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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3일 목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열왕 18,41-46
복 음 :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혹시 레밍(lemming)을 아십니까?
어느 정치인이 우리나라 국민을 빗대서 ‘레밍’이라는 표현을 써서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나그네쥐라고 불리는 이 레밍은 자살하는 쥐로도 유명합니다.
일정 수 이상의 개체가 밀집하면 메뚜기 마냥 갑자기 행동 양식이 바뀌어서
떼를 지어 무작정 몰려다니는 기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이가 바닥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행동이지만,
한번 떼를 짓는 순간 무작정 앞을 향해 직선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만 한다는 게 이상한 점입니다.
이러다 보니 땅끝 해안 절벽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우르르 떠밀려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살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가 미화되어서,
개체군의 밀도가 높아지거나 먹이가 부족해지면
늙은 쥐들이 후손을 위해 스스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단지 습성이었고,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뒤따르는
다른 쥐에 밀려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고귀한 동물처럼 생각했지만, 사실 레밍은 군중심리로 인해
비이성적, 비합리적 행동을 생각 없이 집단으로 하다가
파국적 선택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남들처럼 살려고 합니다.
나만의 삶이 아닌 너의 삶, 그리고 그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나답게 살지 않을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작정 앞으로만 갈 뿐입니다.
혹시 레밍처럼 절벽 아래까지 무작정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남들의 삶이 세상의 뜻만을 따르는 삶입니다.
남들처럼 풍요와 안정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는
나만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끔찍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잘 아는 율법의 내용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율법 내용의 준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되고 또 ‘바보!’라고 말해서도 안 되며,
‘멍청이!’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아닌,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들처럼만 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그렇게만 살게 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 ‘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여전히 산상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 나라’와 관련짓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의로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룸은 산상 설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 앞세워 '의로움'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중심인 6장에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의 의로움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갈라 3,11)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여섯 가지 대당 명제를 통해 제시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옛 율법의 ‘살인’을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 살인만이 아니라,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동기까지도 포함시키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시키십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물론 모든 ‘성’(화) 냄이 살인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화’ 냄도 있고, 교정을 위한 ‘성’ 냄도 있고, 단순한 습관이나 짜증의 ‘성’ 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회서>에서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고 했듯이,
의도되지 않더라도 '혀'로 인하여 죽는 이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율법의 근본정신이 '화해와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동시에,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쳐 줍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이라는 말은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화해와 사랑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8)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 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1세기에 여전히 종교는’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종교의 발전 과정에서 학자들은 ‘자연, 신, 인간’의 흐름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의 엄청난 힘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이때 생겨난 종교는 자연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큰 바위, 높은 산, 오래된 나무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보다 힘이 센 동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곰, 호랑이, 사자, 코끼리, 늑대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발전하고, 능력이 발전하면서 ‘신’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민족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정하였고, 신을 경배하였습니다.
이런 신화의 시대가 발전하면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생겼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 유일신의 시대는 신분이 정해진 시대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사회였습니다.
성주나 왕이 종교를 선택하면 백성들 모두가 같은 종교를 믿는 사회였습니다.
이 신화와 신의 시대가 2,000년 넘게 이어왔습니다.
르네상스, 산업혁명, 과학의 발전,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이제 ‘인간’ 중심의 시대가 왔습니다.
자연과 동물을 숭배하던 인간은 신을 숭배하였고,
신을 숭배하던 인간은 이제 인간의 능력과 인간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열었습니다.
어떤 동물도 인간과 대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차지하던 자리에 인간의 과학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서
인간은 누군가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였던 곳에서도 비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多宗敎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비신자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가 가지는 힘은 ‘친교, 공동체, 조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지갑을 들고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1인 가구의 비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고독하고,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인 체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지식, 윤리적인 실천은
여전히 종교가 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기도하고 예물을 바쳐도 정말 아무 쓸모 없는 경우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타인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자격입니다. 빚이 없다란 뜻입니다.
내가 부모 때문에 의롭게 되었는데, 형제를 괴롭히고 부모에게 찾아와서
예물을 바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인에게 원망을 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책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은 어린 소녀 스카웃 핀치와 그녀의 오빠 젬 핀치이며,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는 마을의 변호사입니다.
스카웃과 젬은 동네에서 이상하다고 소문난 부 래들리(Boo Radley)의 집 앞에서 노는 걸 좋아합니다.
부 래들리는 일체 마을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에 고마워 그들이 노는 나무 앞에 간식을 놓아두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는 도덕적 용기와 정의를 중요시하는 인물로,
아이들에게 항상 올바른 길을 가르치고자 노력합니다.
아티커스는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종차별이 심한 메이콤 마을에서 용기를 보여줍니다.
톰은 백인 여자 메엘라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메일라가 톰을 끌어들인 것이고
그녀의 아버지 밥이 그것을 보고는 메엘라를 구타하고 톰을 강간범으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아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항상 타인을 이해하고, 편견을 갖지 말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주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놀림과 비난을 받습니다.
젬은 이러한 상황에서 화가 나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티커스는 그들에게 인내와 용서를 가르치며,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법을 알려줍니다.
아티커스는 젬에게 총을 선물해 주면서 다른 새는 다 잡아도 되지만,
앵무새는 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앵무새는 아티커스가 변호하는 죄 없는 톰과 같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사실 밥이 못된 인간이고 자기 딸의 잘못을 톰에게 뒤집어씌운 것을 밝혀내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다 백인이었기 때문에 톰은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밥은 여전히 판사의 집을 습격하고 애티커스의 자녀들을 위협합니다.
짐도 밥에게 팔이 부러지는 공격을 당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 밖으로 안 나오던 부 래들리가 나와 밥과 싸워주었고 밥은 칼에 찔려 사망합니다.
다행히 보안관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냥 자기 혼자 넘어져 그렇게 된 것으로 목격 증언해 주겠다고 하고 마무리됩니다.
[앵무새 죽이기]는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의 도덕적 가르침과 용기를 통해
스카웃과 젬이 세상의 편견과 불의를 극복하고,
타인과 화해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이 책에서 형제간의 관계 회복과 성장을 끌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정말 주님 앞에 예물을 들고나와도 소용없는 사람은 타인에게 원망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앵무새를 죽인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사.시.]에는 이것이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존재였고,
세리는 죄인이기는 하였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리사이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대신 갚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돈을 바쳤고 세리는 감히 나서지도 못했지만,
누가 의롭게 되어 돌아갔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기도나 미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양심 성찰이 이것입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은 없는가?’
앵무새를 살리려고 목숨을 거는 아버지에게
앵무새를 죽이고 와서 죽은 앵무새 고기를 바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셨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뜻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으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안토니오는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정적인 평가의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있는 곳에 만족치 못하고 부적응한 변덕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긴 것은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성덕과 열성 때문이었습니다.
더 잘살아 보려는 거룩한 원의 곧 뜻에 따라 옮긴 것으로
그뿐 아니라 성인들 가운데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그의 뜻이었다면 그의 뜻이 아닌 것이 그의 일생에 더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일생은 뜻하지 않은 일이 많았던 한 생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한 생을 요약하면
뜻하지 않았던 한 생인데
하느님 뜻이었던 한 생입니다.
자기 뜻에 따라 작은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자기 뜻에 따라 모로코로 순교하러 갔지만
그의 뜻은 병으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향 포르투갈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배는 풍랑으로 인해 고향이 아니라 이탈리아로 갑니다.
이 풍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곳에서 조용히 은수자로 살고자 하였는데
참석한 서품식 강론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안토니오가 강론하게 됐고 이로 인해 설교자가 됩니다.
이 갑작스러운 일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무튼 그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설교자가 되고, 관구장도 되고, 프란치스칸 최초의 신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서른여섯의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흔히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불에 타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가요 신학자였지만,
오늘 지혜서의 말씀처럼
기도에서 얻은 지혜로 설교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나는 기도를 올려서 지혜를 받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정신을 얻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주겠다."
이것은 또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신학 교수직을 허락하며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았고,
그 영의 불이 활활 타올랐으며 그래서 기도의 영으로 가르치고,
헌신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뛰어난 설교가’요 ‘곤경 중의 전구자’로 인정합니다.
지금 치면 대학자가 강단에만 서지 않고 서민들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 뜻이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너무도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것인데 여러분에겐 어떻습니까?
내가 뜻하지 않은 그러나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을 안토니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화 → 바보 → 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메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메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 받을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 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하신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 점, 일 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도려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肉化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到來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자격이란, 狀態的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狀況的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福音史家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 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뿐만 아니라 “바보”라고 요가는 자는 중앙 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 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 번 삼켜보자.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