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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Scene 18. The Chaos /혼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호와 성녀를 훑어보
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상기된 얼굴의 하녀는 조용히 문을 두
드렸고 곧이어 고색창연한 장식으로 가득한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을 뒤로하고 몇 명의 사람들이
응접실 안에 서거나 앉아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방안에 떠도는 부드
러운 차의 향기가 살짝 머리를 내밀었지만 방안으로 지호와 성녀가 한
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문은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 지호님."
들어선 지호를 향한 시선들 중 에드워드가 벌떡 일어서더니 정중한 태
도로 지호를 안내했다. 평소에도 행동에 절제가 있던 그였지만 지금은
더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
"소개드리죠. 이분이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네스 후작님, 그리고 여
기 이분이 퍼플스타의 지호님입니다."
지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에드워드가 자신을 소개한 사람을 향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단정히 빗어넘긴 초로의 귀족신사가 창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속에서
지호는 호기심과 날카로운 경계, 그리고 한조각의 호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호입니다."
지호는 가볍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극진한 예라고 할 수는 없었
지만 지호의 퍼플스타를 생각한다면 격식에 어긋나지도 않았다. 게다
가 이곳은 황궁도 아니었으니까.
"로드릭이라 하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재상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조금 짙어졌지만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
나고 있었다. 한동안 지호에게서 머물던 재상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여사제 에반제린에게로 건너갔다.
"아, 바로 소문의 그 성녀님이시군요.
재상은 지호 옆에 서 있는 여사제 에반제린을 바라보았다. 에반제린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사제의 예를 표했고 재상은 그들에게 의자를 권했
다.
"좀 앉으시게. 뭐, 내 집은 아니지만서도. 허허허."
조금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보자는 의도였던 듯 했지만, 재상외에 따라
웃는 사람은 없었다. 재상 옆에 서 있는 애쉴리마저 표정없는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빈의자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호는 응접실에 있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에드워드와 일레인, 자신과 여사제 에반제린, 제
국 재상 로드릭과 항상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날카로운 이미지의 귀
족. 응접실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여섯이었다.
아이리스는…… 없나?
"누굴 찾고있나?"
재상이 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새 그는 한 손에 찻잔을 받쳐들
고 있었다.
"재상님을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재상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앙피시아의 엘마이러 말인가? 아니, 그쪽하곤 또 얘기가 다르
다네. 일단 그쪽은 제국 사람이 아닌데다가, 서로의 위치를 생각한다
면 이렇게 사사롭게 만날 사람은 아니지. 위치에 따른 격식이란게 있
으니까 말일세."
지호를 향한 재상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자네와도 이렇게 만날 사이는 아니네만……"
뒷말을 흐리며 재상은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차의 향기를 음미하듯 가늘게 감겨 있었다. 한동
안 차를 음미하던 재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몇가지 개인적으로 해두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일세. 먼저, 일레인양."
재상이 자신을 부르자 일레인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동안 재상은
자신에게 일레인양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존칭을 붙
인다는 것은 그를 수하로서가 아니라 대등한 귀족으로 인정한다는 뜻
이었다.
"그대는 훌륭히 약속을 지켜주었소.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기대 이상
이었소. 그러니 나 또한 그대와의 약속을 기쁜마음으로 지키게 된 것
을 다행으로 생각하오. 그대의 가족들은 곧 만나게 될 것이오."
일레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상은 방금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게다가 재상이 명령의 대가로 약속했던 것은 자신들
을 풀어주는 것이었지 가족들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재상은 이미
일레인을 귀족의 하나로 인정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돌려주겠다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우정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오."
재상은 일레인과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에드워드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일레인의 얼굴은 격동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성녀님."
재상은 시선을 돌려 여사제 에반제린을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재상의
갑작스런 부름에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했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 빠른 시일내에 중앙 대신전에 들러보
시오."
"그, 그게 무슨……"
여사제 에반제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재상의 얼굴에 웃음
이 번졌다.
"하하. 이거 아직 모르고 계셨나 보군. 하하하."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사제를 앞에두고 재상은 유쾌한 듯 웃었다.
"아, 죄송하오. 사실 사제께서, 아니 견습사제라고 하셨던가? 하여간,
사제께서 컨웨이에서 행하신 기적은 이미 제국 내에서도 그 소문이 파
다했소.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제국의 의지에 반하여 행해졌다는 것이
었지. 때문에 성녀님께서는 황실과 신전간의 뜨거운 감자 같은 문제가
되어 있으셨던 거요. 서로 눈치를 보느라 말이오."
"가, 감자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여사제의 모습을 보고 재상은 다시 웃
음을 터트렸다.
"풋. 아, 죄송하오. 성녀님을 앞에 두고 이러다가 신성모독으로 천벌
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려."
재상은 정말로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듯 잠시 표정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황실에선 사제님을 파문하길 원했소. 그러나 신전 측에서는 그
럴 수가 없었지. 아무래도 컨웨이의 기적을 일으켜 신전의 위상을 드
높인 사람이니까. 특히 신전의 영향력이 낮았던 제국 바깥에서 말이
오. 그렇다고 황실의 눈치가 공공연히 보이는 상황에서 성녀로 추인할
수도 없었던 거요. 하지만 오늘 황실에서 제국 신전쪽으로 공문 하나
가 발송되었소."
재상은 느긋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뭐, 내용은 별거 아니오. 화려한 미사여구로 길게 써놓기는 했지만
결국 그말이 그말이지. 우린 상관 안할 테니 맘대로 하시오 정도 될까
?"
재상이 빙긋 웃었다.
"사제님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소. 그러니 중앙대신전에 가시면 좋
은 일이 있을거요."
여사제 에반제린은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에 누구를 떠올렸
는지 금방 그 큰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재상은 지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젠 좀 껄끄러운 얘기들을 해야할 차례가 된 것 같군."
재상은 긴장하고 있었다. 표정도 변한 것이 없고, 목소리도 그대로였
지만 지호는 재상이 긴장으로 조금 몸을 굳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 유적 말이네만…… 사라졌네."
"네?"
놀라움으로 반문한 것은 지호가 아니라 일레인과 에드워드였다.
"말 그대로네. 급하게 파견한 두개 기사단이 발견한건 그저 평범한 자
연동굴이었네. 동굴 입구에 선명한 전투흔적도 확인했고 위치 또한 잘
못 잡을 이유가 전혀 없었네만. 있는것은 조금 크지만 평범한 그것도
얼마 들어가지 않아 막혀버린 짧은 동굴뿐이었네."
재상의 얼굴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내가 아는 어떤 어른께서는 자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네. 자네가……
말해줄 수 있겠나?"
그는 지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제국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나?"
재상 옆을 지키고 섰던 애쉴리의 얼굴에 살짝 의아한 빛이 스치고 지
나갔다. 재상이 제국의 앞날을 묻고 있다. 그것도 저런 젊은이에게.
애쉴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의혹을 품은 것은
그 자신 뿐인 듯, 일레인과 에드워드는 진지한 얼굴로 지호를 쳐다보
고 있었다.
"카르나스, 그가 고대의 힘을 가졌나?"
재상이 재촉하듯 묻자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입구를 닫았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
이겠지요."
"입구를 닫아?"
에드워드가 묻자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할 거요, 에드워드. 그 장소는 동굴 아래 있
는 것이 아니오. 다만 입구가 거기 있었을 뿐. 카르나스는 그 입구를
닫아버린거요. 그리고 그건 그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뜻하오."
"그리고 그가 그 힘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겠지."
재상이 덧붙였다. 그러나 지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입구를 닫았다는 것이 곧 카르나스가 고대의 힘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나?"
재상은 진지한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깨운 자와 다루는 자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깨운 것은 자네, 그리고 다루는 자는 카르나스이기 때문이라는 뜻인
가?"
재상의 말에 지호가 의혹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아, 아까 말한 그 어른한테서 들은 얘길세. 그보다, 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그 어른께서…… 제가 그곳에 무언가 손을 봐뒀다는 말씀도 하셨습니
까?"
"아니. 손을 봐뒀나?"
재상은 간단히 답했다. 지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대로 그곳을 깨운 것은 저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을 다루
는 자는 카르나스죠.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생깁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조금 손을 써둔 거죠. 자세하게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그가 쉽게 그것을 풀어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그에게는 지혜의 마이야도 없으니……"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일레인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
다.
"다른 유적을 열면 되잖아요? 그럼 카르나스에게 대항할 힘을 가질 수
있어요."
말을 끝내자 마자 일레인은 움찔하며 끼어든 것을 후회했다. 지호가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예요."
지호는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일레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옆
에 앉아있던 여사제 에반제린이 살짝 지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제서
야 지호는 일레인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지호의 입에서 짧은 한숨
이 새어나왔다.
"후, 미안하오. 당신에게 화낼 문제는 아닌데도…… 만일 카르나스가
정말 고대의 힘을 손에 넣었다면 그를 막는 것은 불가능 하오. 다른
유적의 힘을 개방한다고 해도 카르나스를 막을 순 없소. 그것은 서로
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 상대가 공멸을 두려워하지 않
는다면 그것은 그저 피해를 두배로 할 뿐이오."
지호는 두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설령 카르나스가 그 힘을 손에 넣었다 할 지라도…… 난 다른
유적을 열지는 않을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흐음……"
침묵을 깬 것은 재상이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대고는 조용히 물
었다.
"깨운 자와 다루는 자가 다르다는 것을 이용해서 손을 봐둘 정도라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그 사실을 카르나스도 알고있나?"
재상의 말에 지호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 자네가 고대의 힘을 개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말
일세."
지호는 눈쌀을 찌푸렸다.
"고대의 힘을 개방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아니,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 여하튼 카르나스는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 그것으로 됐네."
재상의 단정적인 말에 방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자네가 다른 유적을 열었었고, 또 열 수 있다는 사실을 카르나스가
알고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자네는 카르나스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
용할 수 있다는 말일세. 그보다……"
재상은 두손을 모아 잡았다.
"카르나스가 고대의 힘을 완전하게 얻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가 부분
적으로만 고대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그가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또 뭐가 있나?"
"첫번째는 물건입니다."
지호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즉시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는 물건들을 이용한다면 카르나스는 충분한 재력과 무기로
쓸만한 것들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고대의 진짜 힘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제대로만 사용한다면 충분한 위협이 됩니다."
"어느정도로?"
지호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해보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런것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전쟁에서 상대에게 없는 한가지 요소란 것이 얼마나 큰 잇
점이 될런지는 지휘관에 따라 천차만별이니까요. 얼마전에 있었던 독
립 기사단의 예만 봐도……"
지호는 말끝을 흐렸다. 생각나는대로 예를 들긴 했지만 지옥의 불과
물의 용으로 성을 무너뜨린 마녀(魔女) 렌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는 잊
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호의 말을 듣던 다른 사람들은 지
호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그녀가 없었더라도
독립 기사단이 그토록 엄청난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까?
"이를 테면 획기적인 신무기 같은 것이라는 거군. 그리고 다음은?"
"고대의 비전(秘傳)입니다. 이것 역시 정확하지는 않지만 원로원 5대
가문이 예전에 가졌던 힘을 복원할 수 있을겁니다."
재상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갑작스레 거론된 원로원 5대 가문이라는 말
에 에드워드와 일레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호는 재상을 바라
볼 뿐 그들을 위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가?"
"시간만 충분하다면 가능합니다. 개중에는 대단히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마법종류라면 독립 기사단에 이미 소속되어있는
마법사들로 하여금 익히게 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
시 마법에 능한 것이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재상은 '끄응'하는 신음을 내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눈을 아래로
깔고 무언가 생각에 잠기던 재상은 지호가 자신을 아직 쳐다보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또 있나?"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조금 애매한 것입니다만…… 체계와 사상에 관한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