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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리허설 공연 3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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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연들을 보면 이상한 추세가 하나 있는데 프리뷰 공연과 최종 드레스리허설 공개 시연회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비슷한 선전이나 엄연히 다르죠. 프리뷰는 정식개막 전 미리 보여준 뒤 관객 반응을 예상하고 경우에 따라 가지치기를 해서 본 공연을 보다 말끔하게 다듬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고 드레스리허설은 말 그대로 무대극에서 의상과 분장을 갖추고 마지막으로 하는 무대 연습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선 이 두가지가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죠. 프리뷰 공연은 정식 개막 전 객석 단가를 낮추고 좀 더 저렴하게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 무대입니다. 동시에 첫 공연이나 공연 초반에 기술적으로나 연기면에서 벌어지기 쉬운 서툴고 거친 모습 보는 걸 꺼려하는 관객들이 많기 때문에 사전 관객 포섭용이자 해당 작품 사전테스트 용으로 쓰이고 있죠. 그래서 언론시연회와 일반 공개 시연회를 따로따로 하는 공연들이 많아졌는데 언론시연회에선 사전적 정의에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레스리허설 공연도 마찬가지고요.
언론시연회에서나 일반 공개 시연회에서나 프리뷰 공연과 드레스리허설 공연의 의미는 가볍게 눙쳐지고 있지만 본 공연 개막 전에 미리 선보여 간을 맛보게 해준다는 점에선 일치합니다. 돈을 받고 안 받고의 차이로 의미가 갈려요. 문제는 국내 일반 공개 시연회에선 1만원이 됐건 2만원이 됐건 정가에 비하면 푼돈이나 다름없는 가격대로 책정하여 판매한다는 것입니다. 신시컴퍼니 정도 외에는 대게 언론시연회는 사전에 공개해도 일반 공개는 유료 시연회로 열었죠. 이걸 문제삼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어째서 유료 시연회를 열면서도 드레스리허설 공연으로 둔갑시키냐는 것입니다. 단어가 주는 미묘한 차이에 기대 프리뷰 공연을 드레스리허설 공연으로 순화시켜 프리뷰 공연 때 받을 수 있는 비판을 불식시키려는 잔꾀가 아니면 뭐겠어요. 교활한거죠. 어차피 프리뷰와 드레스리허설이란 외래어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고 사전적 정의에 알맞게 써먹지도 않고 있으니 무료 시연회를 펼친다면 어떻게 표명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는다면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는 너다]는 애초 5일 동안의 드레스리허설 공연을 잡았던 작품입니다.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는게 최종 시범 단계를 의미하는건데 무슨 5일씩이나 드레스리허설 공연으로 올린답니까. 드레스리허설이면 마지막에 한번만 하는 게 정석입니다. 5일 드레스리허설이라, 이건 엄연히 프리뷰죠. 7월 21일 수요일부터 7월 25일 일요일까지 5일 동안 하루 1회씩 공연하여 드레스리허설 공연으로 올리고 월요일은 공연계 휴무 흐름에 맞춰 당연히 쉬고 곧바로 7월 27일 화요일부터 본 공연 개막이면 다른데서 거의 다 활용하는 유료 프리뷰 공연입니다. 그런데도 부득부득 드레스리허설 공연을 강조하여 5일의 드레스리허설 공연기간을 잡았죠. 준비부족을 이유로 이틀이 잘려나가 최종적으로 3회의 드레스리허설 공연을 치루긴 했지만 왜 돈을 받고 선보이는 프리뷰성 공개를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정가에 비하면 파격가였지만 2만원을 받았다고 해서 거저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돈 2만원이면 대학로에서 괜찮은 연극 한편은 굳이 프리뷰 공연 아니라도 이런저런 할인 적용받아 골라서 볼 수 있습니다.
유료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는 것 자체부터가 말이 안 돼는거죠. 돈을 받고 공개하는 프리뷰 공연엔 명목이 생기지만 돈을 받고 하는 드레스리허설 공연엔 그럴만한 이유가 성립될 수 없어요. 돈을 받아버리면 단어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걸요. 프리뷰 공연처럼 받을만한 부분은 다 받으면서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고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돈을 받고 일반 시연회를 선보이고 싶다면 프리뷰라 명명하면 되는겁니다.
제가 유료 드레스리허설 공연에 예민하게 구는 것은 [나는 너다]공연 전에 이 작품 연출가인 윤석화가 나와서 어이없는 소견을 밟혔기 때문입니다. 처음 예매처 공지로 5일 동안이나 드레스리허설 공연을 전석 2만원에 판다고 할 때부터 달갑지 않았지만 윤석화가 그 말만 안 했으면 유료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는 것에 그러려니 하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프리뷰 공연에서 연출자가 나와 작품을 소개하는 건 흔한 일이니 반갑게 받아들였는데 황당하게도 윤석화는 유료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 같더군요. 제가 3일째 드레스리허설 공연을 본건데(드레스리허설을 3일이나 하다니) 나와서 하는 말이 원래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는 게 공연 도중 중단될 수도 있고 중간에 재정비하여 쉬었다가 다시 할 수도 있는데 전날과 전전날 공연이 무리없이 흘러 처음부터 끝까지 끊김없이 완주할 수 있었다는거에요. 그래서 마지막 드레스리허설 공연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고 행여라도 중간에 중단되는 일이 있더라도 양해바란다나요.
웬만하면 중간에 끊는 일 없이 공연을 선보인다고는 했지만 웬만하면 이란 단서가 붙은거라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저렇게 말해서 놀랐어요. 윤석화가 정의하는 드레스리허설이란 자기네들끼리 연습할 때나 먹힐 수 있는 주장이지 이게 돈내고 온 일반 관객들 다 모아놓고 할 소리는 아니죠. 만약 정말 저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 바꿔야 합니다. 우리 공연 좀 잘 봐주십사 하는 애교로 받아들이기엔 진심이 뚝뚝 묻어나와 당혹스러웠어요. 만약 보고 있는데 중간에 연출자 개입으로 공연이 끊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심란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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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지 101주년 되는 해입니다. 100주년 되던 작년에 많은 행사와 기념사업이 있었죠. 이 말은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문화예술계 행사가 현재 단물 다 빠진 상태라는 얘기입니다. 100주년이라는 숫자상의 완벽한 조합에서 1이 더해지면 뒷북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미, 시대 정신을 담아낸다 해도 의미가 절반으로 잘려 나갈 수 밖에 없어요. 100주년이기 때문에 후광을 받을 수 있고 길이 회자될 수 있는것이죠. 윤호진의 [명성황후]가 1995년 12월 30일 날 개막했다는 걸 상기해보세요. 1995년은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명성황후]초연은 세종문화회관에서 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의 12월 30일은 다음 날 제야 음악회를 위해 무대작업 하는 날로 쓰이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이날 [명성황후]가 올려졌다는 건 뮤지컬 [명성황후]가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무리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명성황후]는 국내 뮤지컬 중 이례적으로 사운드트랙이 선발매된 작품인데 얼마나 급했으면 공연 개막보다 5일 앞서 완성됐습니다.
100주년 기념사업은 날짜 맞춰 부지런히 파헤쳐 아무리 못해도 해넘어가기 전에 관철시키는 게 관건입니다. [명성황후]는 초연 1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 기념작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완성도와 별개로 작품의 의미가 그럴듯해지는데 101주년이 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꼭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이성재 주연의 드라마 [동방의 빛]은 작년에 제작발표회를 갖고도 촬영도 못하고 엎어졌죠.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뮤지컬이었던 에이콤의 [영웅]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사업 중 가장 특수를 누린 문화상품이었습니다.
[나는 너다]는 뒷북 중의 뒷북입니다. [나는 너다]와 같이 안중근 부자의 이야기를 그릴 콘서트형 뮤지컬 [장부가]완 입장이 달라요. 다음 달 말에 개막되는 [장부가]는 그냥 안중근 소재의 작품이지만 [나는 너다]는 의거 100주년 기념작 테가 사방에서 묻어나오는 경우이니까요. 물론 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되는 해라 자잘한 행사가 있긴 했지만 의거 100주년 되던 작년만큼 큰 의미를 남긴 건 아닙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과 생애를 되짚어보는데 의미를 두었던 건 순국보단 의거에 초점이 맞춰진 편이고 [나는 너다]의 기본바탕은 애초 의거 100주년 기념작으로 만들려고 하던 뮤지컬이 동종업계에서 먼저 나오는 바람에([영웅]) 변형되어 가시화되다 제작비 문제로 기획이 엎어졌고 윤석화의 열정으로 시기를 조율하다 후발주자로 나선 게 현재의 모양세가 된겁니다. 그러니 좀 어색해질 수 밖에요. 의거 100주년도 지났지만 100주년 기념사업 잔재가 여기저기 흩뿌려진 작품이 극장도 정극이 잘 올라가지 않는 국립극장 산하의 하늘극장에서 올려지니 관제무대극이 아님에도 다소 고리타분한 냄새도 납니다. 송일국 출연이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화제를 모으기 힘들었을거에요. 윤석화는 연출 초짜고([토요일밤의 열기][꽃밭에서]에 이은 3번째 연출작) 남자배우 원톱 작품이니 윤석화가 삼고초려하여 송일국을 모셔왔다는 게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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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집안배경에 역사 영웅 대하사극 위주로 경력을 이어온 바람에 본의 아니게 정치적이고 애국적인 무겁고 진지한 이미지가 덮입혀져 있는 송일국의 안중근,안준생 연기는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뚜렷한 제시도 못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송일국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기에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의 꼭두각시가 돼야했던 안준생의 고통과 멍에는 송일국에게도 대입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배우와 배역과 배우 자체의 모습이 한번에 감정이입 됩니다. 송일국은 무대경력이 없는 배우지만 연기를 잘 하는 축에 속하고 이미지도 반듯하며 실제로 독립투사 후예라는 점에서 배역과 잘 어울립니다. 이걸 떠나서 안중근,안중생의 1인 2역 분리도 데뷔 무대라는 걸 감안하지 않고 보더라도 이만하면 괜찮은 실력이지만 송일국의 출신성분을 배제하고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안중근과 안준생이 번갈아가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좀 더 배역분리가 수월할 수 있었지만 신경쇠약에 빠진 나약한 안준생의 모습과 절도있고 청렴결백한 안중근의 강인한 모습의 대비가 멋지게 창조됐습니다. 한 달 일정의 단독공연인데 목관리는 해야겠어요. 초반에 너무 몰아부쳐서 벌써 목이 나간게 보이더군요. 다행이 하늘극장의 취약한 극장 음향 구조 때문에 연극임에도 마이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보완은 됐지만 저러다 목이 완전히 잠겨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어요. 공연 3일째에 이러면 큰일이죠.
송일국이 앞으로도 연극을 얼마나 할진 모르겠지만 몇 작품 더 거치면 연극배우로도 좋은 배우로 남을거라는 가능성이 데뷔무대에서 안정적으로 분출됐습니다. 대체로 송일국의 이미지는 그의 조상들과 가족들에 비하면 좋은 편이죠. 싸이코 여기자와 법적공방에 휘말리지만 않았다면 드라마 몇 편 미진하다 하더라도 스타성 유지하면 잡음없이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면에서 아까운 배우에요.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한 박정자의 중후한 연기는 객석을 숙연하게 할 정도로 깊이가 있고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를 연기한 배해선은 비중은 작지만 안중근과 조마리아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묻혀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충실합니다. 배우질은 전체적으로 좋고 앙상블도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게 무대극에선 드문 특별출연인데, 새로운 제작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군요. 송영창과 강신일이 극중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았는데 실제로는 출연하지 않습니다. 공연포스터에는 이들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고종 역을 맡은 강신일은 배경스크린으로 투사되고 이토 히로부미 역의 송영창은 하이퍼 파사드 기술을 통해 무대 바닥에서 인식됩니다. 이들은 영상과 목소리로만 무대에 등장하며 필요한 부분에서 강렬하게 제 몫을 다합니다. 무대극에서 배역이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경우는 있어도 영상으로만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익히 알려진 배우들을 섭외해 재주껏 활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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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무척 진지하나 따라가긴 쉽습니다. 안준생은 처음과 마지막에만 나오기 때문에 각 배역에 집중하기도 간편합니다. 막이 열리면 허허벌판에 안준생이 피폐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할머니와 어머니와 선조들에게 비난을 받으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그를 구원하려 하지 않고 왜놈의 앞잡이라 비난하며 외면합니다. 그에겐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명예를 먹칠한 죄로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혈육까지도요. 안준생은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안중근을 원망하며 좌절합니다. 그리고 바로 안중근 이야기로 넘어가죠. 안중근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그 안중근 이야기로 여기서부턴 일직선으로 흐릅니다. 안중근은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동지 11명과 함께 그 유명한 단지동맹을 서약하고 하얼빈 역에서 하차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하고 감옥에 갇히며 재판을 받고 동양평화를 외치며 안중근 만큼이나 강건한 조마리아 여사와 헌신적인 아내와 자식들을 뒤로하고 명예와 조국을 위해 항소하지 않고 사형당하는 과정을 빠르게 따라가죠.
안중근이 죽고 난 다음 다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안준생의 이야기로 넘어오는데 안중근 이야기와 달리 안준생 부분은 사실에 기반했다기 보단 안준생을 형상화하여 빚어진 구성입니다. 이승과 중천을 맴돌며 오도가도 못하는 안준생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표현주의 양식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극 서두와 말미에 잠깐 등장할 뿐이지만 안준생의 이야기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고 연극적인 장치들과 예술적 고취가 함축돼있다고 할 수 있죠. 첫 장면부터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앙상블들의 후면 누드를 보여주면서 안준생의 헐벗은 고독을 대변하고 있고 수의에 구겨진 비닐 망을 걸치게 함으로써 정착하지 못한 이들의 아픈 마음을 그리고자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다시 앙상블 후면 누드가 나오는데 처음과 똑같은 자세지만 이때에는 영상으로만 보여줌으로써 아스라히 멀어져가는 시대의 희생양의 비극과 구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준생 부분은 압축적이고 간접적으로 의미를 뿌립니다.
작품은 안준생의 친일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변호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무조건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이해까진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 밖에 없던 과정을 봐달라는 얘기입니다. 안중근의 업적과 유명한 조마리아 여사와의 관계 외에 안중근의 가족사에 대해선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안중근의 위업에 먹칠을 한 막내아들 안준생의 과오 때문이기도 하죠. 그러나 일본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다음해 조선은 일본통치하게 완전히 묶여버렸고 안준생은 아직 갓난아이에 불과했으니 뭘 알겠어요. 대의선전용으로 희생될 수 밖에 없었던거죠. 또한 조국을 위해 투사한 열사의 죽음 뒤에 국내에서 그의 핍박받은 가족들을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대의명분을 차릴 여유도 없었던거고요. 그래서 훗날 안준생이 호부견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분석한 문서가 종종 나왔죠. 연극 [나는 너다]는 역사를 비판하기 전에 그 내면을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안준생이 아버지는 자기에게 무엇이었느냐고 절규하듯 항변하자 안중근은 대답합니다. 나는 너다 이 말은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안준생 너를 위해 나를 희생한 것이라는 것과 시대를 아우르는 포용정신인거죠.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곧 잘 했건 못 했건 다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그 안에서 반성과 계기를 마련해 보다 성숙한 자세로 개척해 나가자는것입니다. 그런 관용과 따뜻함이야말로 안중근의 평생 염원이었던 조국 해방과 동양 평화의 근간이 될 것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극우세력에 대한 비판이며 현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짧지만 함축적인 제목의 의미가 극에서 연결될 때 관객은 쑥쓰러운 애국심을 자극받아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있겠고 내친김에 기립박수로 보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년 [영웅]때와 같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 부분에선 자동반사적으로 박수가 나오더군요. 노골적인 사상 주입에 거북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확실히 마음을 동요시키는 부분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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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안중근 이야기는 초등학생용 위인전기에 나오는 수준의 사실묘사에서 그칠 뿐입니다. 그림 효과도 그 정도 수준이에요. 송일국의 1인 2역 분리는 훌륭하지만 1인 2역 자체에서 파생되는 효과는 그닥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안준생은 처음과 끝에만 나오기 때문에 오로지 의미 전달 목적으로 희생된 감이 있습니다. 알아차리긴 쉬워도 깊이는 떨어지죠. 상연시간이 겨우 80분 밖에 안 돼는데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전환되는 속도감에 지루할 틈은 없지만 무르익은 맛이 없어요. 이야기의 균형감각도 일정하고 재미도 있으며 의미도 남겨주지만 이야기를 너무 쉽게 가려는 게 있어요. 어설픈 부분을 기술력으로 덧칠하려고 하죠.
윤석화가 자비 털어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인데 볼거리는 풍부합니다. 첨담 영상기술인 하이퍼 파사드를 동원해 배경 묘사에 공을 들였죠. 수시로 바뀌는 스크린 큐브가 동선을 제어해주고 스크린 큐브에 분사되는 영상이 입체적인 배경 효과를 안겨줍니다. 이게 중소극장 연극임에도 8만원이나 받아먹을만큼 돋보이는 수준은 아니지만 바가지 씌운 티켓값에 부합하기 위해 돈들인 티는 낸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과도기에요. 최대한 스크린 규브에 각을 맞춰 영상을 입히려는 노력은 보였지만 제대로 배경을 살린 부분은 몇 개 안 됩니다. 앙상블 누드 장면 전에 스크린에 투사된 송일국이 가만히 있다가 영상 속에서 움직이며 총을 발사하는 장면이나 영상으로 대신한 송영창과 강신일 분량은 적절하게 먹혔지만 기술낭비라 생각될만큼 스크린 큐브 맞추는 시간이 빈번했고 불필요한 잡음도 많았습니다. 이런 건 드레스리허설 공연이라고 해도 감안할 부분은 아니죠. 요즘은 공연계에서 배경 스크린 활용이 유행인데 [몬테 크리스토]나 [영웅]을 제외하곤 진일보한 실력을 보여준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 같군요. 과도기의 작품들을 견뎌야 하는 건 피곤한 일이에요.
그리고 문제의 하늘극장 삼면 객석. 이건 오로지 연출자 재량에 달려있는 부분입니다. 윤석화 연출은 이 점에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하늘극장같이 삼면이 개방된 곳에서 공연을 올릴거라면 극장에 맞게 극을 맞춰야죠. 정 자신없으면 객석의 정면만 받던지요. 극은 정면 객석용으로 짜놓고 대책없이 예매처 공지로 공연 중 세트 이동에 따라 관람 시선에 부분적으로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점 양지 해 주십시요. 란 말을 남기는 건 무책임한 짓입니다. 이 작품은 양면 객석 관객들을 위한 고려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배경막과 입체적인 스크린 큐브는 오로지 정면 객석용으로 제작됐고 연결될 뿐이죠. 영상으로 특별출연한 강신일은 정면에서만 제대로 보일 뿐이고 무대 바닥에 인식되는 송영창의 모습은 위에서 보기엔 멋지지만 맨 아래 객석과 양면 객석에선 이게 누군지 알아차리기 쉽지도 않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는 중요한 장면에서의 영상처리 조차 양면 객석 관객들은 소외됩니다. 객석의 참여를 막아버리는 장면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굳이 이런 극장에서 올리면서 동선을 이렇게 맞춰야만 했을까요? 하늘극장 중앙석은 지나치게 비싸고 시야장애가 생기는 양면 객석은 연극 적정가인데 적정가에서 보면서 이 지경으로 빠지니 문제죠. 매체에선 하이퍼파사드 도입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지만 그건 정면객석에 앉은 관객들이나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국내 공연판에서 윤석화의 추진력은 인정할만합니다. 그녀의 기획력은 알아주죠. [토요일밤의 열기]의 성공, 월간 객석 인수, 7년째 정미소 극장 운영, 국내의 척박한 뮤지컬 대중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 전세금 빼서 올린 [송 앤 댄스], [신의 아그네스]가 대본이 출간되기도 전에 입수하여 국내에 들여온 공, 파격적인 신인발굴 등등 무수합니다. 그러나 연출가로서라면 글쎄요. 처음에 맡으려고 고심하던 김아려 역도 포기하고 연출에만 매진한 채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고 연습 때 무리해서 목이 나가고 프리뷰 공연도 준비부족을 이유로 이틀을 잘라먹을 정도로 윤석화는 이번 [나는 너다]연출에 혼신을 다했지만 이 작품을 맡기에 그녀의 연출능력은 부족하군요. 안 돼는 연출력을 기술력으로 밀어붙이려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조차도 절반만 획득합니다.
- 배우들 누드가 나오는 작품은 사전 공지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영문도 모른채 남의 엉덩이를 봐야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