지는 거죠. 몸이 나다라는 생각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느낌을 내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내 생각이라고 느끼고 내 의지라고 느끼고 내 판단이라고 느껴서 얘가 어떤 판단을 일으킬 때마다 어떤 감정을 일으킬 때마다 거기 같이 휩쓸려 다니면서 괴로워하고 서글퍼하고 복잡해하고. 스트레스 받고 그 뒷생각에 끊임없이 딸려다니는 거예요. 그게 중생이죠. 근데 깨닫는다는 건 뭐겠어요. 이 2년은 그대로 펼쳐져요. 근데 이 2년이 어떤 인연이 펼쳐지더라도 이게 내가 아니라 얘는 그냥 얘 2년 따라 가고 있구나를 그냥 보고 있는 거예요. 이게 꿈인 줄 아니까 신경 쓰지 않는 거예요. 그니까 깨달은 사람도 그 몸뚱이는 가난할 수도 있고 뭐 돈을 빌어 먹을 수도 있고 천차만별이 어떤 사람은 언제 인연이 다르고 보기 다르단 말이죠. 가만히 보면 내가 이 몸과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고 있잖아요. 어떤 감정이 일어나요? 어 어떤 서글픔이나 누군가를 보면서 어떤 친구를 절친했던 어떤 친구를 친구가 승승장구하고 막 잘 나가는 모습 막 손을 대는 것마다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반대로 내 남편은 뭐 손을 대는 것마다 족족 망하고 뭐 잘못되고 이러는 걸 보면서 이제 감정이 일어나겠죠 막 질투심 막 또 그 사람을 보면서 막 상대적 박탈감 이런 것들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운 감정이 막 일어날 수 있죠. 상처 감정 막 생각 이런 것들이 막 일어날 수 있어요.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요 그 생각이 우리 삶 전체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지 않나요? 그런 어떤 생각 하나가 우리 삶 전체를 완전히 집어삼켜서 죽을 때까지 그 그 오은의 느낌 생각 감정에 완전히 집어삼켜서 무기력해져요. 그게 진짜 난 줄 알고 난 해도 안 되는구나. 저 친구는 저렇게 잘 되는데 나는 이렇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구나 나는 고작 이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서글프고 괴롭고 해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그 좌절 절망 속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게 단순한 느낌 생각 감정을 나라고 동일시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예를 들어 연봉 한 5천을 받아요. 근데 이제 내 옛날에 내 가방 들어주던 내가 너 못났다. 생각했던 애가 1억 2억 3억을 막 받아요. 손 내는 것마다 막 대박이 나고 잘 나가요. 그러니까 한 한 3억씩 연봉을 받고 막 집도 좋은 거 사고 집값이 막 오르는데 JB하니까? 나는 1/3도 못 벌고. 나는 정말 정말 불쌍하고 무기력하고 남편 잘못 만나가지고 뇌갓날의 뻥찬 그 남자를 얘는 데리고 살아가지고 얘랑 내가 찾는데 얘가 어떻게 눈이 맞아? 가지고 알고 봤더니 얘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는 줄 알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그런 분 이제 이 이 분노와 이 감정은 더 커질 수도 있겠죠. 근데 문제는 그랬을 때 그 감정이 실제인 줄 알고 평생 괴롭다니까요. 평생 괴로울 수 있잖아요. 그 생각만 하면 괴롭고. 음 그런데 그 생각만 없으면 어떨까요? 그 사람과 비교해 가지고 비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나 그 생각이잖아요. 그 비교 분배심이잖아요. 그게 없으면 어떨까요? 그 사람과의 비교만 없으면 나는 지금 예를 들어 지방 작은 소도시에서 한 3천 4천 5천 정기적으로 벌 수 있으면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죠. 그리고 정기적으로 삼천사천오천 안 벌어도 볼 데 있고 안 볼 때 있고 어떨 때는 한 2 30001년에 벌어 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또 못 벌어 오기도 하고. 그러더라도 어찌어찌 근근이 살아남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는 그러면서도 근근히 살아요. 그 신기하게도 어떨 때는 한 2 3
스님 신기하게 자식이
이러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어떨 때는 한 3. 4천만 걸다가 근데 그랬던 어떤 분이 또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대요 아 그때 스님 신기하게. 자식이 다 학교 다니면서 막 학원을 다닐라려고 막 이럴 때 내가 야 너무 얘도 학원을 너무 가고 싶어 하고 근데 얘 학원을 너무 보내고 싶다 싶을 때 되니까 희한하게 걔 학원 보내는 만큼 돈이 착착 들어와 가지고 걔를 곧 착착 보냈는데 걔가 이제 별로 학원 안? 가도 될 때쯤 되니까 돈이 안 들어와.
가지고 희한하게 그렇더라고. 그러니까 그러면서 희한하다. 그러면서
신기하게 뭔가가 중요해서 쓸 돈이 필요하면 현하게 그만큼은 벌린
그 이상은 안 버리는 거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도 은근히 많아요. 그렇게. 사는 건 문제란 말이에요. 그. 2년 따라
거거든요 나는. 이렇게라도 살 수 있는 게 참 고맙다 다행스럽다 이럴. 수도 있어요. 그? 많은 그러니까 은근히 얻는 집들에서 보면요. 남편이. 평생 집
번도 돈을 갖다 주지 않은 남편들도 은근히 꽤 있어요. 아내 혼자서. 애들 키우고 모든 걸 다 하는데 독박 살림에 독박 돈도 벌고 다 하는데 남편
번도 돈을 갖다 준 적이 없는 집도 있다니까요. 근데 그런. 남편이지만 아내가 너무 사랑할 수도 있어요. 아 그리고. 또 나한테 잘
뭐 그 서로 사랑하니까 그냥 그럴 수도 있고 집안애들은 집안일 어느
정도 하니까 나 이만큼 된다라고 안 쳐도 된다. 너 사고만 치지 마라. 그 사고만 치는 걸로 OK 이러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어 있다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어떤 보좌님은
제가 완전 외향성이고 내가 돈 잘 버니까 난. 남편은 집에서 조용히 살림했으면 좋겠어요. 했는데. 마침 그 남편이 잘 살림을 하니까 다행스럽다. 이러고. 참 고맙다. 이러는. 집도 있을 수 있죠.
그런 집에 비교하면 어때요? 난? 아무 적 없구나. 정상적으로. 3000 4000씩 보러 온다. 이건. 엄청난 잘하는 사람이고 완전히 풍족하고 풍요로운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근데. 내가 비교했던
생각 때문에 내가 박탈감을 느낀다라고 여기면서 평생을 살 수도 있어요. 거기. 갇혀서. 그 이거 어찌 보면 좀 어떤 분들에게는 좀 상처가 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또 도움이 되는 말일 수도 있어서
드리면 그 요즘에 그 다큐멘터리인가요? 선물이라는? 다큐가 나오던데 그 네 번째인가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오대요. 어떤. 부부가 그 이태원 참사에서 딸 하나
딸을 잃은 거죠. 근데? 그 두 부부가 지금까지 지금까지도 음 모든 것이 그 딸의 딸에 대한 생각 때문에
밥 한 끼 먹어도 이 맛이 있지 않은 거예요. 항상? 그 딸이 생각나고 뭐 먹고 싶지도 않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옛날의. 딸이 어디 이제 뭐 성당에 가서
시집 갔으면 좋겠다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것을 이렇게 교육받고 거기서 세례 받고 거기서 시집 갔으면 좋겠다는 말이 떠오르니까. 너를
만나러 가기 전에 엄마 아빠가 니가 원했던 거 다 해줄게. 그래서 엄마 아빠가 그 말 때문에 황당해서 교육받고 미사도 받고 그 사람들하고 이렇게 관계도 맺으면서 커서 결혼하고 싶었다 했기 때문에 또 이
두 부부가 같이 이제 청담 가서 또 결혼식 같은 그런 의식도 하고 아이가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이제 평생을 살아가요. 어 당연히 그러 그러겠죠. 누구나. 누구나 그런 일이 생기면 다 그러는 거 같고 그렇게 많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음 저는 그 불교에서는 정식이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정식 중생의 분별심을 정식이라는 표현을 써요. 정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정 같은 거 있잖아요. 정 그리고 분별 의식 모든 것의 정식이 붙어 있거든요. 그 아이의 죽음 아이가 그전에 나 우리 지와 함께 살았었을 때의 그 삶의 내용물 모든 그 기억 속에 정식이 탁 붙어 있었어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안쓰럽고 가슴 아프고 그랬던 그 정식이 확 사로잡혀 있어요. 그 감정적 상처 감정적 응어리가 마치 그 두 부부가 이렇게 사는데 그 두 부부가 사는 집안 전체에 그 기운이 이렇게 가득 그분이 어딜 가든 그 기운에서 떨쳐나올 수 없을 것처럼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고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고 그것도 부부는 앞으로 남은 인생에 그 에너지 그 기운 속에서 살아간단 말이죠. 그 정식 속에서 그 감정적 상처 아픔 서글픔 속에서 살아가죠. 그게 좋다 나쁘다라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 감정적 상처가 평생을 집어삼키겠죠. 이걸 이제 좋게 말하면 저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아요. 행복해요. 이럴 수 있죠. 근데 그 또한 그 또한 아 이게 제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뭔가 이렇게 확 동해시대 있을 때 이렇게 이런 팩트를 얘기를 하면 그 감정적으로 다 동일시돼 있는 그 그거에 이렇게 뭔가 찬물을 끼얹는 것 같긴 한데 냉정하게 보잔 말이죠. 그랬을 때 어쩌면 그 하나의 이야기 이미 지나간 이야기의 감정을 잔뜩 개입한 다음에 그 감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평생을 살게 돼요.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근데 거기서 완전히 노연한 채 그런 삶을 사는 건 괜찮을 거예요. 근데 거기 완전히 집어삼키게 되면 평생이 그 하나의 감정 그것에 끌려다니며 살게 된단 말이죠. 거기 완전히 노연한 채 그런 삶을 살 순 있어요. 가볍게. 그냥 근데 거기 감정적으로 완전히 끌려다니면 평생을 사게 되는 수도 있단 말이죠. 근데 냉정하게 바라보면 모든 인연은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져요. 그리고 모이고 흩어질 때 어떤 감정을 남겨요. 어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 어떤 감정이 남아요? 근데 그 감정에 실체가 있을까요? 그 감정과 생각 여기에 실체가 있을까요? 근데 우리는 그 감정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외로워. 나는 서글퍼. 내 아이가 이렇게 사고를 당해서 없어졌어. 그걸 나와 동일시해서 나는 그런 사람이에요.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건 팩트예요.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어요. 기쁘게 웃을 수 없어요. 아 아이가 그렇게 떠났는데 어떻게 되고 오실 수 있겠어요? 왜 그게 나의 일이니까. 이렇게 내 일이라고 내 감정이라고 완전히 동일시 해 버려요. 그게 아 상해거든요. 내가 만든 모양이거든요. 나다 내 자식이다. 내 것이다 내 감정이다 내 서글픔이다 하는 그 감정 감정적 동일시 그게 불교에서 말하면 오원 오치원이인 거예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나는 그런 사람이 돼버려요. 그 사람 그런 사람 그렇게 우울한 사람 외로운 사람 괴로운 사람 서글픈 상처가 있는 사람으로 죽을 때까지 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오래 남으니까요. 제가 좀 너무 센 비율을 들었는데 그와 같이 사실은 사실은 하나하나 조금 가벼운 비율을 들어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모든 문제는 우리에게 감정적 찌꺼기를 남겨요. 학창 시절에 누구한테 상처를 받았으면 그 왕따당한 상처가 오랫동안 남을 수 있어요. 그 감정적 상처가 그래서 내 삶을 위축되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래서 20대 때가 나는 친구를 못 만나고 대학 가서도 친구도 못 만나고 또 상처받을까 봐 욕 먹을까 봐 왕따당할까 봐 두려울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의식 속엔 어떻게 되냐면 나는 왕따 당하는 사람 이게 나와 동일시돼 버려요. 그 내 주변에 그런 에너지가 막 이렇게 떠다니는 것 같이 느껴요. 우리가 느끼는 서글픔 뭐 외로움 괴로움 어떤 상처 초조함 불안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이 주변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처럼 막 느끼지 않나요? 근데 그것을 직접 탐구에 봤냐는 거죠. 그게 정말 실제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것을 정말 직접적으로 느껴보았느냐 말이죠. 내가 왕따일 것 같고 남들이 나를 이렇게 무시할 것 같아라는 그 생각 그 생각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대신에 그 생각이 만들어낸 감정적 찌꺼기나 그런 것을 직접 증명하면서 직접 마주하면서 생각을 바로 보면서 바로 보면 어떤 일이 생기냐하면 이 상처 아픔 괴로움 서글픔 그건 내가 보고 있는 거죠. 근데 보면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보고 있는 게 나라고 동일시 하면요. 내가 그 보고 있는 그것과 내가 동일시 돼 버려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착각되면은 나는 그런 사람으로 죽을 때까지 굳어져요.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내가 그러한 느낌을 보고 있지 않나요? 보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지휘관 관하고 있을 때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볼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보세요. 볼 때 기분 나쁜 게 보여요? 그때 지나가 갔어요? 지금은 그냥 그래요? 그런데 좀 이따 기분 좋은 게 보이죠? 그러다 또 기분 좋은 것도 지나갔어요. 우울하고 서글픈 사람이라고 해서 평생 우울하고 서글프지 않잖아요. 잠시 좋은 일 생기면 또 갑자기 기쁠 수 있거든요. 그러면 기쁨이 기쁨을 본단 말이에요. 어 나 지금 기쁘네. 보다가 좀 이따 또 어 나 여전히 또 계속 서글프네. 서글프면 오래 느끼다가 잠깐 기쁨도 느껴요. 그럼 보세요. 이 보는 놈한테는 기쁨이나 슬픔이 없지 않아요? 보이는 것 대상 보이는 거 대상 대상은 좋은 것도 왔다 가고 나쁜 것도 왔다 가잖아요. 근데 보는 놈한테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잖아요. 늘 텅겨 있으니까 그 모든 걸 보죠. 스크린이 깨끗하니까 거기에 온갖 영상을 비추듯이 우리 마음이 텅 비어 있고 청정해서 무엇이든 인연 따라 오는 걸 그대로 비추울 뿐이에요. 내가 누군가한테 상처받아서 서글플 때는 나는 서글픈 사람이 아니라 서글픈 그 감정 막 위축된 그 감정 그걸 내가 잠시 보고 있을 뿐이지 그 감정이 내가 아니에요. 나를 그 감정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죠. 그 서글픈 감정을 뚫고 들어가서 그 바탕까지 볼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아 서글픈 감정은 왔다 가는 거구나 나는 그 감정을 비추고 있는 이 참마음의 진정한 나구나. 이걸 보게 되면 어떤 하나의 상처 때문에 업장 때문에 과거에 상처받았던 하나의 업장이 내 평생을 지배하지 않게 된단 말이죠. 그 업장에서 노연할 수 있게 돼요. 아 나는 원래 왕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인연 속에서 특정한 시기에 잠시 왕따라는 이연을 인연이 왔다 갔을 뿐이구나. 그걸 내가 계속 붙잡을 필요가 없구나. 한번 그랬다고 해서 영원히 내가 그러라리라는 보장이 없구나. 그건 그냥 2년 따라 왔다 가는 것이었구나. 경험이었을 뿐이구나.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이라는 잔재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남들 앞에 나서기 두려워하는 사람 있죠? 그럴 필요가 없구나. 그게 내가 아니구나. 저 어릴 때 어 수련 대회 해 보면 일부러 수련대할 때 첫째 날 지나가면 발표 잘하고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첫째 날 시시컨해 주고 나서 둘째 날쯤 되면 발표하기를 두려워하고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네 발표를 시키면서 모든 사람의 열렬한 열광을 이끌어내도록 하는 방편을 쓰는 그런 걸 한 적이 있었어요. 놀랍게도 전혀 발표를 하고는 태어나서 한 번도 못 해봤던 친구들이 별것 아닌 것 그 조에서 토론한 그렇게 발표를 하는데 조언들과 모든 사람이 막 열렬하게 박수를 쳐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처음에 5분 10분 주변주변 되던 애들이 갑자기 막 엄청 말을 잘하게 되고 그다음에 자기가 막 발발하고 싶어 하고 이러거든요. 근데 나중에 이제 수련회 끝날 때쯤에 이렇게 후기를 쓰고 간 걸 읽어 보면은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발표를 해도 되는 사람이구나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그런 자신감을 얻게 된 게 엄청 큰 성과였다. 이렇게 얘기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자기 업에서 벗어난 거예요. 나는 이런 걸 못하는 사람이야 그게 자기 붙잡고 있는 하나의 자 이미지잖아요. 아상이잖아요. 난 이런 사람이다. 난 우울한 사람이야. 나는 별로인 사람이야. 그게 정말 자기가 맞냐 말이죠. 내가 그 감정이나 그 생각에 한 번 사로잡히면 그게 나의 정체성이 되어서 평생을 나를 그런 사람으로 굳어지게 만드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이에요? 얼마나 서글픈 일이에요? 우리 모두가 그러한 어떤 자기 이미지 속에 갇혀 있다니까요. 거기서 풀려나지 못한 채 또 그 이미지가 너무 좋게 잡히는 사람도 있죠 하는 것마다 승승장구하고. 남들이 막 하는 것마다 잘 되면 그런 사람은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상에 사로잡히는데.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오만한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완전히 오만한 사람이 되어서 주변에 친구가 없어질 수도 있어요. 그 또한 자기 스스로 봐야 된단 말이죠. 바르게 직면하고 바르게 봐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있는 그대로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예요. 정견 다르게 보는 볼 줄 아는 지혜 그럼 그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어떤 감정적 정서적 뭐 나다라는 거 아상 오은에 갇히지 않은 채 살 수 있죠. 자유롭게 살 수 있죠. 이게 진짜 자유의 삶이잖아요. 똑같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감정적 에너지 에너지 장 그게 나라고 느끼면서 그 실제 우리도 그런 거 같잖아요. 어떤 사람 보면 우울한 사람 오면 저 사람 주변에 막 우울한 에너지가 막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나쁜 놈들 보면 주변에 뭔가 어둑혼탁하고 검은 악마의 에너지가 막 끌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그게 상이에요 상 근데 스스로 그런 상의 실제인 것처럼 막 스스로 그렇게 관념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직접 보지 못한 채 왜 분별만 봤으니까요. 분별은 뭐예요? 나는 꺼매 난 우울해. 난 서금으로 이게 분별의 산 모양을 켜켜이 취하는 거거든요. 오취원이라 그래요. 응 다섯 가지 가짜 나를 몸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 가짜 나를 삶의 경험 속에서 진짜 나인 것처럼 취해요. 하나씩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으로 굳어져요. 스스로 난 외모가 뚱뚱해 나 외모가 못났어. 누구한테 살다가 외모 지적을 당하거나 욕을 먹었던 사람은 오춘 세권 몸뚱아리라는 몸이 나다라는 세권을 중에 내 몸은 못났어. 내 몸은 남들한테 좀 불쾌한 인상을 주나 봐 남들이 나를 보기 싫어하나 봐 이런 색이라는 색 오늘 취해 가지고 내 몸뚱아리는 남들 보기 별로 흉칙한 몸인가 봐 이걸 취해요. 그래서 어떤 이 세권을 그런 세권을 과도하게 취한 사람은 평생 집 밖을 나가기 싫어할 수도 있고요. 평생 마스크를 벗기 싫어할 수도 있고요. 그 몸 느낌 생각하지 의식이라는 어떤 하나의 자기란 이미지를 어느 순간에 인생의 어느 순간에 만들어진 어떤 이미지를 혹은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내 스스로 만들어진 자기란 이미지를 우리는 탁 취한 채 그걸 나라고 탁 굳게 붙잡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그 업장 그게 업식이거든요. 업식 업장이거든. 여기에 평생 저당 잡힌 채 이런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까 그분도 어때요? 자녀가 그렇게 해서 떠나간 그 그 인연이 너무 클 거 아니에요. 그런 업식 중에도 그 그것이 가득 삶 전체에 둘러싸인 채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될 거에요. 그런데 그 떠나간 아이가 무엇을 원할까요? 엄마 아빠가 나 때문에 이렇게 음 전 그때까지 그러면 살길 원할까요? 너무나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말한다면 그러니까 즉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진정한 진실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온 오치온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자기라는 틀로부터 좋은 틀 나쁜 틀을 할 것 없이 자기라는 모든 틀록도 완전히 껍질을 깨고 자유와 지기를 우리의 진정한 영혼을 원한단 말이에요 그게 진정한 해탈의 길이란 말이에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게 나라는 에고 아상이라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게 그래서 가만히 보세요. 스스로가 자기가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나 의지 의식 같은 어떤 것으로 내가 쌓아 놨든 취해 놨든 나라는 이미지 내가 뭔가를 갖고 싶다. 취하고 싶다 버리고 싶다라는 어떤 이미지? 그 이미지에 저당 잡힌 채 발목 잡힌 채 평생을 거기 갇혀서 살진 않나? 그로 인해서 자유로워지지 못하진 않나? 정말 그게 내가 맞을까? 왔다 가는 감정이 나겠어요. 그는 인연따라 왔다 갈 뿐이에요. 음 2년도 왔다 갈 뿐이에요. 모든 사람도 왔다 갈 뿐이에요. 어 그런데 왔다 가지 않는 게 여유부동한 것 열의 여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 그것이 진짜 자기거든요. 현재 그런 말을 해요. 이렇게 너무나 큰 상처나 아픔이 있는 분들한테는 그 상처가 이번 생에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분별하는 동안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런 방편으로 말을 하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인생을 살면서 이 괴로운 일이 이 일로 인해서 나는 죽을 때까지 헤어나지 못할 것 아마도 근데 거기서 헤어나오려면 또 먼저 떠나가신 분이 그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 때문에 상처받는 걸 원하겠느냐. 먼저 떠나간 부모님이 나 때문에 상처받는 걸 바라겠느냐. 아니면 내가 우리 군에 있을 때 부모님 돌아가신 걸 못 옆에서 못 지켜드려서 죄 의식에 사로잡힌 장병들도 만나보거든요. 그래서 웃지를 않고 우울해 있어요. 왜 그러냐고 왜 물어봤더니 내가 너무 큰 불효를 저질렀는데 내가 부모님한테 할 수 있는 보답은 우울해 있는구나.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부모님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내가 이렇게 친구들하고 신나고 재밌게 즐겁게 군생활을 할 수가 있냐. 그거는 죄다. 부모님을 향한 죄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럼 또 나가는 부모님이 자식이 나 때문에 죽을 때까지 우울하고 암담하게 사기를 바랄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나 가족의 인연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계속 우울해하면 그 아이도 계속 우울해 있는 것이기 바라면 나와 연결된 마음이 우울하면 경계도 울하거든요. 마음이 꼭 경계고 경계가 마음이기 때문에 음 내가 우울하면 떠난 그분도 우울하지 않을까요? 근데 내가 경쾌해지고 맑아지면 그분도 경쾌해지고 맑아지지 않을까요? 응 그래서 여기서 노여놔야 된단 말이죠. 그 그 그런 감정적 상처 아픔 거기서 놓여나는 것이 그분을 향한 음 가장 큰 기도죠. 그분에게 할 수 있는 진정한 음 천도고. 위령이죠. 계속해서 그분을 충무먼. 죽을 때까지 추모만 하는 게 진정한 추모 의식이 아니에요. 지혜를 깨달아서 그런 일이 따로 없다라는 것 나와 세계가 따로 없다라는 것 나와 너가 따로 없다라는 것 너 하나의 근원은 본래 한 마음이라는 걸 바르게 깨닫는 것 크게 진정한 추모예요. 어두컴컴한 추모 의식 속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게 추모가 아니고 빠르게 걷어서. 노여나는 것이 진정한 그들을 위한 삶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그렇게 평생을 어떤 특정한 상처나 아픔이나 감정 뭐 이런 혹은 이것들이 나라고 굳어지게 되면 죽을 때까지 거기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 껍질을 못 깨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죠. 그 껍질을 하나하나 깨는 게 이 공부예요. 조견 오은개공 도일체고에 일체의 고통과 앵날에서 벗어나려면 오은희 공한 줄을 볼 수 있어야 돼요. 아 이게 오치원이었구나. 내가 붙잡은 거였구나. 내가 붙잡은 감정이었구나. 이 감정이 영원한 건가? 이 감정은 인연 따라 온 거구나. 이 감정이 내가 아니고 우리는 그 감정이 난조한단 말이에요.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제 나는 이런 상처를 당했기 때문에 난 죽을 때까지 이런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요. 음 거기서 노여놔야 되지. 응. 그건 그냥 왔다가는 대상일 뿐이에요. 느끼는 대상이군요 대상 근데 대상은 비추고 있는 이 마음은 서글픈도 느끼지만 기쁨도 느끼고 슬픔도 모든 걸 다 다 비추거든요. 여기는 특별 하나 없이 청정하단 말이에요. 오고 가지 않는 본래부터 있던 거란 말이에요. 이 마음을 깨달으면 음 삼남한생 오은주 먼저 떠나보낸 그분들의 진짜 진짜를 보게 되는 거예요. 그분들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거예요. 깨어나게 하는 거예요. 내가 죽으니까 그분도 죽지. 내가 살면 그분도 살아나거든요. 이게 중요한 말이에요. 내가 살아나야 그분도 살아나요. 내가 분별 속에 죽어 있으면 그분들도 계속 죽어 있어요. 내가 깨달아야 그분도 같이 깨닫는 거예요. 왜 몰래 깨달았기 때문에 예 이 세상엔 본래 어둠이 없어요. 한 티끌 어둠이 없어요. 한 티끌도 원래 청정함밖에 없어요. 원래 광명 빛밖에 없어요. 근데 그 어둠이라는 건 인연 따라 잠시 왔다 가는 것뿐이거든요. 진정한 자기의 본성을 확인하면 무한한 광명이에요. 큰 거 무한한 광명은 돌 셋넷으로 쪼개지지 않아요. 먼저 떠나간 그분들이 다 무한한 광명 그 자체와 하나되어 있단 말이에요. 근데 나는 여전히 내 분별 속에 사로잡혀서 내 생각 속에 사로잡혀서 죽을 때까지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간다고 간다면 그게 어떻게 그분들을 위한 일이겠어요? 먼저 떠나간 그분들이 본래 광명이고 본래 빛이듯이 본래 청정이듯이 우리도 지금 빨리 본래의 자기로 깨어나야 그분을 깨어나게 하는 거죠. 그게 부처님께서 했던 방식이에요. 부처님이 나보다 나를 태어나게 하고 먼저 죽었던 엄마에 대한 평생 깨닫기 전까지 평생 트라우마 같은 게 있으셨던 거 같아요. 상처배 하나? 이런 것들 예 꼭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그 그런 형편의 이야기로 남아 있죠?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어 어머니에게 법을 사라고 내려오셨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부처님의 깨달은 것이 부처님 어머니에게 법을 선하신 거고 부처님 어머님을 깨닫게 한 거예요. 사기가 깨어나야 온 세상이 깨어나요. 먼저 떠나간 그분이 깨어나요. 근데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나도 그 사람도 모두 다 어리석은 중생으로 끊임없이 남을 뿐이에요. 그 오둑오둑하고 우울하고 그런 곳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이제 그 어둑어둑한 지하 시대에 있는 어둠은 특히 우리 본성인 빛빛에 의해서 환하게 드러나서 밝게 사라지고 분리 빛 광명 이곳이 삶에 드러나게 되면 나는 그 어떤 상처도 없어요. 그 어떤 없이 억장도 없어요 밖에 있는 이더러일 뿐이에요 이게 진정한 해탈이죠. 자유죠. 모든 것으로 모든 걸림으로부터의 벗어남이고. 응 근데 우리는 삶의 어느 인생의 어느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어떤 이야기 어떤 오치온을 가지고 바로 삼아서 평생을 그 나라는 감옥에서 못 벗어난단 말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것이 진실하냐 반야신경 초기 불교 경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에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싶을 정도로 오운 12차 18개 얘기가 계속 나와요. 논기코 혐오따 색상이 미축법 안희비 설신의 뭐 맨날 그 얘기밖에 없어요. 초기 불교 경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그 얘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되게 짜증이 났어요.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불교 공부할 때 아 불교는 뭐 이렇게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뭐 맨날 이 얘기만 맨날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끝까지 나오노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불교는 그거밖에 할 게 없더라고요. 오원이 뭐예요.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 이게 나라고 여기는 건 망상 그거 깨라는 얘기밖에 없어요. 나와 세계가 있다라는 이 망상을 깨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을 본다라는 망상 그게 눈기꺼 혐오 없듯이 색상의 미초법을 접촉하면 안식 이식 비식서식 신식 의식 내가 세상을 본다라는 그런 분별 의식이 일어날 뿐이다. 그게 나와 세계라는 분별이지 본래는 나도 없고 아니비 서신에도 공하고 색상의 미처법도 공하고 접촉도 하고 거기서 일어난 의식도 다 공하다. 실제 나와 세계관 돌로 다녀 있지 않다. 그렇지. 무상고보와. 넌 세상은 이게 무화거든요. 근데 왜 있다고 느끼느냐? 왜 나도 있고 세계도 있고 온 12차 18개가 왜 있다고 느끼느냐? 또 분별 때문이다. 그 분별을 어떻게 만들어진 거냐? 12 연기로 만들어졌다. 그 전체 구조를 설라는 게 사성제예요. 고집멸동 괴로움의 원인이 뭐냐? 12연기의 그 12가지 분별 때문이다. 그 분별 때문에 오운과 12차 18개가 있다라는 망상 착각을 일으킨다. 그걸 끊임없이 탐구하도록 하는 거예요. 사유하도록 하는 거예요? 왜 이것이 처음엔 탐구인 거 같고 사유인 것 같지만 24유가 깊어지고 사유가 어디에서 가슴으로 확 내려오기 시작하면 내려오게 되면 이게 체득이 되고 체험이 된단 말이죠. 정말 그렇구나 모두도 그냥 어 공환해 양자 물리학에서도 보니까 막 공화당에도 막 공한 것 같아. 이렇게 머리로 이해했을 때 괴로움이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근데 그 가슴으로 내오기 시작하면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인도 성자들은 이 깨달음을 가슴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머리가 내려갔습니다. 그런 측면을 그냥 그렇게 말로 한 거예요. 그게 막 여기가 아니라 여기다 이런 게 아니고 체험적 이해가 된단 말이죠. 몸과 마음이 진짜 내가 아니었구나. 어떻게 그래야 돼요? 바로 이렇게 봐야 된단 말이죠.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어느 느낌의 감목처럼 갇혀 있는지 어떤 생각에 갇혀 있는지 어떤 생각을 붙잡고 있는지 어떤 감정적 상처의 평생 사로잡혀 있는지 근데 어떤 의식에 내가 묶여 있는지 그거를 보는 거예요. 따로 딱히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아요. 바르게 보면 된단 말이죠. 빠르게 보는 눈은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어요. 근데 왜 못 볼까요? 분별로만 보니까 생각으로만 보니까. 그래서 생각에 한번 탁 끊어져야 된다는 말이 그거예요. 선도 생각하지도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 너의 벌레 면목은 무엇이냐? 응 응. 여기 싹 올라가서 토요일 매주 토요일날 1시 반부터 3시까지만 좀 시끄러운 것만 좀 이렇게 해달라고 얘기를 하면 되게 좋으시더라고요. 아 그렇게 얘기를 한다는 게 제가 올라오다. 깜빡 얘기를 못 했는데 얘기를 하시면 안배경 뮤지션도 좋을 것 같은데요. 몰라서 이분들이 이러시는 것 같더라고요. 어 여기 이제 영어 스터디 카페가 들어온답니다. 골라도 보니까. 시끄럽지 않은 게 들어와서 그렇게 보세요. 그렇게 이제 우리는 이 사실을 물으니까 자기 자기 마음 자기 분배심 자기 오온 오치운 이거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우린 죽을 때까지 뭐만 하려고요? 세상만 바꾸려고 쫓아다니는 거예요. 돈만 벌면 해결되겠지. 뭐 몸이 건강하면 해결되겠지. 이것도 세상이에요. 내 주변에 적금만 바꾸면 해결되겠지. 경계를 바꾸려고. 끊임없이 바깥에 있는 세상을 바꾸려고 쫓아다니는 거야. 세상 바꾸면 해결되겠지. 지금 세상에 이렇게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제대로 있는 그들을 보면 어때요? 저 지구 반대편에 전쟁이 있어요? 자기 마음의 전쟁이 있어요. 자기 마음에서 그 전쟁을 여기서 일으키고 있잖아요. 여기서 자기 붙잡고 있잖아요. 흘러가게 하지 못하고 이 비추는 이 마음은 전쟁을 비추고 있는 이 마음은 전쟁이 없어요. 지구 한 평등 평화밖에 없어요. 비춰진 상이란 말이 오고 가는 상이란 말이에요. 인연따라 오고 가는 오고 가는 상은 좋거나 나쁨 무엇이 아니에요. 아니 스님 전쟁은 무조건 나쁜 거죠. 그 종교인이 그렇게 말하시면 되겠어요. 전쟁은 무조건 나쁜 거고 청와대는 무조건 좋은 거 아닙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그거는 둘로 나누는 거예요. 전쟁과 평화를 둘로 나누어서 전쟁은 나쁜 거 평화는 좋은 거 전쟁하는 놈들은 나쁜 놈들 평안한 좋은 놈들 그렇게 나누는 것이 진짜 전쟁이에요. 알 수 없어요. 일어나는 모양의 세계는 왜 일어나는지 그 일이 일어나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거든요. 근데 우리는 이건 일어나도 되는데 저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돼라고 해서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없애려고 취하거나 버리려고 해요. 전쟁이 일어나면 절대 안 돼라고 집착을 하면 그게 집착이에요. 그게 항상 분별이에요. 그러나 그렇다고 전쟁이 일어나야 돼? 일어나서 괜찮아 이 얘기를 하라는 게 아니죠. 마음을 낼 수 있어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 운동에 동참할 수도 있어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근데 거기 내가 깊이 사로잡혀 있다면 내가 지금 전쟁 중인 거죠? 모든 전쟁이 드러나고 있고 전쟁이 끊임없이 9시에 비추고 있는 그 와중에도 그 모든 걸 드러내고 있는 이 바탕에 있을 수 있으면 여기에는 전쟁이 있는데 전쟁이 없어요.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고 탐지지 3독이 있는데 탐지지 3독이 없고 세상의 모든 복잡 혼란스러운 들이 있는데 그런 일이 없어요. 그런데 저보다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 마음을 없애지 않고 자기 마음의 분배를 없애려 하지 않고 다만 경계만 제거하려고 한다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분자피 시끄럽게 스크론만 더 할 뿐이다. 죽을 때까지 여러분이 나는 전 세상의 전쟁을 못 봐주겠어. 그건 나쁜 거 절대 나쁜 거야. 죽을 때까지 난 지금부터 반전운동을 할 거야. 그러면 아마 우리 죽을 때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내가 원하는 삶이 펼쳐지기 전까지 한 번도 평화를 얻지 못할 거예요. 죽을 때까지. 자기 마음에 대해서 먼저 평화가 와야 돼요. 그러면 세상에는 본래 평화가 있었음을 깨닫게 돼요. 조금만 전쟁이에요?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매 순간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 남들과 싸우고 욕망하고 화내고 내 뜻대로 욕은 취하고 하고 싶고 저건 버디고 싶고 끊임없이 극이 전쟁이잖아요. 저 지구 반대편에는 저 전쟁이 그렇게 중요해요. 내 마음속에 내가 매일같이 싸우고 있는 이 전쟁에서 노연하지 않으면 그 모든 전쟁을 일시에 잠재울 수 있어야 돼요. 일시정멸시킬 수 있어야 돼요. 그건 바깥에는 전쟁을 쫓아가서 전멸시키는 게 아니에요. 자기 마음의 정변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대로 있는데 그런 일이 없어요. 신기하죠.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전쟁이 없어요. 응 세상의 모든 번잡하고 시끄러운 일이 있는데 그런 일이 벌레 없었구나. 한 물건도 없었고 뭐 하나 시끄러운 게 없단 말이에요. 세상에는 본래부터 모양의 세계에는 온갖 시끄러운 게 있죠. 근데 모양의 세계는 실제가 아니에요. 진실한 게 아니에요. 2년 따라 그냥 모여질 뿐이에요. 응. 꿈속에 있을 때는 어 세상이 좀 평화롭으면 좋겠고 삶의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고 시끄러운 일이 없었으면 좋겠었잖아요. 끝을 깨고 보니까 어때요? 꿈속의 스토리를 바꿀 필요가 없어요. 그 2년 따라 그냥 펼쳐지는 거여서 내버려두면 되겠고 12 볼 필요가 없어요. 꿈인데 꿈에 뭐 하러 11 걸어요? 꿈 속에서 전쟁이 난다고 해서 또 꿈에 들어가 가지고 꿈을 평정해야 돼요? 그 전쟁은 없을 필요가 없어요. 아 꿈이구나 하면 끝난단 말이에요. 전쟁 있는 채로 전쟁이 없어요. 음 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