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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과 우탁선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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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탁 선생은 고려시대 대학자로 금수산 자락 아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에서 태어났는데, 인근에서는 새원이라고도 부른다. 금수산의 정기를 받은 적성 땅에는 ‘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세 곳 있는데 새원이·새터·새말 등이다. 이곳이 이른바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품달촌으로 새원이에서는 우탁 선생이, 새터에서는 조선시대의 명필이며 대학자인 지수제와 유척기 선생이 태어났다.
우탁 선생은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는데,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를 못하였다. 이에 우탁 선생이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경이 근신이 되어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 죄를 아느냐?”고 꾸짖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왕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사인암은 우탁 선생이 사인벼슬을 지내며 이곳에서 청유하였다는 유래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인암 밑을 흐르는 운계천의 옥같이 맑은 물, 첩첩이 쌓아 올려져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절벽, 어우러진 노송 등이 일품이다. 사인암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우탁 선생의 친필각자를 보기 위해 발길을 옮기니 물가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사찰에서 친 울타리와 자물쇠가 걸려진 쪽문이 시절의 각박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인암 밑으로 다가서니 연마라도 한 것처럼 판판한 암벽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을 탐승했던 유명·무명인들의 이름과 글귀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어 그간 세월의 더깨와 풍류를 보여주는 듯 했다. 사인암 위쪽 물 한가운데는 1977년 이 지방의 유림에서 건립한 역동선생의 기적비가 섬처럼 떠 있다. 아름드리 노송의 솔내가 진동하는 그 밑에서 역동 선생의 친필각자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선생의 친필은 아니었지만 선생의 뜻이 담긴 글을 대하니 아쉬움이 한층 덜어졌다.
탁이불군(卓爾弗群)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것이 아니며 확호불발(確乎不拔)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 서도 두려울 것이 없고 둔세무민(遯世無憫) 세상에 은둔하여도 두려울 것이 없다 유유자적하는 역동선생의 모습이 그대로 글에 담겨져 있으니 사인암에서 금방이라도 선생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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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紀行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의 발자취 - 예안 지삼리 묘소와 사인암(탄로가 시조비) -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정정재
우리나라 역대 인물 중 퇴계선생,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은 모르는 국민이 없지만,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오늘은 역동우탁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과, 정4품인 사인 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 양상에 힘쓴 곳이라 현재도 마을 이름이 사인암리인 사인암을 둘러 보았다. 우탁 선생은 1263(원종 4)년 단산현(丹山縣) 금수산 칠성봉 아래(지금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 천규(天珪)의 아들로 태어나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 감찰규정(監察糾正), 성균좨주(成均祭酒)을 역임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다가 1343년(충혜왕 복위 3년)에 예안에서 81세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지삼리에 있다.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인 동시에 시조문학(時調文學)의 효시(嚆矢)로 탄로가(嘆老歌)를 남긴 분이다.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嘆老歌 탄로가) 말년의 역동 선생이 늙음을 한탄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탄로가」는 그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예안면 지삼리 '鼎井齋 정정재' 재실 정원과 충북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 암벽에 새겨 전한다. '고려사'에는 다음같은 우탁설화(禹倬說話)가 전하여진다. |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정정재 정면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영묘실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묘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비각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전경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제단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근경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시조비가 있는 풍경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탄로가 시조비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 시비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삼의문 三宜門
▲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리 소재 사인암. 역동선생이 정4품인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상에 힘쓴곳이라 현재도 마을 이름이 사인암리이다. 이곳 사인암에는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는 嘆老歌 탄로가가 새겨져 있다.
▲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리 소재 사인암. 역동선생이 정4품인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성에 힘쓴 사인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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