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내 푸른빛의 봄날 서식지는 종로였다. 대부분의 약속을 종로서적에서 했는데 뒷편 골목에 음악다방도 있고 기원도 있었기 때문이다.
광화문에 새로 생긴 교보문고가 훨씬 크고 세련된 서점이었지만 웬만해선 서식처를 잘 옮기지 않는 나는 여전히 종로서적을 애용했다.
주머니 가볍던 시절이라 열 권을 구경하면 겨우 한 권을 살 정도였다. 친구를 종로서적에서 만나면 다방이나 술집에 가기 전 기원에서 바둑 한 판을 때릴 때가 많았다.
둘 다 어깨 너머로 배운 얼치기 바둑이라 서로 지기도 했고 이기기도 했지만 실력은 제자리 걸음이었다.
어느 날 술집을 나와 건너편에 있는 탑골 공원에서 점을 친 적이 있다. 당시는 파고다 공원이라 불렀는데 담벼락을 빙 둘러서 사주관상을 보는 포장마차 점집이 많았다.
친구가 한참 연애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안 풀리는 연애 고민을 점으로 해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친구가 점을 보고 나서는 내게도 보란다. 나는 무슨 점이냐며 손사래를 쳤다가 사주를 말해줬는데 점 치는 양반이 대뜸 하는 말이 장가 두 번 갈 팔자란다.
친구와 나는 동시에 크게 웃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한테 어떻게 이런 점괘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점쟁이가 용하다는 것을 50살 넘어서야 알았다. 아내는 쉰 둘에 병이 들어 투병을 하다 내 곁을 영원히 떠났다.
처갓집 반대를 뚫고 결혼을 했던 아내는 52년 삶이 일생이 되어 버렸다. 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떠날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내는 내가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유언이랄 것도 없이 투병 중에도 자기 죽거든 다른 여자 만나 남은 생 살라고 했다.
어느 날 아내가 그랬다.
"나 죽거든 가능한 빨리 잊고 재혼해. 당신은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잖아."
훗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연속극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벌어졌을 때는 막막했으나 못 견딜 것만 같던 시절도 살다 보니 다 지나갔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올해가 아내의 10주기다. 작년 이맘 때쯤 북한산 중흥사에 들러 법당에서 수없이 절을 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52년을 살다 간 아내가 누려야 할 행복을 가로챈 도둑놈이다.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그날 왜 그렇게 참회의 절을 했는지 모른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행여 민폐가 될까 소리 나지 않게 애를 썼다.
나만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이래서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이 있나 보다.
아내는 모든 꽃을 좋아했지만 유독 능소화를 사랑했다. 꽃 이름을 잘 모르는 내게 처음 능소화를 알려준 것도 아내다.
능소화를 볼 때면 이 꽃이 뭐였더라? 묻곤 했다.
"응, 능소화야."
"맞다, 능소화. 나는 장미꽃도 알고 국화도, 봉숭아도 아는데 이 꽃 이름을 왜 자꾸 잊어 먹나 몰라."
엊그제 우리집 주변을 걷다가 지는 능소화를 보자 아내 생각이 났다. 지난 6월부터 이 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건만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꽃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잠시 멈춰 꽃을 바라보고 있다가 중년 여성이 지나가기에 물었다.
"이 꽃 이름이 뭐죠?"
"능소화요."
맞다. 능소화,, 나는 언제나 능소화 앞에서는 죄인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리나무님한테도 아픈 기억이 있나 봅니다. 저 또한 그때 겪은 일을 생각하면 비몽사몽이란 말이 맞습니다.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떠남을 막지 못했습니다. 속절없다는 단어가 이럴 때 쓸려고 생긴 말이었구나 싶었네요.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인 것이 인간사이긴 해도 80인생, 90인생이라는데 너무 일찍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저는 철이 없어선지 웃음이 많은 편이고 잘 웃습니다. 가리나무님도 화이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